날뛰는 멧돼지, 설설 기는 대책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더니, 정작 호랑이가 사라지고 나니까 엉뚱하게도 멧돼지가 판을 치고 있다. 남한에서의 마지막 호랑이 기록이 1922년 경북 대덕산 호랑이이니, 실로 90년 만에 속담을 바꿀 만한 기막힌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호랑이 뿐만 아니라 표범, 늑대, 여우까지 이른바 먹이사슬의 최강자들이 몽땅 사라져버린 이 땅의 무주공산. 그래서 더욱 기고만장해졌는지 멧돼지로 인한 희한한 일들이 연일 그치지 않고 있다.
벌건 대낮에 도심지로 내려와 애먼 사람을 물어뜯는가 하면, 수많은 자동차가 총알처럼 내달리는 도로 위로 뛰어들어 운전자들을 혼비백산케 하고, 그것도 모자라 달리는 열차에 몸을 내던져 투신자살(?)하는 소동까지 벌이고 있다. 산골마을 농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멧돼지들의 텃밭으로 변해 주인 농부들이 허구한 날 멧돼지 눈치를 살펴가며 농사 짓고 심지어는 전문 퇴치꾼인 한국수렵협회 회원이 멧돼지를 잡다가 물려 죽는 일도 생겨났다.
영화 '차우'에서의 성난 멧돼지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인간세계를 향한 대자연의 분풀이 같기도 한, 믿기지 않는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얼마나 다급했으면, 얼마나 똥줄이 탔으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간 영역에 쫓기듯 들어와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겠는가 하는 측은지심도 든다.
멧돼지는 말이 돼지지 사실 맹수나 다름없다. 성질이 급하고 사나우며 날렵하다. 한창 내달릴 때는 시속 40km가 넘는다. 게다가 뾰족한 엄니는 가히 치명적이다. 흥분한 멧돼지는 호랑이도 쉽게 대들지 못할 정도로 위험스럽다.
오래 전 한 사냥꾼으로부터 이런 얘길 들은 적 있다. 한 번은 사냥개들을 데리고 멧돼지 잡이에 나섰는데 가장 아끼는 개 한 마리가 그만 실수해 멧돼지 엄니에 들이받쳤다고 한다. 한달음에 달려가 살펴보니 목 부위가 마치 해부칼로 그은 것처럼 잘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멧돼지 엄니가 그렇게 날카롭고 무서운 줄은 미처 몰랐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한 번은 엽총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멧돼지와 맞닥뜨려 급한 김에 눈앞에서 총을 쐈다고 한다. 연거푸 두 발을 맞은 멧돼지가 쓰러지는가 싶더니만 이내 일어나 쏜살같이 달려들더란 것이다. 복부가 맞아 배 밖으로 삐져나온 내장이 나무 둥치에 걸리는 바람에 가까스로 화를 면하긴 했지만, 그 때처럼 간이 오므라든 적이 없었다며 손사레쳤다.
오죽하면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 이런 말이 전해질까. "한나라를 멸하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은 흉노족을 무척 두려워 했다. 왕망은 고심 끝에 죄수와 노예들을 이용하기로 하고 흉노를 쳐부수면 형 면제와 신분 상승을 약속하고는 전장터로 내보냈다. 그러면서 그들을 부른 이름이 '저돌지용(猪突之勇: 본래는 저돌희용)'이다."
얼마나 막무가내였으면 '멧돼지처럼 앞만 보고 돌진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저돌'은 '앞뒤 가리지 않고 함부로 날뜀'을 뜻하는데 여기서의 저(猪)가 바로 멧돼지를 일컫는다.
환경부는 최근 멧돼지 포획틀을 설치해 도심에 출현하는 멧돼지 피해를 줄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길길이 날뛰는 멧돼지를 더이상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의지만큼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낯선 환경에 당황할 대로 당황한 멧돼지가 생각처럼 얌전하게 포획틀에 갇히면 좋겠는데, 결과는 글쎄올시다다. 얼마 전 동물원을 탈출했다가 포획틀에 갇혀 되돌아온 반달가슴곰이 있긴 하나 야생 멧돼지는 그와는 전혀 다른 상대다.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본 장난 같은 발상이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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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카우보이와 멧돼지

