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생활해 왔다.

이를 입증해주는 것이 고대 이집트서 발굴된 어로(漁撈)장면 벽화요 세계 각지서 발견되는 구석기인들의 어구(漁具) 유물이다.

어로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용하는 도구와 대상물을 잡는 난이도 등을 생각할 때 물고기를 잡는 어로가 들짐승과 날짐승을 잡는 수렵(사냥) 보다는 다소 이르게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고대인들에게 있어 어로와 사냥은 모두가 그들이 먹고살기 위한 절대적인 생활수단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따라서 어로와 사냥은 나물이나 열매 등을 채집해 먹던 일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생활수단이자 인류 문명을 탄생시킨 근원적인 삶의 양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현대인들의 가슴 한 편에는 먼 옛날의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물고기와 새, 짐승들을 보면 우선 그것을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거나, 최소한(?) 그것을 직접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본능적으로 각인돼 있는 듯 하다.

예쁜 꽃과 잘 익은 나무열매를 보아도 그런 충동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굳이 성악설이니 성선설이니 하는 형이상학적인 얘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본능 내지 잠재의식을 어느 정도 갖고 태어난 것만은 사실인 듯 싶다.

필자가 과거 생태교실을 운영하면서 느낀 바도 그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물고기는 커녕 풀잎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어린이와 학부모들도 일단 기회가 주어지면 거의 대부분 그런 행동을 보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진행상 물고기를 채집해 보라고 하면 처음엔 멈칫멈칫 하다가도 다른 참가자들이 물 속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기 시작하면 그들도 금새 바지가랑이를 걷어붙이고 신나게 잡아댄다.

이러한 사례는 특히 그 동안 물고기를 전혀 잡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들 대부분이 '잡는 일'에 쉽게 적응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오히려 더 재미를 느낀다는 점이다.

곤충채집을 할 때나 식물채집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은 비단 군중심리에 의한 것만은 아닌 듯 하다.

 

그러나 필자가 더욱 놀란 것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물고기 등을 잡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그들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 또한 가슴 한 편에 강하게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생태교실을 운영할 때 매번 참가자들로 하여금 물고기 등을 직접 채집케 한 다음 채집된 생물에 대하여 설명해준 후 곧 바로 채집한 당사자들에게 풀어놓아 주도록 해왔는데 그 반응이 의외로 좋게 나타나 참가자들의 대부분이 오히려 잡을 때보다도 더 한 경쟁을 벌이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한 경쟁은 단순히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괜한 경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이보다 더 한 자기모순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채집한 생물에 대한 강한 애착심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 생물에 대한 애착심은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의 소중함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충북 영동의 초강천으로 생태답사 갔을 때의 일이다.

그 날 역시도 채집한 물고기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물고기를 막 풀어놓아 주려고 하는 데 한 아이가 하천이 떠나가도록 울어 제키는 것이었다.

하도 의아하고 당황스러워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다른 아이가 이미 가져다 풀어놔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 것을 대신 풀어 놓아주면 어떻겠니"하고 다른 물고기를 갖다 주었더니 그 어린이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 어린이의 말인 즉, 물고기면 다 같은 물고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또 한번 깊이 깨달았다.

맞다. 물고기면 다 같은 물고기가 아닌 것이다.

자신이 잡은, 그것도 공들여 애써서 잡은 그 물고기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풀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린이들이 자신이 잡은 물고기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이미 물고기를 잡을 때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채집을 했고 그 과정에서 물고기에 대한 애착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마음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필자에게는 매우 소중한 경험이다.

생태교실을 열었던 가장 큰 동기가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자연과 인간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기 위함이었는데 행여 목적과 방법이 뒤바뀌어 생명을 경시하고 자연의 위대함을 손상시키지는 않았는가 반성하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을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통해 내 자신이 배우고 느끼는 점은 무척 많다.

내가 겪은 경험 또한 그렇다.

생물을 잡고 풀어놓아 주는 과정에서 그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욱 진한 생명의 소중함을 느낄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에게 귀중한 깨우침을 준 그 어린이와 참가자들에게 늦게나마 고마운 뜻을 전하고 싶다.

세계 각국의 금언과 속담 가운데에는 물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스위스의 금언 가운데에는 '물은 생명'이란 것이 있으며 프랑스 금언으로는 '물은 황금'이란 것이 있다.

