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곡저수지 미호종개, 어항 물고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민물고기 중 학술적 이력이 가장 독특한 종은 미호종개(천연기념물 454호, 멸종위기야생동식물 Ⅰ급)다. 1982년 당시 서원대교수이던 손영목박사가 미호천에서 첫 채집해 1984년 김익수박사(전북대교수)와 공동으로 신종 발표한 이 물고기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금강 수계에만 사는 귀중한 유전자원이다.
 또한 이 물고기는 우리나라 전체 민물고기 200여종 가운데 '유일하게' 학명을 이루는 속명, 종소명, 명명자 모두가 국내 학자로만 만들어진 기념비 같은 어류이다.

 속명(Iksookimia)은 김익수박사의 이름을 따서, 종소명(choii)은 김박사와 손박사의 은사인 고 최기철박사(전 서울대교수)의 성(崔)을 따서 붙였다.  지금의 정식 학명인「Iksookimia choii (Kim and Son)」에서, 최초 명명자를 뜻하는 괄호안의 Kim and Son은 신종발표자인 김박사와 손박사를 뜻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학명을 공식화 한 이는 루마니아의 Nalbant박사다. 기름종개속(屬)의 권위자인 Nalbant박사는 1993년 처음으로 Iksookimia속을 기재 발표하면서 기존의 기름종개속(Cobitis속)으로 분류되던 미호종개(발표당시 종명은 Cobitis choii)를 참종개, 왕종개, 부안종개, 남방종개 등과 함께 Iksookimia속으로 묶었다. 미호종개로 인해 미호종개속이란 하나의 분류체계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미호종개를 한국의 자존심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하지만 미호종개는 외롭고 가련한 존재이기도 하다. 지구상 우리나라에만, 그것도 금강 일부수역에만 살고 있다는 건 그만큼 태생적으로 외롭고 생태적으로도 밀려나 살고 있다는 뜻이다.

 미호종개 서식지는 2006년 이전까지만 해도 약 20개 지점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06년 이후 조사에서는

겨우 6곳(인공복원지 제외)밖에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개체수마저 급속히 줄고 있다. 국내 최대 서식지인 진천 백곡저수지의 상류부만이 약 1만 마리가량 살고 있을 뿐 다른 서식지에서는 겨우 서식사실만 확인될 정도로 극소수가 살고 있다. 학자들은 현존 개체수가 불과 2만 마리도 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호종개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4대강 사업의 일환인 백곡저수지 둑높임 공사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강행될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충북도가 조정안을 내놨지만 내용이야 어쨌든 공사 진행 자체가 미호종개에겐 엄청난 위협이다. 상황에 따라선 '그나마 밀려나 가까스로 살아오던 최후 보루'마저 잃을 판이다.

 자연 생태계에서 한 동물의 집단 서식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군다나 백곡저수지내 미호종개 집단서식지의 경우 기존에 알려졌던 서식지와는 환경이 판이하다. 미호종개는 대부분 유속이 완만하고 모래가 깔린 하천의 얕은 여울에 서식하는데 백곡저수지에서는 상류의 하천 유입부 한 곳에 집중해 살고 있다. 유입수량과 수질, 저수위에 특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공사후 5년간 현수위를 유지한 뒤 매년 30㎝씩 수위를 높인다고는 하나 지금과 같은 서식환경이 그대로 유지될 지는 미지수다. 또한 대체 서식지란 것도 근본적인 대안은 아니며 사업추진을 위한 면죄부용일 뿐이다. 자연상태의 물고기 서식지는 결코 어항이 아니다. 인위적 공간을 만들어 미호종개를 살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백곡천과 백곡저수지가 어항이 아니듯 미호종개 역시 어항속 물고기처럼 취급해선 안 된다. 그들이 왜 전례없이 백곡저수지 상류에 몰려 살게 됐는지, 그 가련한 원인부터 생각해 볼 때이다.

쫓겨난 수달가족

 

 야생동물의 흔적을 찾아내고는 심장이 뛸 만큼 반가워한 적이 있다. '위기의 야생'을 취재하던 지난해 겨울 얘기다.
 엄동설한에 달래강변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니는데 상류 쪽 어느 지점에 이르자 얼음판 위로 심상찮은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길게 이어진 발자국 사이 사이로 마치 사람이 붓을 끌고 다닌 것 같은 꼬리 흔적까지 나 있는 것으로 보아 그토록 찾으러 다녔던 수달임이 틀림 없었다. 가슴이 뛰었다.
 

 더욱 흥분한 것은 크기가 다른 여러 개의 발자국과 배설물, 먹이 흔적, 영역 표시 등 보다 확실한 흔적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곧바로 추적에 들어갔다. 주요 이동 노선과 먹이 장소, 배설 장소, 텃세 표시를 위해 몸을 비벼대는 장소 등을 꼼꼼히 살펴본 뒤 물가에서 산으로 이어진 발자국을 따라갔다. 여러 개의 발자국은 어느 한 급경사면의 바위굴 앞에서 동시에 사라졌다. 굴 입구를 들여다 보니 반들반들했다. 보금자리까지 찾아낸 것이다.
 

