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미물이고 누가 영물인가


자연 생태계에는 새끼에 대한 사랑이 유난히 강한 동물이 있다.
예를 들어 꼬마물떼새를 비롯한 물떼새류와 원앙이, 꿩, 쏙독새 등은 알을 낳아 둔 둥지 근처나 어린 새끼가 있는 곳에 낯선 침입자가 나타나면 어미새는 마치 부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몸이나 날개를 갑자기 늘어뜨려 금방 잡힐 것처럼 보이거나 한쪽 날개가 부러진 것처럼 옆으로 누워 날개를 푸드덕거리기도 하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넘어지기까지 한다. 그러면 침입자는 그 행동에 현혹돼 잡으려고 달려들게 마련인데 어미새는 그때마다 잡힐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도망치며 침입자를 먼곳으로 유인한다. 어미새의 목숨을 담보로 알과 새끼를 보호하는 강한 모성애를 엿볼 수 있다.

또 꾀꼬리와 때까치, 파랑새는 둥지 가까이에 천적이 다가가면 큰 경계음을 내며 잽싸게 공격한다. 행여 둥지를 건들라치면 마치 사생결단을 한 것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얼굴과 머리를 마구 공격하는데 특히 어린이와 여자는 어떻게 용케 알고 더욱더 악()을 써 혼비백산하게 만든다. 이 역시 목숨을 건 강한 새끼사랑이다.

새 가운데에는 또 새끼가 어미를 도와 동생들을 기르거나 둥지를 트는 등 '가족애'가 유난히 두터운 새도 있다.
앞서 말한 꾀꼬리가 그 주인공인데 지난해 태어난 1년생 새끼 꾀꼬리는 이듬해 어미가 둥지 틀 때 함께 재료를 물어다 틀고 또 동생들이 태어나면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줌으로써 어미에게 은혜를 갚는다. 또한 둥지에 침입자가 나타나면 어미보다 더 맹렬히 공격해 동생들을 지켜낸다.
이경우 1년생 새끼를 조류학에서는 '헬퍼(Helper)'라 부르는데 이 헬퍼의 행동은 실제로는 어미가 되기 위한 학습과정이나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한 효조(孝鳥)가 없고 더한 가족애도 없을성 싶다.

곤충도 강한 자식사랑을 보이는 게 있다. 수서곤충인 물자라는 암컷이 수컷 등에 알을 낳으면 수컷은 부화할 때까지 업고 다니며 애지중지 보호한다. 또 에사키뿔노린재는 자신의 알을 몸으로 감싼채 꼼짝 않고 부화할 때까지 보호한다.

물고기도 자식사랑이 유난히 강한 게 있다.

우리나라에 사는 열동가리돔과 줄도화돔은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이 입으로 받아 부화할 때까지 넣고 다니며 보호한다. 수컷의 입이 부화장인 셈이다. 자신은 먹을 것도 못 먹어가면서 오로지 새끼만 보호하는 참으로 기특하고 영특한 부성애다.

또 해마라는 물고기는 수컷 배에 육낭(育囊)이 있어 암컷이 낳은 알을 받아 부화할 때까지 살신보란(殺身保卵)한다. 열거하자면 끝없는 이러한 동물들의 자식사랑은 그 내면을 알면 알수록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경외감마저 든다. 자연은 인간의 어머니라 했던가. 사유(思惟)가 없는 이들 동물도 자식과 부모, 가족을 사랑하는 지고지순의 본능을 갖고 종족 유지에 최선을 다하는 게 대자연의 이치다.

하물며 인간사는 어떤가. 걸핏하면 어린 핏덩이를 남의 집앞이나 화장실에 내다버리고 자식들은 어버이를 돈 없고 늙었다는 이유로 마구 학대하거나 홀로 살게하는 현대판 고려장이 난무한다.

이유도 모른채 가족들과 헤어져 험한 세상을 방황하는 미아들이 부지기수고 알량한 돈 몇푼과 성적 욕구 때문에 남의집 귀한 자식 유괴해 목숨 끊는 비정한 사건이 연일 터진다. 우리가 미물이라 깔보는 동물들은 자식사랑 부모사랑 가족사랑이 변치않는데 사람들은 그 반의 반도 못 따라 가는 이들이 허다하다. 허니 누가 미물이고 누가 영물인가. 자식과 부모,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5월 가정의 달이다.

철쭉꽃이 폈다. 그것도 흐드러지게 폈다.

대전,청주 등 도회지 부근에선 이미 지난달 24일께 철쭉꽃이 폈고 속리산 뒷자락의 사담 계곡엔 28~29일께부터 피기 시작했다.
철쭉꽃만이 아니다.

눈송이처럼 희게 피는 팥배나무꽃도 사담계곡에 흐드러지게 피어 제모습을 알리고 앙증맞고 기이한 모습의 매발톱꽃도 온통 꽃망울을 터트렸다.
문제다. 이들 꽃이 핀 게 문제가 아니고 '이르게' 핀 게 문제다.

혹자는 꽃 몇 종 이르게 폈다고 뭐 그리 호들갑 떠나 할 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다.

철쭉꽃과 팥배나무은 보통 5월 중순께나 핀다. 그런데 올해엔 4월 하순께 피기 시작했다. 매발톱꽃은 더하다. 보통 6~7월에 피지만 요즘 어딜 가나 만개했다.
이미 진 꽃도 있다. 대개 5월 이후 꽃을 피우는 귀룽나무는 올해엔 4월 하순 꽃이 폈다 진 후 지금은 열매까지 맺혔다.

아그배도 꽃잎을 떨군 지 오래다.

왜 그럴까. 날씨 때문이다.

날씨가 하도 이상스러우니 꽃들마저 개화시기에 혼란이 온 것이다.
요즘 날씨를 보라.

