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잡던 시절의 작은 소망을 생각하며

 

 

나 어릴때 작은 소망은/ 계곡에 숨어있는 개구리 잡아 노랗게 구워서/ 다리는 뚝 떼어 소금찍어 내가 먹고/ 검은 알은 엄마 드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노는 것이었다네/ 나 어릴때 작은 소망은/ 진달래 먹고 찔레 꺾어먹으며/ 냇가에 나가 버들피리 꺾어불며/ 가재와 미꾸라지 잡아 고무신에 담고/ 다슬기 잡으며 노는 것이었다네….
강순병시인의 '작은 소망'이란 시의 일부다.

 

그렇다.

1960~70년대만 해도 이 땅의 코흘리개 아이들은 무시로 들과 산 찾아 개구리 잡고 꽃과 열매 따 먹으며 놀았다. 그게 생활이요 삶이었다. 지금이야 먹을거리가 지천하고 놀거리도 많지만 그 때만 해도 자연이 곧 주전부리 창고요 놀이터였다.

우선 봄이 되면 너도나도 산을 찾았다. 칡뿌리 때문이었다. 굵직한 알칡을 토막내 주머니에 잔뜩 넣고는 턱이 얼얼하도록 씹고 다녔다.

개구리잡기도 성행했다. 장순병시인은 계곡에 사는 산개구리 잡아 구워먹는 게 작은 소망이었다고 했지만 그 시절 흔히 잡아먹던 개구리는 논과 개울가에 살던 참개구리였다. 지금은 참개구리든 산개구리든 함부로 잡아먹을 수 없지만 그 땐 물고기잡이처럼 예사로 여겼다.
진달래와 찔레순,삘기(띠의 어린순),아까시꽃,감꽃도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의 주전부리였다. 또한 꿀맛이 일품인 원추리와 꿀풀, 한번 손 댔다 하면 입주위가 새까맣도록 따먹던 버찌와 오디, 손가락에 가시 찔리는 것도 잊은 채 정신없이 따먹던 산딸기와 멍석딸기, 도토리 익을 무렵이면 누렇게 익어 알이 빠지던 개암, 늦서리 내려야 쭈글쭈글 익던 고욤도 잊지못할 계절의 별미였다.

모내기철이면 으레 써레질하는 논으로 달려가 올미 주워먹고 여름이면 저수지에 들어가 마름 따다 삶아먹는게 일이었다. 또한 동네앞 논둑에선 동무들과 쭈그리고 앉아 껌풀(떡쑥) 뜯어 한입 물고는 "껌이 되라" 주문하며 오물오물 씹던 빛바랜 추억도 있다.
뿐만 아니다. 소나무 속껍질인 송기를 먹는다고 어린 가지 꺾어 겉껍질 벗긴 다음 앞니에 대고 하모니카 불듯 좌우로 빨고 다녔으며 무의 꽃대인 장아리를 먹기 위해 무밭을 기웃거리고 아까시나무 새순을 잘라 입에 물고다니기도 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보리와 밀에 생긴 깜부기병을 무슨 귀한 먹을거리인 양 보는 대로 입에 털어넣고는 볼에 묻은 깜부기가루가 우스워 깔깔대기까지 했다. 또 가을이면 벼메뚜기 말고도 풀무치,방아깨비 잡아 구워먹고 벌집 따다가 애벌레를 볶아먹어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던 게 그 시절이다.

 

40~50년 전의 일을 알지 못하는 세대들은 웬 뜬금없는 얘기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농작물 외에는 웬만한 건 대부분 자연에서 구했던 그 시절엔 늘 먹고 겪었던 실제 상황이다. 세월이 바뀌고 먹을거리,놀거리가 풍부해진 오늘날 굳이 그 옛날의 먹을거리,놀거리로 되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 때 그 시절 어린이들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며 그곳에서 먹을거리,놀거리를 스스로 찾아냄으로써 자연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즐겼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돈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맛있는 음식과 놀이기구를 즐길 수 있는 요즘 어린이들. 하지만 개구리를 보면 외계동물 만난 것처럼 자지러지고 산에 가면 산딸기를 보고도, 들에 가면 오디를 보고도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런 어린이들이 허다하기에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부모들이여, 요즘의 모광고처럼 학부모만 되려 하지 말고 하루만이라도 진정한 부모가 되어 자녀들과 함께 자연을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자연처럼 있는 그대로를 깨우쳐주는 것도 없쟎은가. 지금 산야엔 오디,산딸기같은 자연의 메뉴가 그득하다.(2010년 6월 15일)

아까시나무꽃 피는 계절의 단상

 

 

1601년 프랑스에 미국으로부터 블랙 로커스트(Black Locust)란 나무가 들어왔다.

들여온 사람은 Jean Robin과 그의 아들. 그후 100여년이 지나 이 나무는 저명한 식물학자 린네에 의해 로비니아 수도아카시아(Robinia pseudoacacia)란 학명이 붙여졌다. 로빈이 들여온 아카시아 비슷한 나무란 뜻이다. 열대수종 아카시아를 닮았지만 아카시아는 아니다란 의미도 있다.

