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봄이 또다시 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농촌하면 떠오르는 것이 고목이다. 일종의 랜드마크라 할까.

길을 가다가도 고목이 나타나면 으레 가까운 곳에 마을이 나오고 행여 마을이 없으면 적어도 옛 마을터나 집터가 자리하고 있는 게 우리네 농촌이다.
   그만큼 고목은 우리 농촌을 대표하는 상징물로서 그 자체가 고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예부터 고목은 마을을 지켜온 수호신이자 휴식을 주던 쉼터요 할아버지의 따스한 정을 기억케 하는 매개체였다.
 고목은 또 자연 생태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니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태박물관이었다.
봄이 되면 참새와 찌르레기,원앙이 날아들어 줄기와 가지에 난 구멍마다 둥지 트느라 요란했고 여름이면 서쪽새 깃들어 밤새 불침번 서던 곳이 고목이다. 또 늦가을 돼 서리라도 내릴라 치면 구렁이,무자치 얼어죽을 새라 밑둥치 구멍으로 속속 기어들고 중턱 나뭇가지 구멍으론 귀염둥이 다람쥐 겨울잠 자러 서둘러 들어가던 곳이 바로 고목이다. 또 겨울이 오면 올빼미 눈 부라리며 썩은 나무구멍 찾아 몸 숨기고 터줏대감 부엉이는 밤새 울며 괜한 아이 겁 주던 곳이 마을어귀 고목이었다. 일년내내 딸린 식구 많아 늘 시끄럽고 사시사철 생명이 머물던 생태계의 텃밭이었다.
 

  그러던 고목이 요즘엔 어떻게 됐나.

봄이 와도 찌르레기,원앙은 커녕 참새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고 여름철 서쪽새 울음소리 끊긴 지 오래다. 유구한 마을마다 전설처럼 내려오던 고목나무 속 구렁이 얘기도, 겨울밤이면 머리끝을 쭈뼛쭈뼛하게 만들던 부엉이 소리도 추억속 옛일이 됐다.
 나무는 서있건 만 생명의 발길이 무 잘리듯 단절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온갖 생명이 들끓던 고목들이 왜 이처럼 황량해졌을까. 답은 하나, 우리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고목의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막아버림으로써 생명의 발길을 끊어버린 것이다. 고목의 줄기나 가지에 난 구멍은 새를 비롯한 많은 생명들의 둥지 내지 거소 역할을 해온 중요한 서식환경이다. 참새가 붙박아 살고 찌르레기와 원앙이 날아들며 서쪽새와 올빼미가 찾아든 것도 기실 나무구멍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중요한 곳에 엉뚱한 손을 댐으로써 그곳을 찾던 생명들을 졸지에 갈 곳 없는 미아(迷兒)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나무를 살리기 위한 외과수술이란 미명 아래 전국에 있던 거의 모든 고목의 구멍들을 몰타르와 스치로폼 류로 온통 ‘땜질’한 웃지 못할 처방(?)으로 인해 그곳에 깃들던 생명들로 하여금 집 잃은 설움을 겪게 한 일대 사건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편협한 잣대가 부른 자연파괴 행위다.
 

  수백년을 살아온 고목들은 비바람을 비롯한 모든 자연조건에 적응한 결과로서 가지에 구멍도 생기고 때론 줄기 자체가 텅 빈 채 서 있는 것이 본디 모습이다. 또한 오래된 줄기 가운데엔 죽은 세포가 모여 살아있는 세포를 감싸 보호하는 것이 나무의 섭리다. 그러니 구멍 몇 개 난 들 큰 문제가 안되며 자신의 썩은 구멍으로 인해 죽었다는 나무도 보질 못했다.
 그런데 이같은 자연섭리를 생각지 않고- 순전히 인간의 시각에서- 그것을 도려내고 땜질해 주면 오래 살겠지 하는 단순한 판단이 결국 나무에게도 씻지 못할 생채기를 남기고 생태계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꼴이 됐다.

 한쪽에선 인공둥지를 달고 먹이까지 줘 가며 억지로라도 야생동물을 불러들이려 하고 또 한쪽에선 엉뚱한 발상으로 찾아오던 동물마저도 내쫓는 게  우리네다. 전문적인 의견은 무시되기 일쑤이고 들으려하지도 않는다.
 산란철 앞둔 참새가 가까운 고목 놔두고 애써 콘크리트 구멍 찾아 기웃거리는 그 이상한 봄이 또다시 오고 있다.

‘진정한 숲’을 보려면 그대로 둬라

 
 봄을 맞는 산들이 시끄럽다.

   깊은 산 골짜기는 물론 인가 근처 산에서도 굉음이 울려퍼지고 있다. 다름 아닌 나무베는 소리다.
   예전엔 일일이 톱질 해 나무를 베었지만 요즘엔 기계톱으로 하기에 소리가 여간 큰 게 아니다. 엔진이 달린 데다 동시에 여러 대가 가동되기 일쑤이니 소리가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메아리까지 합쳐지면 더욱 요란하다.
 처음엔 낮은 소리였다가 곧바로 찢어질 듯한 고음이 나면 영락없이 나무 하나가 넘어간다. 그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1~2분이다. 길어봤자 5분이 안 걸린다. 수 십 년 살아온 생명이 그렇게 속절없이 끝난다.
 

