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 소동,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5인조 추격대와 식인 멧돼지의 한판 승부를 그린 영화 '차우'. 최근 빈발하고 있는 멧돼지 소동을 모티브로 한 괴수 어드벤처다. 공교롭게도 국내에서는 이 영화 상영 이후 멧돼지 소동이 더욱 빈발함에 따라 목하 신드롬까지 일고 있다. 우연치고는 대단한 우연이다.
하지만 최근의 멧돼지 소동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선 멧돼지만 나타나면 총부터 들이대 사살하고 보는 현 세태가 아쉽다. 멧돼지가 그렇게도 위험한 동물인가.


물론 멧돼지는 위험하다. 화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오죽하면 저돌(猪突)이란 말까지 생겼을까. 이 말뜻엔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는 멧돼지 모습이 내포돼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어디까지나 화난 멧돼지를 전제로 한다. 멧돼지는 보통 새끼를 거느리고 있거나 위협을 느꼈을 때 저돌적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러질 않는다. 사람을 먼저 공격하는 예는 더욱 드물다.


그런데도 나타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살한다. 과잉반응이란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생명경시 풍조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제 아무리 위험성 있는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단지 도심지 또는 주택가, 도로변에 나타났다고 해서 무조건, 그것도 공개된 장소서 총으로 쏴 죽인다는 것은 자칫 '무엇이든 위험하면 죽여도 된다'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얼마 전 조류 인플루엔자와 구제역에 걸린 가축들을 보란 듯이 공개적으로 살처분했다가 뒤늦게 너무한 처사란 반발이 일자 인도적(?) 살처분이란 지침을 마련했던 기억을 벌써 잊었는가.


해서 제의하건대 대처방안을 좀 바꿨으면 한다. 그들도 엄연한 생명체요 우리 생태계의 한 구성원이란 점을 고려해 무조건 죽이고 보는 행위는 자제했으면 한다. 인명 피해와 같은 위험 소지가 높아 굳이 급처방이 필요하다면 일단 마취시켜 생포한 다음 살처분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풀어줄 것인지를 결정하되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함부로 사살하는 행위는 하지 말길 바란다. 이는 교육상으로도 필요한 일이다.


또 하나. 도심지 등에 나타나는 멧돼지는 대부분 먹잇감이 궁해서 혹은 길을 잃어 방황하다가 본의 아니게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따라서 덮어놓고 맹수취급하는 것 역시 피해망상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왜 갈수록 더 자주 출몰하고 있는지부터 생각할 일이다. 야생동물에게 있어 사람은 결코 달갑잖은 존재다. 그러니 사람곁을 찾아오고 싶어 찾아오겠는가. 개체수는 늘어난 반면 서식공간은 한정돼 있기에 사람들과의 활동영역이 겹치면서 맞닥뜨릴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 것 뿐임을 헤아려야 한다.


또한 멧돼지를 만났을 때의 행동요령도 제대로 알릴 필요가 있다. 먼저 위협하든가 공격하지 않는 한 덤벼들지 않는 동물이란 점을 주지시키고 당황하거나 소리쳐 예민해지지 않도록 주의할 것도 상기시켜야 한다. 두렵다고 허겁지겁 달아나는 것도 멧돼지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삼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차제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얼마전 한 고속도로에 멧돼지가 뛰어들어 자칫 대형사고를 빚을 뻔한 것처럼 앞으로 그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로드킬 문제'를 보다 심각한 당면과제로 받아들여 대책마련을 서둘렀으면 한다.


앞으로 닷새 뒤면 전국 각지서 순환수렵장이 운영된다. 명목이야 멧돼지를 포함한 유해조수의 구제와 개체수 조절, 건전한 수렵문화 정착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살생을 공식적으로 허가하는 일에 어느 지자체에서는 신청자 접수시작 3분 만에 무려 1,000명이 몰려들어 곧바로 마감됐다고 한다. 해당 지자체야 신이 났겠지만 그 역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민물해파리 '한반도 과거'와 연결돼 있다

 

지난 10월 11일 대청호에서 또다시 민물해파리가 발견됐다. 15년 전인 1994년 8월 국내 최초 발견된 이래 두번째다. 대청댐 건설(1980년) 이후로 치면 14년만에 처음 나타났다가 29년만에 다시 출현했다. 민물해파리 자체도 생소하지만 대체 이 동물의 생활사가 어떻기에 29년만에 단 두번, 그것도 15년이란 공백기를 두고 나타났는지 큰 관심사다.


