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소리

 

개구쟁이 시절 여름이면 즐겨했던 장난이 있다. 매미잡기다. 잡아도 그냥 잡는 게 아니라 소꼬리 털로 옭아잡는 짓궂은 장난이었다.
우선 소꼬리에서 가장 긴 털을 뽑아 그것을 기다란 막대 끝에 묶어 올가미를 만든다. 올가미는 10원짜리 동전 3~4개 정도 들어갈 크기면 족하다. 그런 다음 매미를 찾아 올가미를 매미 머리맡에 살그머니 갖다대면 자동으로 뒤집어 쓴다. 매미가 자기 죽을 줄 모르고 올가미를 뒤집어 쓰는 이유는, 다람쥐가 낚싯줄 올가미를 스스로 뒤집어 쓰는 것처럼, 특유의 묘한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거미줄 같은 게 거치적거리면 그걸 떼어내려고 머리빗질하듯 앞발을 자꾸만 쓸어올리는 본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쨋거나 올가미를 뒤집어 쓴 매미는 줄에 매단 풍선처럼 막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속절없이 잘도 잡혔다. 그 때 매미가 할 수 있었던 건 단 두 가지 뿐이었다. 나에게 봉변이라도 주듯 냅다 오줌을 갈기는 것과 짧고 날카로운 소릴 내는 일이었다. 그나마 수컷인 경우에만 소릴 질렀고 암컷은 소리도 못 지르고 그저 날개만 푸덕였다.
대개의 사람들은 수컷 매미가 매번 같은 톤, 같은 소리만 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질 않다. 천적을 만나거나 경쟁 상대를 만나면 더 큰 톤으로 악 쓰듯 소릴 낸다. 실제로 북미에 사는 어느 종은 평소 105.9 데시벨의 소리를 내다가 천적인 새가 나타나면 즉시 108.9 데시벨의 소리를 낸다는 보고가 있다. 매미가 기를 쓰고 울어대는 이유는 새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서란 보고도 있다.
매미는 주변 소음이 많을수록 더 큰 소릴 낸다. 도심 매미가 시골 매미보다 더 시끄러운 건 그 때문이다. 소음속에서 암컷을 부르려니 더 큰 소리가 필요한 건 당연하다. 또 천적에게 잡혔을 때엔 올가미에 걸렸을 때처럼 보다 높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살려고 발버둥치며 발음근을 있는 힘껏 오므리기 때문이다. 발음근은 진동판에 붙은 근육이다.
매미 소리는 날씨와 기온에 따라서도 다르다. 궂은 날 보다 화창한 날, 선선한 날 보다 가마솥 더윗날 소리가 더 높고 크다.
또 한 가지. 매미가 평상시 내는 소리는 울음이 아니라 구애음이다. 암컷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뽐내는 소리다. 조류(새)로 치자면 Call이 아니라 번식기에 내는 Song에 해당된다. 울음은 천적 혹은 사람에게 잡혔을 때나 내는 소리다. 새에게 잡힌 매미의 절규와 올가미에 걸린 매미의 외마디가 우는 소리다. 그런데도 우린 무턱대고 울음으로 표현한다. 매번 울면서 구애하는 동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린 지난 2003년 9월 엄청난 '매미 소리'로 치를 떤 적 있다. 태풍 매미다. 피해, 경로, 위력에 있어서 1959년 9월의 태풍 사라와 여러모로 닮은 초강력 태풍이었다. 공교로운 건 발생 번호 또한 둘 다 14호였다는 점이다. 또 엄청난 피해를 불러온 죄로 두 이름 모두 태풍명단에서 영구제명됐다.
며칠전 괴산 달천변의 어느 식당에 들렀다 뜰앞 커다란 나무를 베는 광경을 목격했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 탓이랬다. 손님이 얼마나 짜증냈으면 그랬겠냐마는 좀 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옛 선인들은 일부러 기생개구리를 기르고 정원에 나무 심어 매미를 불러들였다는데….
태풍과 매미의 발생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받는다. 온난화가 진행될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단다. 짜증을 내고 나무를 벨 게 아니라 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를 줄여 나가는 데 관심 가지면 어떨까 싶다.
매미 소리는 본래 거친 음이 아니었다. 그렇게 만든 건 우리들이요 그걸 감수해야하는 것도 우리들이다. 매~앰,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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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낚시와 요즘 낚시

 