그후 187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박람회에 참가했던 일본인 쓰다가 수도아카시아 가로수를 보고 종자를 들여온 게 일본의 첫 도입 계기가 됐고 그것이 1878년 한 농업잡지에 니세아카시아란 일본이름과 明石屋樹란 한문이름으로 소개됐다. 일본어로 니세아카시아 즉 가짜아카시아라 부른 것은 종소명인 pseudoacacia를 그대로 번역한 때문이다. 문제는 아카시야노키(明石屋樹)란 일본식 한문명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아까시나무란 모호한(?) 한국명을 낳고 나아가 아카시아란 그릇된 이름으로 부르는 빌미가 됐다는 점이다.

어쨋거나 아까시나무는 일본보다 16년 늦은 1891년 일본인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오게 됐는데 그 목적이 조경용이었다. 다름 아닌 사까키란 사람이 중국 상하이에서 묘목을 가져다 인천공원에 심은 것이다. 그뒤 1898년 일본출정철도감부가 인천 월미도에 조림한 것을 비롯해 1940년까지 무려 1억그루 가까이 심어졌다.

해방후에도 아까시나무는 계속 심어져 한때 인공조림수의 10%에 이를 만큼 사방·조림공사가 꾸준히 이뤄져 오다가 산림녹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공식재가 중단됐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미국,중국에 이어 세계 3번째의 아까시나무 대국이 됐다.

그러나 아까시나무에 대한 국내 인식은 정반대다. 도입된지 100년 넘는 유일한 나무이자 우리나라 조림역사의 산증인인 대표수종이 되레 쓸모없는 나무로 푸대접 받는 신세다. 기껏해야 양봉가들의 밀원수 내지 땔나무 정도로만 인식될 뿐 가구용 고급목재나 건축용 목재, 동물사료용으로 널리 이용하면서 줄곧 식재면적을 넓히고 있는 다른 나라들과는 전혀 딴판이다. 원산지인 미국조차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우리 다음으로 넓은 식재면적을 갖고 있는 헝가리도 목재수요량의 80%를 아까시나무로 대체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우리나라서 아까시나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데는 2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일제 강점기때 들여왔다는 부정적 시각이고 또 하나는 조상묘를 해치는 나쁜 나무란 인식이다. 일본인이 들여온 나무가 조상묘를 파고드는 것도 미워죽겠는데 뽑아도 뽑아도 계속 돋아나니 좋아할 리 만무란 얘기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일제때 그들이 자체분석한 보고서를 보면 헝가리의 성공사례를 들어 아까시나무의 긍적적인 면이 부각돼 있다. 재질의 내구성이 좋아 농기구재로 그만이며 토양개량 효과가 있어 산림황폐화를 막는데도 효과적이라고 소개된 것이다. 수탈의 상징인 철도 침목을 만들고 우리 산야를 망치기 위해 들여왔다고 믿는 우리들로서는 한번쯤 곱새겨볼 만한 대목이다.

또 한가지 아쉬움은 민둥아까시나무에 대한 푸대접이다. 우리나라 산림청은 1960년대 세계 최초로 가시없는 민둥아까시나무를 개발하고도 가치를 이해 못해 활용은커녕 방치하고 있었는데 미국서는 이를 다량 번식해 귀중한 사료자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기막힌 일이다. 천안제일고 교정에 쓸쓸히 서있는 민둥아까시나무 원종들을 떠올릴 때마다 아까시나무 대국이면서 아직도 생태교란종 논란만 거듭하고 있는 우리 현실이 부끄러워 손톱밑이 가시 찔린 것처럼 아려온다. 아~까시여!

쇠뜨기 열풍의 부끄러운 경험을 벌써 잊었는가

 

매크로비오틱(Macrobiotic)이 유행하고 있다. 건강을 위한 장수식 식생활법 혹은 식이요법을 말하는데 신토불이와 음양 조화, 일물전체식(一物全體食)을 요체로 한다. 즉 그 지역서 난 자연물을 음양에 맞춰 통째로 먹을 것을 권한다.


1920년대 일본서 주창돼 서양으로 건너가 헐리우드 배우들과 카터, 클린턴 등 유명인들이 실천하면서 유행했다가 2000년대 들어 다시 일본서 열풍이 불자 국내서도 덩달아 붐이 일고 있는 음식문화 운동이다. 어원상으론 생명을 거시적으로 보고 자연에 적응하면서 평안하게 사는 생활법이란 거창한 의미를 담고 있지만, 알고 보면 우린 이미 오래 전에 터득한 생활법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할아버지적 생활을 돌이키면 된다. 텃밭에서 자란 푸성귀를 뿌리째 뜯어다 이것저것 섞어 차린 할머니 밥상을 툇마루에 앉아 오붓하게 먹는 생활이 곧 그것이다.


그런 것을 국제적 열풍이다 하니까 이제서야 너도나도 따라 하려 하고 동호인 모임까지 생겨나고 있다. 몸에 좋다면 물불 가리지 않는 우리네 습성이기에 그리 이상할 것도 없고 또 오래 살기 위해 건강한 식생활을 영위한다는 데 뭐라 말할 생각도 없지만, 그 여파가 엉뚱하게도 다른 부작용을 낳고 있으니 문제다.
다름 아닌 최근 불고 있는 민간약초 열풍에다 매크로비오틱의 일물전체식 열풍까지 합세해 이상한 풍조를 낳고 나아가 과량섭취에 따른 피해까지 속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민들레,질경이,돌미나리가 몸에 좋다 하니까 잎과 뿌리, 심지어 꽃과 씨까지 몽땅 채취해다 임의대로 달여 먹는 새로운 풍속도가 생겨났다. 소루쟁이,까마중,인진쑥,조릿대,느릅나무 등도 마찬가지다.
약초와 산나물 뜯던 수준은 옛말이요 아예 싹쓸이판이다. 일물전체식이 유행하기 전엔 그래도 뿌리 정도는 놔두는 게 보통이었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다.


