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황소바람 가득한 우리 농촌

올겨울 들어 자주 듣는 반가운 말이 있다. 삼한사온이다. 어린 시절부터 겨울이면 으레 들어왔던,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시나브로 사람들의 입에서 멀어져 아예 잊힌 말이 돼가던 이 말, 대체 얼마만인가. 세월의 무상함 속에 까맣게 잊고 지내던 할아버지 생전의 웃음소리를 듣는 것처럼 반갑다못해 귀가 번쩍 트인다.


삼한사온. 이 말은 본래 사흘은 춥고 나흘은 포근했던 전형적인 우리나라 겨울 날씨의 대명사였다. 본뜻대로라면 7일을 주기로 날씨가 변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기에 어떨 땐 사한오온 또 어떨 땐 삼한육온이 찾아오기도 했다. 중요한 건 추운 날이 있으면 곧 포근한 날이 올 것이란 믿음, 그 믿음을 준 게 바로 삼한사온이요 그 믿음을 가지고 여유롭게 생활해온 게 우리 민족이란 사실이다. 겨울 날씨가 아무리 추워봤자 겨울 날씨고 제아무리 포근해봤자 그 또한 겨울 날씨란 느긋함, 그게 우리 민족의 겨울 정서였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삼한사온이 실종되면서 모든 것이 흐트러졌다. 한 번 추위가 닥치면 그 끝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막무가내 이어지고 또 그러다가 돌연 푹한 날씨가 찾아오면 그 역시 끝을 종잡을 수 없게 됐다. 이상한파, 이상난동이 삼한사온을 대신하면서 걸핏하면 찾아오는 게 '이상한 겨울'이다. 80~90세 어른들이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겨울 날씨가 이젠 다반사가 됐다. 한 해 겨울에 극한값을 경신하는 기상요소가 부지기수다. 눈폭탄은 예사요 겨울 폭우, 겨울 장마가 어느덧 친근한 말이 됐다.


사람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듯이 날씨 또한 앞을 예측할 수 있어야 모든 게 순조로운 법이다. 한데 우리나라 날씨가 어떻게 변했는가. 허구한 날 여우가 시집가는 듯 변덕이 죽 끓듯한 날씨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고 있다. 봄이 되면 따뜻해지고 여름이 오면 무더워지며 그런 다음엔 장마와 태풍이 오가고 겨울엔 추위와 따사로움이 번갈아 찾아와야 정상인데, 그 모든 게 이빨 잘못 물린 톱니바퀴처럼 돼 버렸다. 오죽하면 평년 기온을 되찾겠다는 기상예보가 엄청난 낭보처럼 들리는 시대가 됐을까.
이렇게 된 원인 중 대표적인 게 지구 온난화와 엘니뇨 현상이다. 겨울이면 당연히 시베리아 고기압이 주기적으로 강약을 반복하면서 우리나라에 영향을 줘야 하는데 지구촌 기류의 대혼란으로 연방 삐그덕거리니 한반도 날씨인들 정상이겠는가.


겨울 날씨 변화로 인해 잊혀가는 말이나 속담이 늘고 있다. 세상살이가 변해 자연과 접할 기회가 적어진 탓도 있지만 그 보다는 우리 특유의 겨울 정서가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늦잠 자는 아이를 깨우기 위해 어른들이 해오던 거짓말 "얘야! 뒷산에 까치가 하얗게 얼어죽었다"는 말도, 저수지 얼음이 갈라지면서 내는 괴이한 소리를 "귀신이 너 잡으러 오는 소리"라고 으름장 놓던 말도 옛날 얘기가 됐다. '개구리가 얕게 월동하면 겨울이 따뜻하다'거나 '무 뿌리가 길면 그해 겨울이 춥다'거나 '개암나뭇잎이 떨어지지 않는 해는 눈이 금방 녹는다'거나 하는 등의 속담도 잊힌 지 오래다.


모처럼만에 듣는 삼한사온. 그래서인지 요즘 날씨를 보면 최근 몇 년간의 날씨와는 좀 다른 느낌이다. 며칠은 춥고 며칠은 포근하고…. 하나 정작 되돌아와야 할 우리네 겨울 정서는 아직도 고드름이다. 특히 겨울 농한기를 맞아 조금은 맘 편히 쉬어야 할 우리 농민들, 그들 가슴 속엔 여전히 황소바람이 그득하다. 조류인플루엔자와 구제역 걱정하랴, 소값 폭락에 사료비 난방비 걱정하랴, 온갖 걱정이 태산이다.
아무쪼록 날씨 만큼이나 우리네 정서도 하루빨리 되찾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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