또 오스트리아에서는 '빈의 시민은 여행에서 돌아오면 먼저 빈의 물을 마신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네덜란드에서는 '물은 슬기롭게 쓰라'는 금언이 전해지고 있다.

'사람은 우물이 마를 때까지 물 같은 것은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은 생명의 고동이다'란 속담은 아일랜드 것이고 '물은 가장 오래된 약'이란 속담은 핀란드 것이다.

그밖에 '물과 민중은 억제할 수 없다'는 이탈리아, '물은 귀중한 것이니 절약하여 쓰자. 물은 생명이다'는 남아프리카, '물은 작아도 큰 구실을 한다'는 태국, '물은 쓰되 낭비하지 말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물을 멋지게 쓰자. 물을 사랑하자'는 아메리카, '물의 낭비는 삼가라'는 튀니지아, '마실 수 없는 물은 그냥 흐르게 하라'는 스페인과 멕시코의 속담 및 금언이다.

이들 물과 관련된 금언과 속담들은 각 나라 사람들의 물에 대한 관념이 그대로 농축돼 있는 값진 말들이다.

더욱이 이들 금언과 속담은 대부분 물은 소중한 것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경구적 성격이 강해 오늘을 사는 각국의 현대인들로 하여금 물의 소중함을 새롭게 다지게 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그러기에 이러한 금언과 속담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그 의미가 전혀 퇴색되지 않은 채 각 국민들의 가슴속에 그대로 전해 내려오면서 오늘날 가장 중요한 '무형의 물지킴이'  역할을 해오고 있다.

 

우리 나라에도 물과 관련된 속담은 여럿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숫자적으로는 전 세계에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울 정도로 많은 편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대부분이 물의 자연적, 물리적인 특성만을 은유한 것들일 뿐 외국의 경우처럼 물의 소중함을 강조한 것은 드물다.

아니 드물다고 하기보다는 아예 눈을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거의 없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 실례로 '물 먹은 배만 튀긴다',  '물밖에 난 고기',  '물 본 기러기 꽃 본 나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물에 빠진 것 건져놓으니까 내 봇짐 내라 한다',  '물위에 뜬 기름', '물은 건너봐야 알고 사람은 지내봐야 안다'  등등은 물의 자연적, 물리적  특성만을 은유한 것들일 뿐 물의 소중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물건을 마구 헤프게 쓸 때 '물 쓰듯 한다'고 표현할 정도로 되레 물을 함부로 써도 되는 것쯤으로 비하시켜 온 게 우리들이다.


아무리 물이 지천했던 나라였을 망정 물의 진정한 가치와 소중함을 담은 금언이나 속담 하나 번듯하게 남아있지 않은 우리가 부끄러울 따름이다.

물이 흔하디 흔하던 시대에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같은 '엉뚱한 혜안(?)'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물과 관련된 세계 각국의 금언과 속담을 들먹일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물이 가장 소중한 자연자원으로 인식되는 이른바 물 기근 시대를 맞아 우리도 이젠 '물 쓰듯 한다'는 말을 '물처럼 귀하게 쓴다'는 뜻으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물의 진정한 가치와 소중함을 강조하는 멋진 금언 내지 속담이 탄생되길 기대해 본다.

물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동물과 마찬가지로 식물도 자신의 생명유지와 종족보존을 위해 온갖 다양한 생존전략을 갖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식물의 '자손 퍼트리기 전략'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신비롭다.

예를 들면 민들레, 씀바귀, 박주가리 같은 식물들은 자신의 씨에 가벼운 솜털(씨수염)을 달아 바람 타고 둥실둥실 멀리 퍼져나가고 소나무, 단풍나무, 가중나무 같은 것은 씨에 날개를 달아 멀리멀리 퍼져 나간다.

또 도깨비바늘과 도꼬마리 등은 갈고리가 달린 가시를 이용해 사람의 옷이나 짐승 털에 붙어 장거리 여행을 하고 산삼, 천남성, 오미자 등은 붉은 열매로 새를 유혹해 스스로 먹이가 됨으로써 산너머 강 건너까지 손쉽게 이동한다.

봉숭아 종류와 콩과 식물들은 용수철처럼 탄력성이 있는 씨 주머니를 터트려 종자를 멀리 날려보낸다.  