   요즘 이뤄지고 있는 나무베기 작업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솎아베기 즉 간벌이요 또 하나는 송두리째 베어내는 벌목이다. 공식적인 작업만 두 가지지 뗄나무를 장만하기 위해 몰래 베는 도벌까지 합하면 세 가지다.
 간벌과 벌목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간벌은 나무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잘 자라도록 시원찮은(?) 나무를 솎아주려는 것이며 벌목은 다 키운 나무를 수확하거나 산지 개발 혹은 수종갱신을 위해 허가를 얻은 후 실시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요즘엔 일자리 만들기의 일환으로 해당 기관들이 앞다퉈 작업을 벌이다 보니 산 하나 건너마다 기계톱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다.
 

   문제는 무분별한 나무베기가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벨 곳 안 벨 곳 가리지 않고 무작정 기계톱을 들이댄다. 간벌과 벌목, 일자리 만들기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다.
 특히 간벌은 그 효과가 크다는 걸 익히 안다. 간벌한 산과 안 한 산은 차이가 난다. 나무 자라는 게 다르다. 벌목 역시 수종갱신을 위해선 꼭 필요한 절차요 효과 또한 무시할 게 아니다.
 하지만 그 효과란 것이 문제의 원인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효과냐는 것이다. 정녕 산을 위하고 나무를 위한 것인지 궁금하다.
 쓸만한 나무만 잘 자라게 하는 것이 진정 자연을 위하는 일인가. 그 어찌 산마다 쓸만한 나무만 있어야 하는가.

   자연에는 불필요한 것이 없다. 그러니까 자연이다. 한자(漢子)를 놓고 봐도 그렇다. ‘스스로 자(自) 자’에 그럴 연(然)‘이 합쳐진 게 자연이니 말 그대로 ’스스로 그렇게 된 것‘ 혹은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바로 자연 아닌가.
 

   무참히 잘려나가는 나무 한 그루도 귀중한 생명이거니와 그 나무 한 그루가 잘려져 나감으로써 숲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야 한다. 나무 하나가 쓰러지면 그 공간은 졸지에 혼돈 상태가 된다. 전에 비치지 않던 햇빛이 들어오고 또 그렇게 되면 하층부의 식물이 영향을 받는 등 여파가 도미노처럼 번진다. 
 졸지에 휑하니 뚫려진 숲 환경은 야생동물들을 불안케 한다. 갑자기 바뀐 환경을 그들이 좋아할 리 없다. 또 하나는 굉음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다. 조용하던 산골짜기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굉음은 그 자체가 폭탄이다. 산에 깃들어 사는 동물들이 치명타를 입는다. 난데 없는 소리에 기겁해 달아나야 하고 야행성 동물들은 잠 잘 시간에 괜한 생고생을 해야 한다. 가뜩이나 요즘은 들짐승들이 새끼 갖는 시기다.  
 며칠 전엔 이런 일이 있었다. 지난해 괴산군을 떠들석하게 했던 ’괴산호주변 까막딱따구리‘ 둥지 바로 근처서 별안간 간벌굉음이 울려퍼졌다. 벼락을 맞은 듯한 놀란 가슴으로 즉시 해당부서에 연락해 중단시키긴 했으나 아직도 떨떠름하다.
 

   간벌과 벌목을 하지말라는 게 아니다. 하더라도 나무만 보지 말고 숲생태계도 봐가면서 하라는 얘기다. 아울러 진정한 숲을 보려거든 스스로 그러려니 내버려 두는 일도 한 방법임을 강조하는 바다. 

별스런 봄날씨 결코 예삿일 아니다

 
 산과 들이 10여일전 모습과는 딴판이다. 설연휴 동안 전국을 빙판길로 만들었던 폭설 흔적은 온데간데 없고 어느새 언덕마루엔 아지랑이가 살랑이고 냇가에선 버들강아지가 복슬복슬 피어나고 있다. 여우같은 날씨 탓에 불과 며칠만에 한겨울서 곧바로 봄을 맞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례적인 ‘정월속 삼월날씨’가 이어지면서 바빠진 건 자연계의 동식물이다. 새들은 새들대로 들짐승은 들짐승대로 성급한 기지개 켜고 때아닌 신혼살림 준비에 분주하다. 마을앞 까치부부는 벌써 둥지를 반 이상 틀고 제 짝 한눈팔세라 구애행동에 열올리고 있다. 수십마리 떼지어 날던 참새들도 어느덧 제 둥지 찾아 각자의 텃새권을 확보하고 달라진 목소리를 낸다.
 겨우내 얼어붙어 제대로 활동 못했던 달래강 수달부부도 이젠 곧잘 나타나 사랑다툼에 여념없다. 다른 동물보다 일찍 새끼 깐 수리부엉이도 늘어난 식구에 몸이 달았는지 쉰 목소리를 내며 분주히 날아들고 앞개울변 암고라니는 만삭의 몸으로 신랑따라 뒤뚱인다. 예년 같으면 아직 이동시기가 멀었을 청둥오리도 요즘들어 북쪽 향해 망향가 부르는 횟수가 잦아졌고 겨우내 뒷동산 배회하면서 작은 새들의 간을 콩알만하게 만들던 말똥가리의 행동도 이젠 예사롭지 않다. 
 때이른 봄날씨에 꿀벌도 제정신이 아니다. 아직은 벌통안에 똘똘뭉쳐 체온 유지할 철인데 갑작스런 기온상승에 서툰 날갯짓 했다가 이내 내려앉아 벌벌 떠는 모습이 안쓰럽다.
 식물들 역시 춘심을 못이겨 생활리듬이 빨라졌다. 앞집 울타리 매화나무 꽃망울이 아침 저녁으로 모습을 달리하고 밭둑 쑥밭에선 금방이라도 “쑥~”하고 새싹이 돋을 것처럼 꿈틀댄다.  
 바빠진 건 사람도 마찬가지다. 농부는 농부대로 도시인은 도시인대로 발걸음이 달라졌다. 과수원 하는 이웃주민들은 꽃눈이 더 커지기 전에 가지치기를 마쳐야 한다며 돈내기 하듯 가위손 놀리기 바쁘고 파종 앞둔 고추농가들은 비닐하우스 손질하랴 묘판 손질하랴 바지춤 내려가는 것도 모른다.
 도시인들 역시 성급한 봄나들이에 야외행렬이 잦아졌다. 도시근교 벌판엔 벌써부터 나물 캐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각 산 등산로엔 이른봄 산행을 즐기려는 발길이 줄을 잇는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달라지고 바빠지는 게 자연계요 인간사다. 하지만 올 봄맞이는 유난히 별스럽다. 아니 별스럽다 못해 걱정스럽다. 죽 끓듯 변덕스런 날씨가 가져온 이상기온이 결코 달갑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널뛰듯 갑자기 오른 기온 덕에 서민들 난방비 걱정은 덜었지만 그 이상으로 걱정되는 것이 농축산물과 자연생태계 피해다.
 갑자기 찾아온 이상기온이 장기화 되고 극심한 일교차에 겨울안개까지 연일 끼는 것 자체가 농축산 일과 생태계에 큰부담을 주고 있다. 동식물의 생태시계 혼돈에 따른 조기 개화와 조기 산란, 병충해 극성 등이 우려되고 가축들에겐 호흡기 질환과 집단폐사까지 걱정된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철이다. 절기로야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은 음력 정월이요 양력으로도 이월이다. 우수 이전의 입춘추위도 있고 꽃샘추위도 있기 마련인 게 이즈음이다. 한 마디로 냉해마저 우려된다는 얘기다.