 

 촬영은 이튿날부터 시작됐다. 우선 동굴에는 몇 마리가 사는지, 어느 지점을 통해 물가로 이동하는지, 잡은 먹잇감은 어떻게 먹고 얼음판 위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 등을 기록하기 위해 촬영장소를 강 건너편에 잡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첫째 날도 둘째 날도 수달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달은 보통 해가 떨어질 무렵에 보금자리를 나서는데 연 이틀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름대로 은폐한답시고 위장망까지 동원했는데도 눈치를 챘던 모양이다.
 

 너무 깔본 탓이다. 해서 장기전으로 갔다. 면도날 같은 강바람이 연일 몰아쳤지만 한 번 시작한 일 수달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 보자는 식으로 무작정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매복했다. 그러길 일주일여. 수달들도 지쳤는지 아니면 '저 이상한 존재'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님을 알았는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달가족은 셋이었다. 큰 개 만한 어미 둘에 1년생으로 보이는 새끼 한 마리가 가족을 이뤄 살고 있었다. 촬영 시작 보름쯤 돼서는 카메라 앞까지 다가와 두리번거리는 대범함도 보였다. 그만큼 친해졌다.
 

 그로부터 4개월뒤, 수달가족의 여름나기는 어떠한지가 궁금해 다시 그 자리를 찾았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수달가족이 보이질 않았다. 물가 바위 위에 그많던 배설물도 오래된 것 외에는 보이질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예감이 좋질 않아 보금자리를 가봤다. 아뿔싸, 바위굴 앞에 서있던 나무들은 온데간데 없고 웬 뜬금없는 토종벌통 3개가 문지기처럼 서있었다. 굴 안을 들여다 보니 썰렁한 채 풀까지 자라나 있었다.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또 그로부터 일년여가 지난 엊그제(2010년 12월 24일), 수달가족도 보고 싶고 또 미련도 남아 있어 혹시나 하고 다시 그 자리를 찾았다. 역시나였다. 흥분에 들뜨게 했던 발자국도, 먹다만 물고기뼈와 비늘도, 배설물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일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되돌아오지 않을까. 얼마나 두려웠으면 인근에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멀찌감치 달아났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3마리가 동시에 굴밖으로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뚱뒤뚱하면서 물속으로 뛰어들던 귀여운 수달가족. 팔뚝만한 잉어를 잡아서는 자랑스러운 전리품인 양 한참을 가지고 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우둑우둑 씹어먹던 '먹보' 수달가족. 얼음판 위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썰매를 타듯 미끄러지며 정답게 장난치던 개구쟁이 수달가족….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서려는데 문득 소름끼치는 불길함이 스쳤다. "혹시 벌통이 놓이던 그 때 수달가족이 아예 싹쓸이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닐까?"

산골에 미꾸라지와 개구리가 없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겨울이면 흔히 볼 수 있었던 시골 정경이 있다. 미꾸라지(혹은 미꾸리) 잡이다. 요즘 같은 농한기가 되면 으레 시골에선 삽과 양동이 들고 들로 나서는 게 일이었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해온 일이기에 별다른 약속이 없어도 한 사람이 나서면 다른 사람이 자동으로 따라 나서는 식이었다.
 

 목적지도 거의 정해져 있었다. 대부분이 그 동네 토박이들이었기에 언제 어딜 가면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은 훤히 알고 있었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우선 얼음을 깨고 물을 퍼냈다. 논도랑이나 수렁 같은 곳에 미꾸라지가 많았기에 물이라고 해봤자 삽으로 몇 번 퍼내면 그만이었다. 물이 잦아지면 삽이나 손으로 열심히 진흙을 들춰냈다. 그러면 동면하던 미꾸라지들이 놀라서 꼬물꼬물 삐져나오기 마련이었는데, 날씨가 추운 날엔 미꾸라지의 몸이 굳어져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움직임이 굼뜨거나 아예 죽은 양 꼼짝 않는 것들도 있었다.

 잡은 건 비단 미꾸라지만이 아니었다. 알을 실은 개구리들도 더러 잡곤 했다. 별미 혹은 약용 목적이었다. 지금이야 일부러 개구리만 골라 잡는 전문꾼이 생겨났지만 그 때만 해도 개구리는 잡아도 그만 안 잡아도 그만인 계륵 취급을 받았다. 아니, 오히려 안 잡는 사람이 더 많았다.

 미꾸라지 잡이가 끝나면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한 쪽에선 미꾸라지 손질하느라 시끌벅적, 또 한 쪽에선 가마솥에 양념 넣고 물 끓이느라 시끌벅적, 또 다른 쪽에선 수제비 준비하느라 시끌벅적, 말 그대로 잔치분위기였다. 비록 잡아온 미꾸라지 양은 얼마 되지 않을 지언정 큼직한 무와 대파 썰어넣고 거기에 수제비까지 빚어 넣으면 그야말로 명품 추어탕이 따로 없었고 그 것 한 그릇이면 동장군도 저멀리 달아났다.
 