이렇게 퍼져나간 씨들은 또 끈질긴 생명력으로 주변 여건이 새싹을 틔우기에 적당한 조건을 갖출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오랜 기간 자신의 발아력을 유지한다.

실례로 인도의 어느 늪지대서 발견된 연씨는 1천년이 지났는데도 새싹이 돋아났으며 루피너스 아르티쿠스(Lupinus articus)란 식물종자는 무려 1만년이 지난 후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싹을 틔워 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더욱이 이 식물은 지금의 동종 식물과는 형태학적으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학자들을 더욱 놀라게 했음) 

식물의 씨는 또한 그것이 다 익어 땅에 떨어진 다음에도 일정 기간 동안 휴면기를 갖는다.  어린 새싹과 뿌리가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오기 위해서는 적당한 온도와 수분, 산소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모체(母體)에서 떨어져 나왔다해서 모든 씨앗이 금방 새싹을 틔우는 게 아니다.

어떤 것은 운이 좋아 별 어려움을 겪지 않고도 껍질이 물러져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반면 어떤 것은 몇 년이 지나도 적당한 조건을 만나지 못하고 딱딱한 껍질을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다.

 

하지만 식물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을 동원해 자신이 생산해 낸 씨앗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 힘들이지 않고도 새싹을 틔울 수 있도록 '어미(?)'로서의 배려와 임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 실례를 야생의 산삼에서 볼 수 있다.

산삼은 자신의 열매가 산새들의 눈에 잘 띄도록 붉고 탐스럽게 맺음으로써 그 것을 따먹은 새들의 이동거리까지 종자를 퍼트린다.

그러나 산삼의 속셈은 거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산새의 먹이가 되면 연한 육질 부분은 소화가 되지만 단단한 씨는 새의 뱃속을 통과하는 동안 모래주머니의 모래에 깎이고 위액에 들어있는 산(酸) 성분에 깎이어 새똥과 함께 배출되기 때문에  손쉽게 발아할 수 있는 조건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단한 겉껍질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비바람 속에서 풍화돼야만 싹틀 조건을 맞게 된다.


이러한 배려는 비단 산삼에게서만 있는 건 아니다.

알고 보면 이 땅의 모든 식물 하나 하나가 제 종자 제 씨앗을 위한 '숭고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비록 작디작은 씨 한 톨이지만 그 속에 내재된 생존전략과 생명현상은 그것을 알면 알수록 더 큰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느끼게 된다.

씨 한 톨의 위대함과 신비로움.

이것이 바로 이 지구상의 식물 생태계를 움직이는 숭고한 힘이요 생존원리인 것이다.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날.

시절은 바야흐로 온갖 식물들이 '씨 한 톨'을 만들기 위해 꽃가루를 열심히 날리는 초여름이다.

예전 같으면 시골 아낙들이 송홧가루 받느라 온산을 누빌 때이지만 지금은 세태가 변해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비단 세태만 변한 게 아니다.

꽃가루보다 더 한 황사가 온 하늘을 뒤덮어 사람들을 잔뜩 긴장하게 만드는 그런 세상이 돼 버린 것이다.

전국의 초등학교가 어버이들을 위한 운동회 등 각종 행사를 여는 이 시기에, 하필 '황사 주의보'라니....

행여 황사와 함께 날아온 오염원들이 식물들의 꽃가루에 묻어 돌연변이를 낳는 씨앗을 만들지나 않을는지.

괜한 걱정이 앞선다.

 

우리는 흔히 잡초(雜草)란 말을 쓰고 있다.

풀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그래서 있으나 마나한 것쯤으로 취급되는 풀이 곧 잡초다.

아니 농사를 짓는 이들에겐 오히려 '없었으면 하는 풀'이 바로 잡초요 잡풀이다.

사전을 찾아봐도 잡초 또는 잡풀이란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대수롭지 않은 풀'로 풀이돼 있다.

대수롭지 않은 풀!.

여기서 대수롭지 않다는 말은 대단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대수로움의 주인은 누구인가.

대단한 우문(愚問)이지만 그 주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이다.

'인간의 잣대'로 그들을 바라보니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을 리 없고 대수로울 리 만무다.

그래서 갖다 붙인 이름이 잡초요 잡풀이다.