 행여 큰추위가 다시 오면 안되겠지만, 그래도 못 믿을 게 이즈음 날씨이고 보면 이대로 앉아 보고만 있을 문제가 아니다. 기상청과 농민들은 날씨변화에 더욱 긴장하고 농축산 당국과 지자체는 예찰 및 지도 강화 등 대책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작금의 가뭄사태가 말해주듯 최선의 방책은 철저한 사전대비밖에 없다. 피해가 나타난 뒤에 특별재해지구 선포니 뭐니 해봤자 말짱 사후약방문이다.
 올 대보름달은 왠지 밝게 보이지만은 않다.

득신과 올 농사, 그리고 기상 예측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옛말 가운데 득신(得辛)이란 게 있다. 본래는 음력 정월 상순에 첫 번째 드는 신일(辛日)을 일컬었으나 매년 연초에 벼농사의 풍흉을 점치던 일종의 풍습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정월 초하루에 신일이 들면 일일득신, 초이틀에 들면 이일득신, …, 초열흘에 들면 십일득신이라 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일, 이일…'이라는 그해의 득신일수로, 바로 이 득신일수가 벼농사의 풍흉을 예측하는 점괘 역할을 했다. 즉, 그 해의 득신일에 따라 벼의 개화 기간이 좌우되고 또 그 기간의 장단에 따라 풍흉이 결정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일일득신인 해는 하룻동안, 이일득신인 해는 이틀동안,…, 십일득신인 해는 열흘동안 벼꽃이 핀다고 믿어 벼농사 작황이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벼는 개화 기간에 따라, 또 그 기간 동안의 기후여건에 따라 작황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개화 기간이 너무 짧거나 길어도 덜 좋다. 따라서 선조들은 벼의 개화기를 벼가 장가드는 시기라 하여 중요시했으며 그 기간이 길고 짧냐를 득신일에 비춰 헤아려 보고는 미리 풍흉을 점쳐 대비했던 것이다. 벼농사에 가장 좋은 득신일은 5일이며 4일과 6일은 비교적 양호, 그밖의 득신일은 흉작 내지 작황이 별로 좋지 않다고 믿었다.

슈퍼컴퓨터로 기후예측을 하고 과학영농기술이 발달한 요즘 세상에 웬 뜬금없는 구닥다리 풍습을 들먹이냐고 할 지 모르나, 득신일에 따른 풍흉 예측이 벼농사에 큰 도움을 준다는 주장이 있기에 한번쯤 참고해 볼 필요성이 있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또한 올해의 경우 득신일로 봐선 대흉작이 예고돼 이에 대한 대비책이 요구된다는 경계의 의미도 있다.

득신일에 따른 풍흉 예측이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가는 진천의 코시바이오란 회사가 내놓은 최근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2001년 이후 8년 동안의 득신일과 벼작황을 대비한 결과 선조들의 예측이 놀랄만큼 맞아떨어지고 있다.
실제로 득신일이 4일이었던 2001년엔 재해가 적고 일조량이 넉넉해 풍작이었던 반면 득신일이 1일이었던 2002년도엔 태풍 루사 등 악천후로 쓰러짐 피해와 일조량이 부족해 흉작이 들었고 득신일이 7일이었던 2003년도에도 태풍 매미와 냉해 등으로 20여년만의 흉작이, 득신일이 2일이었던 2004년도에도 겨울철 이상기온에 가뭄과 백엽고병까지 발생해 흉작이 들었다.
또 득신일이 8일이었던 2005년도에도 잦은 국지성 호우로 침관수와 불임(不姙)이 발생해 흉작이 있었던 반면 득신일이 4일이었던 2006년도엔 별다른 재해 없이 평년작을 웃도는 작황을 이뤘으며 득신일이 9일이었던 2007년도엔 도복 및 백엽고병 발생과 등숙률(여뭄) 저조로 평년작에도 못미치는 흉작을 기록했다. 2008년도엔 득신일이 가장 좋다는 5일인 가운데 재해가 없고 일기도 양호해 사상 최대의 풍작이 나타났다.

