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여의주를 얻는 한 해가 되길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으니 본 사람도 없다. 본 사람이 없기에 그 모습은 상상하기 나름이다. 해서 어떤 이는 세상에서 가장 그리기 쉬운 동물이 용이란다. 그럴 법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가장 뚜렷하게 각인돼 온 동물이 용이다. 실체가 없는데도 실체가 있는 그 어느 동물보다 더 정형화한 동물이 용이다.


용의 출발은 대체로 뱀이다. 동서양이 같다. '고대 외계인설'이 심심찮게 나도는, 그 결과 일부 추종자들은 용의 실체가 불을 뿜으며 나타나는 외계인(비행체)일 것이라고 믿는 서양에서조차 용의 근원은 뱀으로 통한다. 드래곤(Dragon) 자체가 큰 뱀을 뜻하는 그리스어 드라콘(Drakon)에서 유래했음이 그를 입증한다.
서양 용의 모습은 이렇다. 대부분이 몸집 큰 뱀 혹은 도마뱀 형상에 박쥐 같은 날개를 가졌으며 날카로운 발톱과 송곳니, 가시돋은 꼬리가 있고 입에선 불이나 연기를 내뿜는다. 이러한 서양 용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통해 전해온다. 이에 비해 동양 용은 보다 구체적이다. 마치 실물을 보면서 묘사한 듯한 글로써 전해진다. 중국 위나라 때 장읍이 지은 자전 '광아(壙雅)'의 익조(翼條)에는 "용은 비늘을 가진 동물의 우두머리로서 몸은 아홉 동물, 즉 낙타의 머리, 사슴의 뿔, 토끼의 눈, 소의 귀, 뱀의 목덜미, 조개 같은 배, 잉어의 비늘, 호랑이의 발, 매의 발톱 형상을 하고 있다"고 묘사돼 있다. 더욱 상세한 것은 비늘 수가 81개이며 소리는 구리 쟁반을 울리는 듯하다는 것이다. 또한 입 주위엔 긴 수염이 있고 턱 밑엔 여의주가 있으며 목 아래엔 거꾸로 박힌 비늘(역린:逆鱗)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설명엔 서양 용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다는 불이나 연기가 없다. 날개도 없다. 그렇다고 날지 못하는 건 아니다. 자유자재로 난다. 이 점이 서양 용과 다른 점이다. 성격도 서양 용은 잔인하고 포악한 반면 동양 용은 선하다. 목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 한 친화적이다.


굳이 아홉 동물을 닮고 비늘 수도 아홉이 아홉 번 겹친 81개란 것은 최고를 의미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뱀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용이 된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모든 뱀이 이무기가 되고 모든 이무기가 용이 되는 건 아니다. 덕을 쌓아야 한다. 그렇듯 용은 선망의 대상이자 상서로움의 상징이었다. 신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신이요 인간 세계에선 왕을 상징해 왔다.


오늘날의 용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성취, 성공, 완성, 좋은 일 등의 의미로 쓰인다. 덕담으로 흔히 "용꿈 꾸세요"라고 하듯이 용꿈은 좋은 일, 바라는 일의 성취를 뜻한다. 용은 또 훌륭한 사람, 힘 있는 사람을 상징하기도 한다. 개천에서 용 나고 미꾸라지가 용 된다는 속담이 그 예다. "그 사람 용 됐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용은 또한 선거판에도 자주 등장한다. 잠룡(潛龍)에 빗대어 물밑 경쟁을 벌이는 후보자의 뜻으로 곧잘 쓰인다. 반면 허세의 의미로도 쓰인다. "미꾸라짓국(비짓국) 먹고 용트림한다"는 속담이 그 것이다.


임진년 용띠 해가 밝았다. 일부에선 흑룡의 해니 뭐니 말들이 많지만 중요한 건 용이 상상의 동물인 만큼 각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점이다. 밝게 보면 밝고 어둡게 보면 어두운 것이다. 올핸 특히 여러 잠룡들이 꿈틀거릴, 총선과 대선이 있는 해란 점에서 국민선택의 향방이 중요한 해다. 용 뽑으려다 엉뚱한 이무기 뽑는 일은 없어야 겠다.
나라와 국민 모두가 용이 구름 타고 여의주를 얻는 웅비의 한 해가 됐으면 한다.

야생동물의 똥 이야기(2)

 

똥 이야기는 사실 대놓고 하기엔 좀 그런 부분이 있다.

 

똥 자체가 야생동물의 것이든 사람의 것이든 그리 썩 내키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냄새도 그렇거니와 이미지 또한 더러운 것의 대명사로서 뇌리 깊숙이 각인돼 있는 까닭에 "똥" 하면 벌써 얼굴부터 찡그리기 일쑤다.

 

그러나 어쩌랴. 야생동물 얘기를 하자니 똥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고 그렇다고 똥 대신 다른 말을 쓰자니 딱히 대체할 말도 없으니 그저 똥이라고 할 수밖에.


혹자는 "배설물이란 점잖은 말이 있는데…"라고 할 지 모른다. 하나 그건 몰라서 하는 얘기다.

 

배설물이란 생물체가 신진대사를 통해 몸밖으로 배설하는 물질, 즉 똥과 오줌, 땀 따위를 총칭한다.

 

그러니 어찌 똥 이야기를 하는데 오줌과 땀 등을 총칭하는 말을 쓰겠는가.