잡초와 잡풀이란 말은―그 동안 인간에 의해 순전히 타의적으로―그 범주에 속해온 당해 풀들에겐 대단히 기분 나쁘고 화가 나는 말일 것이다.

인간에게 쓸모가 없다고 해서 굴비 엮듯 한데 묶어 '풀 이하의 이름'을 달아 경멸하는 까닭에서다.

풀의 입장에서 보면 그 보다 더 서럽고 야속한 말이 없을 것이다.

엄연히 풀이면서도 풀 이하의 대접을 받아야 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대자연이 어찌 저희 인간들만의 것인가.

속이 터지고 복장이 터질 일이다.

인간의 오만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 오만은 자연에 대한 오만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잣대가 인간중심으로 못박히게 된 그 첫 걸음마가 잡초와 잡풀이란 말에서 비롯됐다는 뜻이다.

그러한 오만으로 인하여 그 동안 우리 인간은 얼마나 대자연을 깔보고 멸시해 왔던가.

그 깔봄과 멸시는 고작 '대수로운가 대수롭지 않은가'라는 조그마한 잣대에서 출발하여 결국 대자연속의 모든 식물을 잡초 또는 잡목이라는 하나의 부류와 유용식물이라는 또 다른 부류로 이분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관심마저도 유용식물에게만 쏟아오게 하는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다.

 

어찌 대자연의 온갖 식물들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해야 하는가.

인간에게 대수롭고 필요하면 관심의 대상이고 그렇지 않으면 관심조차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그런 논리가 대자연의 섭리를 얼마나 무시하는 말인가.

자고로 이유없는 삶은 없다고 했다.

대자연의 모든 생명은 나름대로 삶의 이유와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잡초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쓸모 없는 풀이 어디 있으며 있으나 마나 한 풀이 어디 있는가.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대자연의 한 구성원이자 주인으로서 모두가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에게도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소임이 있다.

어찌 그 소임이 인간에게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공연한 잣대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

하거늘 우리 인간은 되레 그릇된 잣대를 만들어 대자연을 멸시해오길 꺼리지 않았다.

이제 그 잘못된 잣대는 버려야 한다.

자연과 인간이 둘이 될 수 없고 인간은 자연을 벗어나 살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깨달은 이상 그 그릇된 잣대를 버려야 한다.

그릇된 잣대를 버리는 길은 지금부터라도 잡초와 잡풀이란 말이 대자연을 얼마나 얕잡아 보는 '건방진 단어'인가를 깊이 깨달아 그같은 단어들을 쓰지 않는 방법밖에 없다.

지금까지 잡초로 인식돼 온 풀들도 저마다 각각의 이름을 갖고 있다.

바랭이, 뚝새풀, 방동사니, 새우풀, 크령, 수크령 등이 그들이다.

따라서 제각기 붙여져 있는 이들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굳이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잡초와 잡풀이란 말 대신 들에서 자라는 풀이란 뜻의 '들풀'이나 '야생초'로 바꿔 불러야 한다.

이들을 또 유용식물(작물 포함)과 구분할 필요가 있을 때엔 '여느풀' 또는 '보통풀'이라는 명칭이 어울릴 성싶다.

'예사풀'이란 이름도 괜찮을 듯 하다.

명칭이 여러 가지라 혼란스러울 것 같지만 그래도 잡초와 잡풀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는 것이 그나마 대자연을 업신여기지 않고 모든 풀들을 평등하게 대해 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들을 사용할 경우에도 반드시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그들도 그들 나름 대로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또 더 나아가 그들도 자연생태계를 이루는 중요 구성원이자 대자연의 주인이란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 세상에 잡초와 잡풀은 없는 것이다.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우리 나라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상한 광경(?)'을 종종 보게 된다.

이탈리아 로마 한 복판의 질경이와 폼페이유적의 명아주, 헝가리 페스트의 자귀나무, 호주 도로변의 민들레, 뉴질랜드 농가의 뽕나무 등은 국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라 그리 이상할 것도 없지만, 그 식물들을 포함한 모든 자연물들이 그곳 사람들과 진정한 교감을 나누며 한데 어우러져 생활하는 것을 보면 정녕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그 이상하게 보이는 광경 중의 하나는 바로 사람들과 야생 새들의 어우름이다.