8년간의 사례지만 이만하면 기막힐 정도 아닌가. 가히 족집게 수준이다.
그렇다면 올 작황은 어떨까. 올해는 정월 초하루가 신미일(辛未日)이니 일일득신이다. 득신일로 보면 최악이다.

앞의 자료도 도복과 병해충이 발생하고 일조량까지 부족해 흉작이 우려된다고 예측하고 있다. 대풍이 와도 시원찮을 판에 흉작이 예상된다니 걱정이다. 가뜩이나 이 예측의 이면엔 올여름 기상예보까지 포함돼 있다.

잊혀진 풍습이지만 선조들의 오랜 경험과 슬기가 담긴 득신. 그 경험칙의 의미를 되새겨봄으로써 올해의 난관을 슬기롭게 헤쳐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올해처럼 일일득신이었던 2002년도엔 태풍 루사가 지나갔음을 꼭 상기했으면 한다. 우린 이미 대가뭄 속에 있다.

수렵철, 짐승도 떨고 사람도 떨고 있다

 
며칠전 청원ㆍ괴산 경계의 한 마을에선 별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130kg이나 되는 커다란 멧돼지가 마을옆 봇도랑에 빠져 죽은 것이다. 시멘트 구조물이긴 하지만 너비와 높이가 고작 1m 남짓하고 물도 말라있는 봇도랑이기에 모두들 의아해 했다.

위급상황이 벌어지면 사냥개도 쉽게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민첩하고 괴력을 발휘하는 야생 멧돼지가, 그것도 자기 키의 한 길도 채 안 되는 도랑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객사하다니. 총에 맞아 창자가 밖으로 나와도 그것을 씹어가면서 덤벼들고 또 덫에 걸리면 발목을 끊고라도 도망치는 악착스러움과 강한 생명력을 가진 멧돼지이기에 의아심은 더욱 컸다.
주민들에 의하면 당시 그 멧돼지는 특별한 외상도 없었고 병들어 쇠약한 상태도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얼마나 발버둥 쳤으면 발굽이 다 까지고 두눈은 부릅뜬 채 앞발을 난간에 걸치고 죽었단다.

 
또 엊그제엔 이런 일도 겪었다.

멧돼지가 죽은 곳서 아주 가까운 농로를 지나치다 고라니와 마주쳤다. 대낮에 고라니와 마주친 게 이상한 게 아니라 그 고라니의 행동이 이상했다. 맞은 편서 황급히 달려오던 고라니는 차를 보자마자 맹수를 만난 양 뒤도 돌아보지 않고 똥줄이 빠져라 달아났다. 헌데 뛰는 모습이 영 이상했다. 한쪽 다리를 저는 것이었다. 깨금발을 뛰듯 엉덩이를 실룩거리던 그 고라니는 한참 뒤 다른 장소서 다시 마주쳤을 때도 역시 기겁을 했다.
당시 필자는 겨울철 야생동물을 촬영하느라 좁다란 농로를 매우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던 중이어서 평소 같으면 고라니가 그렇게 까지 놀라 허둥대진 않았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데 별안간 하천 건너편서 총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게 답이었다. 총소리를 듣는 순간 두 가지 의문점이 풀린 것이다.

멧돼지가 비명횡사하고 고라니가 깨금발로 달아나던 장소는 다름 아닌 청원군 경계와 바로 이웃한 지역이다. 청원군 지역은 올겨울 순환수렵장이 운영되는 곳이다.

해서 이곳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연일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고 졸지에 사냥밥 신세가 된 야생동물들은 살길 찾아 인근 타지역으로 몸을 피하고 있다. 봇도랑에 빠져 죽은 멧돼지 역시 청원지역서 사냥꾼에 쫓겨 ‘피난’하다 기진맥진해 참변을 당했다.  

비록 청원 뿐만 아니라 진천,음성,제천 등 순환수렵장이 운영되고 있는 지역의 야생동물들은 요즘 편안할 날이 없다.

그들이 얼마나 불안해 하는가는 그들의 행동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어찌나 사람을 무서워하는지 달리던 차가 멈춰서는 시늉만 해도 즉각 달아나거나 긴장한다. 총을 쏠까 두려워서다.

지자체마다 돌아가면서 순환수렵장을 운영하는 이유는 유해조수를 구제하고 건전한 수렵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그러기에 제도 자체를 탓하는 건 아니다.

늘어난 들짐승 때문에 농사철 내내 밤잠 설치는 산간주민들의 애타는 농심도 잘 알고 있고 1년을 학수고대하며 수렵철을 기다려온 엽사들의 기분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일부 몰지각한 엽사들의 그릇된 총질로 인해 야생동물들이 수난 당하고 농촌주민들이 불안에 떠는 등 부작용이 심각한 데 있다.

예전의 엽도(獵道)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날짐승이 땅이나 물위에 있을 땐 절대 쏘지 않고 한번 놓친 들짐승은 뒤쫓지 말아야 함에도 기필코 잡겠다는 듯 막무가내다.

인가에선 총소리를 내지 않는 게 도리인데 걸핏하면 지붕과 마당위로 총알이 날아든다.