 

 

"1970년 무렵 나는 너무나 많은 소들을 갖게 돼 지붕도 없는 축사에 100~200 마리씩 가두어 놓고 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가장 크고 살찌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우선 소의 식습관을 바꾸기 위해 풀 대신 조섬유와 곡물, 농축 단백질을 먹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식사는 소의 소화기관을 상하게 했다. 많은 소들이 탈장으로 고생했고 나 또한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소를 사들였다. 어떤 땐 20여 곳에서 한 번에 100마리씩 들여오기도 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소들을 한 우리에 넣어 기르다 보니 이번엔 질병이 문제였다. 해서 사용하게 된 것이 항생제였고, 들끓는 파리떼를 없애기 위해서는 다량의 살충제까지 뿌려댔다.
소들을 더욱 빠르게 성장시키기 위해 호르몬을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가장 빈번히 사용한 성장호르몬은 DES(디에틸스틸베스트롤)이었다. 나는 이 호르몬을 임신한 소의 유산을 위해서도 사용했다. 그 무렵 나는 화학약품이라면 무조건 좋은 줄로 알았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소 한 마리의 무게를 1,100파운드 되도록 만드는데 30개월 걸리던 것을 15개월로 단축시켰고 농장을 4O배나 키웠다. 하지만 정작 수지타산을 맞추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화학물질 자체가 비쌌고 매년 보다 많은 화학비료와 항생제를 사용해야만 그 전 해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소들은 병들거나 죽어나갔다."

 


미국 몬태나에서 대규모 축산업을 하다가 신경종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비로소 산업축산의 폭력성을 깨닫고 채식주의자가 된 하워드 F. 리먼의 <성난 카우보이>란 책을 일부 요약한 내용이다. 카우보이에서 축산업자로, 동물권리운동가로, 채식주의자로 변신해 온 리먼은 1996년 그 유명한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소가 소를 먹는 현실을 폭로하면서 광우병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해 주목 받았던 인물이다.


당시 리먼이 겨냥한 것은 광우병이지만, 그의 주장과 논리는 오늘날 축산업에 몸담고 있는 전세계 농민과 국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성난 카우보이>를 통해 사용하지 말아야 할 화학약품 등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용해 온 제 자신을 스스로 폭로하고 아울러 그것을 방임해 온 국가에게도 일부 책임을 묻고 있다. 사육두수가 적었을 땐 없던 걱정거리들이 점점 사육두수가 많아지면서 자꾸만 생겨나고, 또 그런 반면 욕심은 더욱 커져 보다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축산현실을, 체험을 통해 통렬히 지적하는 한편 그릇된 축산업이 지구를 어떻게 절망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는지를 싸잡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잊을 만하면 불거져 나오는 가축 전염병들, 특히 요즘 한창 시끄러운 우리나라 구제역(비록 광우병은 아니지만)을 바라보면서 문득 떠오른 것이 리먼의 <성난 카우보이>요, 언제나 하세월인 우리의 방역대책이다.
왜 또 발생했을까. 올해만도 1월과 4월에 이어 벌써 세 번째다. 구제역으로 시작해 구제역으로 끝나는 느낌마저 든다. 언론에선 단골메뉴까지 생겨났다. 자고 나면 '빠르게 확산'이란 굵직한 타이틀과 함께 여지없이 생매몰 광경이 내비쳐진다.


치료약은 없고 예방약도 오히려 만들면 전파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만들지 않는다는, 그래서 일단 발병하면 일정 반경내 가축들을 모조리 매몰한다는 우리나라의 현실. 이런 와중에 멧돼지는 도심으로 내려와 수시로 날뛴다. 마치 축사 안의 가축들도 언젠가는 뛰쳐나와 날뛰는 날이 있을 것이란 시위라도 하듯 말이다.