민물해파리목 작은히드라과의 자포동물인 이 민물해파리는 학명이 Craspedacusta sowerbyi이지만 보통 '히드라 메두사(Hydra medusa)'라 불린다. 히드라 메두사란 메두사 형태의 히드라를 뜻하며 우리말로는 민물해파리의 성체를 일컫는다. 민물해파리는 생활사가 독특하다. 일생 동안 폴립(polyp)형과 메두사형 등 두 가지 형태로 세대교번 하는데 폴립형은 바위 같은 곳에 붙어 고착 생활하는 반면 메두사형은 물속을 헤엄치면서 생활한다. 따라서 대청호에 출현한 민물해파리는 보통 때는 작은 폴립형태로 존재하다가 조건이 맞으면 세대교번을 통해 메두사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메두사형은 흔히 알려진 바다해파리 모습과 흡사하다.


그러나 민물해파리와 바다해파리는 별개 동물이다. 분류학상 민물해파리는 히드라충강(綱)이고 바다해파리는 해파리강(綱)이다. 혈통상 멀어도 한참 먼 관계다. 두 종은 자포동물이란 점만 같다. 일반적으로 해파리라 부르는 동물은 해파리강에 속하는 바다동물이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민물해파리는 명칭만 해파리다.
민물해파리는 크기가 매우 작다. 우산형태의 몸체(외산) 지름이 1.5~2mm밖에 안된다. 백원짜리 동전보다 작다. 하지만 모습은 신비롭고 아름답다. 투명하고 앙증맞은 몸체와 200여개의 촉수를 움직여 헤엄칠 땐 가히 환상적이다.


대청호를 포함한 국내 수역(1994년 대청호서 처음 발견된 것을 계기로 그후 소양호 등 몇몇 수역에서도 발견됨)에서의 민물해파리 출현은 의미가 자못 크다. 우선 전세계적으로 희귀종인 민물해파리가 우리나라에서도 서식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증거다. 그런 면에서 최초 발견 장소인 대청호는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이 종이 일본에 서식하고 있는 진수(眞水)해파리와 동일종이란 점에서 지질사학 또는 자연사학적으로도 소중한 단서가 되고 있다. 왜냐면 양국의 민물수계에 같은 종이 분포하고 있는다는 것은 과거 어느 때인가 양국의 땅이 하나의 민물수계에 속해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고황하(古黃河)다. 일본 열도가 대륙에서 분리되기 전 한반도와 이어주던 커다란 물줄기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기후환경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한 답 또한 민물해파리가 갖고 있다. 다시 말해 국내서 민물해파리가 출현하는 상황을 종합해 보면 저절로 답이 나온다는 얘기다. 그동안 대청호를 비롯한 국내 수계서 출현한 민물해파리는 모두가 긴 가뭄과 무더위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4년도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랬다. 이는 결과적으로 수온이 높을 때만 출현한다는 얘기다. 1994년 당시 대청호에선 수온 섭씨 28~30도, 기온 30도 이상일때 출현했다. 올해 역시 눈에 띈 건 10월이지만 첫 발생은 이미 수온이 높았던 여름철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종합하건대 화제의 민물해파리는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하나의 대륙으로 이어져 있던 시기에 생겨났으며, 그 시기에는 지금보다 기온이 훨씬 더 높았음을 추론케 해준다. 대청호 주변의 두루봉동굴 유적서 코끼리,사자,원숭이,쌍코뿔이 등 아열대 혹은 열대성 동물의 뼈화석이 출토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민물해파리 출현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민물해파리를 연구하는 국내학자는 하나도 없다. 이게 현실이다.

10월 9일과 괴산호, 그리고 '백조의 노래'

 

10월 9일은 충북 괴산호의 생태에 있어 매우 중요한 날이다. 이날을 전후해 국제적 보호종이자 천연기념물 201호인 큰고니(백조)가 괴산호를 찾기 때문이다.
혹자는 철새인 큰고니가 매년 도래하는 날짜를 어떻게 한 날(10월 9일)로 특정할 수 있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 기자 역시 처음엔 그런 의문을 가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데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증거가 있어서다. 그것도 15년간이란 놀라운 데이터가 있다.