"그러면 변(便)도 있고 분(糞)도 있는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변과 분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야생동물에겐 잘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야생동물의 변? 야생동물의 분? 더 이상하지 않은가.

 

뜻 자체도 변은 똥과 오줌을 의미하기 때문에 앞서 말한 배설물에 가깝다.

 

분 역시 똥을 뜻하긴 하나 본래 의미(米+異 = 쌀의 다른 모양 즉 쌀이 변해서 된 것)로 볼 때 야생동물보단 사람에게 더 잘 어울리는 말이다.

 

축분이란 말이 있긴 하나 여기서의 축은 가축이다.

 

또 공룡의 똥화석을 굳이 분(糞)화석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맞는지는 독자 판단에 맡긴다.


어쨋거나 똥은 똥이고 똥처럼 정직한 것도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똥은 먹은 그대로의 표출이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어원 풀이가 있다. 한 전문의사가 펴낸 책에 "똥의 어원은 동(銅)이 아닐까"라는 기발한 내용이다.

 

그는 "옛날엔 동(銅)이 거울로 사용됐다. 구리 거울을 닦고 문질러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마찬가지로 똥은 우리 몸 속을 비춘다. 대장암이나 염증성 장질환 같은 것들을 똥으로 살필 수 있다"며 "몸 속을 비추는 거울 같은 똥을 동(銅)과 비슷한 발음인 똥으로 부르기 시작한 건 아닐까"라고 풀이했다.


똥은 먹은 대로 눈다. 야생동물 또한 그렇다.

 

풀을 먹으면 풀 먹은 똥을, 짐승을 잡아먹으면 짐승 잡아먹은 똥을 눈다.


심마니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 천종(天種)이니 지종(地種)이니 하는 말이 있다. 천종은 말 그대로 하늘에서 씨앗이 떨어져 난 산삼을 뜻하고 지종은 땅에서 나고 자란 산삼을 말한다.

 

이 천종과 지종이란 말 속엔 야생동물의 역할, 특히 야생동물의 똥이 자연에게 베푸는 심오한 기능이 함축돼 있다.

 

천종 산삼은 야생동물 중 하늘을 나는 새를 통해, 지종 산삼은 네발 가진 들짐승을 통해 씨앗의 발아과정을 거친다.

 

삼 씨앗은 껍질이 워낙 두껍고 단단해 그냥 땅에 떨어지면 여간해 발아하지 않지만, 이를 새와 들짐승이 먹으면 장내 소화과정을 거치는 동안 껍질이 위액에 어느 정도 녹아 잘 발아할 수 있는 상태가 돼 똥으로 배출된다.

 

똥은 정직하기에 삼딸(열매)을 먹은 새와 동물들은 반드시 어딘가엔 삼씨가 든 똥을 누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그 똥에서 삼씨가 발아해 천종과 지종이 되는 것이다.

 

이때 삼 씨앗이 똥에서 분리되면 어떻게 될까. 발아율에 변화가 온다. 이미 소화과정을 거치면서 껍질이 깎인 상태이기 때문에 씨앗이 똥 속에 들어있건 똥과 분리되건 발아율에 차이가 날까 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큰 차이를 보인다. 똥 속에 든 상태에서 발아할 때가 훨씬 더 높다. 그러기에 씨앗과 똥이 분리되기 쉬운 새 똥에서 난 천종이 더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똥이 그냥 똥이 아니란 사실은 여기서도 입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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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동물의 똥 이야기(1)

 

똥은 똥이다. 그러나 똥이 아니다.

 

적어도 야생동물의 똥 만큼은 흔히 말하는 똥이 아니다. 똥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선 야생동물의 똥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단순히 먹고 싼 잔재물이 아니다.

 

똥 주인이 어느 동물인지, 초식성인지 육식성인지 잡식성인지, 또 무엇을 주로 먹는지 등등을 포함해 그 동물의 거의 모든 삶을 밝힐 수 있는 단서다.

 

똥처럼 정직한 것도 없다. 먹은 그대로의 표출이다.

 

요즘엔 학문 발달로 똥부스러기만 가지고도 DNA분석을 통해 개체식별 등 보다 많은 정보를 얻고 있다.

 

똥은 특유의 냄새가 있다. 똥내다.

 

똥이 더럽다는 이미지가 비록 똥내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똥내에도 많은 정보가 들어있다.

 

네발 가진 들짐승 중에는 항문에 특정냄새를 풍기는 분비샘이 있어 똥을 눌 때 분비물도 함께 배출한다. 이 분비물은 주로 성숙한 개체의 짝짓기 철에 배출돼 배우자를 찾는 데 중요 역할을 한다.

 

짝짓기할 준비가 됐으니 알아달라는 구혼 메시지다. 오줌내가 이를 대신하기도 한다.

 

야생동물의 배설물, 즉 똥과 오줌은 영역표시에도 자주 이용된다. 이 때도 냄새가 작용한다.

 

한 가지 재미난 것은 이 배설물 냄새에 동종은 물론 종이 다른 동물도 강하게 반응한다는 점이다.

 

이런 예가 있다. 얼마 전 삵을 촬영하기 위해 삵이 자주 다니는 괴산의 어느 산길에 무인센서 카메라를 설치해 놨는데 엉뚱하게도 너구리가 찍혔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너구리의 행동이었다. 삵똥 근처를 지나치는가 싶더니만 이내 냄새를 맡고 되돌아와서는 자신의 몸뚱이를 삵똥에 마구 비벼댔다.