옛 사람들은 낚시를 어떻게 했을까. 우선 낚싯줄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궁금하다. 18세기 후반 조선 학계에 영향을 끼친 일본의 화한삼재도회에는 "참외덩굴을 햇볕에 말리면 철선처럼 질겨서 끊기 어려우므로 낚싯줄로 쓰는데 어가(漁家)에서 가장 귀히 여긴다"고 기록돼 있다. 화한삼재도회가 중국의 삼재도회를 본떠 지은 것이기에 당시 일본산이었건 중국산이었건 오늘날의 참외덩굴과 얼마만큼 달랐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낚싯줄로 썼다는 게 쉽게 이해되질 않는다. 아마도 참외덩굴의 섬유질 부분을 실처럼 꼬아 사용한 게 아닌가 싶다.
또 같은 책에는 중국 광동서 생산되는 천잠사(天蠶絲)를 낚싯줄로 썼다는 기록도 보인다. 천잠사는 산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실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쓴 난호어목지에는 삼이나 칡 껍질로 만든 실을 이용해 오늘날에는 사라진 오리낚시(鴨釣)를 했다고 소개돼 있다.
다음엔 찌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화한삼재도회에는 "갈대 혹은 기장 줄기를 1~2촌 정도 잘라 썼다"고 전하며 중국에서는 새깃털을 썼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후기 문신 남구만은 시문집 약천집에서 "낚시할 때 무릇 낚싯줄에 삼대(짚대공이란 설도 있음)를 매다는 이유는 그것이 뜨고 가라앉는 것을 보고 물고기가 먹이를 삼키거나 뱉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남구만은 또 "그것이 움직이기만 하고 잠기지 않은 것은 물고기가 미끼를 완전히 삼키지 않은 것이어서 이 때 당기면 너무 빠른 것이고 삼켰다 다시 토하는 것을 천천히 당기면 이미 늦은 것이다. 그러므로 잠길락 말락할 때 당기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낚싯바늘. 서유구는 전어지에서 "낚시는 쇠갈고리를 달아서 물고기를 잡는 도구로서, 쇠갈고리 즉 낚싯바늘(鉤:구)에는 거꾸로 된 가시(미늘 혹은 구거:鉤距)를 만들어 쓴다"고 설명하고, 난호어목지에서는 "무쇠 혹은 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든다"고 설명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낚싯바늘은 가는 철과 바늘을 갈고리처럼 구부린 다음 닭의 뒷 발톱(距)처럼 생긴 미늘을 만들어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미끼는 무엇을 썼을까. 서유구는 난호어목지에 먹이를 던져 물고기 모으는 방법(投餌聚魚法)을 소개하면서 "깻묵과 술지게미는 모두 냄새를 많이 풍기는 물고기 미끼이다. 깻묵과 술지게미를 두 손으로 두드려 덩어리를 만들고 황토진흙으로 얇게 싸서 햇볕에 말린 다음 배를 타고 물고기가 노는 곳에 던져 넣는다. 그러면 물고기들이 냄새를 맡고 모여든다. 그런 뒤에 그 곳에 낚싯대를 드리우면 만에 하나라도 실수하는 법이 없다."고 썼다.
서유구는 또 같은 책에서 오늘날의 여울낚시격인 유조법(流釣法)을 소개하면서 "지렁이나 물가 돌밑의 청충(靑蟲:수서곤충의 유충)을 미끼로 써서 얕은 여울에 낚시를 던져 넣고는 연 날리듯 줄을 풀거나 당기면 물고기가 잡힌다"고 설명했다.
낚시에 관한 옛기록을 살피다 보면 오늘날의 주낚처럼 예전에도 일타백피식 싹쓸이 낚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난호어목지에 소개된 만등조법(萬燈釣法)이 그것이다. 기다란 낚싯줄에 수백 개의 바늘을 매달고 미끼를 꽂아 바다나 포구같은 곳에 가로질러 놓았다가 이튿날 아침 거두는 방식이다. 걸려든 물고기 모습이 만등을 달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단다.
강태공이 봤다면 혀를 찰 일이지만 기록으로 남겨질 만큼 성행했던 것으로 보아 예전 사람들도 물고기를 많이 잡고 싶은 욕심은 요즘 사람 못지 않았나 보다.
모든 낚시도구가 현대화된 오늘날 국내 낚시계에는 잡는 것보다 풀어주는 게 미덕이라는 바람이 불고 있다. 모처럼만에 부는 멋진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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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의 한과 실학정신