주민들은 하소연하고 싶어도 총 든 이들이기에 함부로 말도 못한다.
짐승도 떨고 사람도 떠는, 그래서 더 으스스해진 곳이 요즘의 순환수렵장 부근 산간마을이다.

언제까지 풍선만 불어댈 것인가

 
 충북도청서 경제부처 합동 지역경제설명회가 열리던 지난 7일 괴산 불정·감물지역 주민들을 만났다. 정부가 추진중인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와 관련해 ‘최근 이 지역 주민들이 달천댐 건설을 관계기관에 건의했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주민들의 답변은 이러했다. “어느 누구도 댐 건설을 건의한 적은 없다. 다만 주민 대다수가 댐 건설을 희망하고 있고 또 언젠가는 댐이 건설될 것으로 믿고 있다. 오죽하면 댐 건설을 반대하던 사람들까지도 마음을 돌리겠는가.”
 의외였다. 달천댐 건설 재추진 논란이 일던 2006~7년까지만 해도 댐 얘기만 꺼내면 고개를 젓거나 화를 내던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왜 그럴까. 불과 1년여 전까지만 해도 옆사람 눈치보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주민들이 이젠 대놓고 댐 얘기를 하니 이유가 궁금했다.
 “댐요? 이왕에 들어설 것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들어서는 편이 주민들을 살리는 겁니다. 이거야 원, 사람이 살 지역입니까.”
 댐 건설 예정지로 거론된 후 지역사회가 묘하게 돌아가면서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얘기다. 그 첫번째 이유는 댐 건설 예정지로 지목된 후 부동산 거래가 뚝 끊기고 상권까지 죽었으며 집과 창고가 낡아도 수리할 생각조차 안하고 논에 객토도 안한다는 것이다. 수리하고 객토해 봤자 보상을 더 받는 것도 아니라며 아예 손을 놓고 있단다. 한 마디로 의욕상실증에 빠져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역인심이 갈수록 흉흉해지고 있음을 들고 있다. 지역에 경조사가 있어도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조해 봤자 추후 댐이 건설돼 서로 흩어지면 헛부조가 될 게 뻔하다는 생각에서다. 깜짝 놀랄 일이다. 댐 얘기가 주민들의 의욕을 앗아가고 인심까지 변하게 만들었으니 이야말로 큰 부작용 아닌가.
 대화도중 궁금증 하나가 늘었다. 왜 이곳 주민들이 지금같이 달천댐 건설을 기정사실처럼 믿게 됐는가. 답은 간단했다. 정부가 아직까지 달천댐 계획을 완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지난 2007년 7월, 당시 건설교통부가 댐 건설 장기계획 변경보고서에 ‘남한강 달천수계 댐 후보지는 해당 지자체와 협의를 완료한 후 추진한다’고 명시한 것을 괴산군이 “이는 사실상 백지화를 선언한 것”이라 해석해 언론에 보도됐으나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주민은 없다는 설명이다.
 국가의 댐건설 장기계획은 그 성격상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또 다시 추진될 것으로 주민들은 믿고 있다. 다만 중요한 건 언제 삽을 대느냐인데 그 시기가 줄곧 오리무중이어서 지금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권도엽 국토해양부 1차관이 충북도청을 방문, 달천댐 건설 재추진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상황을 봐야 한다”라면서도 “남한강 수계는 댐이 절대 부족한 상황”이라느니 “희생과 양보가 필요하다”느니 아리송한 답변만 늘어놓음으로써 가뜩이나 혼란스런 지역정서에 기름을 잔뜩 부었다. 실체없는 변죽만 또다시 울린 셈이다.
 언제까지 이처럼 풍선만 불어댈 것인가. 언제까지 자꾸만 말장난할 것인가.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도 그렇다. 모두 다 좋으라고 하는 사업이니 믿고 따라오라고만 외쳐댈 뿐 구체적인 내용은 여전히 안개속이다. 사업착수일은 앞당겨져 눈앞인 데도 실체는 줄곧 ‘기대하시라’다. 
 풍선은 자꾸 불면 터진다. 제 아무리 깜짝쇼도 좋고 기밀유지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풍선만 불어대면 무대도 열기 전에 터져 날아가고 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속이 썩어 문드러져가는 달천강 주민들, 나아가 국민들 생각좀 했으면 한다.

새해엔 ‘로드킬’ 없는 세상을 꿈꾸자

 
 두 달 전 일이다. 괴산호 생태 탐사를 위해 산막이란 마을에 들어가 있는데 괴산 청천의 한 후배로부터 긴급 연락이 왔다. 화양동 계곡으로 통하는 도로변에 엄청 큰 새가 죽어있다며 숨 넘어가는 소릴 한다.

   예감이 좋질 않아 곧바로 달려갔더니 역시나 였다.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종인 수리부엉이였다. 덩치와 발톱,부리로 보아 1년도 채 안된 유조였다. 특별한 외상은 없는데 몸속 뼈가 다 으스러졌다.

   로드킬(Road kill)이다. 자기 혼자 먹이잡이 나왔다가 지나가는 차량에 부딪혀 횡사한 것이다. 위에 내용물이 있나 보니 비어 있었다. 얼마나 배가 고파 기진맥진했으면 지나가는 차량도 못보고 피하지 못했을까.

   설령 어린 개체라 하더라도 시력과 청력하면 그 어떤 야생동물보다도 뛰어난 밤의 제왕 수리부엉이가 아니던가.
 

