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추적>

1500여년전 삼년산성에 세계최초의 전략적 땅굴이 있었다
-민간탐사팀, 구체적 정황 및 자료와 함께 주장
 막대한 사업비·지자체 냉담 등으로 발굴 중단

 

삼국통일의 교두보였던 충북 보은 삼년산성(사적 235호)에 1500여 년전 만들어진 군사전략적 땅굴이 있었다는 주장이 구체적인 정황 및 자료들과 함께 제기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만일 이같은 주장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우리나라 역사는 물론 전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세계 최초의 군사용 땅굴로 기록되는 '엄청난 사건'이다.


"어렸을 적 직접 땅굴에 들어가봤다"는 한 출향인사의 증언을 토대로 자체조사에 나섰던 지역인사들은 땅굴의 구체적인 징후를 찾아내고도 4년째 비밀에 부치고 있다가 최근에서야 '땅굴이 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주장과 함께 전모를 털어놨다.


숨막힐 정도의 엄청난 일을 그동안 쉬쉬해 온 이들의 속사정과 자체조사내용, 그밖의 구체적인 정황 등을 심층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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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년산성과 오정산

 

도면----보은지역 민간탐사팀은 자체 조사를 통해 삼년산성 부근의 지하에 공동으로 추정되는 징후를 확인해 냈다. 탐사팀은 특히 이러한 징후가 산성 남쪽으로 연결된 오정산 자락의 8~9부 능선을 따라 일률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도면에 점선으로 이어진 부분)을 밝혀냈다./자연닷컴

 

<1>땅굴의 개연성 및 민간조사 결과

 

때는 4년전인 2004년 2월 27일.

 

충북 보은군청 이호천담당(경제사업단 특허개발)과 김중구(보은읍 누청리 이장)·구명서씨(보은군 탄부면 평각리 이장) 등으로 구성된 임시탐사팀은 땅굴발굴 전문가인 임형열씨를 초빙, 비밀리에 조사를 벌였다.


수맥전문가이기도 한 임씨는 탐사기를 동원, 이틀에 걸쳐 삼년산성 일대를 탐사한 결과 폭 2.5~3m 간격으로 일정하게 동문터에서 약 400m 떨어진 지점까지 지하가 비어있는 징후를 찾아냈다.


이러한 징후가 끝나는 지점은 보은읍 대야리 117, 118번지의 밭으로, 탐사팀은 이 지역이 삼년산성 입구일 가능성이 가장 큰 곳으로 추정했다.(도면의 입구추정지 '가'지점)


탐사팀은 이어 탐사기를 통해 같은 징후를 보이는 지점을 추적한 결과 도면에 나타난 것처럼 동문에서 산성내 동남부를 지나 남쪽 방면 오정산 방면으로 탄부면 평각리 420번지 인근까지 총 길이 약 2.5km나 이어졌다.


지하공동의 징후가 마지막으로 나타난 평각리 420번지는 삼년산성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오정산 능선과 어암~평각간 도로가 만나는 지점의 산자락으로, 이곳 역시 땅굴 입구일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판단됐다.(도면의 입구 추정지 '나'지점)


탐사팀은 특히 지하에 공동이 있는 징후가 오정산 자락의 8~9부 능선을 따라 일률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도면에 점선으로 이어진 부분)을 확인하는 한편 그 노선상에서 약 500m 간격으로 일정하게 떨어진 4개 지점(도면의 빗금 친 A,B,C,D 지점)에서 땅이 가라앉은 '함몰부위'를 찾아냈다.