조선 최대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 중 전어지에 '돗고기'가 소개돼 있다. "머리는 작고 배가 부르며 꼬리는 뾰족하고 끝이 둘로 갈라진다. 주둥이는 가늘고 뾰족하며 등은 검고 눈은 작다. 몸의 생김새가 돼지 새끼와 비슷해 돗고기로 불린다. 지렁이를 미끼로 써서 낚는다."
200년 전의 기록치고는 매우 상세하다. 놀랍다.
임원경제지를 지은 이는 실학자 서유구다. 19세기 초에 이미 농업개혁론을 부르짖은 선지자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1801~1818년)하던 비슷한 시기(1806~1824년), 비슷한 기간(약 18년) 동안 은둔생활하면서 쓴 책이 임원경제지다. 총 113권 52책에 글잣수만 250만자에 이른다.
그로부터 반세기 뒤인 1872년 국제학술지에 'Pungtungia herzi'란 신종 물고기가 발표됐다. 발표자(명명자)는 헤르첸슈타인이란 외국 학자로, 그는 조선의 풍중이란 곳에서 채집한 물고기 1종을 지역명과 자신 이름을 따 신종으로 기재했다. 헤르첸슈타인은 당시 이 물고기에 대해 형태적으로만 간략히 소개했다.
주목할 것은 헤르첸슈타인이 발표한 이 물고기가 한반도 물고기로는 처음으로 학술지에 공식 기재됐다는 점이다. 학술지에 처음으로 기재됐다함은 국내 물고기가 비로소 학계에 알려졌다는 얘기다.
두 사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돌고기다. 서유구가 돗고기로 소개한 돈어(豚魚)와 헤르첸슈타인이 신종 발표한 물고기는 종이 같은 돌고기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 서유구의 한이라 할까, 당시 미개국이었던 조선 사회의 학문적 한계라고 할까. 시기적으로 헤르첸슈타인보다 최소 40여년 앞선 시기에 돌고기에 관한 내용을 책으로 처음 기록했으면서 학계로부터 첫 기재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되새겨 보자는 말이다.
어떤 생물종을 발견해 신종 발표하기 위해선 국제명명규약에 따라 학명을 짓고 정확한 분류와 기재를 한 다음 출판하고 학계에 보고해야 한다. 린네(1707~1778년)가 이명법을 창안한 이래 생긴 국제관례다.
이러한 사실만 서유구가 알았더라도 당시 전어지에 소개한 물고기를 어엿한 신종 물고기로 발표했거나 최소한 조선의 어류목록으로 기록하는 또 다른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정은 그렇질 못했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를 쓰면서 인용한 서적이 약 900종에 이르고 참고한 서적만도 수천 종에 이르지만 서양의 선진학문인 생물분류학적 지식은 접하질 못했다.
돌고기의 한은 또 한 차례 이어졌다. 1935년 일본인 모리가 또 다시 감돌고기(Pseudopungtungia nigra Mori)를 신종 발표한 것이다. 채집지는 영동(황간)과 진안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의 암흑기가 지나면서 국내 어류학계에도 서광이 찾아들어 1975년 드디어 김익수박사가 국내 학자로선 처음으로 참종개를 신종 발표한 것을 비롯해 지난 30여년간 총 20종의 물고기가 국내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기재됐다. 그 중에는 돌고기의 1종인 가는돌고기(1980년 전상린박사 발표)도 포함돼 있다. 3종의 한국산 돌고기 중 1종이나마 국내 학자가 찾아낸 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헤르첸슈타인 이후 100여년간 맺혀온 한이 다소나마 풀린 셈이다.
돌고기의 한을 되짚어보면서 당대 석학 서유구가 가졌던 신념을 떠올려봤다.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 즉 일상의 경제생활에 필요한 실용의 학문을 집대성하겠다"는 확고한 신념 말이다. 그는 그런 의지로 임원경제지를 썼다. 전어지에 물고기 잡는 법과 어구를 자세히 설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게 헤르첸슈타인과 달랐던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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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종개 보호 노력이 추가로 진행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30일 미호종개의 주요 서식지인 부여·청양의 지천 일부 수역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 해당 절차를 밟고 있다. 이에 따라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지정 예고 30일 뒤면 '부여·청양 지천 미호종개 서식지'는 천연기념물로 등재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미호종개는 문화재보호법상의 천연기념물(454호)과 야생동식물보호법상의 멸종위기야생동식물(Ⅰ급)로 지정 보호돼 왔다. 따라서 이번 절차가 마무리되면 미호종개는 3중의 법적 보호를 받는 '귀한 몸'이 된다. 종(種)은 종대로, 서식지는 서식지대로 법적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보호장치 마련의 이면에는 미호종개의 뼈아픈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오죽이나 다급한 신세가 됐으면 2중으로도 모자라 3중의 보호장치를 마련하겠는가라는 점이다.

 

미호종개는 지구상에 한반도에만, 그것도 유독 금강 수계에만 사는 미꾸리과 어류다. 한국고유종이면서 금강특산종이요, 분포상으로는 지도 위에 점 몇 개로 표시될 만큼 극히 제한된 수역에만 사는 국제급 희귀어종이다. 그런 귀중한 유전자원이 오늘날엔 개체수마저 크게 줄어들어 희소종 중의 희소종이 돼 버렸다.

 

미호종개가 처음부터 보기 드문  물고기는 아니었다.

특히 미호종개란 이름을 낳은 미호천에서는 오히려 '흔한 물고기'였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여름철 장마만 지면 미호천변의 실개천과 논 물꼬에 지천으로 모여들던 물고기가 미호종개였다. 미호종개를 신종 발표한 손영목(전 서원대교수)·김익수박사(전북대 명예교수)에 의하면 1983년 채집 당시 한 차례에 평균 20여 마리가 잡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모래 채취와 수질오염 등으로 개체수가 급감해 지금은 절종직전에 와 있는 딱한 신세가 됐다.

 

서식지도 급감해 과거 20여 곳에서 불과 5~6곳으로 줄어들었다. 더군다나 미호종개의 본적지라 할 수 있는 타입 로컬리티(Type locality: 신종 발표 당시의 원기재 지역으로 지금의 충북 청원군 오창읍 여천리 부근에 해담됨)에서도 사실상 절종 상태에 처한 '옛 물고기'가 됐다.
이번에 문화재청이 미호종개 서식지를 천연기념물 지정 예고하면서 타입 로컬리티를 포함시키지 않고 부여·

 

 

청양의 지천을 보호구역으로 결정한 것은 바로 이같은 현실을 감안한 선택이었다. 문화재청은 지난 5월 금강 수계에 대한 미호종개 서식실태 조사를 실시한 바 있는데 그때 내린 결론은 "미호천에는 보호할 만한 서식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최근 집단 서식지가 발견된 백곡저수지 상류부도 자연형 하천이 아니어서 제외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지천은 자연형 하천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Ⅰ급인 흰수마자도 함께 서식하고 있어 보호구역 1순위로 꼽혔다고 한다.

