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가 만나고 전파되던 '생명길' 찾아
금강하구서 내륙까지 소금 이동로 집중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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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은 인간의 생명유지에 있어 물,공기와 함께 매우 중요하다. 인체에 소금 성분이 없으면 세포자체가 제대로 기능 못하고 위액인 위염산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소금은 인류 생활과 문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샐러리(Salary)와 솔저(Soldier)의 유래가 소금과 관련 있듯이 고대 국가에선 소금을 월급으로 준 적 있으며 화폐로 통용되기도 했다. 구약 성서에서는 신과 인간간의 변하지 않는 계약을 소금계약이라 표현했고 신약에서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이 땅의 소금이요 이 세상의 빛"이라고 설파함으로써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되라고 가르쳤다.
소금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도시 발달과 국가 형성을 앞당긴 동력원이기도 했지만 때론 분쟁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중국 한나라가 부여로의 소금 이동을 막자 주몽이 나서서 지금의 인도북부 티벳지역의 소금산을 찾아가 다량의 소금을 구해옴으로써 백성의 신망을 얻어 훗날 고구려 건국의 발판을 마련한 일화는 유명하다.
간디가 인도 국민을 이끌고 대행진을 벌였던 것도 소금과 관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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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이동길 '소금길'
세계 각 지역에는 소금의 이동통로인 소금길(Salt Road)이 있었다. 고대 로마제국이 최초로 건설한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도 바다로부터 소금을 나르기 위한 소금길이었고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 산속에도 고대의 소금길이 있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비단길(실크로드) 이전에 이미 소금길(쏠트로드)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소금길이 많았다.
강원도 정선의 백복령은 정선 사람들이 동해안에서 소금을 구해 넘나들던 옛 소금길이었으며 경북 언양에서 청도로 넘어가는 운문재 역시 소금 등짐장수들이 넘나들던 소금길이었다.
바다와 내륙을 잇던 옛 소금길 외에도 한강,금강,낙동강 등 물줄기에도 소금배가 오가며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소금길은 비단길의 유명세에 밀려 역사속에 한낱 추억처럼 잊히고 말았고 우리나라의 소금길은 교통·운반 수단의 발달로 인해 졸지에 잊힌 길이 돼 버리고 말았다.
인류 역사와 문명,인간의 생명유지에 밑바탕이 돼 온 생명길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금강의 소금길
금강에도 소금길이 있었다. 지금은 까마득히 잊혔지만 불과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해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이 금강 물줄기를 타고 내륙으로 운반됐다. 염전을 떠난 소금은 금강 하류의 강경에서 황포돛단배에 실린 채 긴 여정이 시작됐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각 지역의 포구에 내려진 소금은 수레 혹은 등짐장수를 통해 각 고을로 전해져 거미줄 같은 소금길을 형성했다.
금강 소금배의 종착지(가항종점)는 중류에 위치한 부강포구(충북 청원)였다. 부강포구는 당시만 해도 금강을 대표하는 포구중 하나로, 이곳까지 실려온 서해 소금이 대전,청주,옥천,보은은 물론 심지어 경북 상주지역까지 팔려나가는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도 충북 청원 문의에 가면 염티란 지명이 있다. 부강포구에서 소금을 받은 등짐장수가 보은,상주쪽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기던 고갯마루다.
금강의 소금길은 단순히 소금만 오가던 길이 아니었다. 각종 해산물과 토산품이 오가고 각 지역의 풍습이 사람 냄새와 함께 전파되던 '문명길'이었다.
그 옛날 비단길을 통해 거대한 동서 문화가 전파됐듯이 금강의 소금길 역시 한반도 서해지역과 내륙지역의 삶과 문화가 만나고 전파되던 문명의 탯줄이자 생명줄이었다.
언론사상 최초 시도
이러한 소금길은 1905년 경부철도의 개통을 시발로 각종 철로와 도로가 개설되면서 서서히 사향길로 접어들어 언제부턴가는 아예 그 존재성마저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됐다.
뿐만 아니다. 물길은 물길대로 옛 모습을 잃은 지 오래여서 과거 이곳을 통해 소금배가 드나들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는 곳곳마다 '상전벽해의 지대'로 남아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강의 생로병사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이기도 하지만 인위적인 간섭과 산업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4대강 사업이라는 국가계획에 의해 토사 준설 등 물길 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기는 하나 중도에 반대여론에 부딪쳐 설왕설래를 거듭하고 있다. 4대강 사업은 기존의 물길 환경을 인위적으로, 거의 송두리째 건드리는 전대미문의 큰 사건이다. 따라서 한 쪽에선 건너서는 안 될 강을 무리하게 건너는 것에 비유하기도 하고 또 다른 쪽에선 수심(水深)을 비롯한 모든 물길 환경을 오늘과 내일의 상황에 맞춰 새롭게 정비하려는 대역사(大役事)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느 강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금강에 있어서 4대강 사업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대기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기에 반대론 혹은 신중론이 제기되는 것이리라.
앞에서도 강조한 바와 같이 금강은 오랜 기간 한반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생명길이자 문명길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문화사적 측면은 물론 지역경제 발전사적 측면에서도 완전한 조명이 이뤄지 않은 채 오늘의 시점에 와 있다.
더구나 금강에 얽힌 소금길에 관해서는 그동안 몇몇 학자나 향토사학자 외에는 거의 관심밖인 사각지대에 놓여온 게 사실이다.
이에 <충청타임즈>는 조금이라도 금강의 옛 모습이 남아 있을 때, 또한 금강의 소금배와 관련된 지역민들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이어져 오고 있을 때 하루라도 빨리 예전의 소금길을 재조명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언론사상 최초로 '금강의 소금길'이란 기획취재를 마련했다.
취재팀은 오는 9월말까지 3개월간에 걸쳐, 서해산 소금과 각종 해산물의 집산지이자 금강 소금배의 시발지인 강경포구로부터 상류쪽에 위치한 각 지역의 옛 포구와 그로부터 이어진 옛길 및 장터에 이르기까지 직접 답사함으로써 이 지역에 남겨진 역사의 한 맥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김성식 생태환경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