   지난 주엔 달래강의 겨울철새를 촬영키 위해 충주 인근 수주 팔봉쪽으로 향하는데 바로 앞차가 느닷없이 급정거 하면서 휘청거렸다. 아차 싶어 차밑을 보니 금새 피가 흥건했다. 너구리였다. 야행성이라 주로 밤에 활동하지만 그 역시 굶주린 배를 참지 못하고 한낮에 먹을거리 구하러 나왔다가 참변을 당했다.
 또 3일 전엔 청원군 미원면 달래강변 도로서 고라니 한 마리가, 그 이튿날엔 비슷한 장소서 족제비 한 마리가 처절한 죽음을 맞았다. 생활권이 괴산 청천인 데다 야생동물이 많이 사는 달래강변을 자주 찾다 보니 요즘 들어 로드킬 당한 야생동물 사체들을 부쩍 많이 보게 된다.

 
 야생동물의 로드킬을 볼 때마다 아쉬운 것이 있다. 바로 우리의 무관심이다.

   지나는 운전자들은 대부분 목격 순간만 잠시 얼굴을 찡그릴 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내 집 강아지가 그렇게 됐다면 아마 그렇게 황급히 지나치진 않을 것이다. 또 자신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들짐승을 직면했다면 얼마나 당황하고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란 생각도 별로 않는다.
 당국의 노력도 너무나 미흡하다. 최근 들어 환경부가 인터넷 웹진을 통해 로드킬의 심각성을 알리고는 있지만 그에 대한 대책은 까마득하다. 고속도로 혹은 신설도로에 전시품처럼 만들어 놓은 생태도로란 것도 실로 가관이다. 어린아이에게 밧줄위를 걸어 강물을 건너라는 격이다. 야생동물들은 서커스단의 조련된 동물이 아니다.

      
 로드킬 당한 사체들을 신속히 제거 처리하지 않는 것도 큰 문제다. 오죽하면 도로마다 로드킬 당한 동물들의 사체가 오고 가는 차량에 의해 짓밟히고 또 짓밟혀 아예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있는 곳이 즐비하겠는가.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들의 처분(?)은 늘 까치와 까마귀 몫이 된다. 이동통로가 졸지에 사선(死線)으로 변한 것도 억울할 판인 데 짓밟히고 짓찟기고 형체도 없이 ‘노상분해’되는 팔자가 곧 우리나라 야생동물들이다.
 기왕 나온 김에 까치와 까마귀 얘기 좀 더 해야겠다. 요즘의 까치와 까마귀를 자세히 보라. 그들이 왜 도로변을 맴돌고 있는가. 바로 로드킬 때문이다. 그들은 항시 도로변을 맴돌고 있다가 로드킬 사체가 발견되면 곧장 몰려든다. 사고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오는 견인차 같다. 질주하는 차량도 겁내지 않는다. 우리의 무관심은 결국 까치와 까마귀들의 행동까지 변화시켰다.


 이젠 로드킬 방지를 위한 특단이 필요하다. 단순히 전시행정에 그치지 말고, 국내 전 도로를 그야말로 안전한 도로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로드킬 없는 도로, 그것은 곧 사람도 안전한 도로다.
 우리의 무관심이 까치와 까마귀들의 행동까지 뒤바꾸어 놨으니, 이번엔 우리의 관심으로 그들을 더 이상 로드킬 사체나 탐내는 ‘걸조(乞鳥)의 굴레’에서 벗어나게끔 해주자.

’개구리 망신살’ 또 언론을 탔다

 
 겨울철이면 으레 언론을 타는 동물이 있다. 개구리다.

   관련 법규가 강화된 이후 아무개가 개구리를 잡다 적발됐다느니 모씨는 먹기만 했는데도 벌금을 물게 됐다느니 하는 기사가 곧잘 보도된다.
   겨울철 단골메뉴인 개구리 관련기사 중에는 간혹 쓴웃음을 짓게 하는 경우가 있다. 4년전 충북 모지역서 있었던 사건(?)도 그런 경우다. 당시 한 펜션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화재원인이 가관이다. 까닭인 즉슨 당시 모지역 사람들이 그 펜션으로 놀러왔다가 개구리를 잡아먹고는 2차로 노래방엘 간다는 것이 그만 가스불 위에 개구리 잔여분을 올려놓고 가는 바람에 불이 난 것이다.
 조사 결과 시커멓게 그을린 용기속에 역시 시커멓게 탄 채 ‘만세’를 부르는 개구리가 꽤 여러 마리 발견됐으니 당사자들은 꼼짝없이 실화자에다 야생동물 불법 포획자로 몰려 졸지에 개망신 당했다. 개구리 잡아먹다 남의 재산 태워먹고 범법자까지 된 셈이니 개망신 아닌가.
 

   지금은 많이 계도돼 개구리를 몰래 잡아먹는 행위는 크게 줄었지만 아직도 깊은 산골에선 배터리까지 동원한 간 큰 포획꾼들이 더러 있다. 현행 야생동식물보호법에는 개구리와 뱀 등을 불법 포획할 경우 2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도록 돼 있다. 불법포획한 걸 먹거나 운반, 보관만 해도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백만원 이하의 벌금을 문다. 그만큼 중범죄 취급한다. 들키면 오랏줄 망신 아니면 재산을 축내야 한다. 혹자는 너무 과한 게 아니냐고 할 지 모르나 그게 다들 자초한 일이다.
 