 

타입 로컬리티가 위치해 있는 충북으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하나 그렇다고 이의를 제기할 입장이 못된다. 미호종개의 본향(本鄕)마저 지키지 못한 처지도 있고 게다가 금강 수계내 최다 서식지인 백곡저수지 상류부마저도 현 상태대로의 보호는 커녕 삽질을 가한다는 입장이니 입이 열 개라도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학계에 보고된 미호종개의 타입표본(Holotype 홀로타입: 신종 발표시 기준으로 삼은 표본)은 현재 전북대 자연과학대 생물학과가 수장중인 4854번의 표본이다.

이 홀로타입이 채집된 타입 로컬리티가 '미호종개의 옛 서식지'로 남을, 참으로 안타까운 시점에 와 있음을 먼저 부끄러워 해야 한다.

미호종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량한 물고기 중의 하나다.

대부분의 새들은 집짓기의 명수다.

파랑새처럼 남의 둥지를 빼앗아 새끼를 치는 종도 있고 뻐꾸기처럼 아예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그 둥지 주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새끼를 기르도록 하는 종도 있지만, 많은 새들은 집짓기의 타고난 선수들이다.
송곳 같이 뾰족한 부리로 나무와 흙을 쪼아 기다란 구멍을 뜷고 그 속에 둥지를 마련하는 딱따구리와 물총새류를 보면 목수들도 가히 놀랄 만큼 기막힌 기술력을 보인다. 그들의 둥지 안을 들여다 보면 드릴로 파낸 듯 대패로 밀어낸 듯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뾰족한 부리로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흔히 볼 수 있는 까치집도 그냥 지어진 게 아니다. 한 마디로 철옹성 같다. 무려 1천600여 개나 되는 나뭇가지를 이리 얽고 저리 얽어 매우 견고하게 짓는다. 바닥에는 진흙을 깐다. 공학의 개념을 배운 것도 아닌데 바람 부는 방향과 세기 등 주변 여건까지 고려해 둥지를 튼다. 그러니 비가 와도 잘 새지 않고 태풍이 불어도 까딱없다. 설령 나무가 뿌리째 넘어가 땅바닥에 내동갱이 쳐져도 겉만 약간 부서질 뿐 벽체와 바닥은 멀쩡하다.

 


꾀꼬리와 때까치, 밀화부리는 물론 붉은머리오목눈이(일명 뱁새)와 개개비처럼 덩치 작은 새들도 정교하게 집을 짓는다. 자기들만의 명당자리를 찾아 풀잎과 뿌리, 나뭇가지, 심지어 폐비닐 같은 각종 재료들을 물어다 적재적소에 꼼꼼히 이용한다. 사람의 손기술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다.

 

집짓는 기술만 뛰어난 게 아니다. 둥지의 위치에 따른 안전성도 고려한다. 천적으로부터 자신과 새끼를 보호하고 아울러 안정적인 먹이 공급을 위한 본능이자 진화의 결과이다. 앞에서 말한 '명당자리'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요즘 들어 딱새와 할미새, 박새류처럼 인가 근처 혹은 인가내 구조물에 둥지를 트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는 것도 속내는 안전성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천적에 비해 안전하고 인가 주변이 다른 곳에 비해 먹이 구하기가 쉽다고 믿는 것이다.

 


앞날의 일기를 내다보고 둥지 위치를 정하는 새들도 있다. 천연기념물 어류인 어름치가 그해 강수량을 예견해 산란탑 위치를 수심이 깊거나 얕은 곳으로 정하듯, 쇠물닭이나 깝작도요 같은 일부 물가새들도 나름대로의 일기전망에 따라 둥지 위치를 정한다. 예를 들어 번식기간 중 비가 많이 올 것 같으면 둥지를 평소보다 높은 곳에 짓고 그와 반대면 낮은 곳에 짓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새들의 이같은 지혜로움도 때론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올해 같은 경우다. 얼마나 날씨가 극성스러우면 새들의 본능으로도 예측하지 못하는 이변 아닌 이변이 일어나겠는가.
사정은 이렇다. 달래강(달천)에서의 번식 생태를 기록하기 위해 약 20일 전부터 관찰해 오던 쇠물닭 둥지와 깝작도요 둥지가 있었는데, 이번에 내린 장맛비로 하나는 둥지 전체가 떠내려가고 또 하나는 알이 몽땅 물에 잠겨 곯는 사태가 벌어진 것. 쇠물닭은 쇠물닭대로, 깝작도요는 깝작도요대로 이른바  안전 수위를 정해 둥지를 틀었건만 예기치 못한 악천후로 인해 한 해 새끼 농사를 모두 망치는 뼈아픈 시련을 겪어야 했다.

 

졸지에 피붙이를 잃고 허공을 헤매는 생명체가 어디 이들 새 뿐이겠냐마는, 그동안 온갖 정성 들여 알을 품던 쇠물닭과 깝작도요 어미들, 또 불빛을 비추면 알 속에서 꼼지락 거리며 어엿한 생명력을 느끼게 했던 어린 새끼들, 그 가엾은 존재들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 마음이 편하질 않다.