5월초인데 낮기온은 벌써 한여름을 방불케 하고 아침 저녁으론 되레 썰렁하다. 봄과 한여름 날씨가 공존해서다.

어떨 땐 수은주가 곤두박질쳐 극심한 일교차를 보인다. 얼마전 괴산,보은 등 내륙지역에 엄청난 된서리가 내린 데 이어 오늘(6일) 또 다시 서리가 왔다.
올해엔 유난히 날씨가 변덕스럽다.

예년에 비해 무더위가 훨씬 이르게 찾아온 데다 두 세 차례 썰렁한 날씨가 반복되면서 한여름인지 봄인지 종잡을 수 없게 하고 있다.
날씨가 이러니 생태달력인들 온전할 리 없다.

봄에는 봄꽃이, 여름엔 여름꽃이 펴야 정상적인 생태달력인데 봄꽃과 여름꽃이 한 데 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생태계 곳곳에서 이상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모기와 병해충이 조기 출현하고 산란기를 맞은 물고기들이 알을 낳지 않고 방황(?)한다.

또 큰 일교차와 지난번 내린 된서리로 농축산물이 피해를 입었다.
이른바 '양봉철'이 왔어도 식물의 꽃에서 꿀이 적게 만들어지는 바람에 양봉업자들이 울상이다. 극심한 일교차 때문이다.
냉해가 더한 곳은 고추재배 농가와 과수농가다. 애써 심은 어린 고추묘는 지난 된서리에 얼어죽거나 잎이 말라 다시 심어야 할 판이고 이제 막 꽃을 떨군 사과,배,복숭아는 어린 열매가 동해를 입어 과육이 기형으로 자라는 피해를 입게 됐다.
또 산란계를 키우는 양계농가에서는 때이른 무더위로 닭들이 먹이를 잘 먹지 않아 산란율이 크게 떨어졌다고 하소연이다.

가뜩이나 조류인플루엔자로 멍든 가슴 날씨로 인해 더욱더 찢어진단다.

기후는 변한다.

지구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계속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기후변화는 그 속도가 너무 빠르게 나타난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수 백년 동안에 이뤄질 기후변화가 불과 몇십 년만에 나타나고 있고 그 속도는 점점더 빨라지고 있다.
생태계는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생태계는 갈팡질팡한다.

계절의 흐름과 밤낮의 길이를 감지하는 '생태시계'가 온전히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우이지만 동식물의 생태시계가 아예 고장나면 어떻게 될까.

여름철새와 겨울철새의 구분이 없고 각종 해충이 시도 때도 없이 들끓게 될 것이다. 생태계내의 계절적인 질서가 깨져 말 그대로 혼돈의 세계가 오게 된다.

현실은 어떤가.

봄과 여름은 물론 사계절의 경계가 모호해진 한반도. 그래서 봄꽃과 여름꽃이 함께 피고 여름철새인 백로,왜가리가 겨울에도 이동하지 않는 이상해진 생태계.

우린 지금 혼돈의 세계, 무질서의 세계에 이미 살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심각성도 모른 채….

바야흐로 산나물철을 맞아 온 산이 산나물 밭이다.

이웃집 할머니 봄나물 캐러 들로 나서던게 엊그제 같은데 요즘엔 산으로 향한다. 세월 참 빠르다. 봄인가 싶더니 여름이고 봄나물 나왔다 하니까 산나물이다.

산나물은 종류가 많다. 대표격인 취나물만도 곰취, 참취, 수리취, 분취, 미역취, 개미취, 좀개미취, 벌개미취, 바위취, 병풍취 등 10가지가 넘고 고사리, 고비, 원추리, 참나물, 어수리, 솜대, 모싯대, 박쥐나물, 어리병풀, 우산나물, 물레나물, 남산제비꽃 등 그 수가 엄청나다.

전해오는 말에 소가 먹을 수 있는 건 사람이 먹어도 된다고, 적당히 데쳐 우려내면 웬만한 새싹은 나물이 된다.

그러나 이 철에 나는 새싹이라고 무턱대고 먹어선 크게 후회한다. 맹독성 식물 때문이다. 초오류(草烏類)인 투구꽃, 놋젓가락나물, 그늘돌쩌귀 등과 앉은부채류가 바로 요주의 식물이다.

특히 초오류는 옛날 사약재료로 이용됐을 만큼 독성이 무척 강하다.
또 앉은부채나 애기앉은부채는 잎이 배추처럼 소담해 먹는 나물로 오인하기 쉬우나 먹는 즉시 설사한다. 어찌나 설사가 심한지 이것에 한 번 당했던 사람들은 '호랑이배추'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호랑이처럼 무섭다는 얘기다.

비온뒤 고사리 돋듯 한다더니 최근 내린 비로 온 산에 나물이 지천하면서 가는 곳마다 사람 또한 천지다.

웰빙 붐 타고 부쩍 늘어난 산나물애호가들이 너도 나도 산으로 나서기 때문이다. 재미도 재미거니와 산채의 독특한 맛과 건강까지 챙길 수 있으니 일거삼득이란다.
많은 세시풍속이 자취를 감춰가고 있으나 산나물 뜯기만큼은 오히려 성행하고 있다. 아니 성행 정도가 아니라 극성이다.

산나물 뜯으러 가는데 심지어 관광차 빌리고 인터넷으로 회원 모집해 원정까지 나서니 극성 아닌가.

산나물 뜯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폐해 또한 속출하고 있다. 산과 생태계가 된통 홍역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게 중에는 아주 작정한 듯 되나가나 싹쓸이 해가는 이들도 있다. 씨를 지울 태세다. 먹성 좋은 멧돼지떼가 며칠 굶은 후 지나간 것처럼 아예 쑥대밭을 만들어 놓는다.