 

참으로 이상했다. 너구리와 삵은 딱히 앙숙관계도, 그렇다고 우호적인 사이도 아닌데 너구리가 왜 그런 행동을 보였을까.

 

추측하건대 너구리는 삵처럼 자신보다 강한 이미지를 가진 짐승 똥내를 스스로 몸에 묻힘으로써 보다 강하게 보이려는 일종의 의태(擬態) 습성이 있지 않나 싶다.

 

그도 그럴 것이 너구리가 단순히 자신의 냄새를 삵똥에 남기려면 그 위에 직접 똥이나 오줌을 누면 될 것을 굳이 남 똥에 몸을 비벼대겠는가.


야생동물의 똥내는 종에 따라 다르다. 먹이와 장내 박테리아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설치류를 잘 잡아먹는 족제비 똥에서는 노린내가 나고 물고기를 주로 먹는 수달 똥에서는 비린내가, 돼지처럼 무엇이나 잘 먹는 멧돼지 똥에서는 구린내가 풍긴다. 똥내 또한 정직하다.


똥이 그냥 똥이 아니란 건 다음 예에서 보다 확실해 진다.

 

멧토끼를 관찰하다 보면 평상시엔 딱딱한 똥을 누다가도 때론 부드럽고 가는 똥을 누는 것을 볼 수 있다. 습관적으로 두 가지 똥을 누는 것도 신기하지만 더 신기한 건 부드럽고 가늘게 눈 똥은 누자마자 다시 먹는다는 점이다.

 

토끼류 외에도 일부 설치류도 자신의 똥을 먹는 습성이 있는데 이를 식분성이라 한다.

 

이 기이한 습성의 원인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으나 일부 학자들은 장내 박테리아에 의해 만들어진 비타민류를 재섭취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똥이 이럴진대 어찌 단순히 '소화하고 남은 찌꺼기'라 하겠는가.

 

야생동물의 똥은 그 동물의 생활습성까지도 말해준다.

 

너구리, 산양처럼 별도의 똥자리를 마련해 놓고 매번 그 곳에만 볼일 보는 '화장실 타입'이 있는가 하면 멧돼지처럼 아무데나 누는 '노상방뇨형'이 있다.

 

또한 오소리처럼 굴 입구에다 버젓이 실례하는 동물도 있고 야생 고양이처럼 흙으로 은근슬쩍 덮어놓는 동물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대부분의 야생동물이 눈에 잘 띄고 냄새도 잘 퍼지며 모양새도 오래 남는 곳에 주로 똥을 눈다는 점이다.

 

마치 "내똥 여기 있소"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게 야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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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과 마지막눈

 

강원 산간지역에 때 아닌 눈폭탄이 쏟아졌다. 11월 마지막 날부터 3일까지 무려 나흘간 폭설이 이어졌다. 적설량이 많은 곳은 1미터 가까이 기록했고 적은 곳도 30센티미터를 넘었다. 웬만한 고개와 산봉우리들은 말 그대로 눈천지가 돼 버렸다.
절기상으로 소설이 지나 내일이 대설이라고는 하나 이제 막 초겨울 문턱을 넘어섰는데, 눈폭탄이 쏟아지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몇몇 나무들은 여전히 빛이 덜 바랜 나뭇잎을 붙들고 있고 굼뜬 벌과 나비 또한 한낮이면 더러 모습을 드러내는, 아직은 폭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계절 아닌가. 가뜩이나 올핸 기온마저 푹해 다람쥐, 오소리 등 많은 동물들이 겨울잠에 들지 않고 여기저기 방황하는 어정쩡한 시기다. 해서 언론들마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떤 매체는 늦가을이라고 표현하고 어떤 매체는 초겨울이라고 부르는 등 헷갈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느닷없이 눈폭탄이 떨어졌으니 놀랄 수밖에. 나무들은 나무들대로 물기 머금은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가지마다 축축 늘어뜨리고 있고 산속에서 활동하던 동물들은 졸지에 눈더미를 뒤집어쓴 채 오도가도 못하게 됐으니 그 시련이 오죽 하겠는가. 지역주민들 역시 뜬금없이 내린 눈에 얼마나 놀라고 피해가 컸겠는가.
이번 폭설이 더욱더 혀를 내두르게 하는 것은 그 지역에 내린 '첫눈'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서 인근 지역에 눈발이 날리긴 했어도 '눈다운 눈'은 이번이 처음이었단다. 그러니 제 아무리 폭설이 잦은 다설지역이라 하더라도 첫 번째 내린 눈이 수십센티미터를 넘어서 1미터 가까이 쌓였다는 것은 재앙과 다름없는 이변이다.
첫눈은 의미가 있다. 옛 사람들은 첫눈이 내린 시기와 양, 당시 기온을 가지고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매년 소설 절기를 즈음해 기온이 내려가고 첫눈도 내리기에 소설 절기가 되면 으레 날씨가 추워지고 눈도 적당히 내려주길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야만 보리 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날씨는 푹하고 눈은 산더미처럼 쌓였다.
첫눈은 낭만과 추억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첫눈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떠지고 옛일이 떠오른다. 어느 시인이 "첫눈이 오는 이유는 모두가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했듯이 첫눈이 오는 날짜에 맞춰 약속하고는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연인들도 많다. 요즘엔 첫눈 오는 날을 맞추는 이벤트도 성행하고 있다.
강원 산간지역에 폭설이 쏟아질 때 다른 지역엔 비가 내렸다. 겨울비 치고는 역시 깨나 많은 양이었다. 충청지역의 경우 괴산 등 일부에서는 겨울장마란 얘기가 나올 정도로 때 아닌 폭우가 쏟아졌다. 비 대신 눈으로 쏟아졌다면 수십센티미터는 족히 쌓였을 양이다. 불행중 다행이다. 하지만 땅덩어리는 좁은 나라에서 한 쪽은 폭설이, 또 한 쪽은 폭우가, 그것도 초겨울 초입에서 마구 쏟아지는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린 지난 2004년 3월 4~7일 내린 대폭설을 기억하고 있다. 모두가 봄기운에 들떠있을 때 뜬금없이 쏟아져 역대 기상 관측기록을 경신하면서 곳곳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 그 끔찍했던 눈폭탄. 그 폭설은 다름 아닌 그 해 '마지막눈'이었다.
첫눈도 마음 놓을 수 없고 마지막눈도 결코 안심할 수 없는 불안한 세상이 됐다는 얘기다. 날씨가 걸핏하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극에서 극을 왔다갔다 해대니 눈과 비인들 그 어찌 예측 가능하게끔 내리겠는가.
날씨 현상의 예측불허 시대. 이번 강원 산간지역의 '첫눈 폭설'로 인해 더욱더 분명해진 이 시대의 현실이자 우리 앞에 이미 다가와 있는 소름끼치는 자연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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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의 통곡