멧돼지에게 더이상 빌미를 주지 말자

 

 

요즘 웬만한 산을 오르다 보면 흔히 보게 되는 흔적이 있다. 멧돼지 흔적이다. 전국의 거의 모든 산이 민둥산이었던 1960~70년대만 해도 깊은 산골에나 가야 볼 수 있었던 멧돼지 흔적이 지금은 도시 인근의 야산에서도 쉽게 목격될 만큼 예삿일이 됐다.
흔적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냥 지나간 발자국에서부터 먹이 찾느라 낙엽더미를 헤집어 놓은 흔적, 칡뿌리를 캐서 씹어먹은 흔적, 지난 밤에 눈 듯한 질척한 배설물, 여러 마리가 한 데 모여 진흙목욕을 한 흔적, 지나는 길목에 영역표시를 위해 나무둥치에 몸을 비빈 흔적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인상적이고, 한편으론 섬뜩하기까지 한 흔적은 멧돼지 산실(産室)이다. 멧돼지가 새끼 낳기 위해 만들었던 임시 거처인데, 보면 볼 수록 신기하고 교묘하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시야가 탁 트인 곳만을 골라 자리 잡는 것도 그렇고 참나무류나 산철쭉 같은 가는 나뭇가지를 낫으로 자른 것처럼 잔뜩 물어뜯어다 견고하게 집을 짓는 것도 그렇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나뭇더미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 새끼 예닐곱마리를 거뜬히 키울 수 있는 방이 있는 데다 사람이 올라가 아무리 굴러도 무너지지 않으니 보통 솜씨가 아니다.


그러나 말이 산실이지 실은 그처럼 위험한 흔적도 없다. 요즘 같은 가을철이라면 몰라도 새끼 낳는 5월경에 만일 그것과 마주친다면 그건 예사 상황이 아니다. 맹수에 가까운 야생 멧돼지가 1년중 가장 예민한 시기인 번식기, 그것도 갓 낳은 새끼를 데리고 있을 땐 언제 달려들지 모르니 마치 고장난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멧돼지 흔적이 많아졌다는 것은 멧돼지 개체수도 그만큼 많아졌다는 증거요 산에서 사람과 맞닥뜨릴 확률도 그만큼 높아졌다는 얘기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요즘 같은 가을철에 버섯사진을 찍으려고 속리산 인근 산자락을 막 오르는데 느닷없이 젊은 사람 하나가 1백미터 경주하듯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얼굴이 사색이 된 채 그저 앞만 보고 내뛰는 것이 무척이나 심상찮아 보였다. 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기 뒤에 뭐가 따라오지 않느냐며 나보고도 얼른 도망치라고 손을 저어댔다. 그 사람 뒤를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오긴 뭐가 오냐고 했더니 그제서야 달리기를 멈췄는데 여전히 다리를 후들거리는 걸 보니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진정 시키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럴만도 했다. 혼자서 정신없이 버섯을 따는데 바위만한 멧돼지 한 마리가 무엇엔가 놀란 듯 바쁜 걸음으로 산비탈을 내려오다 빙판에 구르듯 굴러떨어지는 걸 봤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버섯이고 뭐고 다 내팽겨치고 걸음아 나살려라 내튀는 중이었단다. 한편으론 우습기도 했지만 나 자신도 머리가 쭈뼛해지는 게 더 이상 올라갈 엄두가 안 나 그냥 내려온 적 있다.

 

버섯철이면 생각나는 그 때 그 상황.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야 실감 나지 않겠지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백두대낮 도심지에 멧돼지가 출현해 추격전을 벌이는 일이 갈수록 잦아지고 있고 산골 농작물은 아예 그들의 '텃밭'이 된 지 오래이니 언제 어느 때 멧돼지와 마주칠 상황이 벌어질 지 아무도 모른다.
해서 하는 얘긴데, 이제 더이상 멧돼지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으면 싶다. 산에 올라가 떼거리로 고성을 지르고 도토리든 산밤이든 보이는 대로 싹쓸이 해오고 먹다 남은 음식들 산중에 함부로 버리는 일 그만 하란 얘기다. 놀라고 배고프고 인간 먹거리에 자꾸만 길들여지니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바로 우리가 사는 도시와 마을일 수밖에….

위장망 안에서 '평화로운 자연'을 보다

 

 

멧돼지에게 또 한번 된통 놀랐다.