자연 생태적으로도 문제이고 본초학자들이 봐도 까무러칠 일이다.

제 아무리 약초라 하더라도 종류에 따라 이용 부위가 다르다. 게다가 독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것도 있고 채취 시기도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이해가 안 되면 가까운 한의원에 가 인진쑥을 뿌리부터 꽃대까지 모두 채취해다 진하게 달여먹으면 어떻냐고 물어보라. 아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인진쑥조차 그런데 소루쟁이처럼 덜 알려진 것들은 어떻겠는가. 소루쟁이는 가축도 먹지 않을 만큼 독성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인터넷글은 "난치병의 명약"이라며 많이 먹어도 무방하다고 부채질하고 있다.


우리는 20여년 전의 부끄러운 경험을 갖고 있다.

일본서 발표된 쇠뜨기의 강장효능이 잘못 전해져 명약으로 소문나는 바람에 너도나도 부대 들고 쇠뜨기 뜯으러 다닌 게 우리들이다. 결과가 어떠했는가. 쇠뜨기 달여먹은 사람치고 물똥 한 번 안 싼 사람 없을 정도로 혹독한 부작용을 겪고서야 "아, 그게 아니었구나" 했다.


40~50대 이상 사람들은 컴프리를 잘 알고 있다. 고혈압,당뇨는 물론 암까지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소문났던 풀이다. 얼마나 선풍적이었나 하면 컴프리를 모르면 문화인이 아니요 다방서 컴프리녹즙 한 잔 안 마셔본 사람은 촌놈 취급 받았다. 그러나 그 뒤 어떻게 됐는가. 컴프리 독성물질이 세포내 유전체구조에 이상을 일으키고 간암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보고되면서 하루 아침에 저주받은 풀이 됐다. 그게 이른바 '컴프리 현상'이다.
뿐만 아니다. 뱀,지렁이,굼벵이,곰쓸개에 이어 호깨나무,산청목,비수리 등 온갖 열풍을 다 겪고도 진시황이 불로초 찾듯 또 다른 영약 열풍에 목말라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게 바로 이 시대의 자화상이다.

위장망 안에서 '평화로운 자연'을 보다

 

 

멧돼지에게 또 한번 된통 놀랐다.

지난 5월 8일 '계곡의 잠수부' 물까마귀의 육추(새끼 기르기) 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보은의 어느 계곡에 들어가 잠복하고 있을 때였다. 새둥지 근처에 카메라를 설치한 뒤 위장망을 푹 뒤집어쓴 채 숨죽이고 있는데 뒤쪽 절벽위에서 갑자기 돌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심상치 않아 뒤돌아보고 싶었으나 그때 마침 물까마귀 어미 1마리가 먹이를 물고 나타나기에 계속 셔터에만 신경썼다. 그러길 5분여. 뒤에서 소리가 난 일은 잊은 채 서너 컷을 더 찍고 나서 사진상태를 확인하고 있는데 이번엔 등뒤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2m 앞으로 송아지만한 멧돼지 1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숨이 멎었다. 야생 멧돼지와 직접 맞닥뜨린 급박한 상황이니 머리카락이 있는 대로 쭈뼛 섰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에 비친 멧돼지표정이 의외로 태연했다. 나를 보지 못한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다행이다 싶은 순간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해댄 것이다. "흐~흠!" 갑자기 사람소리가 나자 멧돼지 행동이 걸작이었다. 마치 자갈밭에서 산악오토바이가 전속력으로 스타트하듯 꽥! 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야생 멧돼지가 빠르다고는 하나 그처럼 비호같은 줄은 미처 몰랐다.

위장망이라고 해봤자 가는어망에 먼지털이같은 술을 듬성듬성 달았을 뿐인데 그 효과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2개의 바위 틈새에 위장망을 치고는 죽은 듯 들어앉아 있는 나를 눈치채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해서 느긋하게 지나던 중인데 돌연 이상한 물체안에서 뜬금없이 인기척이 들리니 멧돼지인들 기겁할 수밖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건 나였는데 되레 헛기침 한번에 똥줄 빠지게 달아나는 멧돼지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평화로운 외출을 방해한 게 미안하기도 했으나 커다란 몸집이 까무러치듯 달아나는 품새에 도저히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날 마주친 것은 멧돼지 뿐만이 아니었다. 다람쥐 1마리는 위장망안으로 기어들어 내 장화 위에 잠시 올라섰다가는 느낌이 이상했던지 이내 달아났고 족제비 1마리는 위장망을 걸쳐놓은 한쪽 바위밑을 지나다가 한참을 서서 혀로 몸치장하고는 태연스럽게 사라졌다. 살아있는 야생 족제비를 바로 눈앞에 두고 쳐다보기는 난생 처음이어서 그저 신기한 마음에 꼼짝 않느라 사진 찍는 걸 그만 깜빡 잊었다. 그밖에도 앙증맞은 굴뚝새와 노랑할미새 등 많은 새들이 다가왔다가는 사라졌다.