 

이 함몰부위는 20~30m 넓이로 나타나 있는데 취재팀의 확인결과 마치 지하 터널이 갑자기 무너져 내린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사진 참조>

 

 

오정산 능선에 있는 함몰부(도면의 B지점)
탐사팀은 지하공동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4개 지점의 땅이 움푹 가라앉은 함몰부위를 찾아냈다. 이 함몰부위는 지하에 공동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노선과 일치하고 있다./자연닷컴
 


탐사에 직접 참여했던 이호천담당은 "탐사기를 통해 지하에 공동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산정상 바로 아래 8~9부 능선에 거의 직선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데다 함몰된 지점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 노선상에 나타나고 있는 점 등은 이곳에 땅굴이 있을 가능성을 가장 강력히 뒷받침해 주는 증거"라며 "당시 탐사기를 작동한 임형열씨는 함몰 부분을 발견하곤 '이곳을 파면 분명히 땅굴이 나올 것'이라고 자신하며 몹시 흥분해 했다"고 말했다.

 

임씨는 '북한 땅굴'을 발견할 때 조사자로 참여한 경력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탐사팀은 이러한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직접 땅굴을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 관내 관정업자를 불러 어암~평각간 도로 인근(도면의 E지점)을 굴착한 결과 지하 18m 지점의 두터운 암반층에서 갑자기 흙과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굴착작업을 벌인 곳은 탐사기를 통해 동공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노선이 지나는 곳이다.


탐사팀은 이곳이 산 중턱임에도 불구하고 지하 20m도 채 안 되는 곳에서 암반층이 나타나다 갑자기 흙과 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과거 동굴같은 것이 있다가 훗날 흙으로 메워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탐사팀은 이같은 구체적인 여러 징후를 포착, 자체 결과보고서까지 작성해 놓고도 지자체와 문화재청 등 관계기관에 적극적인 건의 내지 자체 발굴작업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그 중 결정적인 이유는 굴착작업 당시 확실한 동공을 찾으려 시도했으나 첫 번째 작업을 벌이던 중 인부 한 사람이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발생, 고액의 치료비를 물어주는 등 불상사와 함께 사업추진비 조달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탐사팀 자체가 지역 인사들로 구성된 임시 민간조직이라서 지자체서도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관련 학자들까지도 역사적 기록이 없고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하기 일쑤인 등 사업추진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산성내 지역은 물론 산성 밖 500m 지점까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묶여있어 정확한 탐사 및 발굴작업에 많은 제약을 받은 것도 큰 이유이다.


이호천담당과 김중구이장은 "기초조사 결과 개연성이 특히 높은 지역을 중심으로 동굴을 직접 찾아내려 했으나 막대한 사업추진비 등 어려움이 많아  그러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며 "하지만 지금도 삼년산성에 지하 땅굴이 있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삼년산성은?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오정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축산성으로 사적 235호로 지정돼 있으며 둘레는 약 1.7km에 이른다.

 

오정산 능선을 따라 문터(門址) 4개소, 둥그런 형태의 옹성(甕城) 7개소, 우물터 5개소와 교란된 수구지(水口址) 등이 있다. 470년(자비왕 13년)에 첫 축조된 후 486년(소지왕 8년) 개축돼 오늘에 이른다.

 

삼국시대에는 이 지역이 삼년군, 삼년산군으로 불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불린 듯하나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부른다고 기록돼 있다.

 

보은 지역은 대전.청주.상주.영동지역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삼국시대에는 신라,백제,고구려 모두에게 중요한 전략적 지점이었기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신라군은 이곳 삼년산성을 교두보로하여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했는데, 일부에서는 성 둘레가 고작 1.7km밖에 안 되는 작은 성이 당시 난공불락의 철옹성 역할을 한 것은 '땅굴'과 같은 기상천외한 전략적 시설이 한 몫 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 땅굴 개연성 뒷받침하는 자료들
 
   
 
   

서남곡성에서 바라본 삼년산성
성곽 둘레가 1.7k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성인 삼년산성이 숱한 전투마다 백전백승을 거둠으로써 신라통일의 교두보 역할을 한 것은 평균 13m에 이르는 높은 성곽과 험한 지형적 요건 외에도 긴급 이동통로로 이용됐을 땅굴 등 어떤 비밀시설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을 낳고 있다.