지난 5월 8일 '계곡의 잠수부' 물까마귀의 육추(새끼 기르기) 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보은의 어느 계곡에 들어가 잠복하고 있을 때였다. 새둥지 근처에 카메라를 설치한 뒤 위장망을 푹 뒤집어쓴 채 숨죽이고 있는데 뒤쪽 절벽위에서 갑자기 돌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심상치 않아 뒤돌아보고 싶었으나 그때 마침 물까마귀 어미 1마리가 먹이를 물고 나타나기에 계속 셔터에만 신경썼다. 그러길 5분여. 뒤에서 소리가 난 일은 잊은 채 서너 컷을 더 찍고 나서 사진상태를 확인하고 있는데 이번엔 등뒤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2m 앞으로 송아지만한 멧돼지 1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숨이 멎었다. 야생 멧돼지와 직접 맞닥뜨린 급박한 상황이니 머리카락이 있는 대로 쭈뼛 섰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에 비친 멧돼지표정이 의외로 태연했다. 나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다행이다 싶은 순간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해댄 것이다. "흐~흠!" 갑자기 사람소리가 나자 멧돼지 행동이 걸작이었다. 마치 자갈밭에서 산악오토바이가 전속력으로 스타트하듯 꽥! 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야생 멧돼지가 빠르다고는 하나 그처럼 비호같은 줄은 미처 몰랐다.

위장망이라고 해봤자 가는어망에 먼지털이같은 술을 듬성듬성 달았을 뿐인데 그 효과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2개의 바위 틈새에 위장망을 치고는 죽은 듯 들어앉아 있는 나를 눈치채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해서 느긋하게 지나던 중인데 돌연 이상한 물체안에서 뜬금없이 인기척이 들리니 멧돼지인들 기겁할 수밖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건 나였는데 되레 헛기침 한번에 똥줄 빠지게 달아나는 멧돼지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평화로운 외출을 방해한 게 미안하기도 했으나 커다란 몸집이 까무러치듯 달아나는 품새에 도저히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날 마주친 것은 멧돼지 뿐만이 아니었다. 다람쥐 1마리는 위장망안으로 기어들어 내 장화 위에 잠시 올라섰다가는 느낌이 이상했던지 이내 달아났고 족제비 1마리는 위장망을 걸쳐놓은 한쪽 바위밑을 지나다가 한참을 서서 혀로 몸치장하고는 태연스럽게 사라졌다. 살아있는 야생 족제비를 바로 눈앞에 두고 쳐다보기는 난생 처음이어서 그저 신기한 마음에 꼼짝 않느라 사진 찍는 걸 그만 깜빡 잊었다. 그밖에도 앙증맞은 굴뚝새와 노랑할미새 등 많은 새들이 다가왔다가는 사라졌다.


위장망안에서 바라본 자연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그것이 비록 겉으로 보이는 평화일망정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동물들이 아직 상당수 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이 됐다.
위장망안에서의 시간은 또 많은 것을 생각케 했다. 위장망을 쓰지 않고서라도 인간이 아무때나 그들 자연과 함께 허울없이 지낼 수는 없을까. 공상 같지만 과연 그것이 불가능한 일일까.


또 이번 촬영을 통해 물까마귀의 특별한 자식사랑을 확인하게 됐다. 물바깥에서 먹잇감을 잡는 것도 어려울 텐데 매번 물속에 들어가 헤엄치면서 먹이를 잡아다 새끼들에게 먹이니 그보다 더한 부모의 정이 어디 있는가. 쉬지 않고 먹이를 물어다줘도 곧장 배고프다고 보채는 새끼들이 그저 안쓰러운 양 더욱더 열심히 잠수질에 나섰던 물까마귀 어미들. 해가 어둑어둑해서야 고된 날갯죽지를 추스르며 서로를 위로하던 그들 부부를 바라보면서 문득 내 어깨에 짊어진 불효의 짐이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어버이날이었던 그날, 물까마귀에게서 부모의 숭고한 내리사랑을 다시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잊지못할 하루였다.