 

자연이 자연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이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예측불허의 시대'. 그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더 빨리 다가오고 있다.

얼마 전 난초과 식물인 천마의 사진을 찍기 위해 산에 오르다 실로 오랜만에 반가운 광경을 봤다.

풀이 무성한 어느 묘를 지나는데 느닷없이 까투리 한 마리가 발밑에서 튀어올랐다. 독사가 많은 지역이라 가뜩이나 조심스레 발길을 옮기는 중이어서 내심 놀랐으나 까투리 하는 꼴을 보니 그 녀석은 더 놀란 모양이었다.
갑자기 튀어 올랐다가는 이내 땅에 떨어져 다친 시늉을 했다. 한 쪽 날개와 다리가 부러진 양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며 몸을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마치 자기를 잡아보라고 유혹이라도 하듯 주위를 맴돌며 혼을 뺐다.

 

얼마 만에 보는 몸짓인가.

제 딴엔 내 시선을 끌어보려고 부던히도 애쓰고 있었지만, 그 속내를 익히 아는지라 눈길은 이미 발밑을 향해 있었다.

그의 새끼인 꺼병이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몇 초 안 지나 바짝 엎드린 채 머리를 처박고 있는 꺼병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미의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무작정 꼼짝 않고 있을 태세였다. 귀엽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두려움에 떠는 작은 움직임들이 애처로워 서둘러 자리를 뜨고나니 그제야 어미의 행동과 소리가 달라졌다. 적이 물러갔으니 안심해도 좋다는 공습해제 경보였다.

 

꿩 가족이 보인 일련의 행동들을 생물학에선 의태(擬態)라고 한다.

사람이 나타나자 어미가 다친 시늉을 하며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려고 한 것이라든가 어미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몸을 숨긴 뒤 죽은 척 했던 꺼병이들의 몸동작이 의태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동물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동물 혹은 식물체나 무생물체와 흡사한 색채, 모양, 자세 등을 가지는 게 의태다. 한 마디로 생존을 위한 흉내작전과 위장술이 곧 의태다.

 

새끼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방패막이로 삼았던 까투리의 모정, 그 모정의 다급한 신호를 받고 즉시 시체놀이하듯 부동자세를 취했던 꺼병이들의 모습, 그 어찌 생명의 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반갑고 흐뭇한 광경이 아니겠는가.

 

의태를 하는 새 중에는 깝작도요란 게 있다. 모래와 자갈이 깔린 하천변에 주로 살면서 꼬리와 몸통을 항시 깝작거리는 이 새도 번식기에 위급상황을 만나면 까투리처럼 즉시 다친 시늉을 해 가족의 안녕을 지킨다. 꿩은 덩치라도 크지만 깝작도요는 덩치도 작은 게 간덩이는 커 천적이 바싹 다가올 때까지 꼼짝 않고 있다가 마주치기 직전 또는 밟혀죽기 직전에서야 별안간 움직여 다친 시늉을 한다.
요즘 보기 드물어진 쏙독새도 의태를 하는데, 쏙독새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아주 어렸을 적이다. 마을 뒷산을 오르는데 한 오리나무 아래서 쏙독새 한 마리가 날더니 갑자기 총 맞은 행동을 보였다. 어린 마음에 잡으려고 다가갔더니 약 올리듯 자꾸만 달아났다. 다가가면 날아가고 다가가면 날아가고. 한참 뒤 제자리로 돌아와 보니 낙엽속 둥지안에 품고 있던 흰알 두 개가 있었다. 그 뒤로 새의 의태란 걸 알았다.

 

지난 주말엔 의태가 아닌, 안타까운 죽음을 목격했다.

한 야산길을 지나는데 장끼 한 마리가 '까투리 의태하듯' 풀숲에서 튀어올랐다. 아니 까투리도 아니고 웬 장끼가 저런 행동을 할까, 의아해 했지만 하는 짓이 영락없이 의태 같았다.

그런데 웬걸, 한 5분 가량을 이리 뛰고 저리 뛰더니만 이내 움직임이 없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다며 다가가 보니 상황이 그게 아니었다. 금세라도 죽을 것처럼 온몸이 굳어가고 있었다. 주변을 보니 최근에 씨앗을 뿌린 콩밭이 있었다. 씨앗 도둑을 막기 위해 밭주인이 놓은 극약을 먹은 것이다.

 

약 기운에 졸다가 졸지에 불청객에 놀라 튀어오른 게 마지막 날갯짓이 된 셈이다.

장끼는 그렇게 죽어갔다.

"찌익 찌익…." 아침부터 요란하다. 새끼가 부화한 지 10여일 지나면서 소리의 톤이 점점 높아진다.

우리집에 동거하는 야생 딱새 얘기다. 어미는 어미대로 먹이 나르느라 정신이 없다. 동 트는 새벽부터 해 지는 저녁까지 잠시도 쉬지 않는다. 먹이를 물어다 주는 중간 중간엔 또 새끼 배설물까지 물어다 버리는 지극정성까지 보인다. 연중 가장 바쁜 어미새들의 몸짓, 작지만 그 무엇보다도 커 보이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펼쳐지고 있다.