위장망안에서 바라본 자연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그것이 비록 겉으로 보이는 평화일망정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동물들이 아직 상당수 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이 됐다.
위장망안에서의 시간은 또 많은 것을 생각케 했다. 위장망을 쓰지 않고서라도 인간이 아무때나 그들 자연과 함께 허울없이 지낼 수는 없을까. 공상 같지만 과연 그것이 불가능한 일일까.


또 이번 촬영을 통해 물까마귀의 특별한 자식사랑을 확인하게 됐다. 물바깥에서 먹잇감을 잡는 것도 어려울 텐데 매번 물속에 들어가 헤엄치면서 먹이를 잡아다 새끼들에게 먹이니 그보다 더한 부모의 정이 어디 있는가. 쉬지 않고 먹이를 물어다줘도 곧장 배고프다고 보채는 새끼들이 그저 안쓰러운 양 더욱더 열심히 잠수질에 나섰던 물까마귀 어미들. 해가 어둑어둑해서야 고된 날갯죽지를 추스르며 서로를 위로하던 그들 부부를 바라보면서 문득 내 어깨에 짊어진 불효의 짐이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어버이날이었던 그날, 물까마귀에게서 부모의 숭고한 내리사랑을 다시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잊지못할 하루였다.

올해가 '입춘 없는 무춘년(無春年)'이라더니…

 

범띠 해인 올핸 입춘이 없는 무춘년(無春年)이라더니 그 말이 기막히게 들어맞았다. 봄은 왔었는데 겨울 품을 벗어나지 못한, 봄 아닌 봄이었기 때문이다.
화창한 날씨를 보이다가도 걸핏하면 추위가 찾아와 103년만의 4월 한파란 새기록을 세우더니만 급기야 며칠전엔 속리산에 눈까지 내렸다. 4월 하순에 눈이라니, 이변도 보통 이변이 아니다. 속리산 자락에 핀 산벚꽃을 개칠하듯 하얗게 내린 눈을 바라본 사람들은 뜬금없는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이 어느 땐가. 내일(5일)이면 입하다. 여름문턱에 들어서는 날이니 절기상으론 엄연히 초여름이다. 더구나 보름뒤엔 더위가 시작돼 여름기분이 든다는 소만이다. 그때면 식물들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니 본격적인 여름이다.
그런데 작금의 날씨는 어떤가. 5월 들어 예년기온을 되찾았다는 날씨가 마치 어린애가 온·냉탕을 오가며 뛰놀듯 기고만장이다. 낮이면 햇볕이 쨍하다가도 저녁과 아침이면 수은주가 마냥 내려간다.


농민들은 올해들어 줄곧 죽을상이다. 유례없던 겨울추위 끝에 봄을 맞았으나 우수에서 곡우까지 봄절기 다가도록 봄 같지 않은 봄날씨가 천방지축 이어져 큰피해를 입는 바람에 절망을 옆에 끼고 산다. 이미 얼어죽은 과수목과 담배묘,고추묘,감자싹 등은 이제 신물이 나 쳐다보기도 싫단다.
우리주변의 초목·곤충들은 또 어떤가. 만개해야 할 꽃들은 피는 도중 얼어붙어 시커멓게 변하기 일쑤고 나뭇가지에선 새이파리들이 흡사 사람머리에 기계충 걸린 것처럼 듬성듬성 돋고 있다. 제초제를 뿌린들 그런 흉한 모습을 할까. 매년 이맘때면 지천으로 날아들던 벌과 나비는 정신없는 기온변화에 혼이 빠진듯 제몸 추스르기 바쁘다. 어쩌다 보이는 벌과 나비는 힘겨운 날갯짓으로 측은지심을 부른다.
봄이 실종된 게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겨울에서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날씨로 치달은 게 어디 한두 해 있었던 일인가. 다만 올해의 경우엔 겨울날씨에서 곧바로 여름날씨로 건너뛰질 않고 이상저온 현상이 장기간 그리고 더욱 잦게 이어지면서 생태리듬의 도미노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점이 다르다. 입하가 코앞인데 벚꽃과 목련꽃이 벌어지고 개나리가 이제서야 피는 지역이 부지기수다. 절기가 이른 것도 있지만 날씨영향이 더 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춘년의 위력을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없다. 더군다나 무춘년엔 불길하다는 속설까지 있으니 세상사 돌아가는 꼬락서니와 함께 적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의 무춘년은 지난해(음력 2009년 소띠 해)에 입춘을 빌려준(?) 결과다. 지난해엔 음력으로 1년 사이에 입춘이 2개였다. 이른바 양두춘(兩頭春)의 해였다.
속설에서는 양두춘엔 길하고 무춘년엔 불길하다고 전한다. 속설을 꼭 믿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뜩이나 경험칙으로 보면 속설이 길사엔 잘 맞지 않고 흉사엔 비교적 잘 맞는 까닭에 앞으로 남은 2010년이 더욱 걱정된다.