조난 위기에서 멧돼지 길을 만나다

 

지난 2월 속리산에 붉은박쥐(천연기념물 452호, 일명 황금박쥐) 서식지가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자연동굴인데 수십 마리가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붉은박쥐가 어떤 동물인가. 암수 비율이 1:10~1:40밖에 안 되는 멸종위기Ⅰ급 동물로서 최근엔 자연동굴이 아닌 폐광에서만 발견되는 희귀종이다.

곧바로 소문을 추적했다. 그 결과 다행히 최초 발견자가 찾아져 날씨가 풀리는 4월초께 같이 답사하자는 약속을 얻어냈다.
그로부터 1개월여 뒤인 지난 9일 드디어 답삿길에 올랐다. 동행자는 최초 발견자 A씨와 '속리산 산사나이'로 통하는 박경수씨(한국자연공원협회 이사).

오전 10시에 금강골 입구서 만난 일행은 곧바로 목적지를 향했다. 그런데 얼마 안가 문제가 생겼다. 발견자 A씨가 바쁜 일 때문에 도중에 내려간단다. 난감했지만 그곳까지 올라와서 대략적인 동굴 위치와 가는 길을 알려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해서 일행은 만난지 30분만에 둘이 됐고 답삿길도 졸지에 탐삿길로 변했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A씨와 헤어진 뒤로 길이 사라진 것이다. 집채만한 바위를 지나면 수십길 낭떠러지가 나타나고, 가까스로 바위지대를 벗어나면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빽빽한 조릿대숲이 막아섰다. 수백번 속리산을 올랐다는 박씨도 이런 길은 처음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죽을 힘을 다해 오르고 또 오르길 2시간여. 거대한 암벽 봉우리를 돌자 A씨가 말한 얼음폭포가 나타났다. 4월 중순 가까운 시기에 얼음폭포를 만나니 그나마 신기한 생각에 잠시 앉아 땀방울을 훔칠 수 있었다. 게다가 더 반가웠던 것은 얼음폭포 뒤로 동굴처럼 생긴 어두운 공간이 보였다. 갑자기 힘이 솟았다.

그러나 웬걸, 다가가 보니 바닥은 온통 얼음이요 10미터 남짓한 굴 안쪽으로는 햇빛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허탕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굴내 환경으로 보아 황금박쥐 아니라 다른 박쥐도 살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샅샅이 살펴봤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맥 풀린 몸을 추스려 일대를 더 뒤졌지만 동굴도 붉은박쥐도 찾지 못했다.
아쉬움 속에 이젠 내려갈 길이 막막했다. 올라온 길을 되밟자니 엄두가 안났고 능선으로 올라가 등산로를 만나자니 앞이 캄캄했다. 박씨도 올라온 길이 징글징글했던지 일단 올라가자는 표정이었다. 결국 위쪽을 향해 천근만근 같은 발걸음은 다시 시작됐는데, 아뿔싸 그 길이 위험으로 이어질 줄이야.

가깝게 보이는 비로봉을 향해 온몸으로 기다시피 해 올라선 곳이 하필 수십길 낭떠러지 위였다. 오금이 얼어붙었다. 멧돼지 보금자리가 곳곳에 널려있고 그들이 떼지어 금방 지나간 흔적도 역력한, 그런 위험천만한 지대를 천신만고 끝에 벗어난 곳이 천애의 벼랑끝이라니. 기가 막혔다.
옴짝달싹 못하게 되자 위기감에 휩싸였다.

조난사고가 이래서 나는구나 하는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벼랑끝이라도 길은 있겠지. 한발짝 한발짝 똥끝 타는 암벽등반을 했다.

 

그러길 1시간여, 간신히 벼랑을 벗어나는 순간 자그마한 짐승 길이 나타났다. 멧돼지 길이었다. 반들반들한 것으로 보아 '살아있는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등산로로 이어질 것 같았다.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지옥에서 빠져나온 기분이 이 같으랴.

상고암에 들러 물한모금 마시니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보며 내려오는 등산로가 마치 고속도로 같았다. 자연앞에 인간은 한낱 미물임을 온몸으로 절감한 하루였다.

 

생명길을 터놔준 멧돼지들아 고맙다. 아울러 노구에도 불구하고  동행해 준 박경수씨께 감사드린다.