두릅나무와 엄나무는 성한 가지가 없다. 해도 너무 한다.

과욕의 대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행여 희귀한 것이 눈에 띄면 영락없이 뽑아제친다.

깽깽이풀, 복수초, 노루귀 같이 희소성 높은 야생화는 물론 오갈피·느릅·헛개나무 등 몸에 좋다는 나무와 분재용 나무가 주 표적이다.

 

이쯤하면 산도둑이요 절도다. 거기다 산불까지 종종 내니 정도가 극에 달한다. 산으로서는 최악의 계절이다.

상황이 이러니 당국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다. 산림청이 칼을 빼 들었다.

산림청은 최근 산나물과 산약초를 불법채취하다 적발되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리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현행법에는 임산물을 절취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도록 돼 있다. 중벌이다.

이젠 관계기관의 허가 내지 산주인의 동의를 얻어야만 산나물을 뜯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중죄인 취급 받는다.

이에대한 반발도 많다.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풍습을 법으로 막는다니 너무하단 얘기다. 게다가 각 산마다 누가 주인인지를 알아 동의 얻고, 매번 행정관서 찾아 허가받아야 한다니 말이 되느냐며 볼멘소리까지 한다.

하지만 자초한 화다. 자연이 베푼 선물을 자기만 독차지하려는 얌체족들의 과욕이 낳은 결과다.

산나물 뜯는 것까지 법의 잣대로 철퇴를 가하게 된 세상,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꺾세 꺾세 고사리 꺾세' 정겹던 노랫가락이 비가(悲歌)처럼 맴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방역복과 장화, 마스크를 착용하고 한 손엔 부대를 든 사람들. 그들이 거리를 좁히자 한쪽으로 닭과 오리가 내몰린다.

영문도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닭과 오리들. 맨앞 무리가 억지로 떠밀려 웅덩이로 떨어지거나 잽싼 손아귀에 잡혀 부대에 넣어지자 뒤쪽 무리가 난리 친다. 죽음을 아는듯 발버둥 치지만 소용없다. 외마디 비명들이 파편처럼 튄다. 아수라장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쪽에선 굴삭기가 흙을 퍼담는다.

홀로코스트의 현장이 이랬을까.
차마 눈 뜨고 못 볼 생지옥, 바로 가금류 살처분 현장이다.

처참한 이 장면들이 잇따라 보도되면서 또다시 나라안이 'AI(조류 인플루엔자) 신드롬'에 빠졌다.

닭과 오리 사육농가는 물론 사료·식품업계까지 초비상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치킨 사달라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며 조용해졌고 닭고기와 계란 매장, 심지어 삼계탕집, 오리요리집까지 발걸음이 뜸해졌다.

무의식적인 연쇄반응인지 경험적인 훈련인지 파장이 빠르게 번지고 있다.

지난 2003년 이후 벌써 세번째다.
아니 세번째도 세 번째지만 이번엔 그 피해가 사상 최대일 것이라는 게 문제다. 관련 업계의 줄도산이 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또다시 검은 그림자가 전국을 뒤덮고 있다. 걱정이다. 왜 이럴까.

잊을 만하면 터지고 잠잠하다 싶으면 날벼락이다. 속이 상한다. 그래서 묻고 싶다.

AI를 막을 근본처방은 없는가. 정녕 없다면 그 피해만이라도 줄일 방도는 없는가.

우선 방역체계부터 생각해 보자. 지금껏 당국은 뒷북치기 일쑤였다. 발병하고 확산된 뒤에야 비로소 '잊고 있던 할 일'이 생각난 듯 허겁지겁 역학조사니 고병원성 확인작업이니 야단법석을 떤다.

한번도 어느 지역에 AI 발생이 우려되니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는 사전예고를 들어본 적 없다. 사전 및 상시 예찰시스팀이 미비해서다.

또 하나 발병 및 확산 경로에 대한 관심 소홀이다. 지금까지 숱한 지역, 숱한 농가에서 AI가 발생했어도 지역별·농가별 발병 및 전파경로에 대한 자세한 분석결과가 나오질 않는다.

어떻게 발생해 어떤 경로로 주로 전파되는지를 알아야 효과적으로 차단할 게 아닌가. 그런 데도 안한다. 그러니 제대로된 방역이 이뤄질 리 만무다.

 

일단 발병하면 서둘러 끌어묻는 살처분 과정에도 문제 있다. 전 세계 대부분 국가가 고병원성 AI 발생시 조속한 살처분 정책을 펴고 있기에 그 자체를 반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과정이 문제다.

제 아무리 병에 걸렸다하더라도 그들도 생명체인 이상 굳이 잔혹하게 대할 필요는 없잖은가.
사전방역에 실패해 발병케 한 것도 부끄러운데 그들을 마구 대하기 일쑤고, 또 무슨 자랑거리라고 공개적으로 땅에 끌어묻는가.

국보 1호가 불 탄 건 국민적 수치라 한나절도 안돼 급히 천막 두르면서 농민이 애써 기른 가축은 병 들었다는 이유로 공개처형하듯 천막 한 조각 두르지 않고 버젓이 살처분한다.

제발 부탁한다. 국민 정서를 위해 최소한 임시 가리개라도 두른 상태서 작업()하길 당부한다.

또 아무리 급하더라도 지하수 오염도 생각하길 바란다. 그들이 썩으면 그 썩은 물이 어디로 가겠는가. 얇은 비닐 한 두겹으로 그 엄청난 침출수를 막겠다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닭과 새는 본래 닭대가리 행동, 새대가리 행동을 않는다. 사람이 그렇게 볼 뿐이다.

괜한 닭, 괜한 새 얕잡아 보지 말고 이참에 우리 스스로 닭대가리, 새대가리 같은 짓 안하는 지 깊이 반성할 일이다.