 
"어릴 적 직접 들어가 봤다"

출향인사 이재성씨 생전 체험담 증언
굴속 광장 활·칼 등 병장기 널려 있어
주민들, 전설·정황 들어 "분명 있다"

◈ "실제 있다"는 증언(체험담)

   
유일한 땅굴 체험자인 고 이재성씨로부터 직접 증언을 들은 박경수씨(한국자연공원협회 이사).
 

보은 삼년산성에 1500여년전의 '군사용 땅굴'이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의 출발은 한 출향 인사의 증언이 단초가 됐다. 어렸을 적 실제 땅굴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는 '엄청난 말'을 함으로써 보은지역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남긴 사람은 탄부면 사직리(이하 사직리)가 고향인 이재성씨(증언 당시 68세·2년전 작고)로 이씨는 작고 전 고향사람을 만나면 심심찮게 삼년산성 땅굴 얘기를 무용담처럼 들려줬다 한다.

이씨의 얘기는 삼년산성 주변의 여러 전설과 정황, 주민들의 추측 등과 뒤섞여 결국 '현존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 소문으로 발전돼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씨는 작고 전 속리산에 사는 박경수씨(75·한국자연공원협회 이사·사진)에게 자신의 체험담을 생생히 증언했는데 이 증언은 보은지역 인사들로 하여금 임시탐사팀을 만들어 자체 조사를 하게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 다음은 이씨가 생전에 증언한 땅굴 체험담이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 사직리에 사는 초등학생 6명이 마을 인근의 굴속에 한번 들어가 보자고 약속하고 여러날 동안 준비했다. 어른들 몰래 횃불까지 만들어 놓고 토요일 오후(3시쯤으로 기억)가 돼서야 굴에 들어가게 됐는데 굴속이 워낙 길고 캄캄해 모두가 잔뜩 긴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이 두갈래로 갈라져 오른쪽 큰 길로 따라 들어가니 돌연 넓은 광장이 보였고 바닥엔 화살촉과 창으로 보이는 녹슨 쇳조각이 있어 그걸 주워 장난까지 했다. 더 들어간 굴 내부는 좁았다 넓었다를 반복하다 또 다른 광장이 나왔고 거기엔 화살촉, 칼, 활, 창 등 병장기가 널려 있었다.

한참을 놀다 나와 보니 밖은 한밤중이었고 온 동네가 횃불 천지였다. 한 마을에서 어린이 6명이 한꺼번에 없어졌으니 동네가 온통 뒤집혔던 것이다. 모두가 잔뜩 겁 먹었으나 할 수 없이 어른들에게 붙잡혀 실컷 혼났으며 심지어 지게 작대기로 두들겨 맞기까지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굴이라면 신물이 났고 어른들은 동굴을 흔적도 없이 메웠다. 당시 맞은 것이 너무나 끔찍해 50년이 지났어도 오금이 저리고 정확한 위치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박경수씨는 이 증언을 듣고 당시 이재성씨와 함께 사직리 부근을 답사했으나 수해 등으로 지형이 변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씨와 함께 동굴에 들어갔던 당시 친구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작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동문터와 남문터 밖의 모습 

현재 남아있는 성문터를 보면 서문을 제외한 동·남·북문 모두가 과거 어떻게 드나들었나 의심이 갈 정도로 문턱이 높고 밖에서 보면 허공에 떠있다. 왼쪽 사진은 동문터(무너진 부분)와 바깥 성벽, 오른 쪽은 남쪽 성문터에서 바라본 바깥 성곽으로 사람과 우마차가 도저히 드나들지 못할 정도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 현지 정황·전설, 각계 추정

이씨의 증언 외에도 삼년산성에 땅굴이 있을 개연성은 곳곳서 확인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삼년산성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평각리 뒷산(삼년산성과 이어진 오정산)에 굴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예부터 이 바위 아래 동굴에 오소리 같은 동물을 잡으려 불을 지피면 연기가 삼년산성 쪽에서 피어 올랐다는 증언을 들 수 있다.