멧돼지 소동,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5인조 추격대와 식인 멧돼지의 한판 승부를 그린 영화 '차우'. 최근 빈발하고 있는 멧돼지 소동을 모티브로 한 괴수 어드벤처다. 공교롭게도 국내에서는 이 영화 상영 이후 멧돼지 소동이 더욱 빈발함에 따라 목하 신드롬까지 일고 있다. 우연치고는 대단한 우연이다.
하지만 최근의 멧돼지 소동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선 멧돼지만 나타나면 총부터 들이대 사살하고 보는 현 세태가 아쉽다. 멧돼지가 그렇게도 위험한 동물인가.


물론 멧돼지는 위험하다. 화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오죽하면 저돌(猪突)이란 말까지 생겼을까. 이 말뜻엔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는 멧돼지 모습이 내포돼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어디까지나 화난 멧돼지를 전제로 한다. 멧돼지는 보통 새끼를 거느리고 있거나 위협을 느꼈을 때 저돌적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러질 않는다. 사람을 먼저 공격하는 예는 더욱 드물다.


그런데도 나타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살한다. 과잉반응이란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생명경시 풍조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제 아무리 위험성 있는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단지 도심지 또는 주택가, 도로변에 나타났다고 해서 무조건, 그것도 공개된 장소서 총으로 쏴 죽인다는 것은 자칫 '무엇이든 위험하면 죽여도 된다'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얼마 전 조류 인플루엔자와 구제역에 걸린 가축들을 보란 듯이 공개적으로 살처분했다가 뒤늦게 너무한 처사란 반발이 일자 인도적(?) 살처분이란 지침을 마련했던 기억을 벌써 잊었는가.


해서 제의하건대 대처방안을 좀 바꿨으면 한다. 그들도 엄연한 생명체요 우리 생태계의 한 구성원이란 점을 고려해 무조건 죽이고 보는 행위는 자제했으면 한다. 인명 피해와 같은 위험 소지가 높아 굳이 급처방이 필요하다면 일단 마취시켜 생포한 다음 살처분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풀어줄 것인지를 결정하되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함부로 사살하는 행위는 하지 말길 바란다. 이는 교육상으로도 필요한 일이다.


또 하나. 도심지 등에 나타나는 멧돼지는 대부분 먹잇감이 궁해서 혹은 길을 잃어 방황하다가 본의 아니게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따라서 덮어놓고 맹수취급하는 것 역시 피해망상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왜 갈수록 더 자주 출몰하고 있는지부터 생각할 일이다. 야생동물에게 있어 사람은 결코 달갑잖은 존재다. 그러니 사람곁을 찾아오고 싶어 찾아오겠는가. 개체수는 늘어난 반면 서식공간은 한정돼 있기에 사람들과의 활동영역이 겹치면서 맞닥뜨릴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 것 뿐임을 헤아려야 한다.


또한 멧돼지를 만났을 때의 행동요령도 제대로 알릴 필요가 있다. 먼저 위협하든가 공격하지 않는 한 덤벼들지 않는 동물이란 점을 주지시키고 당황하거나 소리쳐 예민해지지 않도록 주의할 것도 상기시켜야 한다. 두렵다고 허겁지겁 달아나는 것도 멧돼지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삼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차제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얼마전 한 고속도로에 멧돼지가 뛰어들어 자칫 대형사고를 빚을 뻔한 것처럼 앞으로 그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로드킬 문제'를 보다 심각한 당면과제로 받아들여 대책마련을 서둘렀으면 한다.


앞으로 닷새 뒤면 전국 각지서 순환수렵장이 운영된다. 명목이야 멧돼지를 포함한 유해조수의 구제와 개체수 조절, 건전한 수렵문화 정착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살생을 공식적으로 허가하는 일에 어느 지자체에서는 신청자 접수시작 3분 만에 무려 1,000명이 몰려들어 곧바로 마감됐다고 한다. 해당 지자체야 신이 났겠지만 그 역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수렵철, 짐승도 떨고 사람도 떨고 있다

 
며칠전 청원ㆍ괴산 경계의 한 마을에선 별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130kg이나 되는 커다란 멧돼지가 마을옆 봇도랑에 빠져 죽은 것이다. 시멘트 구조물이긴 하지만 너비와 높이가 고작 1m 남짓하고 물도 말라있는 봇도랑이기에 모두들 의아해 했다.