 지금이야 거의 볼 수 없는 화석화된 시골 모습이지만 그 당시엔 웬만한 시골 마을에선 비일비재하게 이뤄졌던 정겨운 겨울나기요 훈훈한 광경이었다.
 지금도 커다란 가마솥을 보거나 시골집 굴뚝 연기를 보면 그 시절 그 사람들이 마냥 그리워지곤 하는데, 요 며칠 전 보은의 어느 산골 마을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뒤로는 마치 추억의 한 장면을 영영 도둑맞은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얘기인즉슨 이렇다. 달천 상류가 자신들의 고향이어서 매년 이맘때 쯤이면 형제자매들이 모여 미꾸라지 천렵을 하곤 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시골이 엄청나게 변했다는 것이다. 골짜기마다 새로운 집과 공장이 들어서고 논배미마저 택지로 바뀌거나 기계화 영농으로 대부분 마른논으로 변해 미꾸라지와 개구리가 살 만한 곳 자체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개체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더구나 개구리의 경우 논배미든 산골짜기든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씨가 말랐단다.
 그들은 서식환경 악화도 문제지만 배터리를 이용한 싹쓸이 남획이 더 큰 문제라고 열 올렸다. 미꾸라지와 개구리가 있을 만한 곳이면 으레 배터리를 들이대고 마구 지져대니 그들이 살아남을 리 만무란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첩첩산골도 이런 지경인데 찻길이 훤히 뚫린 다른 곳들은 어떻겠냐는 그들의 푸념속에서 생태계는 물론 우리의 추억마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널 대로 건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찾으면야 어디 미꾸라지 개구리 몇 마리쯤 찾아내지 못할 시골 마을이 있겠냐마는,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이뤄지는 싹쓸이 남획이 근절되지 않는 한 정말이지 미꾸라지 개구리 한 마리 살지 않는 그런 세상이 올 것은 뻔한 이치다.
배터리에 감전돼 쭉쭉 뻗는 미꾸라지와 개구리의 잔영이 아른 거린다. 이 추위에.

정이품송과 나랏일

 

최근 정이품송의 가지가 또 부러진 것과 관련해 '이상한 말'이 나돌고 있다. 지난 1993년 강풍으로 서쪽 가지 1개가 부러진 것을 시작으로 2004년엔 폭설로, 2007년엔 강풍으로 서북쪽 가지가 잇따라 부러진 바 있는데 매번 가지가 부러지던 해엔 나라 안에 '큰일'이 생겼기 때문에 이 번에도 뭔가 심상찮은 조짐이란 것이다.


풍문의 시발점은 17년 전인 1993년 2월 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속리산 지역을 강타한 초속 40m 가량의 강풍과 함께 심한 눈보라가 몰아쳐 정이품송의 서쪽 가지 1개가 부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날 부러진 가지는 직경 25㎝, 길이 5~6m 가량으로 서쪽으로 난 가지 중 가장 긴 것이었다. 이 때문에 좌우대칭이던 정이품송 특유의 자태가 균형을 잃기 시작했다.
600여 년을 살아온 정이품송이 처음으로 가지가 부러지던 그 날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기 바로 3일 전이었다. 가지가 부러질 당시엔 아무 말도 떠돌지 않았으나 11년 뒤인 2004년 3월 5~6일 대폭설 때 두 번째 가지부러짐이 발생하면서 나랏일과 관련된 좋지 않은 풍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 폭설은 살인적이었다. 3월 5일 하루 적설량만도 청주 32.0 cm, 보은 39.9 cm를 기록하는 등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3월에 내린 하루 적설량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이 폭설로 인해 정이품송은 두 번째로 가지가 부러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는데 이 번에도 서북쪽으로 난 가지가 피해를 입었다. 당시 정국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건으로 나라 안이 온통 떠들썩하던 시기였다.


세 번째 가지부러짐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초기 징후가 나타나던 2007년 발생했는데 그 해는 우리나라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현 대통령이 당선되던 해였다.
그 해 3월 28일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순간 최대풍속 26.7m/sec의 강한 돌풍이 불어 정이품송 가지 1개가 부러졌다. 당시에도 역시 서북쪽으로 난 가지(직경 약 30cm, 길이 4∼5m)가 부러졌는데 이를 두고 일부 사람들은 나라에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적이 우려하는 목소리를 낸 바 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지난 6일 밤 또 다시 초속 10m 이상의 강풍이 몰아쳐 서북쪽 가지 1개(직경 약 20cm, 길이 약 5m)가 부러졌으니 사람들의 우려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당시 취재 현장에서 들은 주민들의 우려는 한결같이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려고 자꾸만 정이품송 가지가 부러지느냐"였다.


다소 견강부회격인 과장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냥 흘려보낼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더욱이 정이품송을 지역의 자랑거리이자 자부심으로 여겨오고 있는 지역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이품송의 건강은 곧 지역의 건재함, 나아가 나라의 안녕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을 수 있기에 그저 '헛우려'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정이품송은 수령 600년이 지난 노거수 중의 상노거수다. 사람으로 치자면 평균수명을 훨씬 넘긴 시한부 삶이다. 언제 어느 때 푸르름을 잃을 지 아무도 모른다. 부러진 가지의 대부분이 속이 거의 썩어 비어 있는 것도 노쇠한 정이품송의 현 상태를 말해 준다.