 

해질 무렵 인가 근처나 물가 갈대밭에서 흔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하도 괴이한 소리라서 정확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언뜻 들으면 "어어읔 어어읔!" 목놓아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웨에엑!" 가래뱉는 소리 같기도 한 아주 묘한 소리다. 인터넷 검색창을 뒤져봐도 딱히 '이 소리다' 라고 설명한 글이 없을 정도로 참으로 기괴하다.
어쨋거나 그 소리는 듣기 좋거나 편한 소리는 아니다.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소리 혹은 비명에 가깝다. 해서 그 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어떤 짐승이 올무나 덫에 걸려 지르는 외마디 소리로 착각하기도 한다.
가끔은 혼자서 산길 걷는 사람을 혼비백산케 하기도 하는 그 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고라니 소리다. 사람이 듣기에 절박하게 들릴 뿐이지 고라니들이 그저 평상시에 내는 신호음에 불과하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거나 새끼를 부를 때 그들은 이상하리 만치 절규하는 듯한 괴성을 낸다. 제 방귀에도 놀라 걸핏하면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소심한 성격에다가 공격력이라고는 뒷발질 혹은 수컷의 송곳니가 전부인 영원한 피식자의 신세를 한탄이라도 하는 양 그들은 이해 못 할 기이한 소리로 의사소통을 한다.
하지만 고라니는 절대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평생 초식만 하는 온순한 동물이지만 수백만년 동안 한반도 생태계를 지켜온 터줏대감이다. 대륙사슴, 백두산사슴, 노루 등 다른 사슴과 동물들은 이미 자취를 감췄거나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든 반면 고라니 만큼은 여전히 꿋꿋한 삶을 이어오고 있다. 학자들이 고라니를 일컬어 한반도 생태계의 최후 생존자 또는 최후 승리자로 표현하는 것은 그같은 강인한 유전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고라니가 처음 이 땅에 뿌리 내린 것은 수백만년 전. 소위 고황하라는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중국대륙과 한반도가 서로 붙어 있던 시기에 그들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빙하가 녹으면서 서해가 생겨났고 대륙과 한반도가 분리되면서 고라니 혈통은 중국계(중국아종)와 한국계(한국아종)로 나뉘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고라니는 전 세계에서 한반도와 중국에만 사는 이 지역 고유종이다. 더군다나 현존 개체수의 대부분이 한반도에 산다.
고라니는 형태형질 분류학적으로도 특이한 동물이다. 전 세계 사슴과중 유일하게 뿔 대신 송곳니를 가졌고 유두가 4개다. 한 마디로 진화가 덜 진행된 고대형(古代型) 동물이다. 사향노루도 송곳니가 있지만 과가 다르다.
고라니는 유난히 물가를 좋아한다. 헤엄을 잘 치며 보금자리도 물가 풀숲에 잘 튼다. 고라니를 Water Deer 즉 물사슴이라 부르는 이유다.
고라니 수컷들은 교미철엔 더욱 괴상한 소리를 낸다. "또르륵 또르륵!". 수컷들이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힘겨루기 할 때 내는 독특한 소리다. 일부다처제인 고라니의 세계,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수컷들의 힘겨루기와 과시음. 마치 귀뚜라미 울음소리 같은 그 독특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요즘 같은 겨울철이다. "또르륵 또르륵!" 치열하지만 이 보다 더 자연스러운 소리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사랑다툼이 막 시작될 즈음, 하필이면 최악의 시련을 맞는다. 인간의 수렵철, 밀렵철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총기류 뿐만 아니라 곳곳에 설치된 올무와 덫이 그들의 목과 발목을 옥죈다. 또 서식지 주변은 온통 도로다. 로드킬 건수가 가장 많은 시기 또한 이 철이다. 일년에 단 한 번 있는 교미철이 채 지나기도 전에 불귀의 객이 되는 고라니들이 부지기수다.
"어어읔 어어읔!" 그들의 소리가 갈수록 통곡으로 들리는 이유가 이 때문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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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허수아비와 생태 도둑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 바라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쓸쓸하다. 떼지어 날던 참새들도, 부산하게 움직이던 농부들도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엊그제 내린 비 이후 바람도 스산해졌다. 된서리에 살얼음까지 얼었다. 계절은 이미 겨울문턱을 넘어섰다.
그런데 아직도 들녘에 서있는 존재들이 있다. 빛바랜 허수아비들이다. 철은 이미 지났건만 무슨 까닭인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들 서 있다. 표정을 보니 하나같이 겸연쩍다. 하고 있는 모양새도 어줍다. 알곡이 익을 때만 해도 활짝 펼친 두 팔이 깨나 듬직해 보였을 그들, 이제 어깨도 쳐지고 몸도 기울어진 게 마치 패잔병처럼 보인다.
한 줄기 바람이 겨드랑이만 파고 들어도 별의별 궁상이 다 떠오르는 계절. 그래서인지 괴산의 한 마을을 지나는데 저 만치 논 한 편에 서 있는 허수아비들이 자꾸만 시선을 잡아 끌었다. 차를 세우고는 이런 궁상 저런 궁상 다 떨다가 결국은 "농부들이 얼마나 바빴으면 그대로 두었을까"하고 그들의 철 잃은 존재 이유를 막 이해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번엔 허수아비 군상 너머로 수상한 움직임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쁜 걸음을 하는 3명의 사람들. 허수아비가 서 있는 논 옆 개울로 무언가를 잡으려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내친 김에 다음 행동을 눈여겨 봤더니 맨 앞에 선 사람이 배낭 속에서 무언가 꺼내 들고는 이내 개울로 들어갔다. 손에 든 건 배터리였다. 얼마 전 동면에 들어간 개구리를 잡기 위해 원정 온 외지꾼들이었다. 한 사람은 잡고 또 한 사람은 그릇에 주워 담고 또 한 사람은 망을 보고. 한참을 그렇게 불법으로 개구리를 잡은 그들, 안 되겠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들고 다가갔더니 어느새 저멀리 달아났다.