위급상황이 벌어지면 사냥개도 쉽게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민첩하고 괴력을 발휘하는 야생 멧돼지가, 그것도 자기 키의 한 길도 채 안 되는 도랑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객사하다니. 총에 맞아 창자가 밖으로 나와도 그것을 씹어가면서 덤벼들고 또 덫에 걸리면 발목을 끊고라도 도망치는 악착스러움과 강한 생명력을 가진 멧돼지이기에 의아심은 더욱 컸다.
주민들에 의하면 당시 그 멧돼지는 특별한 외상도 없었고 병들어 쇠약한 상태도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얼마나 발버둥 쳤으면 발굽이 다 까지고 두눈은 부릅뜬 채 앞발을 난간에 걸치고 죽었단다.

 
또 엊그제엔 이런 일도 겪었다.

멧돼지가 죽은 곳서 아주 가까운 농로를 지나치다 고라니와 마주쳤다. 대낮에 고라니와 마주친 게 이상한 게 아니라 그 고라니의 행동이 이상했다. 맞은 편서 황급히 달려오던 고라니는 차를 보자마자 맹수를 만난 양 뒤도 돌아보지 않고 똥줄이 빠져라 달아났다. 헌데 뛰는 모습이 영 이상했다. 한쪽 다리를 저는 것이었다. 깨금발을 뛰듯 엉덩이를 실룩거리던 그 고라니는 한참 뒤 다른 장소서 다시 마주쳤을 때도 역시 기겁을 했다.
당시 필자는 겨울철 야생동물을 촬영하느라 좁다란 농로를 매우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던 중이어서 평소 같으면 고라니가 그렇게 까지 놀라 허둥대진 않았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데 별안간 하천 건너편서 총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게 답이었다. 총소리를 듣는 순간 두 가지 의문점이 풀린 것이다.

멧돼지가 비명횡사하고 고라니가 깨금발로 달아나던 장소는 다름 아닌 청원군 경계와 바로 이웃한 지역이다. 청원군 지역은 올겨울 순환수렵장이 운영되는 곳이다.

해서 이곳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연일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고 졸지에 사냥밥 신세가 된 야생동물들은 살길 찾아 인근 타지역으로 몸을 피하고 있다. 봇도랑에 빠져 죽은 멧돼지 역시 청원지역서 사냥꾼에 쫓겨 ‘피난’하다 기진맥진해 참변을 당했다.  

비록 청원 뿐만 아니라 진천,음성,제천 등 순환수렵장이 운영되고 있는 지역의 야생동물들은 요즘 편안할 날이 없다.

그들이 얼마나 불안해 하는가는 그들의 행동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어찌나 사람을 무서워하는지 달리던 차가 멈춰서는 시늉만 해도 즉각 달아나거나 긴장한다. 총을 쏠까 두려워서다.

지자체마다 돌아가면서 순환수렵장을 운영하는 이유는 유해조수를 구제하고 건전한 수렵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그러기에 제도 자체를 탓하는 건 아니다.

늘어난 들짐승 때문에 농사철 내내 밤잠 설치는 산간주민들의 애타는 농심도 잘 알고 있고 1년을 학수고대하며 수렵철을 기다려온 엽사들의 기분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일부 몰지각한 엽사들의 그릇된 총질로 인해 야생동물들이 수난 당하고 농촌주민들이 불안에 떠는 등 부작용이 심각한 데 있다.

예전의 엽도(獵道)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날짐승이 땅이나 물위에 있을 땐 절대 쏘지 않고 한번 놓친 들짐승은 뒤쫓지 말아야 함에도 기필코 잡겠다는 듯 막무가내다.

인가에선 총소리를 내지 않는 게 도리인데 걸핏하면 지붕과 마당위로 총알이 날아든다.

주민들은 하소연하고 싶어도 총 든 이들이기에 함부로 말도 못한다.
짐승도 떨고 사람도 떠는, 그래서 더 으스스해진 곳이 요즘의 순환수렵장 부근 산간마을이다.