이 바위를 직접 답사한 민간탐사팀의 김중구씨(보은읍 누청리 이장)는 "동네 어른들의 말에 따라 굴바위의 입구 쪽을 돌과 막대기로 쳐봤더니 '쿵∼쿵∼' 하고 울림소리가 들렸다"며 "이는 바위 안쪽이 비어있기 때문이며 만일 이곳에 큰 동굴이 있다면 산성과 연결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평각리 뒷산 굴바위 등 각종 정황을 들어 '땅굴 개연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민간탐사팀의 김중구씨(누청리 이장).
 

그 다음은 산성 주변의 지형과 현재 남아있는 4개의 문터와 관련된 현지 주민 및 향토사학계의 해석이다.

기록과 전설 등에 따르면 당시 삼년산성에는 3,000명에서 사단병력(1만2,000~2만명)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다량의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최소한 우마차를 이용해 성안으로 운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재 남은 성문터와 성곽주변 상황으로만 보면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라는 강한 의문이 생긴다. 왜냐면 각 성문의 문턱이 워낙 높게 설계돼 있어 도저히 우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며 성곽주변 역시 수십길 낭떠러지 혹은 급경사로 돼 있어 맨몸으로도 접근하기 어렵다.<사진 참조>

일각에서는 현재의 서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나, 서문 역시 과거에는 문턱이 꽤나 높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문밖 또한 급경사에다 인근에 강이 흘러 접근이 쉽지 않았다고 전한다. 인근의 배뜰(이평)이란 지명은 옛날 배가 다니던 들이란 뜻으로 이를 뒷받침한다.

서문이 지금처럼 주요 출입구 역할을 했을까라는 것도 의문이다. 당시 삼년산성은 서문 방향(지금의 보은읍내 방향)을 향해 백제군과 대치하고 있던 최전방이다. 하루가 멀다않고 수시로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적이 훤히 바라다보는 서문을 굳이 주요 출입구로 사용했을리는 만무하다. 성문은 남문과 동문,북문도 있었으며 수도 경주(후방) 쪽으로는 남문과 동문이 있었으나 남문 밖은 낭떠러지, 동문 밖은 급경사로 돼 있다. 따라서 우마차를 이용해 성안으로 군량미 등을 실어나르고 군사를 신속히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땅굴과 같은 비상통로가 분명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삼년산성은 둘레가 1.7k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성임에도 불구, 매번 전투때마다 백전백승을 거둠으로써 신라통일의 교두보 역할을 한 것도 지형적 요건 이외의 어떤 비밀시설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을 낳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성 남쪽에 있는 옥천 청산의 '핏들' 전설과 관련해서도 삼년산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즉, 삼년산성은 인근 접경지역의 방어까지 담당했는데 위급시에는 옥천 청산까지 군사를 파견해 백제군과 싸웠다. 하지만 신라군은 그곳서는 연전연패해 핏물이 들을 가득 채울 정도여서 핏들이란 지명까지 낳았던 반면 유독 삼년산성에서만 연전연승했는데 이는 '땅굴'과 같은 비밀시설을 통해 기습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란 것이다. 따라서 땅굴의 역할은 평소엔 군수물자 수송통로이고 비상시엔 군사들의 긴급 이동통로였다고 보고 있다.

끝으로 동굴 입구가 동문쪽 혹은 남문쪽과 연결돼 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다. 과거에는 성 남쪽의 탄부면 평각리 세골이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삼남대로로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주막(세골주막)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많이 다녔다고 한다. 특히 이 길은 신라쪽 후방(경상도 방면)에서 전방인 삼년산성쪽을 잇는 길과도 일치하기 때문에 이 길과 맞닿은 평각리 부근이 가장 유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다음은 산성 주변의 지형과 현재 남아있는 4개의 문터와 관련된 현지 주민 및 향토사학계의 해석이다. 기록과 전설 등에 따르면 당시 삼년산성에는 3,000명에서 사단병력(1만2000∼2만명)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다량의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최소한 우마차를 이용해 성안으로 운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재 남은 성문터와 성곽주변 상황으로만 보면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라는 강한 의문이 생긴다. 왜냐면 각 성문의 문턱이 워낙 높게 설계돼 있어 도저히 우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며 성곽주변 역시 수십길 낭떠러지 혹은 급경사로 돼 있어 맨몸으로도 접근하기 어렵다.<사진 참조>

