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에 미꾸라지와 개구리가 없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겨울이면 흔히 볼 수 있었던 시골 정경이 있다. 미꾸라지(혹은 미꾸리) 잡이다. 요즘 같은 농한기가 되면 으레 시골에선 삽과 양동이 들고 들로 나서는 게 일이었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해온 일이기에 별다른 약속이 없어도 한 사람이 나서면 다른 사람이 자동으로 따라 나서는 식이었다.
 

 목적지도 거의 정해져 있었다. 대부분이 그 동네 토박이들이었기에 언제 어딜 가면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은 훤히 알고 있었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우선 얼음을 깨고 물을 퍼냈다. 논도랑이나 수렁 같은 곳에 미꾸라지가 많았기에 물이라고 해봤자 삽으로 몇 번 퍼내면 그만이었다. 물이 잦아지면 삽이나 손으로 열심히 진흙을 들춰냈다. 그러면 동면하던 미꾸라지들이 놀라서 꼬물꼬물 삐져나오기 마련이었는데, 날씨가 추운 날엔 미꾸라지의 몸이 굳어져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움직임이 굼뜨거나 아예 죽은 양 꼼짝 않는 것들도 있었다.

 잡은 건 비단 미꾸라지만이 아니었다. 알을 실은 개구리들도 더러 잡곤 했다. 별미 혹은 약용 목적이었다. 지금이야 일부러 개구리만 골라 잡는 전문꾼이 생겨났지만 그 때만 해도 개구리는 잡아도 그만 안 잡아도 그만인 계륵 취급을 받았다. 아니, 오히려 안 잡는 사람이 더 많았다.

 미꾸라지 잡이가 끝나면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한 쪽에선 미꾸라지 손질하느라 시끌벅적, 또 한 쪽에선 가마솥에 양념 넣고 물 끓이느라 시끌벅적, 또 다른 쪽에선 수제비 준비하느라 시끌벅적, 말 그대로 잔치분위기였다. 비록 잡아온 미꾸라지 양은 얼마 되지 않을 지언정 큼직한 무와 대파 썰어넣고 거기에 수제비까지 빚어 넣으면 그야말로 명품 추어탕이 따로 없었고 그 것 한 그릇이면 동장군도 저멀리 달아났다.
 

 지금이야 거의 볼 수 없는 화석화된 시골 모습이지만 그 당시엔 웬만한 시골 마을에선 비일비재하게 이뤄졌던 정겨운 겨울나기요 훈훈한 광경이었다.
 지금도 커다란 가마솥을 보거나 시골집 굴뚝 연기를 보면 그 시절 그 사람들이 마냥 그리워지곤 하는데, 요 며칠 전 보은의 어느 산골 마을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뒤로는 마치 추억의 한 장면을 영영 도둑맞은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얘기인즉슨 이렇다. 달천 상류가 자신들의 고향이어서 매년 이맘때 쯤이면 형제자매들이 모여 미꾸라지 천렵을 하곤 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시골이 엄청나게 변했다는 것이다. 골짜기마다 새로운 집과 공장이 들어서고 논배미마저 택지로 바뀌거나 기계화 영농으로 대부분 마른논으로 변해 미꾸라지와 개구리가 살 만한 곳 자체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개체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더구나 개구리의 경우 논배미든 산골짜기든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씨가 말랐단다.
 그들은 서식환경 악화도 문제지만 배터리를 이용한 싹쓸이 남획이 더 큰 문제라고 열 올렸다. 미꾸라지와 개구리가 있을 만한 곳이면 으레 배터리를 들이대고 마구 지져대니 그들이 살아남을 리 만무란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첩첩산골도 이런 지경인데 찻길이 훤히 뚫린 다른 곳들은 어떻겠냐는 그들의 푸념속에서 생태계는 물론 우리의 추억마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널 대로 건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찾으면야 어디 미꾸라지 개구리 몇 마리쯤 찾아내지 못할 시골 마을이 있겠냐마는,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이뤄지는 싹쓸이 남획이 근절되지 않는 한 정말이지 미꾸라지 개구리 한 마리 살지 않는 그런 세상이 올 것은 뻔한 이치다.
배터리에 감전돼 쭉쭉 뻗는 미꾸라지와 개구리의 잔영이 아른 거린다. 이 추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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