 

AI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변종을 만들어가고 방역체계는 되레 뒷걸음질 치니 걱정거리가 자꾸만 늘어난다.

제 아무리 변이를 거듭하는 AI 바이러스라 하더라도 인간의 건강까지 넘 봐서는 안되는데, 마음이 영 놓이질 않는다.

미국에서는 소고기 협상에 따른 쓰나미가, 국내에서는 AI 발생에 따른 날벼락이 축산농가들의 혼을 몽땅 빼앗아가고 있는 이 현실. 이 암울한 현실이 우리의 뿌리, 농촌을 더욱 더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청남대 초입 대청호변엔 한반도 역사의 뿌리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유적지가 있었다. 이름하여 두루봉 동굴이라 하는 것인데, 지금은 동굴은커녕 산 밑자락까지 파헤쳐져 수십길 낭떠러지로 변한 흉물의 역사터다. 하지만 이 유적이 갖는 중요성 때문에 현행 교과서에 이름이 번듯하게 올라있는 '실체없는 선사유적지'다.

이 동굴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해는 1976년. 당시 모 광산이 석회암 채취를 위해 발파하던 중 예사롭잖은 동물뼈가 나와 충북대와 연세대 박물관이 긴급 발굴에 착수, 1983년까지 숱한 유물을 찾아냈다. 특히 이곳에서는 4만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에 살았던 두명의 사람뼈(그중 하나는 5세 가량의 '흥수아이'로 명명)와 동물뼈, 각종 석기 등 그 시대 생활상과 환경 생태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발굴 종료 25년이 지난 오늘 이 동굴을 새삼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이 동굴서 발견된 진달래과의 꽃가루 때문이다. 발굴 당시 이 동굴에선 3백43개의 꽃가루가 검출됐는데 유독 진달래과 꽃가루만이 굴 입구서 1백57개나 발견됐다.

진달래과는 산성토양을 좋아하는 식물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알카리성 토양인 석회암 동굴에서, 그것도 굴입구서 꽃가루가 집중 발견된 것일까.

발굴조사자였던 충북대 이융조교수는 "그 시대 사람들이 이미 꽃의 아름다움을 알고 주거지를 꾸미기 위해 일부러 갖다놓은 미의식"이라며 "이로 보아 이들 구석기인은 세계 최초로 꽃을 생활화한, 이른바 '꽃을 사랑한 첫 사람들(the first flower people)'로 생각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흥수아이를 포함한 두루봉 구석기인들은 큰원숭이, 쌍코뿔이, 옛코끼리, 크로쿠타, 하이에나 같은 들짐승이 우글거리는 삶의 전장 속에서도 꽃을 꺾어다 집앞을 장식하고 감상하는 심미안과 여유를 가졌던 것이다.

혹자는 웬 뜬금없는 아프리카 동물이냐고 하겠지만, 실제 발굴에서 이들 짐승뼈가 상당수 나왔다. 그만큼 그 시대엔 따뜻했고 동물상도 달랐다.

두루봉 구석기인이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란 건 아직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이 두루봉을 찾았던 것은 피난처인 동굴과 함께 인근에 금강이란 물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강이 곧 생명수요 삶의 터전이었던 '과거의 금강 사람들'이다.

강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금강을 젖줄 삼아 삶의 뿌리를 이어가는 이 시대 이 지역 사람들 또한 '오늘의 금강 사람들'이다.

바야흐로 꽃 피는 계절 4월을 맞아 온갖 꽃들이 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벚꽃과 개나리, 목련이 피고지는가 싶더니만 시골 산자락에도 각종 제비꽃과 괴불주머니, 현호색, 양지꽃 등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진달래 역시 산 양지쪽 능선을 따라 한창 붉은 물감을 흩뿌리고 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더니 하루가 다르게 산빛이 변한다. 말 그대로 만화방창(萬化方暢)이니 화란춘성(花爛春盛)이다.

먼 옛날 두루봉 사람들이 사냥갔다 돌아오는 길에 진달래꽃을 한아름 꺾어나르던 시기도 요즘 같은 시기였으리라. 단지 기후가 다르고 생태계가 달라 당시 진달래가 어떤 종이고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할 뿐이다.

야생상태서 그날그날 의식주를 해결하느라 고단한 삶을 살았을 과거의 금강 사람들. 그러면서도 봄꽃 한아름에 환한 미소지으며 내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을 그들. 그들이 남긴 삶의 흔적은 온 데 간 데 없는데 그 옆으론 오늘의 금강 사람들이 오염시킨 강물만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진달래 흐드러진 언덕너머로 요절한 흥수아이의 일그러진 잔영이 아지랑이처럼 현기증을 일으킨다.

온 산야가 시끌벅적하다.

우수 경칩 이후 들려오기 시작한 봄의 소리, 생명의 소리가 청명을 지나면서 더욱 요란해지고 있다.
계절이 바뀌었음이리라.

겨울철새들이 혹한을 무대 삼아 멋진 군무와 운율을 펼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계절은 벌써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를 향해 달리고 있다.
계절이 바뀌면 대자연은 스스로 무대를 바꾸고 바뀐 무대엔 새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것이 곧 생태시계요 자연의 이치다.
봄은 소리없이 온다고 했던가.

하지만 생태계의 봄은 생물들의 사랑노래로부터 시작된다.

겨우내 움츠렸던 개구리들이 땅위로 기지개를 켜자마자 부르는 게 바로 사랑의 세레나데다. 생태계를 깨우는 서곡이자 봄을 알리는 전령가인 셈이다.
그 뒤를 잇는 게 텃새들의 합창이다. 참새와 박새 같은 텃새들이 생명의 계절 잉태의 계절, 봄이 되면 일제히 사랑노래를 쏟아놓는다. 사람이 사춘기가 되면 변성기를 맞듯 새들도 짝짓기철이 오면 울음소리가 바뀐다. 평소의 울음소리와 짝 찾아 사랑 나눌 때의 소리가 다르고, 둥지 틀어 새끼 기를 때 소리가 다르다. 산란철에 천적을 만나면 더욱 독특한 경계음을 낸다.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다.