나무로서는 유일하게 고위 품계(정이품)를 받아 그것을 이름으로 삼고 또 부인(정부인송)까지 거느린 유별난 명품 소나무가 이젠 '반쪽 모습'을 한 채 지역민들의 우려를 자아내는 엉뚱한 근심거리가 된 것이다.
혹자는 매번 서북쪽 가지만 부러지는 것에도 의미를 두고 있다. 나랏님(?)이 있는 쪽이 그 쪽이기에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그 쪽 가지만 부러진다는 것이다. 억측치고는 모골이 송연한 억측이다.

성난 카우보이와 멧돼지

 

 

"1970년 무렵 나는 너무나 많은 소들을 갖게 돼 지붕도 없는 축사에 100~200 마리씩 가두어 놓고 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가장 크고 살찌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우선 소의 식습관을 바꾸기 위해 풀 대신 조섬유와 곡물, 농축 단백질을 먹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식사는 소의 소화기관을 상하게 했다. 많은 소들이 탈장으로 고생했고 나 또한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소를 사들였다. 어떤 땐 20여 곳에서 한 번에 100마리씩 들여오기도 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소들을 한 우리에 넣어 기르다 보니 이번엔 질병이 문제였다. 해서 사용하게 된 것이 항생제였고, 들끓는 파리떼를 없애기 위해서는 다량의 살충제까지 뿌려댔다.
소들을 더욱 빠르게 성장시키기 위해 호르몬을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가장 빈번히 사용한 성장호르몬은 DES(디에틸스틸베스트롤)이었다. 나는 이 호르몬을 임신한 소의 유산을 위해서도 사용했다. 그 무렵 나는 화학약품이라면 무조건 좋은 줄로 알았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소 한 마리의 무게를 1,100파운드 되도록 만드는데 30개월 걸리던 것을 15개월로 단축시켰고 농장을 4O배나 키웠다. 하지만 정작 수지타산을 맞추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화학물질 자체가 비쌌고 매년 보다 많은 화학비료와 항생제를 사용해야만 그 전 해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소들은 병들거나 죽어나갔다."

 


미국 몬태나에서 대규모 축산업을 하다가 신경종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비로소 산업축산의 폭력성을 깨닫고 채식주의자가 된 하워드 F. 리먼의 <성난 카우보이>란 책을 일부 요약한 내용이다. 카우보이에서 축산업자로, 동물권리운동가로, 채식주의자로 변신해 온 리먼은 1996년 그 유명한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소가 소를 먹는 현실을 폭로하면서 광우병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해 주목 받았던 인물이다.


당시 리먼이 겨냥한 것은 광우병이지만, 그의 주장과 논리는 오늘날 축산업에 몸담고 있는 전세계 농민과 국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성난 카우보이>를 통해 사용하지 말아야 할 화학약품 등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사용해 온 제 자신을 스스로 폭로하고 아울러 그것을 방임해 온 국가에게도 일부 책임을 묻고 있다. 사육두수가 적었을 땐 없던 걱정거리들이 점점 사육두수가 많아지면서 자꾸만 생겨나고, 또 그런 반면 욕심은 더욱 커져 보다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축산현실을, 체험을 통해 통렬히 지적하는 한편 그릇된 축산업이 지구를 어떻게 절망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는지를 싸잡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잊을 만하면 불거져 나오는 가축 전염병들, 특히 요즘 한창 시끄러운 우리나라 구제역(비록 광우병은 아니지만)을 바라보면서 문득 떠오른 것이 리먼의 <성난 카우보이>요, 언제나 하세월인 우리의 방역대책이다.
왜 또 발생했을까. 올해만도 1월과 4월에 이어 벌써 세 번째다. 구제역으로 시작해 구제역으로 끝나는 느낌마저 든다. 언론에선 단골메뉴까지 생겨났다. 자고 나면 '빠르게 확산'이란 굵직한 타이틀과 함께 여지없이 생매몰 광경이 내비쳐진다.


치료약은 없고 예방약도 오히려 만들면 전파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만들지 않는다는, 그래서 일단 발병하면 일정 반경내 가축들을 모조리 매몰한다는 우리나라의 현실. 이런 와중에 멧돼지는 도심으로 내려와 수시로 날뛴다. 마치 축사 안의 가축들도 언젠가는 뛰쳐나와 날뛰는 날이 있을 것이란 시위라도 하듯 말이다.

갈 길은 멀구요 행선은 더디니~

 

어린 시절 매를 길러본 적 있다. 지금이야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불법행위지만 그 당시엔 야생의 매를, 그것도 어린 새끼를 내려다 기르는 일이 그리 별쭝맞은 짓이 아니었다.
매라고 해야 붉은배새매 아니면 황조롱이가 대부분이었으나 두 종 모두 매라고 불렀다. 맹금류인 두 종이 분류학적으로 서로 다른 무리란 걸 안 건 먼훗날의 일이었다. 붉은배새매(현재 천연기념물 323-2호)는 수리과이고 황조롱이(천연기념물 323-8호)는 매과로서, 둘은 날개의 생김새가 확연히 달랐다. 수리과인 붉은배새매는 날개 끝이 갈라져 있는 반면 매과인 황조롱이는 날개 끝이 갈라져 있지 않고 길고 뾰족했다. 당연히 나는 모습도 달랐다.