이 놀라운 데이터를 낸 주인공은 다름 아닌 괴산호 주민이다. 그는 괴산호 인근 동네서 태어나 50년 가까이 살고 있는 토박이로서, 괴산호 생태에 관한 한 눈 감고도 다 아는 전문가다. 그런 그가 15년전부터 특별한 관심을 갖고 관찰해 오고 있는 게 바로 큰고니의 도래 일지요, 그 결과 얻어낸 답이 우리나라 내륙을 경유하는 큰고니의 월동군(群) 중 일부는 매년 10월 9일을 전후해 괴산호를 찾았다가 얼마간 머문 뒤 남쪽을 향한다는 것이다. 괴산호가 중간기착지란 얘기다. 더욱이 매년 첫번째로 목격되는 선발대의 도래일이 공교롭게도 한글날인 10월 9일인 경우가 특히 많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지난해 여름 '달래강의 숨결'이란 기획물을 취재할 때로 그 때도 그는 같은 주장을 했는데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새가 날짜를 잊지 않고 꼭 그 날 괴산호를 찾아오느냐 하는 아주 기본적인 의문이 들어서였다. 한데 그의 말이 맞았다. 그의 말에 따라 지난해 10월 9일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관찰한 결과 실제 그날 저녁 7마리의 큰고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랄 노자였다. 마술 같았다.


그런데 그 마술같은 광경이 올해도 펼쳐졌다. 대한민국의 심장부 세종로에서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 동상이 베일을 벗고 인자하디 인자한 미소로 전국민의 가슴속에 뚜렷하게 각인되던 한글날, 30마리나 되는 큰고니들이 괴산호에 첫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기막힌 일이다.
그런데 그 경이로운 광경이 한낱 깜짝쇼로 끝났다. 너무나 허탈했다. 북쪽으로부터 숨가쁘게 날아온 큰고니떼가 괴산호에 안착하지 않고 한두번 선회하다가 이내 남쪽으로 사라진 것이다. 순간적이었다. 사진 촬영할 겨를도 없이 쫓기듯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깜짝쇼는 이번 만이 아니다. 지난해도 그랬다. 한 주민의 열정이 진실로 밝혀지던 지난해 그날도 그들은 무거운 날개를 괴산호서 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나고 말았었다.


이유가 있었다. 괴산호가 변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그 날엔 괴산군이 추진하던 산막이 옛길(괴산호 바로 옆의 옛길) 복원공사가 한창이었다. 드러난 옛길과 베어진 나무, 낯선 인부들, 기계음 등에 놀라 중간기착지에서의 달콤한 휴식도 못한 채 그들은 고된 날갯짓을 했어야만 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비록 공사장의 시끄러운 기계음은 그쳤지만, 그간 번듯해진(?) 옛길과 그곳을 찾은 외지인들이 그리도 낯설게 보였던 모양이다. 철새들은 그만큼 예민하다. 환경변화는 곧 두려움이다.


철새의 중간기착지는 매우 중요하다. 괴산호 역시 그렇다. 중간기착지에서 안전해야 월동지와 번식지를 무사히 오갈 수 있다. 괴산호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점을 알아야 한다. 괴산호가 큰고니의 한 중간기착지로서 '생태계의 중요한 생명길'이란 사실을.
고니들은 평생 탁한 소리로 울다가 마지막 죽음 직전에만 딱 한번 아름답게 운다고 한다. 그것이 이른바 백조의 노래다. 행여 그 백조의 노래가 괴산호서 울려퍼지지 않았으면 한다. 탁하더라도 생명이 깃들어 있는 그들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면 한다. 영~원~히…

추석은 여뭄과 기욺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

 

추석(秋夕)을 한자대로 풀면 '가을저녁'이다. 추석의 유래가 된 중추절·가배(嘉俳)·가위·한가위 등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한자어로 가을저녁인 추석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름대로 생각컨대 여물 대로 여문 보름달이 떠오름과 동시에 기울기 시작하는 날이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 해(日) 다음으로 경외로운 달(月)이 가장 풍요롭고 커다랗게 떠오르는 날이 바로 추석이요, 더 이상 찰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그 둥근달(滿月)이 다시 기울기 시작하는 날도 추석이니 경건한 마음으로 자연에 감사하고 조상께 예를 올리자는 깊은 뜻이 들어있다고 본다. '여뭄(=참)'과 '기욺'을 함께 헤아린 조상들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는 얘기다.
추석의 추(秋)는 본래 가을을 뜻하지만 어원적으로는 '여물다'란 의미를 지니며 저녁을 뜻하는 석(夕) 자 역시도 '기울다' 혹은 '비스듬하다'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생각할 때 그런 개연성은 더욱 높다. 해서 종합하건대 추석의 또 다른 의미는 여움(참)과 기욺을 동시에 생각케 하는 특별한 날인 것이다.


이 특별한 날인 추석은 한해 농사를 끝내고 오곡을 수확하는 시기이므로 명절 중에서 가장 풍성한 때였다. 고대사회의 풍농제에서 기원했듯 일종의 추수감사절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엔 이 점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끔 한다. 즉, 본래의 추석은 가을추수를 끝내고 햅쌀과 햇과일로 조상들께 감사의 차례를 지내는 명절인데 오늘날엔 이 마저도 시기적으로 잘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윤달의 영향으로 추석이 늦어진 올해만 해도 그렇다. 추석의 본래 의미 대로라면 수확한 오곡으로 제삿상을 차려야 제격인 데 쌀농가 대부분이 수확을 못한 채 추석을 맞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추,밤,사과,배 등 햇과일 때문에 제삿상을 차린 자손들 마음이 덜 죄송스러웠다는 점이다.