지금까지 얼마나 시끄럽고 다사다난했는가. 불과 3분의 1년이 지났을 뿐인데 마음은 연말에 와있는 느낌이다. 하나가 잠잠해지면 또 다른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세상을 놀라게 한다. 사회적 긴장의 연속이다. 천안함 참사로 놀랐던 가슴 간신히 추스르고 나니 이번엔 또 구제역이 전국을 불안지대로 만들고 있다.
달력(음력)에도 입춘이 없고 기후상으로도 봄날씨가 실종된 유별난 해라서 그런지 세상사까지도 유별나게 돌아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 부디 계절에 맞는 날씨, 절기에 맞는 생태리듬이 하루빨리 회복되고 더이상 가슴 덜컹 내려앉는 일이 생기지 않는 남은 한해가 되길 기대한다. 마지막 봄날에…

선유동에 새겨놓은 자랑스러운(?) 이름들

 

괴산 선유동을 찾았다. '계곡의 잠수부' 물까마귀를 촬영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새끼 먹이주는 장면을 촬영하다 중간에 어떤 정신나간 행락객이 벌거숭이 새끼들을 몽땅 가져가는 바람에 찍지 못한 뒤 일년을 별러왔다.


봄볕도 봄볕이었지만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산벚나무의 연분홍과 또 이제 막 새이파리를 내밀기 시작한 온갖 나무의 연두색이 어우러져 더없는 호시절을 시위하고 있었다.

도시 보다 늦게 피어난 개나리며 진달래가 계곡으로 이어진 도로변과 산자락을 온통 딴세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난 겨울 눈 덮인 고갯길을 아찔한 가슴으로 넘나들땐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 모습인가.

때가 되니 앞 다퉈 제 존재를 알리는 만물들의 생명력에 새삼 감동이 일 즈음, 계곡 왼편으로 선유동문(仙遊洞門)이란 음각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안쪽으로 구곡이 있고 이곳이 관문이란 뜻이다.

약 500년전 퇴계 이황이 인근에 들렀다가 절경에 반해 장장 아홉달을 머물면서 구곡(九曲)을 설정하고 경승을 노래했던 곳이 선유동구곡이다. 18세기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어떤 사람은 선유동을 금강산 만폭동과 비교해 웅장한 점은 조금 모자라지만 기이하고 묘한 것은 오히려 낫다고 한다. 대개 금강산 다음으로 이만한 수석(水石)이 없을 것이니, 당연히 삼남 제일이 될 것이다"라고 평했던 곳이다.
선유동이란 이름 자체가 신선이 노닐던 곳(신라 최치원선생이 이름 지었다고 함)인 만큼 각 곡에 깃든 전설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신선들이 금단을 만들어 먹었다는 연단로(4곡)와 나무꾼이 나무 하러 가다가 바위 위에서 신선들이 바둑 두며 노니는 것을 구경하는 동안 도끼자루가 썩어 없어졌다는 난가대(6곡), 또 다른 나무꾼이 바둑 두는 신선들을 구경한 뒤 집에 돌아와 보니 5대손이 살고 있더라는 기국암(7곡), 퉁소를 불며 달을 희롱하던 신선이 머물렀다는 은선암(9곡) 등이 그것이다.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바둑 구경했다는 그 나무꾼의 몰입(?)을 떠올리며 열심히 물까마귀 둥지를 찾고 있는데 커다란 바위벽 중간에 심상찮은 이끼 덩어리가 매달려 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나 다를까. 물까마귀 한 마리가 들어앉아 알을 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낯선 방문객이 궁금했던지 머리를 한번 내밀었다가 들이밀고는 특유의 흰 눈꺼풀을 연방 깜박였다.


부화할 때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되돌아 나오는데 꺼림칙한 글씨들이 발목을 잡았다. 각 곡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면 옆에 버젓이 사람 이름들을 새겨 놓은 것이다. 경치 좋은 곳에 놀러와 술 한잔 걸치니 엉뚱한 생각들이 들었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서라도 천년세세 남기고픈 헛된 욕심이 발로했던지, 정으로 아주 깊숙이 파놓았다. 큰 글씨는 무려 한 아름이나 됐다. 공들인 글씨체로 보아 짧은 시간에 새긴 것이 아니다. 글자마다 끼어 있는 이끼가 세월까지 말해주고 있었다.


이름을 이곳저곳 헤아려보는 동안 자신의 직위까지 새긴 글자가 눈에 띄었다. 관찰사 조○○. 18세기의 문신이다. 먼길 힘들여 왔으니 떡하니 이름을 남겨두고 싶었나 보다. 요즘 같으면 꿈도 못 꿨을 텐데. 바위 높이와 글씨의 정교함으로 보아 기다란 사다리와 솜씨있는 석수(石手)가 동원됐을 것이니 행차 전에 아예 준비했던 건 아니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멋진 시 한 수였다면 그럭저럭 이해라도 했을 텐데. 당시 명을 받아 '높으신 분들' 이름을 새겨야 했던 석수들과 뒷일을 맡았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구곡을 빠져나오는 내내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갑자기 끊긴 '혼새' 울음소리가 궁금하다

 

 

며칠전 충북 보은에서 한 지인을 만났는데 보자마자 혀 내두르는 소릴 했다.

자신의 집 뒷산에서 요즘 괴상한 소리가 자꾸 들린다는 거였다. 가뜩이나 농삿일이 잘 안돼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은데 애써 눈좀 붙이려고 하면 뜬금없이 귀신소리가 들려와 오던 잠이 백리는 달아난다고 넋두리했다. 그것도 늦은밤과 꼭두새벽만 되면 들려오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고 볼멘소릴 했다.

 
정황을 들어보니 새소리 같기에 걱정말라 했더니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러느냐, 말 같지 않은 소리 말라"고 되받았다.

