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동에 새겨놓은 자랑스러운(?) 이름들
괴산 선유동을 찾았다. '계곡의 잠수부' 물까마귀를 촬영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새끼 먹이주는 장면을 촬영하다 중간에 어떤 정신나간 행락객이 벌거숭이 새끼들을 몽땅 가져가는 바람에 찍지 못한 뒤 일년을 별러왔다.
봄볕도 봄볕이었지만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산벚나무의 연분홍과 또 이제 막 새이파리를 내밀기 시작한 온갖 나무의 연두색이 어우러져 더없는 호시절을 시위하고 있었다.
도시 보다 늦게 피어난 개나리며 진달래가 계곡으로 이어진 도로변과 산자락을 온통 딴세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난 겨울 눈 덮인 고갯길을 아찔한 가슴으로 넘나들땐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 모습인가.
때가 되니 앞 다퉈 제 존재를 알리는 만물들의 생명력에 새삼 감동이 일 즈음, 계곡 왼편으로 선유동문(仙遊洞門)이란 음각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안쪽으로 구곡이 있고 이곳이 관문이란 뜻이다.
약 500년전 퇴계 이황이 인근에 들렀다가 절경에 반해 장장 아홉달을 머물면서 구곡(九曲)을 설정하고 경승을 노래했던 곳이 선유동구곡이다. 18세기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어떤 사람은 선유동을 금강산 만폭동과 비교해 웅장한 점은 조금 모자라지만 기이하고 묘한 것은 오히려 낫다고 한다. 대개 금강산 다음으로 이만한 수석(水石)이 없을 것이니, 당연히 삼남 제일이 될 것이다"라고 평했던 곳이다.
선유동이란 이름 자체가 신선이 노닐던 곳(신라 최치원선생이 이름 지었다고 함)인 만큼 각 곡에 깃든 전설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신선들이 금단을 만들어 먹었다는 연단로(4곡)와 나무꾼이 나무 하러 가다가 바위 위에서 신선들이 바둑 두며 노니는 것을 구경하는 동안 도끼자루가 썩어 없어졌다는 난가대(6곡), 또 다른 나무꾼이 바둑 두는 신선들을 구경한 뒤 집에 돌아와 보니 5대손이 살고 있더라는 기국암(7곡), 퉁소를 불며 달을 희롱하던 신선이 머물렀다는 은선암(9곡) 등이 그것이다.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바둑 구경했다는 그 나무꾼의 몰입(?)을 떠올리며 열심히 물까마귀 둥지를 찾고 있는데 커다란 바위벽 중간에 심상찮은 이끼 덩어리가 매달려 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나 다를까. 물까마귀 한 마리가 들어앉아 알을 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낯선 방문객이 궁금했던지 머리를 한번 내밀었다가 들이밀고는 특유의 흰 눈꺼풀을 연방 깜박였다.
부화할 때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되돌아 나오는데 꺼림칙한 글씨들이 발목을 잡았다. 각 곡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면 옆에 버젓이 사람 이름들을 새겨 놓은 것이다. 경치 좋은 곳에 놀러와 술 한잔 걸치니 엉뚱한 생각들이 들었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서라도 천년세세 남기고픈 헛된 욕심이 발로했던지, 정으로 아주 깊숙이 파놓았다. 큰 글씨는 무려 한 아름이나 됐다. 공들인 글씨체로 보아 짧은 시간에 새긴 것이 아니다. 글자마다 끼어 있는 이끼가 세월까지 말해주고 있었다.
이름을 이곳저곳 헤아려보는 동안 자신의 직위까지 새긴 글자가 눈에 띄었다. 관찰사 조○○. 18세기의 문신이다. 먼길 힘들여 왔으니 떡하니 이름을 남겨두고 싶었나 보다. 요즘 같으면 꿈도 못 꿨을 텐데. 바위 높이와 글씨의 정교함으로 보아 기다란 사다리와 솜씨있는 석수(石手)가 동원됐을 것이니 행차 전에 아예 준비했던 건 아니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멋진 시 한 수였다면 그럭저럭 이해라도 했을 텐데. 당시 명을 받아 '높으신 분들' 이름을 새겨야 했던 석수들과 뒷일을 맡았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구곡을 빠져나오는 내내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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