 

산자락에 지어진 조립식 주택. 거실과 주방이 따로 없는, 그런 주방 한 쪽의 가스레인지 송풍기 안이 딱새가 둥지 튼 공간이다. 송풍기 구조상 내부를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사실상 한 주방 한 거실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셈이다. 출입만 달리 할 뿐이다. 그들은 벽바깥 쪽 배기구가 유일한 출입구다.
송풍기 안과 밖이란 차이만 있을 뿐 한 지붕 아래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니 서로의 움직임이 소리로 전달된다. 야생과 인공의 사이엔 얇은 철판만 존재한다. 새들에 대한 호기심을 늘 품고 살던 어린시절 같았으면 벌써 무슨 꿍꿍이를 써서라도 그들이 몇 마리인지 얼마나 컸는지 직접 확인하고야 말았겠지만, 지금은 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있고 또 소리로써 그들 속사정까지 꿰뚫고 있다.

 

그들과의 동거가 이미 10년째 되는 데다 1년에 2번 가량 새끼 치니 한식구나 다름없다. 게다가 어릴적부터 나름대로 체득한 경험까지 있어 소리만 들어도 그들의 생활사는 '내 손 안에 있소이다'다. 이제 막 짝짓기 할 때의 소리와 알을 낳고 품을 때, 부화한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줄 때, 새끼가 다 커 둥지를 떠날 때의 소리가 약간씩 다르다. 위급 상황에선 또 다른 소리를 낸다.
조류학에선 이를 Song과 Call로 구분하는데, Song은 말 그대로 지저귐이요 Call은 상대방을 부르거나 다른 신호를 보내기 위한 소리다. 새끼가 먹이 달라고 보채는 소리와 천적을 알리는 위험신호도 Call에 속한다.

 

경험으로 판단하건데 지금의 딱새가족은 어미를 포함해 모두 6~7마리로 추정된다. 또 새끼들은 일주일 뒤면 이소(離巢)할 것으로 보인다. 둥지 떠나는 날이면 늘 그래왔듯이, 아침부터 둥지 안팎이 유난히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어미는 바깥세상을 향해 첫 날개 펴는 새끼들에게 어서 용기내라고 부지런히 Call하고, 새끼들은 두려움반 호기심반으로 계속 소리(CAll) 지르다가 어느 순간 날갯짓하면 이소 과정은 끝난다.

 

야생 딱새와 동거해 오면서 배운 게 있다. 하나는 새끼들의 학습과정이다.

예들 들어 새끼들이 처음엔 작은 인기척에도 놀라 그것이 어미 소리인 양 예민하게 반응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무뎌져 나중엔 큰 소리에도 꿈쩍 않는다는 점이다. 이 번만 해도 그렇다. 처음 부화해선 물 트는 소리, 가스불 켜는 소리, TV 소리도 어미 소리로 착각해 짹~짹~ 반응하더니만 며칠 지나선 같은 벽의 욕실문 여닫는 소리에도 무덤덤해졌다. 단 며칠 만에 어미 소리를 각인한다는 증거다.

 

또 하나는 아무리 작은 딱새라도 어느 정도 사리분별은 한다는 점이다. 낯선 사람과 차량은 경계하면서 나와 내 차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사나운 개도 목줄에 묶여 있으면 무서워하지 않는다. 마냥 새대가리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그들에게도 믿음이 있다는 점이다. 온갖 소리가 코앞에서 들리는 인공적인 공간을, 그것도 송풍기 팬이 언제 돌아갈 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공간을 계속해서 보금자리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믿음 아니겠는가. 이 점이 내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송풍기를 돌리지 못하는 이유이다.

농부들이여, 부디 용기 내시길…

 

"남들은 날씨가 풀렸다고 좋아하는데 우린 되레 죽을 지경입니다."
한겨울 날씨에서 봄날씨로, 불과 며칠 사이에 두 계절을 오가는 변덕스런 날씨 탓에 과수농가들의 속이 말이 아니다. 피해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하소연할 입장도 못 된다.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AI) 때문에 속으로만 가슴을 태우고 있다.

 사정은 이렇다. 수십 년 만의 강추위로 가뜩이나 과수목의 동해가 있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갑자기 설 연휴를 맞아 예년보다 푹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나무 곳곳이 갈라터지는 상렬(霜裂)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먼저 농가 얘기부터 들어보자. "진작에 가지치기 작업을 했어야 하는데 그동안 추위 때문에 엄두도 못 내다 설 연휴가 지나자마자 밭에 나가 일을 하려는데 나무마다 가지가 갈라터지니 속이 뒤집힐 일 아닙니까."
 괴산군에서 2만여㎡의 과수(사과, 복숭아)농사를 짓고 있는 김모씨(55)의 말이다. 그는 30년 가까이 과수농사를 짓고 있지만 올 같은 해는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연일 영하 10~20도를 밑도는 날씨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영상의 날씨로 바뀌니 과수나무인들 견뎌낼 재간이 있겠습니까."