가만히 서 있던 차에서 별안간 사람이 나와 다가가니 무척이나 놀랐던 모양이었다. 잡은 개구리를 그대로 놓고 튀었다. 다행이었다. 하나 이미 전기 맞은 개구리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반쯤은 네 다리를 뻗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개울에 쏟아 부으면서 세어보니 2백 마리가 족히 넘었다. 시간상으로 보면 어딘가에서 잡은 뒤 이곳으로 온 것으로 보였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이들처럼 불법으로 개구리를 잡거나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겨울을 나기 위해 한 곳으로 모여드는 습성을 교묘히 이용해 싹쓸이 하는 것이다. 요즘 같은 초겨울엔 물흐름도 많지 않고 물도 맑은 데다 얼음도 아직 얼지 않아 불법꾼들이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호기다.
하천의 경우 매년 이맘때쯤이면 수심이 깊은 곳에 붕어, 잉어, 누치, 참마자 같은 대부분의 물고기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모여드는데 꾼들이 이 시기를 놓칠 리 만무. 그물꾼이건 배터릿꾼이건 작살꾼이건 다 달려들어 너도나도 잡아가기 때문에 얼음 얼기 전에 이미 물고기들이 몰살 당한다. 수중배터릿꾼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년중 물속시야가 가장 좋고 수온 또한 그리 차지 않은 시기가 이맘때인 만큼 그들이 가장 바삐 움직이는 시기도 요즘이다. 이들은 주로 수심이 깊은 하천보나 호수에 들어가 동면중인 쏘가리나 잉어 등을 즐겨 잡는다.
열 사람이 한 도둑 못 잡는다고 했다. 기를 쓰고 도둑질 하려는 사람은 그만큼 잡기가 어렵다는 얘기리라. 이들 불법꾼도 마찬가지다. 기를 쓰고 잡는다는데 어찌 쉽게 단속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들이 활개치는 시기가 매년 이맘때쯤이란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단속만 한다면 그들이라고 근절 못 시킬 이유가 없다. 그러나 웬일인지 모두가 손을 놓고 있다. 철 지난 허수아비가 아니라 일년내내 할 일 없는 허수아비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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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뛰는 멧돼지, 설설 기는 대책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더니, 정작 호랑이가 사라지고 나니까 엉뚱하게도 멧돼지가 판을 치고 있다. 남한에서의 마지막 호랑이 기록이 1922년 경북 대덕산 호랑이이니, 실로 90년 만에 속담을 바꿀 만한 기막힌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호랑이 뿐만 아니라 표범, 늑대, 여우까지 이른바 먹이사슬의 최강자들이 몽땅 사라져버린 이 땅의 무주공산. 그래서 더욱 기고만장해졌는지 멧돼지로 인한 희한한 일들이 연일 그치지 않고 있다.
벌건 대낮에 도심지로 내려와 애먼 사람을 물어뜯는가 하면, 수많은 자동차가 총알처럼 내달리는 도로 위로 뛰어들어 운전자들을 혼비백산케 하고, 그것도 모자라 달리는 열차에 몸을 내던져 투신자살(?)하는 소동까지 벌이고 있다. 산골마을 농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멧돼지들의 텃밭으로 변해 주인 농부들이 허구한 날 멧돼지 눈치를 살펴가며 농사 짓고 심지어는 전문 퇴치꾼인 한국수렵협회 회원이 멧돼지를 잡다가 물려 죽는 일도 생겨났다.
영화 '차우'에서의 성난 멧돼지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인간세계를 향한 대자연의 분풀이 같기도 한, 믿기지 않는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얼마나 다급했으면, 얼마나 똥줄이 탔으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간 영역에 쫓기듯 들어와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겠는가 하는 측은지심도 든다.
멧돼지는 말이 돼지지 사실 맹수나 다름없다. 성질이 급하고 사나우며 날렵하다. 한창 내달릴 때는 시속 40km가 넘는다. 게다가 뾰족한 엄니는 가히 치명적이다. 흥분한 멧돼지는 호랑이도 쉽게 대들지 못할 정도로 위험스럽다.
오래 전 한 사냥꾼으로부터 이런 얘길 들은 적 있다. 한 번은 사냥개들을 데리고 멧돼지 잡이에 나섰는데 가장 아끼는 개 한 마리가 그만 실수해 멧돼지 엄니에 들이받쳤다고 한다. 한달음에 달려가 살펴보니 목 부위가 마치 해부칼로 그은 것처럼 잘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멧돼지 엄니가 그렇게 날카롭고 무서운 줄은 미처 몰랐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한 번은 엽총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멧돼지와 맞닥뜨려 급한 김에 눈앞에서 총을 쐈다고 한다. 연거푸 두 발을 맞은 멧돼지가 쓰러지는가 싶더니만 이내 일어나 쏜살같이 달려들더란 것이다. 복부가 맞아 배 밖으로 삐져나온 내장이 나무 둥치에 걸리는 바람에 가까스로 화를 면하긴 했지만, 그 때처럼 간이 오므라든 적이 없었다며 손사레쳤다.
오죽하면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 이런 말이 전해질까. "한나라를 멸하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은 흉노족을 무척 두려워 했다. 왕망은 고심 끝에 죄수와 노예들을 이용하기로 하고 흉노를 쳐부수면 형 면제와 신분 상승을 약속하고는 전장터로 내보냈다. 그러면서 그들을 부른 이름이 '저돌지용(猪突之勇: 본래는 저돌희용)'이다."
얼마나 막무가내였으면 '멧돼지처럼 앞만 보고 돌진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저돌'은 '앞뒤 가리지 않고 함부로 날뜀'을 뜻하는데 여기서의 저(猪)가 바로 멧돼지를 일컫는다.
환경부는 최근 멧돼지 포획틀을 설치해 도심에 출현하는 멧돼지 피해를 줄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길길이 날뛰는 멧돼지를 더이상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의지만큼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낯선 환경에 당황할 대로 당황한 멧돼지가 생각처럼 얌전하게 포획틀에 갇히면 좋겠는데, 결과는 글쎄올시다다. 얼마 전 동물원을 탈출했다가 포획틀에 갇혀 되돌아온 반달가슴곰이 있긴 하나 야생 멧돼지는 그와는 전혀 다른 상대다.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본 장난 같은 발상이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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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와 붕어