일각에서는 현재의 서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나, 서문 역시 과거에는 문턱이 꽤나 높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문밖 또한 급경사에다 인근에 강이 흘러 접근이 쉽지 않았다고 전한다. 인근의 배뜰(이평)이란 지명은 옛날 배가 다니던 들이란 뜻으로 이를 뒷받침한다.

서문이 지금처럼 주요 출입구 역할을 했을까라는 것도 의문이다. 당시 삼년산성은 서문 방향(지금의 보은읍내 방향)을 향해 백제군과 대치하고 있던 최전방이다. 하루가 멀다않고 수시로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적이 훤히 바라다보는 서문을 굳이 주요 출입구로 사용했을리는 만무하다. 성문은 남문과 동문,북문도 있었으며 수도 경주(후방) 쪽으로는 남문과 동문이 있었으나 남문 밖은 낭떠러지, 동문 밖은 급경사로 돼 있다. 따라서 우마차를 이용해 성안으로 군량미 등을 실어나르고 군사를 신속히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땅굴과 같은 비상통로가 분명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삼년산성은 둘레가 1.7k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성임에도 불구, 매번 전투때마다 백전백승을 거둠으로써 신라통일의 교두보 역할을 한 것도 지형적 요건 이외의 어떤 비밀시설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을 낳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성 남쪽에 있는 옥천 청산의 '핏들' 전설과 관련해서도 삼년산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즉, 삼년산성은 인근 접경지역의 방어까지 담당했는데 위급시에는 옥천 청산까지 군사를 파견해 백제군과 싸웠다. 하지만 신라군은 그곳서는 연전연패해 핏물이 들을 가득 채울 정도여서 핏들이란 지명까지 낳았던 반면 유독 삼년산성에서만 연전연승했는데 이는 '땅굴'과 같은 비밀시설을 통해 기습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란 것이다. 따라서 땅굴의 역할은 평소엔 군수물자 수송통로이고 비상시엔 군사들의 긴급 이동통로였다고 보고 있다.

끝으로 동굴 입구가 동문쪽 혹은 남문쪽과 연결돼 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다. 과거에는 성 남쪽의 탄부면 평각리 세골이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삼남대로로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주막(세골주막)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많이 다녔다고 한다. 특히 이 길은 신라쪽 후방(경상도 방면)에서 전방인 삼년산성쪽을 잇는 길과도 일치하기 때문에 이 길과 맞닿은 평각리 부근이 가장 유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3> 당국의 발굴조사 필요

 
   
 

 

   

 삼년산성의 동남쪽 방향

민간탐사팀과 지역 주민들은 과거 삼남대로가 지나던 삼년산성의 동남쪽 방향 특히 탄부면 평각리 세골에서 삼년산성 동문터 앞쪽에 이르는 지역에 '땅굴 입구'가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땅굴 실체 밝혀야" 여론 비등
소문 아닌 '높은 개연성' … 발굴 시급
실존할땐 세계가 놀랄만한 중대 사안


1500여년전 삼년산성에 세계최초의 군사용 땅굴이 있었다는 충청타임즈 보도내용과 관련해 그 실체를 하루빨리 밝혀내야 한다는 여론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지역민들은 특히 삼년산성 땅굴이 그동안 소문으로만 나돌던 것과는 달리 출향 인사의 동굴 체험담과 민간탐사팀의 조사내용을 토대로 구체적인 정황들이 속속 밝혀지는 등 개연성이 높아진 만큼 관계 당국이 실체파악에 적극 나서 줄 것을 바라고 있다.