그러나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 식탐이 유난히 많았다. 어릴수록 그랬다. 개구리면 개구리, 쥐면 쥐, 살아있는 것이면 종류 불문하고 잡아다 주는 족족 무섭게 받아 먹었다. 그러니 성장속도도 매우 빨랐다.
또 영리했다. 참새는 물론 박새, 멧새, 딱새, 때까치, 밀화부리, 물총새, 소쩍새, 올빼미, 심지어 쏙독새까지 별의별 새들을 다 길러봤지만 이들 매처럼 영리한 새는 별로 보질 못했다. 우선 사람을 잘 알아봤다. 누가 누군지 신통방통할 정도로 잘도 구별했다. 그 만큼 주인도 잘 따랐다. 하루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5리가 넘는 학교까지 졸졸 따라와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매 하면 지금도 떠오르는 단어가 긴장감이다. 부리부리한 눈, 갈고리 같은 부리, 낫처럼 날카로운 발톱(매류의 속명인 Falco는 낫을 뜻하는 라틴어 Falx에서 유래), 금방이라도 비상할 것 같은 날렵한 날개 등 몸 생김새부터가 늘 긴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야성(野性)까지 강했다. 온갖 정성을 다해 길러 놓으면 십중팔구는 야성을 보이며 배신하기 일쑤였다. 먹잇감도 잘 받아먹고 말을 잘 듣다가도 돌연 집을 뛰쳐나가거나 딴전을 피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게 바로 야생 매의 특성이요 죽기 전까지 버리지 못하는 게 야성이었다.

 


요즘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북한 땅이 있다. 우리측 서해 5도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는 북녘 땅, 바로 장산곶과 사곶, 해주, 옹진반도, 개머리 해안, 무도 등 '연평도 도발'의 근원지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지역이 어떤 곳인가. 예부터 해류의 소용돌이가 심하고 험한 바위와 암초가 많아 해난사고가 유난히 많았다는 곳 아닌가. 해서 바다 쪽으로 가장 튀어나온 장산곶사(長山串祠)에서는 봄·가을이면 으레 제를 올렸고 효녀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다는 전래소설 '심청전'의 배경이 됐던 곳이며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드니~"로 시작되는 몽금포타령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이들 지역, 특히 장산곶과 해주는 '매'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이 지역 매는 특별히 장산곶매라 불리는데 사냥 나가기 전날 밤 자기 둥지를 부수면서까지 부리를 가는 속성이 있다"고 했던 곳이다.

 

그런 곳에서, 정말로 공교롭게도, 포성을 앞세운 긴장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오랫동안 해난사고가 잇따랐던 이유에서일까. 아니면 매의 본고장으로서 매의 못된(?) 습성만 본받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심술궂은 매사냥꾼의 '시치미 떼는 기질'이 남아서일까. 걸핏하면 엉뚱한 행동으로 서해 5도 주민은 물론 우리나라 국민 나아가 전세계인들을 마냥 경악케 하고 있다.
"갈 길은 멀구요 행선은 더디니~." 몽금포타령의 장단은 언제쯤에나 '한반도의 화음'으로 울려퍼질는지. 갈 길은 계속 멀어지고 행선도 점점 더 더뎌지는 것 같아 속이 울렁거린다.

철새들의 눈물을 잊지말자

 

 

우리나라에는 현재 귀한 손님들이 찾아와 있다. 겨울철새들이다. 조류인플루엔자를 우려하는 방역당국과 가금류를 기르는 농가에서는 마치 원수 취급하듯 곱지 않은 시선으로 경계하고 있지만, 생태적인 측면에서는 거의 1년 만에 만나는 반갑고 소중한 존재들이다.

 

철새가 반갑고 소중한 것은 지구촌 생태계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른바 국제환경대사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지구촌 생태계가 하나로 연결돼 있음을 알려주는 게 바로 철새다.
철새들은 매년 여름 일정한 번식지에서 번식을 마친 뒤 날씨가 추워지면 월동지로 이동해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 또 다시 번식지로 되돌아가 새끼를 친다. 따라서 철새들의 번식지와 월동지, 그리고 이동 중에 들르는 중간기착지의 생태계는 철새라는 자연생물을 매개로 하여 서로 연결돼 있다.
그러기에 철새와 관련된 일, 특히 철새보호 문제는 어느 특정지역의 일만이 아닌 번식지와 월동지, 모든 중간기착지와 연관된 국제적 사안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북쪽의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지역에는 매년 50종에 넘는 도요새와 물떼새가 번식하고 있다. 이들 철새는 여름철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에서 새끼를 친 뒤 겨울이 되면 남쪽의 호주와 뉴질랜드로 날아가 월동하고 이듬해 봄이 되면 다시 번식을 위해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로 되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이들 철새는 한반도 갯벌을 비롯한 여러 중간기착지에 들러 에너지를 보충한다.
따라서 이들 철새를 보호하기 위해선 번식지인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월동지인 호주와 뉴질랜드는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중간기착지에서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제 아무리 번식지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여름을 보냈다 하더라도 중간기착지에서 돌연 오염된 먹이를 먹게 된다면 그들의 삶은 허무하게 거기서 끝나고 만다.