지구촌 제일의 첨단도시로 자부하는 프랑스 파리 시내의 식당 안에 날아들어 손님들로부터 먹이를 받아먹는 야생 참새들과 그 참새들을 마치 집에서 기르는 관상조 대하듯 친근하게 대해주는 그곳 사람들의 모습이라든가, 몽마르뜨 언덕의 잔디밭에 앉아 오고가는 인파에도 아랑곳 않고 한가롭게 먹이를 쪼고 있는 찌르레기와 그 찌르레기를 인파의 한 무리로 인정하는 그곳 사람들의 모습은 감히 우리 나라에서는 꿈에서도 볼 수 없는 '해괴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호주의 브리스번에 있는 사우스뱅크 공원지대에서 산책 나온 사람들과 파티라도 열듯 함께 모여 즐겁게 노는 흑조 떼와 오리 떼는 물론이거니와 시드니 해안가에서 사람들과 노닐며 재롱을 피는 바다갈매기들, 뉴질랜드의 한 도시에서 탁자 위에 앉아 오수를 즐기는 따오기들의 모습에서도 우리와는 거리가 먼 딴 세상이란 느낌을 받긴 매한가지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은 또 새 이외의 다른 생물들에게도 사랑과 정성을 베푼다.

남의 일에 참견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려 못 견딘다는 이탈리아 사람들까지도 세계적 관광지인 폼페이 유적지에 사는 도마뱀들을 마치 전시품인 양 자연 그대로 놔두고 있으며 우리보다 형편이 못하다고 믿고 있는 필리핀 사람들까지도 담벼락에 붙어 징그러운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는 도마뱀붙이를 손님처럼 대해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외국 사람들의 진정한 자연사랑은 또 있다.

그들은 자연을 가꾸되 가능한 한 주변생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연을 자연답게 가꾸어주고 인간 스스로 자연의 하나가 돼 그 속에서 함께 생활한다.

자연을 절대 인간의 소유물로 보질 않는다.

자연 속에 집을 짓되 건물자체가 자연과 친화되도록 짓고 그 속에서 자연을 즐긴다.

공원을 만들어도 그렇다.

공원을 자연상태 그대로 조성하기 때문에 장소가 어딘 들 전혀 어색하지 않고 친밀감을 준다.

하지만 외국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진정한 자연사랑만 있는 건 아니다.

그들에게도 우리가 모르는 자연파괴의 이면이 있다.

또한 우리 나라 사람들이라고 해서 허구헌 날 자연파괴만 일삼는 건 아니다.

참새만 보면 소주 한 잔이 생각나고 뱀을 보면 몸보신부터 생각하는 것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국민 모두가 자연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우리에겐 자연경외 사상의 전통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진정한 실천'에 있다.

그 진정한 실천의 유무는 자연이 말해준다.

조그마한 인기척에도 똥줄이 빠져라고 도망치는 우리 나라 참새와 식당 안에까지 날아들어 손님이 주는 먹이를 사랑스럽게 받아먹는 프랑스 파리의 참새가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자연은 그렇게 솔직한 법이다.

행여 사랑을 베푼답시고 한번 우리 나라 참새에게 먹이를 던져 줘 보라.

아마 돌멩이를 던지는 줄 알고 십리는 줄행랑 칠 것이다.

공원에 사는 양비둘기들도 외국 것과 우리 나라 것의 눈치가 다르다.

외국 공원, 특히 유럽 쪽의 공원에 사는 양비둘기들은 먹이를 주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다가와 평화로운 몸짓을 보이는 반면 우리 나라 것은 아무리 맛있는 먹이를 주어도 이 사람 눈치 저 사람 눈치 다 봐가면서 마치 남의 집 음식을 훔쳐먹는 양 '잔치집의 개꼴'을 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회가 먹고 싶으면 남의 집 담장을 타고 넘어 들어가 정원의 연못 속에 든 비단잉어라도 몰래 잡아다 비빔회를 만들어 먹고 새고기가 먹고 싶으면 고가도로 난간에서 자고 있는 양비둘기라도 잡아다 소금구이를 해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견강부회식으로 억지 예를 들기 위해 일부러 꾸며낸 과장이 아니다.

필자는 그런 사람들을 적어도 대여섯 사람은 보았다.

이러한 직성들이 우리 나라의 자연을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하니 20년 가까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그들의 타고난 보신주의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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