   개구리가 또 이번에 언론을 탔다. 그냥 언론을 탄 게 아니라 한 지자체를 개망신 주고 있다. 다름 아닌 청원군이 관내 업자에게 중국산 개구리를 산 채로 수입토록 허가했다가 망신살이 뻗친 것이다.
 보도 대로라면 관계부서 공무원들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다. 해당업무에 관한 기초 소양조차 없는 것 같다. 그러기에 그깟 개구리 좀 수입허가를 내줬다고 웬 호들갑이냐는 반응이다. 게다가 문제의 북방산개구리(흔히 경칩개구리로 불리는 종의 하나)는 국내산과 종도 같고 생김새도 같을 뿐만 아니라 생태계 교란 동물로도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는 설명까지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생태학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제 아무리 종이 같고 생김새가 국내산과 별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일단 외국산 동물이 산 채로 유입돼 야생화 됐을 경우엔 유전 생태학적으로 큰 문제가 생긴다. 더욱이 이번처럼 수입목적에 인공증식이 포함된 경우엔 그들 개구리가 야생으로 뛰쳐나올 가능성이 훨씬 높다. 만일 우려대로 야생에 노출되면, 담당 공무원의 말처럼 ‘국내산과 꼭같은 종’이기 때문에 국내산과의 교잡은 불보듯 뻔하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우리 고유의 유전자가 훼손되고 흐트러지게 되는 것이다.
 

   이해가 안 간다면 중국산 붕어를 생각해 보라. 일명 짜장붕어가 유입된 이후 국내 상황이 어떻게 됐는가. 당초 우려대로 교잡종인 ‘짬뽕붕어’가 생겨나 판을 치게 됐지 않은가. 중국산 붕어 역시 분류학상으로는 국내산 붕어와 그리 멀지 않다. 혈통이 가까워서 문제가 덜 되는 게 아니라 혈통이 가깝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더 큰 것이다. 교잡이 쉬운 만큼 우리 고유의 유전자가 쉽사리 훼손된다고 보면 된다.
 

   시쳇말에 ‘개구리 뛰는 방향’이란 게 있다.

   하찮은 개구리라고 얕잡아보다간 불똥이 어디로 튈 지 모른다. 물가니 주식이니 모든 것이 다 개구리 뛰는 방향처럼 어지러운 세상, 그나마 개망신 당하지 않으려면 겨울철 개구리마냥 곱게 움츠리고 살 일이다.

   그러다 보면 봄이 오지 않겠는가.

고등어 대풍, 결코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남쪽 바다가 온통 고등어판이다. 낚시꾼들은 바늘에 비린내만 묻혔을 뿐인데 연방 올라오는 고등어 행렬에 탄성 지르기 바쁘고 구경꾼들은 모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아이스박스 하나 채우긴 일도 아니다. 여분으로 가져간 비닐봉지 채우고도 남아도니 인심까지 팍팍 쓴다. 회는 이미 실컷 떠먹은 뒤라 ‘고등어회’ 말만 들어도 비린내가 콧구멍을 후빈다.
 바닷속에 고등어가 얼마나 많으면 낚시바늘이 가라앉을 새도 없다. 대여섯살 어린네도 일단 낚싯대만 잡으면 강태공이다. 이럴 때를 두고 물반 고기반이라던가. 


 즐거운 비명은 고기잡이 배도 마찬가지다. 올라오는 게 고등어요 넘쳐나는 게 고등어다. 그 옛날 풍어가 든 마을에선 부지깽이 대신 생선으로 아궁이불을 다독거렸다더니 요즘 부둣가가 꼭 그 판이다. 가는 곳마다 고등어가 산 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사람마다 소 닭 쳐다보듯 한다. 비린내 좋아하는 고양이마저 아예 곁에도 안간다. 13년 만의 고등어 대풍이 모처럼만에 진풍경을 낳고 있다.
 

  어시장은 더하다. 부산공동어시장은 지난달 22~25일까지 불과 나흘만에 생고등어 1만980톤을 처리해 122억 여원의 판매고를 올렸다. 고등어 위판량으론 사상 최고란다. 고등어가 많이 잡히면서 운반선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아니 오히려 제때 하역을 못해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이다.


 그런데 문제는 동해안 쪽 사정이다. 명태와 대구 잡이가 제철을 맞았건만 어획량이 여간 시원찮은 게 아니다. 오죽하면 그 흔턴 명태마저 구경조차 하기 힘들단다. 이 때쯤이면 대관령을 온통 비린내로 진동케 하던 명태덕장들도 한숨소리만 요란하다. 동해가 아닌 다른 바다서 잡아왔거나 수입산 명태를 손질해 말리자니 기분 좋을 리 만무다. 이대로 가다간 얼마안가 국산 명태는 도감에서나 찾아볼 판이란다.
 

   왜 이럴까. 왜 우리 바다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이상한 바다로 변했을까. 원인은 바닷물 온도다. 기후 온난화로 한반도 근해의 수온이 올라가면서 회유어종을 뒤바꿔 놓았다. 그 결과 겨울철인 데도 난류성 어종인 고등어가 흔해졌고 고등어를 먹이로 하는 다랑어류, 즉 참치가 남해와 제주도 근해서 심심찮게 잡힌다. 참치잡이 트롤낚시 풍경이 먼 나라가 아닌 우리 연안서 자주 목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랑어들은 아열대 어종이다. 아열대 어종은 이 뿐만이 아니라 주걱치,쏠베감펭,노랑가오리,흑새치까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반면 한류성 어종인 명태,대구,청어,도루묵은 갈수록 줄고 있다. 명태는 이제 산지에서조차 ‘금태’라 부르고 원양 명태와 구분하기 위해 ‘진태’란 말까지 생겨났다.