 

지구상 우리나라에만 사는 민물고기 쉬리. 이 물고기가 학계에 처음 알려진 해는 일제 강점기인 1935년으로, 당시 한반도에 건너와 조선땅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신종 물고기 하나라도 더 찾으려고 눈이 벌겄던 모리 타메조라는 일인 학자에 의해서였다. 모리는 남한강 수계에서 '처음 보는 특별한 조선 물고기' 쉬리를 채집해 'Coreoleuciscus splendidus Mori'란 학명으로 신종 발표했다.
모리가 찾아낸 물고기는 체형이 날씬하고 몸색깔과 모습이 아름다워 예부터 기생피리, 여울각시, 연애각시 등으로 불러온 그야말로 조선토종 물고기였다. 모리가 처음 잡았을 때 얼마나 감탄했으면 종소명을 'splendidus'라 했겠는가. splendidus의 splendid는 매우 인상적이거나 아름다울 때 쓰는 말이다.
그로부터 72년 뒤인 2007년 모리가 살아 있더라면 깜짝 놀랄 만한 새로운 사실이 국내 젊은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다름 아닌 '쉬리가 1종이 아니라 2종'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순천향대 방인철교수팀이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충청타임즈 2007년 6월 25일자 최초 보도> "국내에 서식하는 쉬리를 형태 분석과 함께 유전다양성 및 분자계통학적 분석을 병행한 결과 한강과 금강에 사는 쉬리(일명 북방계)가 낙동강과 섬진강에 사는 쉬리(일명 남방계)와 뚜렷이 구분됐다. 특히 남방계 쉬리는 모리가 신종으로 발표했던 기존의 쉬리(북방계)와는 다른 신종으로서 앞으로 보강 연구를 더 실시해 정식으로 신종 발표할 계획이다."
신종 발표가 이뤄질 경우 한국산 쉬리는 1종에서 2종으로 늘어나게 된다. 방교수가 밝힌 북방계 쉬리와 남방계 쉬리는 외형상 체색과 지느러미 반점, 뺨부위 암점 등 여러 면에서 다를 뿐만 아니라 분자 계통학적으로도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것이 변이에서 온 것이건 분포지리학적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건 분명한 것은 쉬리가 보다 다양한 유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20여년 전 고 최기철박사(전 서울대 명예교수)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은 바 있다. 대청호에서 발견한 '한국 최초의 민물해파리'를 들고 찾아간 필자에게 대뜸 "우리나라에 토종 붕어가 몇 종류 사는지 아느냐"고 묻기에 "글쎄요, 저수지에 사는 일반 토종 붕어와 강에 사는 점박이 붕어(일명 돌붕어), 그리고 …"하면서 머뭇거렸더니 "적어도 대여섯 종류, 많게 보면 8종류는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를 학문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가 된다"고 덧붙였다.
당시에는 물고기 분류가 주로 형태형질 분석에 의존하던 때여서 최박사도 그것을 기준으로 잠정 분류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만, 오늘날 분자계통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한 번쯤 곱씹어봐야 할 한 원로학자의 학문적 고백이 아닌가 싶다.
어느 물고기 한 종이 형태적으로 다양한 형질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유전적으로도 다양한 인자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유전 다양성이 높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유전 다양성은 그 종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유전 다양성이 풍부하면 그만큼 자연계에서 살아 남을 확률이 높은 반면 유전 다양성이 낮으면 환경 변화에 민감해지고 적응력이 떨어져 종 자체가 사라지기 쉽다.
오늘날 미호종개나 어름치 같은 고유종들이 백척간두에 서있게 된 것은 다음 아닌 유전 다양성이 극도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같은 물줄기에 살든 다른 물줄기에 살든 모두가 '한 혈통 같은 핏줄'이니 조그만 환경변화에도 순식간에 멸종위기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유전 다양성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단풍과 낙엽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 어딜 가나 단풍이요 낙엽이다. 기온이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늦가을의 대표적 현상이다. 매년 이맘때면 으레 치러지는 대자연의 통과의례이기에, 사람들은 그저 아름답다거나 쓸쓸하다거나 하는 표현쯤으로 넘겨버리기 일쑤이나 실은 오묘한 것이 이들 현상이다.