 
4월은 바야흐로 텃새들의 산란철이다.

부산히 움직이고 재잘거리며 열심히 사랑을 나눠야 '대(代) 내림'이란 숭고한 사명을 마칠 수 있다.
지난 4월 4·5일, 속리산 천왕봉 숲속에선 말 그대로 '대자연의 교향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무심코 들으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소리겠지만, 계절 따라 상황 따라 울음소리가 변하는 새들의 생태와 속내를 알고 있는 필자로선 하나하나의 울음소리도 예사롭게 들을 수 없었다.
고운 빛깔의 곤줄박이 수컷이 암컷을 차지하려고 먹이를 문 채 애절하게 유혹하는 소리, 그에 화답하듯 재잘대며 교태부리는 암컷, 뭐에 뾰루퉁해졌는지 난 데 없이 사랑다툼 하는 진박새 부부, 그 사이에서 먹이를 찾다 황급히 달아나며 서로를 부르는 쇠박새 부부, 고목 둥치에 뒤늦게 둥지를 파느라 낯선 객이 오는지도 모르고 나무를 쪼는 청딱따구리 수컷, 그 옆나무서 망을 보다 수컷에게 경계신호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청딱따구리 암컷, 깊은 골짜기를 타고 멀리서 들려오는 멧비둘기의 구애소리….
사랑과 평화, 긴장과 경계의 신호가 서로 엇갈려 얼핏 들으면 불협화음처럼 들리지만 결코 그들의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세상 어떤 오키스트라가 이처럼 절묘하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낼 수 있을까. 달래강 발원지 탐사를 위해 세 번째 올랐던 당시 산행은 그래서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9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온 나라 안이 시끄럽다. 시끄럽다 못해 활극장을 방불케 한다.

모두가 저만 잘났다고 아우성이다. 민생이야 어떻든 내 알바 아니라며 온갖 고성과 손가락질로 상대방 비난에만 열 올리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수라장이다.

땅도 같고 계절도 같은데 인간계와 자연계가 내는 현재음(現在音)이 이렇듯 확연히 다르다.

한쪽에선 사랑과 생명의 하모니가 울려퍼지는데 다른 한쪽에선 협잡과 이기로 가득 찬 불협화음이 난무하고 있다.
대자연의 소리도 생태계가 건강히 유지될 때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 법.

하물며 우리 사회는 어떠랴. 서로 존중하고 정도를 지켜 나갈 때 비로소 사랑과 화합의 합창이 울려퍼지지 않을까.

입후보자를 포함한 정치인들이여. 선거종반으로 갈수록 적극 투표의사를 가진 사람수가 줄고, 부동층이 느는 이유를 아는가.

그대들이 무시해온 유권자·국민들의 '낮은 소리'가 표심이 되어 결국 '천둥소리'를 낼 것이란 걸 정녕 아는가.

사람마음은 참 간사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지긋지긋한 비에 넌더리 내더니만 반짝해진 햇볕에 언제 그랬냐며 희색을 띤다.
이번의 '줄 비'가 오기 전엔 어땠나.

 "무슨 놈의 날이 이렇게 더워"하며 짜증들 내더니만 갑작스런 겹장마와 함께 기온마저 떨어지니까 언제 그랬냐며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는 둥 호들갑 떨지 않았는가.

어디 그 뿐인가. 알곡이 채 영글지도 않았었는데 전례없는 대풍이니 해가며 선이자 갚듯 이구동성 떠들지 않았는가.  

우리 주변엔 요즘 악몽 꾸는 이들이 많다.

이른바 날씨 대란으로 피해 입은 사람들이다. 아니 피해 정도를 넘어서 재앙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 가운데엔 한 철 벌어 1년 먹고 사는 사람들, 예를 들어 피서대목에 잔뜩 기대 걸고 없는 돈 투자했다가 되레 거덜난 사람도 있고, 몇 년만에 공사 하나 맡았다가 공기(工期)를 못 맞춰 졸지에 빚더미에 오른 이도 있다.

출하 직전의 과일들이 자고 나면 온 밭 가득 떨어져 수확을 포기한 채 망연자실한 사람, 고추는 익어 따야겠는데 하염없이 내리는 비에 밭고랑도 못들어가고 줄담배만 태우다 한 해 농사 망친 사람, 집앞 비닐하우스가 돌풍에 휘말려 엿가락처럼 휘어진 채 하늘로 치솟아도 손 하나 대지 못하고 기절초풍한 사람 등등 피해도,사연도 갖가지다.
가슴에 한이 맺히면 피멍이 든다고, 어디에 하소연도 못한 채 메마른 눈물 한숨으로 달래며 속으로 분을 삭히는 그들이다.
큰 지진이 나 집이 무너지고 태풍으로 강물이 넘쳐나 소,돼지 떠내려가야만 재앙이고 천재인가. 크든 작든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 빚어진 피해라면, 아니 적어도 사람 손으론 어쩔 도리가 없는 피해라면 당연코 재해요 재앙이 아닌가. 그들이라고 일부러 피해를 입고 싶었겠는가.

그건 아니다.

뭔가 잘못 돼도 크게 잘못됐다.

