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의 산과 들, 냇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야생동물이 남긴 각종 흔적들을 만나게 된다.

마치 사람이 다니는 길처럼 빤질빤질하게 나 있는 이동통로에서부터 배설물,발자국,먹이 흔적,머물던 자리(혹은 잠자리),영역 표시 등 그 종류도 많다.
이들 흔적은 대부분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것을 남긴 동물의 실체는 물론 그 동물의 삶과 생활방식, 습성이 담긴 메모리칩이나 다름없다. 예를 들어 어느 산중에서 동물의 배설물을 발견했다면 그것의 생김새와 색깔,냄새,구성물 등의 분석을 통해 그 동물이 어떤 동물이고 식성은 어떤지를 알 수 있으며 또 굳은 정도를 가지고 그 동물이 언제 지나갔는지도 알 수 있다.
또 같은 류의 배설물이라 하더라도 크기와 양, 무더기 수를 통해 그 동물이 어미인지 새끼인지 또 몇 마리가 집단을 이뤄 활동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느 특정 동물을 추적하거나 서식여부를 확인하고자 할 때도 흔적만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도 없다. 
그래서 생태를 연구하는 이들은 야생동물의 흔적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만일 생태조사를 할 때 각종 흔적은 많지만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울 경우엔 차선책으로 그 흔적들을 증거로 제시해 서식여부를 간접 확인하기도 한다.
‘달래강의 숨결’을 기획취재 중인 필자는 요즘 시쳇말로 ‘사냥개’가 다 돼 가고 있다.

달래강 물길 3백리 가는 곳마다 짐승똥이란 똥은 보이는 대로 주워들고 냄새를 맡아가며 수달과 삵,하늘다람쥐 등 몇몇 중요한 종을 집중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들의 흔적과 관련해 몇 해 전 겪은 일이다.

속리산 자락의 어느 산중에서 버섯 사진을 찍고 있는데 웬 청년 하나가 돈내기 하듯 정신없이 산비탈을 내려 오면서 “사람 살려” 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그렇쟎아도 방금 전 멧돼지의 생생한 흔적(온기있는 은신처)을 목격한 후 내심 긴장하고 있던 터에 혼비백산한 청년을 보니 직감적으로 멧돼지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에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 청년 얼굴이 노랗게 질린 채 “내 뒤에 멧돼지 안 따라 오냐”며 빨리 내튀라고 손짓까지 한다. 뒤쪽을 확인하면서 “안 따라온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한숨 돌리며 하는 말이 버섯을 따는 데 뭔가 이상해 고개를 들었더니 멧돼지가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어 버섯자루고 뭐고 다 팽개치고 줄행랑쳤단다.
지금도 산을 오르다 보면 종종 멧돼지 흔적을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 청년 얼굴이 떠올라 한편으론 헛웃음이 쳐지고 또 한편으론 모골이 송연해져  더욱 촉각을 세우게 된다.

요즘 들어 우리 주변에는 야생동물의 흔적이 부쩍 많이 눈에 띄고 있다. 멧돼지 같이 농작물에 피해를 끼치는 동물들의 흔적이야 농민들에겐 반가울 리 없겠지만, 그래도 한반도의 자연을 생각할 때 그 안의 생태계가 더욱 건강해지고 있다는 청신호이기에 우려보다는 반가움이 앞선다.
하지만 이렇듯 반가움을 주는 ‘자연의 흔적’이 있는가 하면 보면 볼수록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인간의 흔적’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어 묘한 대조를 보인다.

더욱이 행락철이 끝나가는 요즘 사람들이 많이 찾던 물가나 계곡 주변 마다엔 몰상식한 이들이 남긴 비양심의 흔적들이 곳곳에 널려 있어 갈 길이 먼 이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냄새와 파리 때문에 고추밭에 들어가려면 몸서리가 쳐져 오죽하면 ‘밭에 똥 싸지 말 것’이란 노골적인 팻말을 써붙이겠냐며 길게 한숨짓던 한 계곡 마을 주민의 일그러진 표정이 이 사회에 남기는 또 다른 흔적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하다.
자연을 바라보기가 괜히 민망해 지는 가을의 초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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