가을은 모든 생명체에 있어 참으로 바쁜 계절이다. 한평생 한 자리에 머물며 사는 나무들마저 저렇게 온갖 수식어(빛깔)를 동원해 울긋불긋 속내를 내비쳐가면서 계절의 문턱을 숨가쁘게 넘어가고 있잖은가. 비가 내린 뒤의 가을 행보는 더욱 빨라졌다. 마치 중국의 변검(變瞼)을 보는 듯하다. 이 모습인가 싶으면 어느덧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요란하지만 그렇다고 시끄럽진 않다. 정중동이다. 고요 속의 움직임, 그러나 어떤 움직임보다 더 위대하다. 생명유지를 위해 몸 일부를 기꺼이 떨쳐내는 숭고함마저 깃들어 있다. 한편으론 장엄하다.
자연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모습, 그 과정에 단풍과 낙엽이 있다. 단풍이 그 시작을 알리는 빛깔이라면 낙엽은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결과다. 비록 불리는 이름은 하나같이 단풍과 낙엽이지만, 그들은 숱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자연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이 나무마다 제각각 다르다는 얘기다.
그것은 나무들의 정체성과도 관련 있다. 아니 단풍과 낙엽처럼 나무들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주는 것도 없다. 한여름엔 한결같이 초록빛을 띠고 있다가도 늦가을만 되면 서로 다른 빛깔로 "나 여기 있소"라고 소리치듯 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단풍과 낙엽이다. 비록 단풍이 들지 않고 낙엽도 별로 떨어뜨리지 않는 상록의 나무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모습 자체가 그 나무의 본질이듯이, 낙엽을 떨구는 나무들도 각기 다르게 단풍빛을 띠고 낙엽을 떨치는 자체가 그들의 본질인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노란 빛깔인 나무가 있다. 고로쇠나무, 계수나무, 느릅나무, 물푸레나무, 배롱나무, 생강나무, 은행나무, 자작나무, 튤립나무, 피나무, 호두나무 등이다. 마가목, 복자기, 붉나무, 산딸나무, 신나무, 옻나무, 화살나무 등은 붉은 빛으로 한해 가을을 마무리 한다. 우리나라의 터줏대감격인 참나무류는 종에 따라 단풍이 노란 색과 붉은 색 혹은 갈색이 뒤섞인 빛깔을 띠며 느티나무도 노란 빛과 붉은 빛을 띠는 것이 따로 있다.
단풍 중에는 또 어느 색이라고 딱히 표현 못 할 정도로 매우 오묘한 빛을 띠기도 한다. 감나무 중에 어떤 것은 붉은 듯 노랗고 어떤 것은 노란 듯 붉은가 하면 또 어떤 것은 초록빛이 덜 바랜 황갈색 단풍이 드는 경우가 그 예다.
낙엽도 그렇다. 땅을 향해 떨어지는 모습이 비슷해 보이지만 종마다 특징이 있다. 흔히 낙엽송이라 불리는 일본잎갈나무는 자잘한 노란 잎이 가랑비 내리듯 차분히 떨어지고 은행나무 이파리는 이리 빙글 저리 빙글 팔자걸음으로 떨어진다. 낙하하는 속도 또한 다르다. 어떤 것은 쫓기듯 단숨에 곤두박질 치는 게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미련이 남아 있는 양 더디게 떨어진다. 소리도 다르다. 가만히 귀 귀울여 보면 어린 애가 까치발 딛듯 사뿐사뿐 내려앉는 것도 있고 후두둑 후두둑 싸락눈 소릴 내는 낙엽도 있다. 어디론가 나뒹굴다가도 결국은 지난 일년의 무게와 두께 만큼 쌓인 채 속절없이 썩어갈 신세이지만 '나는 나'라는 정체성만은 끝까지 잃지 않고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낙엽이다.
'10월의 마지막 밤'이 지나면서 이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늦은 단풍이건 빛바랜 낙엽이건 그저 보고 밟으며 가을정취를 느껴보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끼리라면 더욱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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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추억이 사라진 가을들판