그들이 새까맣게 탄 가슴을 한숨으로 달랠 때 정부는 뭘 하고 지자체는 뭘했나. 정부 일 하고 지자체 일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엔 비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었나.
기상청은 뭘하는 덴가. 비가 몇날 며칠이고 줄창 내릴 때 사람들마다 하던 말이 있다. "도대체 이 비가 언제 끝난답니까. 비가 온다고만 할 뿐 언제쯤 끝날 것 같다는 예보 하나 없으니 원…."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정부는 얼마 전 일기예보의 선진화란 명목으로 엄청난 돈 들여 최신기기를 도입하고 인적 시스팀도 새롭게 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한 것을.

그러나 그 자랑 이후 기상청의 덕을 봤다는 이가 있었는가. 오히려 오보가 많아지진 않았는가.            

필자는 이번 기상이변을 '대재앙'이라 부르고 싶다.

온갖 분야에 가시적인 피해가 큰 것도 큰 것이지만, 이번 기상이변의 가장 큰 위력은 사람들의 인식을 일거에 뒤바꿔놓았다는 점이다.

'날씨가 이럴 수도 있다'는 데 대한 두려움과 혼돈이 그동안 각인돼 온 우리나라 기상 인식을 한 순간에 무너뜨린 것이다.
한반도 기후가 온대에서 아열대로 가고 있다는 주장이 이번에 처음 나온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믿질 않았다.

하지만 이번 기상이변으로 많은 이들이 생각을 바꿨다.
안 바뀐 건 정부요 지자체다.

이번 날씨대란이 있을 때 최소한의 노력은 보였어야 했다. 어느 지역에 어떤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지, 그 정도는 어떤지 파악하고 방안마련에 나섰어야 한다.

당시 시간이 없었다면 햇볕이 난 직후, 아니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조용하다. 너무 조용하다.
지역 머슴이라 자칭하던 국회의원, 지방의원들은 다 뭐하는가.

대선주자들은 자신들의 '큰꿈'만 생각지 말고 민초들의 '작은꿈'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엄청난 걸 바라는가.

작은 관심과 위로의 말 한 마디면 죽다가도 살아날 사람들이다.

추석은 코앞인데 그들은 안중에도 없다.
지금 그들은 가을 걱정, 수확 걱정이 아니라 벌써부터 추운 겨울 생각하며 긴 한숨 내쉬고 있다.

남들 다 반기는 이 가을하늘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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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조상들은 농사철 비가오면 으레 하는 일이 있었다. 물꼬를 보는 일이었다.
곡식이 영글 무렵엔 더욱 더 그랬다. 행여 그 무렵에 비가 자주 오면 아예 그 옆에서 살았다.

그래서 '하지를 지나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잔다'는 속담까지 생겼다.

벼농사가 모든 농사를 대변하던 시절 그야말로 벼 농사의 흥과 망은 민초들의 생과 사를 가르는 문제였다.
햇 과일이 막 나오고 벼가 알곡을 머금기 시작하는 유두날이 되면 충청도, 특히 충북지역에선 물꼬고사까지 지냈다. 부침개에 갓 나온 과일들을 물꼬에 차려놓고 정성껏 풍년을 기원하던 게 물꼬고사다.
법 없이도 살아가던 그 옛날 이웃사촌, 아니 친 사촌끼리도 걸핏하면 말다툼 하게 한 것이 물꼬다.

평소엔 그 쪽 없인 못산다고 할 만큼 마냥 친하다가도 어느 한 쪽이 물꼬를 잘못 막았든지 잘못 튼 경우엔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삿대질에다 멱살잡이 하기가 일쑤였다. 그렇다고 서로 원수가 될 정도로 싸웠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간에 서운한 감정을 곧잘 내비치게 했던 게 바로 물꼬다.
물꼬싸움은 우리네만 있었던 게 아니다. 양(洋)의 저 편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라이벌(rival)'의 어원이 바로 그를 입증한다.
라이벌은 강을 뜻하는 '리버(river)'에서 온 말로 본래 '강가에 사는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던 것이 이편 저편 사람들이 강물을 다루는 과정에서 서로 옥신각신하게 됐고 또 그런 일을 자주 벌이다 보니 경쟁상대인 라이벌이 됐다. 모든 일의 합리성을 중시하던 그들이지만, 물의 방향을 이리 틀고 저리 트는 데엔 잦은 시비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서양에서도 라이벌을 완전한 적대관계(enemy)가 아닌, 선의의 경쟁관계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아 물꼬싸움을 그리 흉한 싸움으로는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 한반도엔 온통 비 얘기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내리부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비 얘기다. 농촌 역시도 마찬가지다.
예전 같으면 농민 모두가 물꼬 옆에 붙어살아야 할 판이다. 예부터 가을농사는 하늘이 지어준다고 했듯이 요즘 내리는 비는 농사에 도움은 커녕 잘된 농사마저 망쳐버리는 쓸데 없는 비다. 자연에서 벌어지는 일을 너무 통속적으로 폄하하는 인간 이기주의적 표현인지는 몰라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그저 한숨으로 달래고 있는 농민들이 너무 안쓰러워 하는 말이다.
한 번 내리기 시작하면 몇날 며칠이고 무한정 내리다가 좀 뜸하다 싶으면 이내 또다시 내리붓는 요즘 비에 모두들 넌더리가 나 있다. 그래서인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데도 물꼬 보러가는 농부를 도통 볼 수가 없다.
농법이 바뀌고 물에 대한 관념도 변하고 물꼬의 기능이 변한 탓일까. 아니면 쌀값도 싼데 그까짓 벼 농사 쯤이야 하는 것일까.
물을 중시하던 시절의 물꼬란 그것을 제때 트고 막는 기술이 곧 농사의 큰 비결이었는데 지금의 농심은 그게 아니다. 그만큼 세상은 변해 있다.