 

 상렬 피해의 원인은 순전히 변덕스런 날씨 때문이라는 김씨. 그의 설명을 정리하면 이렇다. 상렬이란 겨울철 기온변화로 나무줄기의 바깥층 목질부가 세로 방향으로 갈라터지는 현상을 일컫는단다.
 상렬은 낮과 밤의 기온변화가 큰 2~3월경에 주로 굵은 가지의 남쪽 부위에서 일어나는데, 낮에는 태양광선에 가열됐다가 밤중 대기온도가 영하로 급격히 떨어지면 목질부의 세포내 수분이 부피가 늘어나면서 나무줄기를 갈라터지게 한다는 것이다. 현재 상렬 피해가 가장 심한 나무는 복숭아 나무란다.

 

 과수 농가들의 시름은 상렬 그 자체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에 따른 2차 피해를 더 우려하고 있다. 갈라진 틈새로 부후균 등 각종 병원균이 침투해 결국 나무를 죽게 만든다니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더군다나 과수농가 대부분이 연 2년째 날씨로 인한 피해를 입고 있다. 지난해 겨울에도 폭설과 강추위로 동해를 입었던 과수목에 설상가상으로 병충해 등 2차 피해가 발생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그들이다.
 지난해 역시 피해가 가장 심했던 수종은 복숭아 나무였다. 나무 자체가 얼어 죽거나 얼었던 부위에 나무좀이 침투해 결국 말라죽는 피해가 속출했다. 당시 취재차 찾아간 한 과수농가는 "죽을 둥 살 둥 일해봤자 남는 것은 빚 뿐이다"며 "날씨 변덕에 농사짓기가 겁난다"고 울먹였던 적이 있다.

 

 땅은 정직하다고 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젠 옛말이 됐다. 제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봤자 '날씨 한 방'에 허사가 되기 십상이니 농심인들 변하지 않을 리 만무다.
 수확을 눈 앞에 둔 딸기밭 비닐하우스가 하룻밤 새 내린 눈 폭탄으로 폐허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여름이면 폭우와 강풍으로 애써 지은 농작물이 졸지에 애물단지로 변하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농심은 천심이라고 했는데 그 천심을 낳는 하늘은 갈수록 무심해지고 있다. 농촌을 떠나지 못하는 농심은 있으되 농촌에 애착을 갖는 농심은 점점 사그라지고 있다.

 

 한 쪽에선 구제역과 AI 폭탄으로 농심이 무너지고 또 한 쪽에선 날씨 폭탄으로 가슴에 피멍 든 농심이 울고 있다. 제발 올해 만큼은 좋은 일만 있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써붙였을 어느 한 농가 대문의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란 글귀가 되레 '한의 천둥소리'로 다가와 가슴을 때린다.
 이 땅의 농부들이여, 그래도 마지막 용기를 잃지 마시길. 파이팅!.

달천의 왕우렁이알 동면, 예삿일 아니다

 

 

지난해 늦가을 괴산 청천의 지인으로부터 "달천에 이상한 알들이 많다"는 제보를 받았다. 알 생김새와 색깔 등을 물어보니 외래동물인 왕우렁이의 알이 분명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현장을 찾았을 땐 제보자가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알덩어리들이 물가 바위와 갈대 숲에 즐비했다. 날씨가 싸늘한 데도 계속 알을 낳았던 모양이다.
 알덩어리가 많다는 것은 근처에 왕우렁이 성체가 많이 산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왕우렁이는 보이지 않았다. 알을 낳은 뒤 동면하러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갔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추측이었다. 야생상태에서 성체가 동면하는 것을 직접 보질 못 했기에 무리한 판단이었다.

  해서 뒤 이어 떠오른 것이 아마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왕우렁이의 원산지가 (아)열대지역인 남아메리카 아마존강 유역인 데다 성체의 생존수온 하한선이 0℃에서 35일, -3℃에서 3일이란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후자쪽이 더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의문은 알들의 운명이었다. 과연 겨울을 앞둔 알들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알 낳은 어미의 행방도 궁금했지만, 늦가을에 낳아진 알들이 겨울을 견딜 수 있을지도 무척 궁금했던 것이다. 남부지역에서는 최근 동면하는 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지만 중부지역에서는 아직 생소한 사례라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서 겨울을 기다렸다.

 궁금증이 생긴 지 2개월 여가 지난 엊그제(29일) 드디어 사실을 확인할 기회가 왔다. 1년중 가장 춥다는 대

한절기가 가기 전에 문제의 알들이 어떻게 됐는지 보고싶어 현장을 찾았다.
 놀라웠다. 처음에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알들이 차디찬 눈 속에 파묻혀 있는 데도 여전히 선홍색의 영롱한 빛깔을 띤 채 살아 있었다는 점이다. (아)열대지역이 원산지인 외래동물의 알들이 어떻게 겨울 혹한에도 죽지않고 겨울을 날 수 있을까. 놀라운 환경 적응력과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우렁이알에 대한 궁금증은 그렇게 풀렸다. 하지만 놀라운 환경 적응력과 생명력에 대한 감탄은 곧바로 우려로 변했다. 왕우렁이의 확산이 불 보듯 뻔한 증거를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왕우렁이는 한 번에 평균 320개 가량의 알들을 산란한다. 평균 수명 2~6년을 사는 동안 여러 번 산란한다. 게다가 부화후 3개월 만에 성체가 될 만큼 성장력도 빠르다. 더 큰 문제는 이번에 확인된 것처럼 중부지역에서도 알 상태의 동면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지금으로썬 남부지역 위주로 월동란(卵)이 발견되고 있지만 머지 않아 전국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왕우렁이는 식성도 대단해 수면과 수면 아래에 있는 잡초는 물론 벼까지 섭식한다. 미나리, 토마토, (양)배추, 무, 호박, 콩잎 등도 마다 않고 먹어치우며 심지어 동족인 왕우렁이와 동물 사체까지 먹는다는 보고도 있다.
 