할 수없이 설명이 필요했다. 우리나라 여름새중 호랑지빠귀가 있는데, 늦은밤과 새벽녘에 사람이 휘파람 불듯 "히~잇 호~옷, 휘~잇 씨~이" 소릴 내며 구슬프게 울기 때문에 다들 번번이 놀란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그제서야 의혹이 풀렸는듯 기어드는 소리로 괜히 놀랬단다.

필자가 호랑지빠귀를 알게 된 것은 절 생활하던 1980년대초. 머리 식힐 겸 산을 내려갔다가 오밤중에 절을 오르는데 난데없이 귀신소리가 들려왔다. 멈춰서면 조용해지고 걸어가면 소릴 내니 미칠 지경이었다. 마치 작정하고 따라오는 것 같아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앞이나 보여야 무엇인가 확인이라도 하지 칠흑 같은 어둠속인지라 별 도리없이 '돈내기 걸음'으로 진땀을 흘려야 했다.


오기가 생겼다.

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괴상한 소리로 사람 혼을 빼앗았을까. 호기심에 그냥 있을 수 없었다. 귀신은 아닐 테고 짐승 아니면 새일 텐데, 그 정체가 궁금해 이튿날 눈 뜨는 대로 전날 밤 그 장소로 향했다. 어둠이 채 가시기 전이었지만 제 아무리 날고 뛰는 짐승이라도 밝아오는 새벽녘엔 기가 한풀 꺾인다는 것쯤은 알고 있던 터라 자신이 있었다.
불과 몇시간 전 똥줄빠지게 올라왔던 바로 그 계곡에 도착했을 때였다. 휘파람으로 전날 들었던 그 소리를 흉내내니 (속아넘어갔던지) 곧바로 응답이 왔다.

"히~잇 호~옷, 휘~잇 씨~이" 참으로 신기했다. 어릴 적 '잠자리 잡던 걸음'으로 숨죽여 다가갔다. 누군가라도 그 모습을 봤더라면 되레 기절초풍할 형국이었다. 인적없는 산중인 데다 입으로는 해괴한 휘파람 소릴 내지, 걸음과 자세는 뭔가 대단한 일을 벌일 것 같이 진지하지, 게다가 시간도 어슴푸레한 새벽녘이지, 누가 봐도 가관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싱거웠다. 예상 대로 주범이 새(鳥)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기왕 나선 김에 둥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결국 한 시간쯤 더 숨바꼭질 한 끝에 이끼 낀 바위밑에서 보금자리를 찾아내고는 새끼들에게 지렁이를 잡아다 먹이는 것까지 알아냈다.

호랑지빠귀는 혼새라고 불렸다. 구슬픈 소리로 혼을 빼앗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유령새 또는 지옥새로 부르는 이유도 같다. 우리나라엔 매년 4월초·중순쯤 날아오는데 올핸 이례적으로 3월 중순께 충북 보은과 청원 지역에서 발견됐다. 예년보다 10일가량 이른 시기다.

오자마자 특유의 소릴 내며 부산하게 둥지틀던 호랑지빠귀가 지난 14일 새벽녘엔 외마디 비명소리를 내더니 15일 새벽부터 어제까지는 아예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다. 갑자기 찾아든 4월 추위에 놀란 탓일까. 아니면 그 어떤 훼방꾼으로부터 습격을 받은 것일까. 갈팡질팡하는 날씨에 유례없이 이르게 고향 찾아와 괜한 생고생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안쓰럽다.


가슴에 호랑무늬를 하고 숲속을 파헤치며 둥지재료 찾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던 호랑지빠귀들. 짓다 만 둥지속에 '잃은 꿈' 덩그러니 남겨놓고 대체 어딜 갔단 말인가. 이 봄이 가져온 또 하나의 좌절을 바라보면서 도둑이 제발 절이는 심정으로 무사안녕을 빌 뿐이다.

조난 위기에서 멧돼지 길을 만나다

 

지난 2월 속리산에 붉은박쥐(천연기념물 452호, 일명 황금박쥐) 서식지가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자연동굴인데 수십 마리가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붉은박쥐가 어떤 동물인가. 암수 비율이 1:10~1:40밖에 안 되는 멸종위기Ⅰ급 동물로서 최근엔 자연동굴이 아닌 폐광에서만 발견되는 희귀종이다.

곧바로 소문을 추적했다. 그 결과 다행히 최초 발견자가 찾아져 날씨가 풀리는 4월초께 같이 답사하자는 약속을 얻어냈다.
그로부터 1개월여 뒤인 지난 9일 드디어 답삿길에 올랐다. 동행자는 최초 발견자 A씨와 '속리산 산사나이'로 통하는 박경수씨(한국자연공원협회 이사).

오전 10시에 금강골 입구서 만난 일행은 곧바로 목적지를 향했다. 그런데 얼마 안가 문제가 생겼다. 발견자 A씨가 바쁜 일 때문에 도중에 내려간단다. 난감했지만 그곳까지 올라와서 대략적인 동굴 위치와 가는 길을 알려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해서 일행은 만난지 30분만에 둘이 됐고 답삿길도 졸지에 탐삿길로 변했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A씨와 헤어진 뒤로 길이 사라진 것이다. 집채만한 바위를 지나면 수십길 낭떠러지가 나타나고, 가까스로 바위지대를 벗어나면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빽빽한 조릿대숲이 막아섰다. 수백번 속리산을 올랐다는 박씨도 이런 길은 처음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죽을 힘을 다해 오르고 또 오르길 2시간여. 거대한 암벽 봉우리를 돌자 A씨가 말한 얼음폭포가 나타났다. 4월 중순 가까운 시기에 얼음폭포를 만나니 그나마 신기한 생각에 잠시 앉아 땀방울을 훔칠 수 있었다. 게다가 더 반가웠던 것은 얼음폭포 뒤로 동굴처럼 생긴 어두운 공간이 보였다. 갑자기 힘이 솟았다.