 

계속되는 비 예보로 온 나라가 어수선한 가운데 한쪽에선 '강물 가지고 장난(?) 말라' 야단이다.
다름 아닌 이명박 대선후보의 경부대운하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수중시위가 충북땅 달천강에서 시작된 것이다. 환경련 회원들이 주축이된 시위대는 "경부운하 건설 계획은 그 자체가 백두대간을 두동강내는 반생태적 발상"이라며 "공약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배수의 진을 치고 온몸으로 저지하겠다"며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꼭 상기하지 않아도 우리나라의 지리·지정학상 백두대간과 그를 중심으로 나뉘어진 물길은 온 국토, 온 국민, 온 생태계를 아우르는
생명줄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요소다.

특히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 남쪽으로 서로 갈라져 흐르는 우리나라의 강 수계는 이른바 서한 아지역과 동북한 아지역, 남한 아지역이라는 세 개의 독특한 민물고기 분포구계를 구성하고 있다.
한강의 어류상이 양양 남대천과 다르고 낙동강과 다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 중 필요한 물줄기를 이어 운하로 이용한다 하니 한반도 생태계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부터 물을 다스리는 치수(治水)는 산을 다스리는 치산(治山)과 함께 나라 운영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래서 치수를 경국지대도(經國之大道)라 하여 국가운영의 제일과제로 삼고 각 시대마다 나랏님들이 물 다스리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비록 나랏님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소중히 물을 다뤄왔다. 그를 대변하는 게 바로 물꼬다.
민초들은 물꼬를 잘 못 다루면 이웃과 마찰을 일으키거나 한해 농사를 그르쳤기에 신중히 다루었고, 나랏님들은 물을 잘못 다스리면 대재앙이 올 것을 우려해 더욱더 치수에 만전을 기했다.
물꼬는 다름 아닌 '물의 시작이요, 방향'이라 할 수 있다. 잘 못 틀어도 시비거리요 잘 틀어도 아전인수(我田引水)란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하늘에선 줄곧 빗물을 퍼붓고 항간에선 강과 관련된 '말'들이 무성한 요즘.

우리 조상들이 어떤 방법으로 슬기롭게 물꼬를 틀고 치수 했는지 한번쯤 생각해볼 때인 것 같다.

뱁새가 전하는 말 서른여덟번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우리 민족은 예부터 '소나무 아래서 태어나 소나무와 더불어 살다가 소나무 그늘에서 죽는다'고 할 만큼 소나무와 매우 가깝게 지내왔다.

그래서 우리 문화를 소위 소나무 문화라고도 한다.

소나무는 항상 푸르름을 잃지 않는 데다 줄기가 잘려져 나가도 옆에 잔가지를 뻗지 않는 특성 때문에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또한 소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동신(洞神)이나 수호신으로서, 또는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의 상징이자 부부간의 백년해로를 뜻하는 음양수(陰陽樹)로서, 혹은 풍류를 대변하는 매개자로서 세세천년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뿌리깊이 내려왔다.

 


소나무의 어원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솔(수리>술>솔)과 나무가 합쳐진 말로서 '나무 중의 으뜸'을 의미한다.

한자어의 松 역시 木과 公이 합쳐져 '모든 나무의 윗자리에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소나무를 나무 중의 으뜸으로 여긴 사실은 실제 기록으로도 전해진다.

즉, 고려 현종은 즉위 4년(1013년)에 '때를 어겨 나무를 벤다는 것은 효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모든 나무의 장인데 근래 백성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소나무를 많이 벤다하니 차후부터는 이유 없이 소나무를 베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는 칙령을 내린 바 있다.

 나라가 직접 나서 소나무를 보호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시대 때부터이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금산(禁山)과 봉산(封山) 정책으로 소나무를 적극 보호했다.

 소나무가 우리 나라에 특히 많은 이유는 소나무가 잘 자라는 화강암과 화강편마암 지역이 한반도 내에 폭넓게 분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나무도 해를 거듭할수록 사라져 가고 있다.

소나무가 사라지는 가장 큰 요인은 솔잎혹파리에 이은 재선충병과 피목가지마름 등 각종 병해충의 확산과 대기오염의 심화이다.

또한 예전처럼 적극적인 인공식재와 관리가 이뤄지지 않고 있고 낙엽을 채취하지 않는데 따른 토양의 비옥화로 점차 활엽수와의 경쟁에서 뒤로 밀려나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다.

일제가 민족정기를 없앤다 하여 산허리를 싹둑 잘라 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리기다소나무에 솔잎혹파리를 잔뜩 묻혀 들여와 온 산야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억울한 판인데, 이제는 소나무 에이즈라 불리는 재선충병에 피목가지마름병이라는 해괴망측한 병해충까지 들끓고 그것도 모자라 대기오염은 갈수록 태산이니 소나무로선 최대위기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요즘엔 산에서 야생 소나무를 몰래 캐다 파는 신종 도둑들이 이곳저곳에서 활개를 친다하니 기가 찰 노릇이지 않은가..

지구 온난화 혹은 이로 인한 한반도 기후의 변화(아열대화)란 말만 나오면 아예 우리나라에서 소나무는 백년 안에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못을 박아대기까지 한다.

 


여행을 하다보면 산허리 중턱이나 마을 어귀 한자락에 자리잡고 서 있는 멋진 소나무들을 만나게 된다.

활엽수와의 살아남기 경쟁 등 앞서 얘기한 여러 이유로 점점 더 살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신세이긴 하나 여전히 그 꿋꿋함을 잃지 않고 '한반도의 풍류와 기개'를 대변하고 있는 모습에서 가슴 속이 뭉클할 정도로  장한 느낌을 받는다.

제 멋대로 뻗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 구석 어색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말 그대로 자연스런 가지뼏음이 여간 멋진 게 아니다.

그 어느 분재 기술자가 저렇게 멋들어진 아름다움을 창출할 수 있겠는가.