 그러니 피해도 만만치 않다. 국내에서는 아직 피해 사례가 그리 많진 않으나 그건 전초전에 불과하다. 2004년도 국제식량농업기구(FAO) 자료에 의하면 왕우렁이에 의한 연간 경제적 손실이 필리핀의 경우 벼 피해만 약 1억 달러에 이르며 미국은 왕우렁이 방제에 소요된 금액만도 10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일본은 지난 1994년 쿠슈지방 논의 16%가 벼 피해를 입었다.

 일본은 이미 유해동물로 지정했고 타이완은 양식을 전면 금지시켰다. 제2의 황소개구리와 같은 '생태 망나니'가 되기 전에 우리나라도 서둘러 대책 마련을 해야 할 때이다. 논제초제 대용으로 풀어놓은 왕우렁이가 야누스의 얼굴로 다가오고 있다.

청양고추의 처량한 신세를 잊지 말자

 

  미국의 농학자이며 식물병리학자인 노먼 볼로그란 사람이 있다. 2009년 타계한 그는 세계적인 식량증산에 기여한 공로로 197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데 이어 미국 대통령 자유의 메달과 미 의회 금메달까지 받았다. 지금까지 이 3가지 상을 모두 수상한 이는 5명뿐이다.
 

 볼로그는 1942년 미네소타 대학에서 식물병리학과 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멕시코에서 수확량이 많고 병해에 강한 밀 종자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그 결과 생산성이 4배나 많은 꿈의 밀을 개발해 멕시코, 파키스탄, 인도 등에 제공했다. 이 일로 멕시코는 단숨에 밀 수출국으로 변했으며 파키스탄과 인도는 밀 생산량이 2배로 증가해 식량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막힌 사실 하나가 있다. 녹색혁명의 결정적 역할을 한 꿈의 밀이 바로 우리나라 토종 밀의 개량종이란 사실이다. 앉은뱅이밀 혹은 난쟁이밀로 불리던 우리나라 달마종이 일본으로 건너가 농림 10호가 되고 이 것이 멕시코로 건너가 볼로그박사에 의해 소노라란 품종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기막힌 얘기 또 하나가 있다. 청양고추 얘기다. 청양고추는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 종자업체였던 중앙종묘

가 개발한 품종으로, 작고 매운 우리나라 토종 고추와 태국산 고추를 교배해 만든 것이다. 하지만 매운 고추의 대명사가 된 이 청양고추의 신세가 낙동강 오리알처럼 참으로 안타깝게 돼버렸다. 청양고추 종자를 보유하고 있던 중앙종묘가 1998년 멕시코계 세미니스에게 넘어가고 2005년엔 또 다시 미국계 몬산토에 인수됨으로써 종자 주권(主權)이 그들 소유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린 엉뚱한 타령만 하고 있다. 청양고추가 충남 청양이 원산지이니, 경북 청송과 양양이 고향(이들 지역명의 앞글자를 따서 청양고추가 됐다는 설)이니, 귀하고 비싸다는 뜻의 천냥고추에서 유래됐느니 말싸움만 하고 있다. 몬산토가 종자를 팔지 않으면 더 이상 재배할 수도, 매운 맛을 볼 수도 없게 됐는데 말이다.

 우리나라의 종자산업은 심각한 수준이다. IMF 당시 국내 4대 종자업체이던 흥농·중앙·서울·청원종묘가 모두 외국업체에게 인수당한 이래 무려 800여개 업체가 종자를 만들고 있지만 그들의 97%가 종업원 10인 이하의 영세업체들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국내 시장 점유율도 말이 아니다. 거대업체인 몬산토, 듀폰, 신젠타, 다키이 등이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약 26만점의 유전자원을 보유한 세계 6위라는 우리나라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 것이다.

 웬만한 종자는 외국에서 사오니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늘어만 가는 로열티가 말해준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최근 국내 재배면적이 늘고 있는 파프리카의 경우 종자 1g 가격이 12만원선이다. 금 1g 가격이 5만원선이니 금값의 2배가 넘는 셈이다. 파프리카 종자 1g이라고 해봤자 200알도 채 안 된다.

 

 이런 와중에 반가운 소식이 들리고 있다. 그동안 미비했던 종자산업법의 개정 작업이 국회에서 진행중이란 소식이다. 국민중심당 심대평대표 등 11명이 발의해 현재 소관위원회 심의중인 종자산업법 일부 개정법률안은 국내 종자산업의 육성과 지원을 위해 종합계획을 수립·시행하고 나아가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등 종자산업에 대한 행·재정적 지원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농림수산식품부가 종자산업을 농업분야의 신성장 동력산업으로 육성키로 한 가운데 한국형 시드밸리인 민간 육종연구단지의 조성방안이 제시되고 있는 것도 상당히 고무적이다.
비록 늦기는 하지만 국내 종자산업이 눈을 뜨고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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