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에게 더이상 빌미를 주지 말자
요즘 웬만한 산을 오르다 보면 흔히 보게 되는 흔적이 있다. 멧돼지 흔적이다. 전국의 거의 모든 산이 민둥산이었던 1960~70년대만 해도 깊은 산골에나 가야 볼 수 있었던 멧돼지 흔적이 지금은 도시 인근의 야산에서도 쉽게 목격될 만큼 예삿일이 됐다.
흔적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냥 지나간 발자국에서부터 먹이 찾느라 낙엽더미를 헤집어 놓은 흔적, 칡뿌리를 캐서 씹어먹은 흔적, 지난 밤에 눈 듯한 질척한 배설물, 여러 마리가 한 데 모여 진흙목욕을 한 흔적, 지나는 길목에 영역표시를 위해 나무둥치에 몸을 비빈 흔적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인상적이고, 한편으론 섬뜩하기까지 한 흔적은 멧돼지 산실(産室)이다. 멧돼지가 새끼 낳기 위해 만들었던 임시 거처인데, 보면 볼 수록 신기하고 교묘하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시야가 탁 트인 곳만을 골라 자리 잡는 것도 그렇고 참나무류나 산철쭉 같은 가는 나뭇가지를 낫으로 자른 것처럼 잔뜩 물어뜯어다 견고하게 집을 짓는 것도 그렇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나뭇더미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 새끼 예닐곱마리를 거뜬히 키울 수 있는 방이 있는 데다 사람이 올라가 아무리 굴러도 무너지지 않으니 보통 솜씨가 아니다.
그러나 말이 산실이지 실은 그처럼 위험한 흔적도 없다. 요즘 같은 가을철이라면 몰라도 새끼 낳는 5월경에 만일 그것과 마주친다면 그건 예사 상황이 아니다. 맹수에 가까운 야생 멧돼지가 1년중 가장 예민한 시기인 번식기, 그것도 갓 낳은 새끼를 데리고 있을 땐 언제 달려들지 모르니 마치 고장난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멧돼지 흔적이 많아졌다는 것은 멧돼지 개체수도 그만큼 많아졌다는 증거요 산에서 사람과 맞닥뜨릴 확률도 그만큼 높아졌다는 얘기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요즘 같은 가을철에 버섯사진을 찍으려고 속리산 인근 산자락을 막 오르는데 느닷없이 젊은 사람 하나가 1백미터 경주하듯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얼굴이 사색이 된 채 그저 앞만 보고 내뛰는 것이 무척이나 심상찮아 보였다. 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기 뒤에 뭐가 따라오지 않느냐며 나보고도 얼른 도망치라고 손을 저어댔다. 그 사람 뒤를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오긴 뭐가 오냐고 했더니 그제서야 달리기를 멈췄는데 여전히 다리를 후들거리는 걸 보니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진정 시키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럴만도 했다. 혼자서 정신없이 버섯을 따는데 바위만한 멧돼지 한 마리가 무엇엔가 놀란 듯 바쁜 걸음으로 산비탈을 내려오다 빙판에 구르듯 굴러떨어지는 걸 봤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버섯이고 뭐고 다 내팽겨치고 걸음아 나살려라 내튀는 중이었단다. 한편으론 우습기도 했지만 나 자신도 머리가 쭈뼛해지는 게 더 이상 올라갈 엄두가 안 나 그냥 내려온 적 있다.
버섯철이면 생각나는 그 때 그 상황.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야 실감 나지 않겠지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백두대낮 도심지에 멧돼지가 출현해 추격전을 벌이는 일이 갈수록 잦아지고 있고 산골 농작물은 아예 그들의 '텃밭'이 된 지 오래이니 언제 어느 때 멧돼지와 마주칠 상황이 벌어질 지 아무도 모른다.
해서 하는 얘긴데, 이제 더이상 멧돼지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으면 싶다. 산에 올라가 떼거리로 고성을 지르고 도토리든 산밤이든 보이는 대로 싹쓸이 해오고 먹다 남은 음식들 산중에 함부로 버리는 일 그만 하란 얘기다. 놀라고 배고프고 인간 먹거리에 자꾸만 길들여지니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바로 우리가 사는 도시와 마을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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