철새보호와 관련해 우리나라의 역할과 위상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서남해안의 갯벌은 세계 5대 갯벌의 하나로 꼽힐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그 기능 또한 철새들의 번식지와 중간기착지로서 지구촌 생태계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산이다. 1997년 대암산 용늪을 시작으로 1998년엔 창녕 우포늪이, 2007년엔 태안 두웅습지가, 2009년엔 서천갯벌이, 올해엔 고창 부안갯벌이 람사르습지로 등록되는 등 14곳의 습지가 세계적으로 이름나 있다.
이같은 입장에 걸맞게 우리는 2008년도에 이미 환경올림픽이라 불리는 람사르총회와 더불어 국제습지연대 아시아지역회의를 개최한 바 있다. 회원국을 넘어서 주도국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며칠 전 G20 정상회의의 의장국으로서 전 세계인의 관심을 모았던 것이 우연이 아니듯 철새 혹은 습지 관련 국제회의에서의 위상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매립되는 갯벌과 그 위에서 방황하는 철새들이 부지기수로 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20여년 동안 우리나라 갯벌은 자그마치 774개 지구가 매립됐거나 매립될 예정이며 면적은 서울시의 3.2배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다 또 한편에서는 목하 4대강 사업으로 인해 많은 습지가 파헤쳐 지고 있다.


우리나라를 찾은 철새들이 눈물을 흘리면 지구촌 생태계에도 눈물이 흐른다는 점은 안중에도 없는 듯 하다. 철새가 중요한 환경지표란 점에서 그들의 눈물은 곧 그 우리 국민의 눈물이란 점도 까마득히 잊은 듯 하다.
또 하나 간절한 것은 조류인플루엔자와 관련해 철새들을 너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 말았으면 한다. 그들이라고 일부러 바이러스를 옮기겠는가. 그들도 어쩔 수 없는 1차 피해자란 점 명심하면서 방역업무를 추진했으면 한다.

대청호는 본래 다목적댐이다

 

대청호엔 두 종류의 어부들이 있다. 한쪽은 모터 혹은 엔진이 달린 동력선을 이용할 수 있는 어부들이고 또 다른 쪽은 노 젓는 무동력선만 이용해야 하는 어부들이다.
이들의 차이는 확연하다.

한쪽은 기동력이 뛰어나 하루에도 몇번씩 허가구역을 드나들며 고기잡이 할 수 있지만 다른 쪽은 기동력이 떨어져 허가구역의 십분의 일도 못 돈다. 그러니 어획량도 큰 차이가 난다.

그러나 그러한 '신분'의 차이는 당사자들의 경제력 때문이 아니다. 순전히 법 조항 때문이다. 환경정책기본법에 의한 수질보전 특별대책지역상의 차이가 그들을 갈라놓고 있다.
그 경계가 보은 회남대교다. 이 다리 위쪽, 즉 상류쪽으로는 수질보전 특별대책지역 제2권역이고 하류 쪽은 제1권역이다. 그래서 상류쪽은 동력선을 몰 수 있지만 하류쪽은 불가능하단다. 벌써 20년째 그렇게 통제하고 있다.
해서 하류쪽 어부들의 불만이 대단하다. 단지 하류쪽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차별 대우를 받아야 하는 현실이 싫단다.
그들도 상수원이 중요한 건 안다. 가까이에 상수원 취수탑이 있으니 어느 정도 통제나 규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정도가 문제란다. 넓고 수심도 깊은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으라고 허가해 주면서 무조건 노 젓는 무동력선만 이용하라면 아예 고기를 잡지 말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얘기다. 한 어부의 말이다. "내 허가구역을 노를 저어 가자면 가는 데만 10시간도 넘게 걸린다. 그러니 갈 수가 있겠는가. 포기할 수밖에…."


그들의 불만은 또 있다.

똑같은 제1권역 안에서 누구는 엔진 달린 동력선을 타고 다니고 누구는 노를 저어 다니는, 그런 불공평한 처사가 어디 있느냐는 얘기다. 그들이 지적하는 쪽은 다름 아닌 수자원공사(댐 관리단)와 지자체, 경찰 측이다. 상수원이 그렇게 중요한 곳이라면서 왜 자신들은 기름 넣는 엔진 배를 자유롭게 타고 다니느냐는 것이다. 그들이라고 위험성이 없는 건 아닐 텐데 왜 그에 대한 지적은 안 하는지 불만인 것이다.

