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난 위기에서 멧돼지 길을 만나다

 

지난 2월 속리산에 붉은박쥐(천연기념물 452호, 일명 황금박쥐) 서식지가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자연동굴인데 수십 마리가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붉은박쥐가 어떤 동물인가. 암수 비율이 1:10~1:40밖에 안 되는 멸종위기Ⅰ급 동물로서 최근엔 자연동굴이 아닌 폐광에서만 발견되는 희귀종이다.

곧바로 소문을 추적했다. 그 결과 다행히 최초 발견자가 찾아져 날씨가 풀리는 4월초께 같이 답사하자는 약속을 얻어냈다.
그로부터 1개월여 뒤인 지난 9일 드디어 답삿길에 올랐다. 동행자는 최초 발견자 A씨와 '속리산 산사나이'로 통하는 박경수씨(한국자연공원협회 이사).

오전 10시에 금강골 입구서 만난 일행은 곧바로 목적지를 향했다. 그런데 얼마 안가 문제가 생겼다. 발견자 A씨가 바쁜 일 때문에 도중에 내려간단다. 난감했지만 그곳까지 올라와서 대략적인 동굴 위치와 가는 길을 알려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해서 일행은 만난지 30분만에 둘이 됐고 답삿길도 졸지에 탐삿길로 변했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A씨와 헤어진 뒤로 길이 사라진 것이다. 집채만한 바위를 지나면 수십길 낭떠러지가 나타나고, 가까스로 바위지대를 벗어나면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빽빽한 조릿대숲이 막아섰다. 수백번 속리산을 올랐다는 박씨도 이런 길은 처음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죽을 힘을 다해 오르고 또 오르길 2시간여. 거대한 암벽 봉우리를 돌자 A씨가 말한 얼음폭포가 나타났다. 4월 중순 가까운 시기에 얼음폭포를 만나니 그나마 신기한 생각에 잠시 앉아 땀방울을 훔칠 수 있었다. 게다가 더 반가웠던 것은 얼음폭포 뒤로 동굴처럼 생긴 어두운 공간이 보였다. 갑자기 힘이 솟았다.

그러나 웬걸, 다가가 보니 바닥은 온통 얼음이요 10미터 남짓한 굴 안쪽으로는 햇빛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허탕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굴내 환경으로 보아 황금박쥐 아니라 다른 박쥐도 살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샅샅이 살펴봤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맥 풀린 몸을 추스려 일대를 더 뒤졌지만 동굴도 붉은박쥐도 찾지 못했다.
아쉬움 속에 이젠 내려갈 길이 막막했다. 올라온 길을 되밟자니 엄두가 안났고 능선으로 올라가 등산로를 만나자니 앞이 캄캄했다. 박씨도 올라온 길이 징글징글했던지 일단 올라가자는 표정이었다. 결국 위쪽을 향해 천근만근 같은 발걸음은 다시 시작됐는데, 아뿔싸 그 길이 위험으로 이어질 줄이야.

가깝게 보이는 비로봉을 향해 온몸으로 기다시피 해 올라선 곳이 하필 수십길 낭떠러지 위였다. 오금이 얼어붙었다. 멧돼지 보금자리가 곳곳에 널려있고 그들이 떼지어 금방 지나간 흔적도 역력한, 그런 위험천만한 지대를 천신만고 끝에 벗어난 곳이 천애의 벼랑끝이라니. 기가 막혔다.
옴짝달싹 못하게 되자 위기감에 휩싸였다.

조난사고가 이래서 나는구나 하는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벼랑끝이라도 길은 있겠지. 한발짝 한발짝 똥끝 타는 암벽등반을 했다.

 

그러길 1시간여, 간신히 벼랑을 벗어나는 순간 자그마한 짐승 길이 나타났다. 멧돼지 길이었다. 반들반들한 것으로 보아 '살아있는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등산로로 이어질 것 같았다.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지옥에서 빠져나온 기분이 이 같으랴.

상고암에 들러 물한모금 마시니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보며 내려오는 등산로가 마치 고속도로 같았다. 자연앞에 인간은 한낱 미물임을 온몸으로 절감한 하루였다.

 

생명길을 터놔준 멧돼지들아 고맙다. 아울러 노구에도 불구하고  동행해 준 박경수씨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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