어떨 땐 그런 모습에 매료돼 차를 멈추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거나 한참을 바라다보곤 한다.

 


우리나라를 더욱 우리나라답게 하고 한국인을 더욱 한국인스럽게 만들어준 소나무.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소나무가 없었으면 어떠했을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돼 있는 한국화의 인상이 전혀 달라졌을 것은 분명한 일이고 아마도 추사의 세한도도 탄생하지 않았거나 그림 속 화재가 동구 밖에 홀로 서 있는 어느 느티나무로 대치되지 않았을까?

물론 애국가 속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도 없었을 테고...


유구한 역사를 지켜 오면서 한국인의 가슴에 ‘바람서리 불변하는 기상’을 상징적으로 간직하게 해 온 소나무.

그 소나무가 지금 위기에 놓여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그깟 샛바람에 떨어서야 되겠느냐며 우리들로 하여금 자유의 마당으로 내달리게 하던 그 소나무가 말이다....

 지금 농촌은 (芒種)이다


 옛말에 '불 때던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말이 있다.

또 '발등에 오줌 싼다'는 말도 있고 '별 보고 나가 별보고 들어온다'는 말도 있다.

모두 망종(芒種) 절기 때 나온 말이다.

망종 때 오죽 바빴으면 부엌에서 불 때던 부지깽이까지 나서서 사람 일손을 돕고, 일 하다가 바지춤을 내리기도 전에 발등에 오줌을 쌌을까.

가뜩이나 짧은 밤 제대로 잠 한숨 못 자고 별 떠 있을 때 일터에 나가 또 다시 별이 떠야 집으로 돌아오는 심정은 또 어떻고….

 

망종은 가시래기 망(芒) 자와 씨 종(種) 자가 합해서 이뤄진 말이니, 말 그대로 가시래기(까끄라기)가 있는 종자를 거둬들이는 철, 즉  보리 수확철을 일컫는다.

예전 경운기는 물론 트랙터도 없이 모든 일을 소나 사람 손으로 해야 했을 땐 보리 수확기가 일년 중 가장 바쁜 시기였다.

보리의 특성상 제 때 베지 않으면 대공이 쓰러져 손실이 많고 수확하기도 쉽지 않다. 또 보리를 얼른 베어내야 이모작으로 모내기도 하고 콩과 같은 다른 작물들도 심게 된다.

농사란 게 시기를 놓치면 모두가 폐농하게 되니 잠시도 헛눈을 팔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베어낸 보리는 일일이 손으로 타작을 해야만 했으니 일이 끝이 없었다.

볼 일 보고 뭐 볼 시간도 없다는 말은 이런 때를 두고 한 말이다.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고, 내 일 하다보면 남의 일 해야 하는 품앗이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끊임없이 이어져 일손 멈추는 것을 잊는다고 芒種을 다른 말로 亡終이라고도 했다.

끝을 잊었다는 얘기다.

 <사진설명> 농촌을 지키고 있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산골다랑이 논에 늦모내기를 하고 있는 장면. 6월 3일 전북 무주 내도리 입구에서>

 

작가 이문구의 동시 「오뉴월」은 망종 때의 바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엄마는 아침부터 밭에서 살고/ 아빠는 저녁까지 논에서 살고/ 아기는 저물도록 나가서 놀고/ 오뉴월 긴긴 해에 집이 비어서/ 더부살이 제비가 집을 봐주네."

집이야 어찌 됐든 일부터 해야하니까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제 일을 하다가 저녁 늦게서야 만나는 농촌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

어릴 적 농촌에서 자란 40대 이후의 사람들은 이러한 정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늦잠 자고 일어나면 엄마 아빠는 보이지 않고 방 한 구석에 차려진 초라한 밥상을 혼자서 대해야 했던 그 시절.

집에서만 놀기가 따분해 엄마 아빠가 있는 일터를 찾아가면 바쁜데 왜 찾아와 귀찮게 하느냐고 면박 아닌 면박을 받았던 기억과 함께….

바쁠 땐 있는 집 애들이나 없는 집 애들이나 다 같이 찬밥 신세였으니 끼리끼리 모여 해 가는 줄 모르고 노는 게 하루 일과였다.

소꿉놀이에 풀장난 흙장난 하다보면 옷은 옷대로 얼굴은 얼굴대로 온통 시커멓게 돼 까마귀 새끼나 진배없었다.

 

예전의 그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망종 절기가 돌아왔다.

현충일인 6일이 망종이니 이 날부터 하지(22일) 전까지가 이른바 망종 절기다.

망종 절기를 맞은 농촌은 지금 무척 바쁘다.

예전처럼 보리 농사를 많이 짓지 않는 데다 농사일도 트랙터나 이앙기 같은 농기계가 대신 하니 발등에 오줌 쌀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장 바쁜 철임엔 틀림없다.

모내기를 아직 못한 곳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모를 낸 곳도 제초제 뿌리랴 비료 주랴 밭작물 손보랴 하루해가 짧다.

담배나 고추 농사 짓는 농가는 더없이 바쁘다.

담배의 경우 제 때에 잎을 따야 빛깔이 잘 나고 고추는 장마철 오기 전에 말목 박아 탄탄히 해놔야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잘 견뎌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농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이 참에 한번쯤 고향에 들러 일에 지친 꼬부랑 노인네들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 도리인 듯 싶다.

명절 때만 찾아갈 것이 아니라 부지깽이 도움이라도 받고 싶은 요즘 고향을 찾아 함께 농약 치고 고추 말목 하나라도 박는 게 더 큰 보람이 있으리라.

농촌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그들을 도와주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있으면 아이들과 함께 농촌에 들러 '망종'이란 말이 왜 생겨났는지, 그 유래와 의미도 일러줘 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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