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 제454호 미호종개. 충북 음성군에서 발원하여 금강으로 흐르는 미호천에서만 서식한다는 미꾸리과 어류다. 폐수오염, 골재채취로 인한 수량 감소 등으로 하천 생물들은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
멸종만은 허락할 수 없었다. 미호천으로 출근하기 일쑤였고, 산란장면을 찍기 위해 밤새는 건 일상이 됐다.
지난해 12월, 끝내 35편에 이르는 기획취재 <미호종개 시리즈>를 완결하고 만다. 사전 취재기간을 합쳐 꼬박 18개월이 걸린 작업이었다. 학계에선 난리가 났다. 첫 연재가 시작되자 우려 반 기대 반이었던 것이 연재가 계속 되자 격려로, 결국엔 ‘과분한’ 찬사로 이어졌다고.
단일 어종에 관한 연구로는 ‘기념비적인’ 보고서로 평가받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미 ‘바이블’로 통한다. 어떤 교수가 “등골이 오싹할 만한 자책의 매”라고 표현할 만큼 <미호종개 시리즈>는 학자들의 반성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80년대 말 처음 라틴학명인 ‘익수키미아 초이(Iksookimia choi)’로 알게 된 후, 늘 밀린 숙제와 같은 존재였던 미호종개 연구. 20년 만에 그 한을 풀었단다.
김성식 기자. 검은 머리카락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완전’백발의 중년이다. 중 2때부터 염색약을 발랐다고. 어느덧 충청도에서만 기자생활 20년이다. 안 가본 곳이 없다. 늘 환경전문기자였다.
‘새 박사’ 윤무부 교수를 존경했고, 조류학자가 되고 싶었다. 행정학과를 졸업했고, 기자가 됐지만, 그가 걷는 길은 어릴 적 꿈꿨던 그 길과 다르지 않다. 사진기자에게 접사사진을 부탁했지만 “현장 찍는 것도 바쁜데~”라는 대답만 돌아 올 뿐. 결국 직접 접사카메라를 들었다. 그 사진이 수만 장에 이른다. 방대해서 정리할 엄두도 안 난다. 지역기자의 출장비로는 필름값 감당도 힘들었다고.
남편이 집안 일 말고 다른 일에 ‘미치면’ 아내는 괴롭다. 그의 아내 역시 그랬다. 그렇다고 고집을 꺾을 순 없는 노릇. 게다가 일도 여럿 벌였다. 청주 시내에 사업자등록을 하고 생태교실을 열었다. 참가회원들을 인솔하고 들로 산으로 바다로 생태체험을 다녔다. 급기야는 증평군 청천면에 양어장까지 차렸다.
“이놈들이 어떻게 알을 낳고 살아가는지, 자연 상태에 가장 가까운 양식방법은 뭔지. 그런 고민들 하는 곳이죠.” 그런 고민 끝에 특허도 냈다. <인공여울을 이용한 쏘가리 양식 방법>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방법”이라며 돈 되는 특허는 결코 아니란다.
“1990년 인가요? 제가 3년차 기자였을 때니까. 낙동강 상류에서 한강이북에 서식하는 북방종개가 발견됐어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1주일 간 역학조사를 벌였죠. 조사 결과 한강, 금강, 낙동강이 한줄기였고, 소백산맥이 솟아 3갈래로 갈라 놨다는 학설을 유추했죠. 생물 한 종에 대한 연구가 지질학적 수수께끼를 푼 셈이죠.”
생물 한 종이 갖는 환경적, 과학적, 역사적 의미가 그에겐 사명이다. 대운하에 대한 소견을 그의 블로그(http://blog.daum.net/koomlin)에서 인용해본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 남쪽으로 서로 갈라져 흐르는 우리나의 강 수계는 이른바 서한 아지역과 동북한 아지역, 남한 아지역이라는 세 개의 독특한 민물고기 분포구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어류상이 양양 남대천과 다르고 낙동강과 다른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중 필요한 물줄기를 이어 운하로 이용한다 하니 한반도 생태계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97년도 <금강의 생태>라는 기획보도로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3년간 매일 썼던 환경칼럼을 3권의 책으로 엮었고, <전문기자의 환경이야기>, <금강 1천리>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서호납줄갱이의 한(恨)을 공감하고 싶어 하는 자연인’이라 부르고 있다. 서호납줄갱이. 환경파괴와 인간들의 무관심속에 지금은 멸종된 토종 물고기다. 표본마저 미국 땅엘 가야 볼 수 있는 기구한 운명의 물고기. 그 슬픔을 알기에 더더욱 그가 지금의 길을 고집하지 않나 싶다.
“그깟 고기 살려서 뭐하냐?”는 핀잔도 들었을 법 하지만, 그의 ‘인간과 자연, 그리고 생태계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