그러나 웬걸, 다가가 보니 바닥은 온통 얼음이요 10미터 남짓한 굴 안쪽으로는 햇빛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허탕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굴내 환경으로 보아 황금박쥐 아니라 다른 박쥐도 살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샅샅이 살펴봤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맥 풀린 몸을 추스려 일대를 더 뒤졌지만 동굴도 붉은박쥐도 찾지 못했다.
아쉬움 속에 이젠 내려갈 길이 막막했다. 올라온 길을 되밟자니 엄두가 안났고 능선으로 올라가 등산로를 만나자니 앞이 캄캄했다. 박씨도 올라온 길이 징글징글했던지 일단 올라가자는 표정이었다. 결국 위쪽을 향해 천근만근 같은 발걸음은 다시 시작됐는데, 아뿔싸 그 길이 위험으로 이어질 줄이야.

가깝게 보이는 비로봉을 향해 온몸으로 기다시피 해 올라선 곳이 하필 수십길 낭떠러지 위였다. 오금이 얼어붙었다. 멧돼지 보금자리가 곳곳에 널려있고 그들이 떼지어 금방 지나간 흔적도 역력한, 그런 위험천만한 지대를 천신만고 끝에 벗어난 곳이 천애의 벼랑끝이라니. 기가 막혔다.
옴짝달싹 못하게 되자 위기감에 휩싸였다.

조난사고가 이래서 나는구나 하는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벼랑끝이라도 길은 있겠지. 한발짝 한발짝 똥끝 타는 암벽등반을 했다.

 

그러길 1시간여, 간신히 벼랑을 벗어나는 순간 자그마한 짐승 길이 나타났다. 멧돼지 길이었다. 반들반들한 것으로 보아 '살아있는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등산로로 이어질 것 같았다.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지옥에서 빠져나온 기분이 이 같으랴.

상고암에 들러 물한모금 마시니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보며 내려오는 등산로가 마치 고속도로 같았다. 자연앞에 인간은 한낱 미물임을 온몸으로 절감한 하루였다.

 

생명길을 터놔준 멧돼지들아 고맙다. 아울러 노구에도 불구하고  동행해 준 박경수씨께 감사드린다.

대마도는 본래 우리 땅이다

 

15년 전 느낀 대마도의 첫인상은 충격적이었다.

우리나라 남해안의 어느 섬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 정도였다. 제주도보다 더 가까운, 그래서 오랜 세월을 우리 땅으로 지내오다 졸지에 가깝고도 먼 나라 땅이 돼 버린 그 땅이기에 충격은 더 컸다.

게다가 10일 가까이 돌아보면서 피부로 느낀 것은 한마디로 놀라움 자체였다. 내 자신의 유전자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땅에서 풍기는 '냄새'는 가는 곳마다 한을 북받치게 했다.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인 그 한은 일종의 앙금이라고나 할까. 15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 한 구석에 큰 응어리로 남아 있다.

각설하고, 당시 느낀 대마도는 말 그대로 우리 땅의 모습이었다. 자연 생태계는 물론 사람까지도 똑 빼닮아 있었다. 아니 오랜만에 찾은 고향모습이라고나 할까. 낯이 무척 익고 반가운 모습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놀란 것은 공교롭게도 그곳 최북단에 쌓여 있던 우리나라 쓰레기였다. 동행한 일본인이 설명하지 않아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쓰레기들, 제품 회사명이 선명한 ○○라면 봉지와 음료수병 같은 잡다한 쓰레기들이 심장을 멈추게 했다.

얼마나 가까우면 저렇게도 많은 양이 떠내려왔을까. 처음엔 의아스러워 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그런데 웬일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고도 반갑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예전(우리 영토 시절) 같았으면 감히 생각지도 못했을, 그러나 현실은 '국제 쓰레기'가 돼 버린 채 떠내려온 그것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묘한 생각이 들었다.

고향 개도 타향서 만나면 반갑다고 했던가. 우리 쓰레기를 타국서 만나니 돌연 그런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놀란 건 꿩이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박물관에 보란 듯이 전시돼 있는 꿩 표본을 보고 "어째서 저 새가…?"라고 물으니 그들 왈(曰), 원산지가 한반도란다. 여기서 말하는 한반도는 다름 아닌 고려다.

학술상 꿩의 분포지는 중국과 한국, 흑해 연안 및 중앙아시아다.
대마도는 분포지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마도에도 꿩이 살고 있으며 그 뿌리가 한반도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꿩을 일컬어 '고라이(高麗) 기지'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삵 또한 한반도와 관련돼 있다.

대마도는 부산과 지척지간이다. 리수로 따지면 120리가 조금 넘는다. 청주서 공주 가는 거리보다 약간 멀다. 맑은 날엔 부산이 맨눈으로 보이며 국내 휴대폰이 빵빵 터진다. 그곳 원주민들은 이웃마을 가듯 부산으로 술 마시러 간다. 그게 관행이다.