하류쪽 어부들의 주장만을 들어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단속과 통제, 관리를 하려면 누구나 수긍하고 인정하는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하라는 얘기다. 똑같은 엔진에, 똑같은 기름을 넣는 배인데 누가 타면 안전하고 누가 타면 불안전하다고 하는 논리를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대청댐은 누가 뭐래도 '다목적 댐'이다. 홍수조절, 수력발전, 관개 및 상수·농공업 용수 공급 등 여러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댐이다. 본래의 목적이 다목적이라면 이용 측면도 말 그대로 다목적이어야 한다. 어느 한 쪽의 목적을 위해 다른 한 쪽의 목적이 위축되거나 제외된다면, 그에 따른 합당한 조치와 대책, 보상 등이 이뤄져야 마땅하다. 일방적인 희생은 곤란하다.

또 인공댐은 지역의, 나아가 지역민의 소중한 공동 자산이다. 태생적으로 지역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대청댐은 주변 지역에 있어 그동안 무슨 존재였는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유람선 운항 문제를 비롯해 각종 규제 완화 등 대청호 관련 현안에 대한 해법을 이같은 측면에서 다뤘으면 한다. 자연자원은 그것을 잘 지키는 것도 큰 과제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잘 이용하는 것도 큰 과제다.

특히 대청호 유람선 운항 문제에 관한 한 그에 대한 해답은 지금까지 '제1권역' 안에서 '기름 넣는 엔진 배'를 운항해 온 각 기관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기름 넣는 엔진 배가 수질보호에 위험한지 안 위험한지, 또 그외의 다른 문제는 없는지 등등…. 지역민들의 현명한 판단이 있길 기대한다.

멧돼지에게 더이상 빌미를 주지 말자

 

 

요즘 웬만한 산을 오르다 보면 흔히 보게 되는 흔적이 있다. 멧돼지 흔적이다. 전국의 거의 모든 산이 민둥산이었던 1960~70년대만 해도 깊은 산골에나 가야 볼 수 있었던 멧돼지 흔적이 지금은 도시 인근의 야산에서도 쉽게 목격될 만큼 예삿일이 됐다.
흔적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냥 지나간 발자국에서부터 먹이 찾느라 낙엽더미를 헤집어 놓은 흔적, 칡뿌리를 캐서 씹어먹은 흔적, 지난 밤에 눈 듯한 질척한 배설물, 여러 마리가 한 데 모여 진흙목욕을 한 흔적, 지나는 길목에 영역표시를 위해 나무둥치에 몸을 비빈 흔적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인상적이고, 한편으론 섬뜩하기까지 한 흔적은 멧돼지 산실(産室)이다. 멧돼지가 새끼 낳기 위해 만들었던 임시 거처인데, 보면 볼 수록 신기하고 교묘하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시야가 탁 트인 곳만을 골라 자리 잡는 것도 그렇고 참나무류나 산철쭉 같은 가는 나뭇가지를 낫으로 자른 것처럼 잔뜩 물어뜯어다 견고하게 집을 짓는 것도 그렇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나뭇더미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 새끼 예닐곱마리를 거뜬히 키울 수 있는 방이 있는 데다 사람이 올라가 아무리 굴러도 무너지지 않으니 보통 솜씨가 아니다.


그러나 말이 산실이지 실은 그처럼 위험한 흔적도 없다. 요즘 같은 가을철이라면 몰라도 새끼 낳는 5월경에 만일 그것과 마주친다면 그건 예사 상황이 아니다. 맹수에 가까운 야생 멧돼지가 1년중 가장 예민한 시기인 번식기, 그것도 갓 낳은 새끼를 데리고 있을 땐 언제 달려들지 모르니 마치 고장난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멧돼지 흔적이 많아졌다는 것은 멧돼지 개체수도 그만큼 많아졌다는 증거요 산에서 사람과 맞닥뜨릴 확률도 그만큼 높아졌다는 얘기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요즘 같은 가을철에 버섯사진을 찍으려고 속리산 인근 산자락을 막 오르는데 느닷없이 젊은 사람 하나가 1백미터 경주하듯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얼굴이 사색이 된 채 그저 앞만 보고 내뛰는 것이 무척이나 심상찮아 보였다. 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기 뒤에 뭐가 따라오지 않느냐며 나보고도 얼른 도망치라고 손을 저어댔다. 그 사람 뒤를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오긴 뭐가 오냐고 했더니 그제서야 달리기를 멈췄는데 여전히 다리를 후들거리는 걸 보니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진정 시키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럴만도 했다. 혼자서 정신없이 버섯을 따는데 바위만한 멧돼지 한 마리가 무엇엔가 놀란 듯 바쁜 걸음으로 산비탈을 내려오다 빙판에 구르듯 굴러떨어지는 걸 봤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버섯이고 뭐고 다 내팽겨치고 걸음아 나살려라 내튀는 중이었단다. 한편으론 우습기도 했지만 나 자신도 머리가 쭈뼛해지는 게 더 이상 올라갈 엄두가 안 나 그냥 내려온 적 있다.