우리 주변의 산과 들, 냇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야생동물이 남긴 각종 흔적들을 만나게 된다.

마치 사람이 다니는 길처럼 빤질빤질하게 나 있는 이동통로에서부터 배설물,발자국,먹이 흔적,머물던 자리(혹은 잠자리),영역 표시 등 그 종류도 많다.
이들 흔적은 대부분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것을 남긴 동물의 실체는 물론 그 동물의 삶과 생활방식, 습성이 담긴 메모리칩이나 다름없다. 예를 들어 어느 산중에서 동물의 배설물을 발견했다면 그것의 생김새와 색깔,냄새,구성물 등의 분석을 통해 그 동물이 어떤 동물이고 식성은 어떤지를 알 수 있으며 또 굳은 정도를 가지고 그 동물이 언제 지나갔는지도 알 수 있다.
또 같은 류의 배설물이라 하더라도 크기와 양, 무더기 수를 통해 그 동물이 어미인지 새끼인지 또 몇 마리가 집단을 이뤄 활동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느 특정 동물을 추적하거나 서식여부를 확인하고자 할 때도 흔적만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도 없다. 
그래서 생태를 연구하는 이들은 야생동물의 흔적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만일 생태조사를 할 때 각종 흔적은 많지만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울 경우엔 차선책으로 그 흔적들을 증거로 제시해 서식여부를 간접 확인하기도 한다.
‘달래강의 숨결’을 기획취재 중인 필자는 요즘 시쳇말로 ‘사냥개’가 다 돼 가고 있다.

달래강 물길 3백리 가는 곳마다 짐승똥이란 똥은 보이는 대로 주워들고 냄새를 맡아가며 수달과 삵,하늘다람쥐 등 몇몇 중요한 종을 집중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들의 흔적과 관련해 몇 해 전 겪은 일이다.

속리산 자락의 어느 산중에서 버섯 사진을 찍고 있는데 웬 청년 하나가 돈내기 하듯 정신없이 산비탈을 내려 오면서 “사람 살려” 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그렇쟎아도 방금 전 멧돼지의 생생한 흔적(온기있는 은신처)을 목격한 후 내심 긴장하고 있던 터에 혼비백산한 청년을 보니 직감적으로 멧돼지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에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 청년 얼굴이 노랗게 질린 채 “내 뒤에 멧돼지 안 따라 오냐”며 빨리 내튀라고 손짓까지 한다. 뒤쪽을 확인하면서 “안 따라온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한숨 돌리며 하는 말이 버섯을 따는 데 뭔가 이상해 고개를 들었더니 멧돼지가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어 버섯자루고 뭐고 다 팽개치고 줄행랑쳤단다.
지금도 산을 오르다 보면 종종 멧돼지 흔적을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 청년 얼굴이 떠올라 한편으론 헛웃음이 쳐지고 또 한편으론 모골이 송연해져  더욱 촉각을 세우게 된다.

요즘 들어 우리 주변에는 야생동물의 흔적이 부쩍 많이 눈에 띄고 있다. 멧돼지 같이 농작물에 피해를 끼치는 동물들의 흔적이야 농민들에겐 반가울 리 없겠지만, 그래도 한반도의 자연을 생각할 때 그 안의 생태계가 더욱 건강해지고 있다는 청신호이기에 우려보다는 반가움이 앞선다.
하지만 이렇듯 반가움을 주는 ‘자연의 흔적’이 있는가 하면 보면 볼수록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인간의 흔적’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어 묘한 대조를 보인다.

더욱이 행락철이 끝나가는 요즘 사람들이 많이 찾던 물가나 계곡 주변 마다엔 몰상식한 이들이 남긴 비양심의 흔적들이 곳곳에 널려 있어 갈 길이 먼 이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냄새와 파리 때문에 고추밭에 들어가려면 몸서리가 쳐져 오죽하면 ‘밭에 똥 싸지 말 것’이란 노골적인 팻말을 써붙이겠냐며 길게 한숨짓던 한 계곡 마을 주민의 일그러진 표정이 이 사회에 남기는 또 다른 흔적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하다.
자연을 바라보기가 괜히 민망해 지는 가을의 초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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