그보다 더한 건 문화다. 15년 전 조사한 바로는 그들의 숱한 단어가 우리말과 같거나 어원이 같다. 등에 짐을 지는 지게를 지게로, 총각을 총각으로 부르며 하늘이란 우리 말을 그대로 알아 듣는다. 그들의 제2 외국어는 한국어다. "안녕하세요"란 말을 어린애들도 알아들으며 그들 조상 자체를 한반도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조선통신사 행렬은 지금도 연례행사로 재현되고 있으며 신사에 모신 신(神) 또한 한반도 유물이거나 한반도 역사와 관련된 것들이 꽤나 많다.

모처럼 만에 우리 땅에서 '할 말'이 나오고 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서해 참변에 묻혀 빛을 잃었기는 하지만, 최근 우리 정치인들 입에서 대마도 영유권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비록 일본정부의 독도 영유권 방침에 맞불놓는 차원에서 나온 얘기이긴 하지만 세종실록의'대마도본시아국지지(對馬島本是我國之地)'란 기록을 이제서야 천명하는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조상이 물려준 땅도 못 지켜온 우리들 아니었던가.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제15차 CITES 당사국 총회가 남긴 교훈

 

카스텔나우드왕노랑사슴벌레, 코스타리칸 타이거럼프, 브라운 스콜피온, 옐로밸리 토터스, 바아드타이거 살라만다….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나 열대지역의 사바나 초지쯤은 가야 볼 수 있을 법한 이들 동물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하면 언제 어느 곳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애완동물화된 야생동물들이다.
충청도 어느 산골에서 잡힌 왕사슴벌레가 불과 며칠만에 외국으로 팔려나가고 원산지를 모를 각종 타란툴라와 전갈,개구리,거북이,뱀류가 산 채로 국내에 들여와져 코흘리개 손에서 '장난감'으로 길러지는 기막힌 세상. 이 기막힌 세상을 가능케 한 것이 인터넷이요 인터넷을 통한 각종 동식물의 거래가 어엿한 산업, 어엿한 문화로 자리잡은 게 요즘 세태다.
인터넷 자체를, 또 그것을 통해 동식물을 거래하는 현세태를 탓하자는 게 아니다.

이러한 열풍을 타고 멸종위기에 처한 보호종까지 마구 거래되면서 인터넷이 지구촌 생태계를 위협하는 '은밀하고도 거대한 창구'가 되고 있음을 직시하자는 얘기다.

국제동물복지기금(IFAW)이 밝힌 자료를 보면 이 은밀하고도 거대한 창구가 얼마나 심각한 밀거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는 지 여실히 나타나 있다. 실례로 지난 2008년도 조사 자료에 따르면 3개월 동안 무려 7000여종, 액수로는 380만달러어치의 멸종위기종이 인터넷 경매 사이트와 채팅방을 통해 거래됐다. 거래 품목중에는 호랑이 뼈로 담근 와인과 북극곰 가죽, 표범 가죽, 코끼리 상아까지 들어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또 다른 단체의 조사에서는 지난해 에콰도르에서 새끼 사자와 꼬리감는원숭이도 산 채로 판다는 글귀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것이 발견됐다.
이같은 심각성이 알려지자 국제사회가 뒤늦게나마 철퇴를 가하기 시작했다.

지난 13~25일까지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의 국제무역에 관한 협약(CITES)' 제15차 당사국총회서 왕점박이도롱뇽의 상업적인 국제거래를 금지하는 안이 통과된 것이다.
쥬라기시대부터 살아온 것으로 알려진 우크라이나 지역의 왕점박이도롱뇽은 그동안 세계야생동물기금협회(WWF)가 보호해 온 세계적인 희귀종이지만 지난 수년동안 우크라이나에 본부를 둔 한 웹사이트를 통해 매년 200마리 정도가 몰래 팔려나갔다고 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최근의 생존개체수가 불과 1000마리밖에 되지 않는 풍전등화격의 희귀종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5마리당 1마리꼴로, 그것도 마리당 단돈 300달러에 산 채로 거래됐다고 한다. 잔인한 계산이지만 남아있는 현 개체수를 시세(?)대로 따져보면 겨우 30만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지구상에서 수억년을 살아온 생명체 종(種)의 말로가 참으로 비참하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이 동물을 구입한 사람들 대부분이 애완용으로 기르다 실증 나면 그냥 내다버린다고 하니 해도해도 너무 한 것 아닌가.
이번 CITES 총회의 결정은 인터넷을 통한 멸종위기종의 거래가 결국 지구촌 생태계를 파멸로 이끌 중대한 위협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번 총회의 주요 이슈였던 참다랑어(참치),상어,북극곰,산호와 같은 주요 해양생물에 대한 규제안이 관련국들의 이해관계에 부딪혀 부결됨으로써 급기야 CITES 무용론까지 대두됐던 것은 커다란 오점이다.

특히 참다랑어와 상어의 경우 최대 소비국가인 일본과 중국이 앞장서 규제안을 부결토록 이끈 점은 무엇보다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구로 스시와 샥스핀으로 대변되는 그들 국가의 '전통 입맛 산업'이 존재하는 한 지킬 것이냐 잡아먹을 것이냐의 '입다툼'은 매번 재연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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