 

가을이 깊어가면서 들판에 빈 논이 늘어나고 있다. 벼베기와 탈곡을 동시에 하는 콤바인이 숨 가쁘게 지나간 자리에 벼그루터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쓸쓸하다. '지난 1년'을 송두리째 내어준 결과가 처량하다. 여름날 그 따갑던 햇볕이 내리쬘 때만 해도, 폭풍우가 모든 걸 삼켜버릴 듯이 휘몰아칠 때만 해도 농부들의 희망과 근심이 논배미 가득 넘실거렸는데, 이젠 그나마도 없다.
알곡이 털린 지푸라기마저 돈이 된다고 다들 걷혀진다. 되돌려지거나 남겨지는 그 무엇도 없다. 지난 1년의 흔적이 고작 논바닥에 낙인처럼 찍힌 콤바인 자국과 몸통 잘려나간 벼그루터기 뿐이다. 예전의 논과는 분위기와 모습이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다.
우선 생명이 없다. 친환경 농법을 하는 몇몇 논을 제외하고는 그 흔하던 벼메뚜기도 뛰지 않고 개구리도 놀라 방황하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벼베기가 한창이거나 끝난 논배미에는 졸지에 의지할 곳 없어진 벼메뚜기와 개구리들이 혼비백산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건만 지금은 고요하다. 빈 논배미에 뛰어들어 들판이 떠나가도록 흙범벅을 하던 개구쟁이들도, 벼이삭을 줍던 아낙네들의 굽은 허리도 이젠 볼 수 없다. 하물며 미꾸라지를 잡느라 이 논도랑 저 논도랑 후비며 다니던 가을천렵꾼들이 보일 리 만무고 새뱅이와 붕어 잡느라 둠벙물을 퍼내던 정경이 보일 리 더더욱 만무다.
알몸을 드러낸 논배미들의 모습 또한 무척 달라졌다. 경지정리로 비뚤배뚤하던 논두렁은 일직선으로 변했고 그에 따라 논 형태도 네모 반듯한 두부판처럼 변했으며 높다랗던 논두렁은 있는 둥 마는 둥 그저 다른 논과의 경계표지 쯤으로 낮아졌다.
논이 물을 담는 저수지로서의 역할을 뒤로 하고 벼를 생산하는 한낱 공장으로서의 역할만 중시되다 보니 그 구조 또한 많이도 변했다. 그 중 눈에 띄는 변화가 논배미에서 둠벙과 논도랑이 사라진 점이다. 대신 논배미 마다에는 하천 혹은 저수지와 연결된 수로가 설치돼 있거나 관정 하나씩 관행처럼 파져 있다. 언제나 필요하면 수로의 문을 열면 되고 전기 스위치만 올리면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오니 둠벙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됐으며, 논물을 모으거나 흘려 보내는 논도랑 역시 농법 변화와 함께 필요성이 사라져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소 쟁기질 대신 트랙터로 논을 갈고 손모내기 대신 이앙기로 모를 내며 퇴비 대신 화학비료를 쓰고 피사리 대신 제초제를 쓰는 현대 농법이 보편화하면서 논 모습이 크게 변한 것이다.
하지만 편리함과 수확량 증대라는 '얻은 것' 이면에는 '잃은 것' 또한 많다는데 우리 농촌의 아픔이 있다. 특히 우리가 잃은 것 중에는 논 둠벙과 도랑이 사라지면서 불러온 논 생태계 파괴는 쉽사리 돌이킬 수 없는 크나큰 손실이다. 앞서 말한 생명의 부재가 바로 논에서 둠벙과 도랑이 사라진 뒤에 찾아든 재앙이다.
논 둠벙과 도랑은 단순히 물을 대고 유지하는 수원(水源)으로서가 아닌, 논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지탱해 온 소중한 생명그릇 이른바 비오톱(Biotope)이었다. 논 둠벙이 생명을 잉태하고 보듬으며 증식·보급해 주는 생태 창고 같은 역할을 해왔다면 그 창고와 논을 연결해 주는 고리 역할을 한 것이 논도랑이었다. 논에 물이 괴어 있을 땐 자연스레 논과 둠벙, 도랑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논에 물이 없을 땐 온갖 생명들이 숨어드는 피난처 역할을 한 것이 둠벙이요 그 피난처로의 안내길이 되어 준 게 논도랑이다.
논 둠벙과 도랑이 사라진 들판, 생명도 사라지고 우리의 추억도 함께 사라졌다. 이제 막 벼베기가 끝난 논에서 더없는 황량함만이 맴도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사라진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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