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입증해주는 것이 고대 이집트서 발굴된 어로(漁撈)장면 벽화요 세계 각지서 발견되는 구석기인들의 어구(漁具) 유물이다.
어로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용하는 도구와 대상물을 잡는 난이도 등을 생각할 때 물고기를 잡는 어로가 들짐승과 날짐승을 잡는 수렵(사냥) 보다는 다소 이르게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고대인들에게 있어 어로와 사냥은 모두가 그들이 먹고살기 위한 절대적인 생활수단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따라서 어로와 사냥은 나물이나 열매 등을 채집해 먹던 일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생활수단이자 인류 문명을 탄생시킨 근원적인 삶의 양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현대인들의 가슴 한 편에는 먼 옛날의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물고기와 새, 짐승들을 보면 우선 그것을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거나, 최소한(?) 그것을 직접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본능적으로 각인돼 있는 듯 하다.
예쁜 꽃과 잘 익은 나무열매를 보아도 그런 충동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굳이 성악설이니 성선설이니 하는 형이상학적인 얘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본능 내지 잠재의식을 어느 정도 갖고 태어난 것만은 사실인 듯 싶다.
필자가 과거 생태교실을 운영하면서 느낀 바도 그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물고기는 커녕 풀잎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어린이와 학부모들도 일단 기회가 주어지면 거의 대부분 그런 행동을 보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진행상 물고기를 채집해 보라고 하면 처음엔 멈칫멈칫 하다가도 다른 참가자들이 물 속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기 시작하면 그들도 금새 바지가랑이를 걷어붙이고 신나게 잡아댄다.
이러한 사례는 특히 그 동안 물고기를 전혀 잡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들 대부분이 '잡는 일'에 쉽게 적응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오히려 더 재미를 느낀다는 점이다.
곤충채집을 할 때나 식물채집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은 비단 군중심리에 의한 것만은 아닌 듯 하다.
그러나 필자가 더욱 놀란 것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물고기 등을 잡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그들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 또한 가슴 한 편에 강하게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생태교실을 운영할 때 매번 참가자들로 하여금 물고기 등을 직접 채집케 한 다음 채집된 생물에 대하여 설명해준 후 곧 바로 채집한 당사자들에게 풀어놓아 주도록 해왔는데 그 반응이 의외로 좋게 나타나 참가자들의 대부분이 오히려 잡을 때보다도 더 한 경쟁을 벌이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한 경쟁은 단순히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괜한 경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이보다 더 한 자기모순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채집한 생물에 대한 강한 애착심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 생물에 대한 애착심은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의 소중함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충북 영동의 초강천으로 생태답사 갔을 때의 일이다.
그 날 역시도 채집한 물고기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물고기를 막 풀어놓아 주려고 하는 데 한 아이가 하천이 떠나가도록 울어 제키는 것이었다.
하도 의아하고 당황스러워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다른 아이가 이미 가져다 풀어놔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 것을 대신 풀어 놓아주면 어떻겠니"하고 다른 물고기를 갖다 주었더니 그 어린이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 어린이의 말인 즉, 물고기면 다 같은 물고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또 한번 깊이 깨달았다.
맞다. 물고기면 다 같은 물고기가 아닌 것이다.
자신이 잡은, 그것도 공들여 애써서 잡은 그 물고기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풀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린이들이 자신이 잡은 물고기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이미 물고기를 잡을 때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채집을 했고 그 과정에서 물고기에 대한 애착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마음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필자에게는 매우 소중한 경험이다.
생태교실을 열었던 가장 큰 동기가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자연과 인간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기 위함이었는데 행여 목적과 방법이 뒤바뀌어 생명을 경시하고 자연의 위대함을 손상시키지는 않았는가 반성하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을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통해 내 자신이 배우고 느끼는 점은 무척 많다.
내가 겪은 경험 또한 그렇다.
생물을 잡고 풀어놓아 주는 과정에서 그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욱 진한 생명의 소중함을 느낄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에게 귀중한 깨우침을 준 그 어린이와 참가자들에게 늦게나마 고마운 뜻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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