 

버섯철이면 생각나는 그 때 그 상황.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야 실감 나지 않겠지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백두대낮 도심지에 멧돼지가 출현해 추격전을 벌이는 일이 갈수록 잦아지고 있고 산골 농작물은 아예 그들의 '텃밭'이 된 지 오래이니 언제 어느 때 멧돼지와 마주칠 상황이 벌어질 지 아무도 모른다.
해서 하는 얘긴데, 이제 더이상 멧돼지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으면 싶다. 산에 올라가 떼거리로 고성을 지르고 도토리든 산밤이든 보이는 대로 싹쓸이 해오고 먹다 남은 음식들 산중에 함부로 버리는 일 그만 하란 얘기다. 놀라고 배고프고 인간 먹거리에 자꾸만 길들여지니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바로 우리가 사는 도시와 마을일 수밖에….

지난 가을 산골에선 이런 일이 벌어졌다

 

유난히 길었던 지난 추석연휴 기간 동안 '사람폭탄'을 맞은 곳이 있다. 이른바 버섯산지라 불리는 산골마을이다. 모처럼만에 버섯이 많이 난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버섯을 따려고 연일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로 인해 산골마을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어디 사람뿐이랴. 한 사람당 거의 한 대씩 몰고 들어온 차량들도 산골 사람들에겐 폭탄이긴 매한가지였다. 동네 앞이든, 산골짜기든 길이란 길은 몽땅 차들이 가로막았으니 그것이 폭탄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동네마다 고성이 오가고 멱살잡이가 난무했다. 모두가 즐거워야 할 추석명절에 온갖 욕지거리가 메아리치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조용하던 산중에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산골 사람들에게 버섯은 다음 일년을 좌우하는 돈줄이나 다름없다. 농사거리가 변변찮은 사람들에겐 그보다 더 한 생계유지 수단도 없다. 그래서 '버섯농사'라고도 한다.
버섯 중에도 송이버섯은 현금과도 같다. 송이를 얼마만큼 따느냐에 따라서 그날 그날의 돈주머니 차이가 난다. 한해 가을동안 수백만원은 기본이요 무려 수천만원을 벌어 집까지 지은 사람도 있다.

 

더더군다나 올핸 특별한 해였다. 충북의 경우 4년 만에 '떼송이'를 보게 된 해다. 2년전과 3년전은 지독한 가을가뭄 때문에 송이가 나질 않았다. 지난해엔 나는 듯 마는 듯 했다가 금세 멈췄다. 그러니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떼송이이었겠는가. 너무 좋아 밤잠도 못 잔 산골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추석연휴가 유례없이 길게 이어지면서 때아닌 사람폭탄에 한껏 부풀었던 '송이의 꿈'이 홀딱 날아간 것이다. 산마다 넘쳐나는 사람들로 인해 졸지에 송이밭이 쑥대밭이 됐으니 수백만원, 수천만원은커녕 되레 밥 굶게 생겼다는 푸념까지 나왔다.
오죽하면 외지사람들에게 넌덜머리가 난다고 했겠는가. 송이 깨나 난다고 하는 산자락마다 여지없이 사람들이 들어가 짓뭉게 버렸으니 나던 송이도 쏙 들어갔다고 푸념이었다. 심지어 송이밭을 아예 망가뜨려 놓은 사람들까지 부지기수였다. 손갈퀴를 일부러 가지고 다니면서 송이밭이란 밭은 죄다 긁어놓아 황무지로 만들어 놓았다.

 

송이는 영물이란 얘기가 있다. 사람과 눈만 마주쳐도 성장을 멈춘다고 한다. 수십년간 송이를 땄다는 '도사'들 얘기다. 해서 송이꾼들은 송이밭을 자기 텃밭 가꾸듯 애지중지한다. 함부로 밟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송이를 딸 때도 산모가 갓난아기 다루듯 한다.
그런 송이밭을 무참히 밟아놓고 갈퀴질까지 해 놨으니 분통 안 터질 사람 어디 있겠는가. 송이를 따보겠다는 외지인들이야 재미삼아 그런다고 하겠지만 산골마을 송이꾼들에겐 한해농사가 달린 문제요 생계가 좌우되는 중대사다.

 

송이철 외지인들의 몰지각한 행렬은 급기야 산골인심까지도 변하게 만들었다. 가는 곳마다 '입산금지' '입찰지역' 팻말을 박게 만들었고 동네 입구마다 순찰도는 전문인력까지 생기게 한 원인제공도 기실 따지고 보면 외지인들이었다. 최근 들어선 '입산시 형사고발 조치'에 '변상 조치한다'는 글귀까지 눈에 띄고 있다.
심지어 쇠사슬로 차량통행을 막고 완장 찬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보초 서는 동네가 있는가 하면 산능선마다 초소를 짓고 용역(?)들로 하여금 24시간 불침번을 서게 한 동네도 있다. 그 좋던 산골인심이 도회지인심보다 더 사나워졌다.
송이철 다른 볼일이 있어서 찾아간 방문객에게도 송이도둑 취급하며 퉁명스럽게 대하는 산골인심, 입찰멤버중 한 사람을 만나려면 군대 면회절차보다도 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 산골인심, 이 모든 게 다 '외지인'이라 불리는 우리들 탓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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