 관련자료에 의하면 지난 40년간 한반도 근해의 평균 수온이 겨울철엔 섭씨 1.35도, 여름철엔 0.9도 올랐다. 수온 1도 변화는 엄청난 변화다. 어류들은 육상동물보다 5~10배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민감한 물고기는 수온 1도 변화에 생과 사를 넘나든다. 수온이 변하면 먹이를 먹다가도 안 먹는다. 산란기땐 더욱 예민해져 멀쩡하던 물고기도 수온 몇도 상승에 금새 알 깔리고 정액 뿜는다.
 지금 우리주변에선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한반도의 바다 품을 떠나는 어종들이 늘어나고 있고 그 여파가 어느새 우리 식탁에까지 미치고 있다. 반찬은 물론 술 안주와 해장국 거리가 바뀌고 제삿상의 제물까지 바꿔놓고 있다.


 겨울날씨가 푹해졌다고 좋아할 게 아니다. 또 겨울철에 고등어가 대풍이라고 마냥 좋아할 일만도 아니다. 겨울은 그저 적당히 춰야 제맛이고 겨울바다에선 명태,청어가 잡혀야 제격이다.

  국민 생선 명태가 그립다.

갑갑한 세상 공기라도 맑게 살아야 할 게 아닌가

 

 한반도를 향한 ‘환경 공중폭격’이 올겨울에도 어김없이 시작됐다. 지난 2일 충남 서산과 서울,인천 등지를 급습한 중국대륙발 모래먼지를 시작으로 이른바 월경(越境) 공해로 인한 총성없는 전쟁이 또다시 시즌을 맞았다.


   다름 아닌 황사 얘기다. 혹자는 대기중에 모래먼지쯤 끼는 거 가지고 너무 호들갑 떤다 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있다.
 우선 먼지량부터 보자. 황사 한 번에 발생하는 미세먼지는 대략 100만톤이다. 야산 하나가 먼지로 날아든다. 이 중 한반도에 쌓이는 양은 15톤 덤프트럭 4천~5천대 분량인 4만6천톤에서 8만6천톤으로 추정된다. 깔볼 양이 아니다.
 그 다음은 가시적인 피해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의 2005년도 자료에 의하면 황사로 인해 국내서는 일년중 많게는 181만7천여 명이 병원치료를 받고 165명이 사망하고 있으며 모든 피해를 돈으로 환산하면 한해에 많게는 7조3천억여원이 먼지속에 파묻힌다. 우리나라 사람 35.4%가 연평균 두 차례꼴로 황사로 인한 질환을 앓는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사실이 이러니 공중폭격 혹은 전쟁이란 말을 안 쓸 수 없다. 피해지역 입장에선 더욱더 그렇다. 특히 환경 공중폭격이란 용어는 억지로 지어낸 말도 아니다. 일본 언론들이 실제로 자주 써 이미 환경용어화 된 신조어다. 의도성과 적대성만 없을 뿐 실제의 공중폭격이나 전쟁과 다름없다는 뜻이다.


 황사는 오랜 역사를 가진 자연현상이다. 지질시대부터 일었다는 학설도 있다. 영어로 흔히 아시안 더스트(Asian dust)라 부르는 것도 이 지역의 오랜 고질적 현상임을 말해준다.
 우리나라의 첫 기록은 서기 174년 신라 아달라왕 때다. 당시엔 황사 대신 ‘흙이 비처럼 쏟아진다’하여 우토(雨土)라 불렀다. 우토란 말은 고려,조선시대까지 사용됐다. 일본에선 서기 807년 황우(黃雨)가 내렸다는 게 첫 기록이다.
 중국서도 처음엔 황사 대신 우토로 불렀다. 기원전 1150년부터다. 중국서 황사란 용어가 사용된 건 서기 550년 이후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와서야 비로소 황사란 용어가 처음 사용됐다.
 

   문제는 이같은 유구한 역사가 아니라 시대 흐름에 따라 유해성분이 짙어지고 발생횟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발생시기 또한 점차 일러져 연중화 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과거엔 단순히 미세한 모래입자 내지 흙입자가 주였다면 요즘엔 중금속 성분인 납,카드뮴까지 담겨 있다. 중국의 빠른 산업화에 따른 환경오염 때문이다.
 성분이 독해진 만큼 피해도 심각해졌다. 산성흙비(눈)의 원인은 물론 항공,운수,정밀산업 등 각 분야에 피해를 입히고 폐호흡기 질환자와 조기 사망자수도 증가시키고 있다.
 가뜩이나 기후 온난화로 대륙내 사막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데다 산림벌채,초지의 농지화,가축의 과방목이 늘어나면서 사막화를 더욱 부채질해 황사의 연간 발생횟수와 먼지량을 늘게하고 있다. 과거엔 주로 봄철에 일어났는데 최근엔 11월,12월에도 발생하는 등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한다.
 피해면적도 넓어져 우리나라와 일본,몽골은 물론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향한다. 그러나 국제적인 대처는 아직 미흡하다. 중국이 황사관련자료를 아직도 국가기밀로 취급하는 등 소극적이니 큰 진전이 있을 리 만무다.
 

  우리는 이 시점서 명심할 게 있다. 황사의 가장 큰 피해국은 바로 우리나라란 점이다. 아쉬운 사람이 샘 판다고 우리가 적극 나서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끌려가지 말고 목소리를 한껏 키우란 얘기다. 언제까지 모래먼지를 뒤집어쓰고 살 것인가.
 갑갑한 세상에 공기라도 맑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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