더욱이 지역민들은 삼년산성 땅굴이 '실존'으로 밝혀질 경우 국내 역사는 물론 세계 역사를 뒤집어놓을 만큼 중대한 사안임을 들어 보은군과 충북도, 문화재청, 학계를 망라한 발굴조사팀을 구성, 하루빨리 실체를 찾아냄으로써 잊혀졌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삼년산성의 정체성을 되찾아 세계적인 문화유적, 나아가 세계적인 명소로 발돋움 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자체적으로 민간탐사팀을 구성해 조사에 나섰던 김중구씨(보은읍 누청리 이장)는 "어릴적 땅굴에 직접 들어가 봤다는 출향인사의 증언과 인근 주민들의 견해 및 전설, 산성주변의 지형적 상황, 땅굴 전문가의 조사내용 등을 종합해 볼 때 땅굴이 실존할 개연성은 매우 높다"며 "실존 유적으로 밝혀질 경우 세계 전쟁사를 다시 써야할 만큼 학술적으로 중요한 사안임을 감안해 국가적 차원의 조사 및 발굴작업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국가차원의 발굴조사가 어려울 경우 보은군과 충북도가 나서 지역의 오랜 수수께끼인 땅굴의 진위 여부만이라도 가려줌으로써 주민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김중구씨                김정학씨                 우원명씨               이호천씨

 

보은군 탄부면 사직리 주민 김정학씨(61)는 "보은과 충북, 나아가 한국을 전 세계인들의 관심 속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일부 학자들의 부정적인 말만 듣고 그대로 방치한 채 오랜 세월을 나몰라라 해오고 있는 게 너무나 안타깝다"며 "군과 도, 문화당국은 잊혀진 문화유적을 되찾는다는 자세로 실체여부를 밝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원명 속리산관광협의회장(61·사진)은 "만일 땅굴이 찾아질 경우 엄청난 부가가치로 인해 보은지역의 발전은 물론 보은관광과 충북관광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지역내 여론을 감안, 지역 출신 정치인들과 지자체가 적극 나서 발굴조사가 시급히 이뤄질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간탐사팀의 두뇌역할을 해 온 보은군청 이호천담당(경제사업단 특허개발담당·사진)은 "그동안 자체 조사를 하면서 지역민들로부터 받아온 오해와 따가운 눈총, 비난 등은 감수할 수 있었지만 학계의 냉담한 반응과 사업추진비 마련의 어려움 등으로 확실한 개연성을 찾아놓고도 더 이상 일을 진전시키지 못한 채 4년여 동안을 가슴속에 묻어온 게 못내 아쉬웠다"며 "이젠 솔직히 땅굴의 실존 여부를 떠나 지역민들의 궁긍즘을 해소해 주는 차원에서라도 정식 발굴조사가 하루속히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심정을 털어놨다.

우원명 속리산관광협의회장(61)은 "만일 땅굴이 찾아질 경우 엄청난 부가가치로 인해 보은지역의 발전은 물론 보은관광과 충북관광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지역내 여론을 감안, 지역 출신 정치인들과 지자체가 적극 나서 발굴조사가 시급히 이뤄질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간탐사팀의 두뇌역할을 해 온 보은군청 이호천 담당(경제사업단 특허개발담당)은 "그동안 자체 조사를 하면서 지역민들로부터 받아온 오해와 따가운 눈총, 비난 등은 감수할 수 있었지만 학계의 냉담한 반응과 사업추진비 마련의 어려움 등으로 확실한 개연성을 찾아놓고도 더 이상 일을 진전시키지 못한 채 4년여 동안을 가슴속에 묻어온 게 못내 아쉬웠다"며 "이젠 솔직히 땅굴의 실존 여부를 떠나 지역민들의 궁긍즘을 해소해 주는 차원에서라도 정식 발굴조사가 하루속히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심정을 털어놨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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