인터넷으로 지난 수십년간 추석이 든 날짜를 헤아려보니 대부분 9월초에서 10월초 사이에 들어있었다. 앞으로 20년간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농사절기상으로 보아 10월초에 드는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추수감사제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9월초에 추석을 맞는 해엔 새파란 벼와 풋대추, 풋밤을 바라보며 제를 지내야 한다. 농법이 크게 달라져서인지 아니면 기후가 변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추석명절과 현재의 농사절기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변한 건 또 있다.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는 양태가 많이도 달라졌다. 민족대이동으로 인한 불편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귀향 몇 시간만에 제삿상에 머리만 조아리고 이내 휑하니 떠나는 급하디 급한(?) 귀성객들이 많아졌다. 성묘길에 만나거나 아니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인사와 담소, 술잔을 나누면서 회포 풀던 정경은 거의 볼 수 없게 됐다. 마을 단위의 풍습도 그렇다. 씨름대회나 콩쿨대회 같은 건 빛바랜 앨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꿈같은 얘기가 됐다.


대신 마을입구마다 나부끼는 건 어느 어느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총동문체육대회를 알리는 현수막 뿐이다. 추석명절을 틈타 옛 친구와 선후배들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이즈음에서 우선 고향의 실정부터 생각해 봄이 어떨까. 고향을 지키느라 허리가 굽을 대로 굽은 채 하루하루를 고되게 살아가면서도 뼈빠지게 지어놓은 농삿물을 어디다 내다 팔 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고향 어르신들을 위해 내고향 농산물 팔아주기 씨름대회나 노래자랑과 같은 화합의 장을 열어보면 어떨까 싶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고 아껴주시는 동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 옛날 마을행사의 단골멘트를 상기하면서 말이다.

야생버섯 흉년 가히 ‘자연 재해’ 수준이다

 
 잘 아는 송이꾼이 있다. 충북 괴산의 칠성면에 사는 그는 15m밖의 송이를 발견해낼 만큼 혜안을 가진 송이박사다. 남들은 발밑의 송이도 지나치기 일쑤지만 그는 반경 2~3m를 한번에 훑고 지나가면서도 땅속에 든 송이조차 흘리는 법이 없다. 그는 한 해에 송이를 따 많게는 3천만~4천만원, 적게는 2천만~3천만원을 번다. 송이따기가 어엿한 직업인 셈이다.

 
   그런 그에게 열흘전 전화를 했다. 송이작황이 궁금해서다. 그런데 신호음이 끊기자마자 굉음이 들려왔다. 의아해 했더니 남의 과수원에서 예초기로 풀을 깎고 있단다. “아니, 버섯꾼이 송이철에 산에 가지 않고 품삵일을 하다니?” 다시 물었다. 그 왈, “산에 가 봤자 버섯이라고 생긴 건 하나도 없어 아예 오르지 않는다”며 풀죽은 소리를 했다. 그는 얼마전까지 공공근로사업 일을 하다가 송이철 직전에 그만뒀다. 그런 그가 송이따기를 포기한 채 품삵일을 하고 있다.


 가을 폭염과 가뭄으로 야생버섯 산출량이 크게 줄자 그 여파가 일파만파다. 앞의 송이꾼처럼 버섯따기가 본업인 사람들은 우선 당장 소득이 없어 살 길이 막막해졌다. 그들은 송이철 한 철 벌어 한 해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송이가 곧 돈줄인 그들인데 송이가 초반에 조금 반짝하다가 중반기 이후 전혀 나지 않으니 이보다 더 한 날벼락이 없다. 충북의 경우 제천,단양,괴산,보은,영동 등 송이 산출지역엔 버섯따기가 본업인 사람이 부지기수다.


 상황이 이러니 여파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충북 괴산지역만 해도 한 해 송이철 주민소득 총액이 60억~70억원이란 얘기가 있다. 따라서 이들 송이 산출지역에서 졸지에 사라진 돈이 무려 수백억원대다. 더욱이 올핸 3년째 송이흉년을 맞았다. 2007년 이후 송이 구경을 못한 송이꾼들이 무척이나 많다. 능이 등 다른 버섯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충북 도내 전체로 치면 그 손해액이 가히 재해수준이다. 자연재해가 꼭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불어야만 하는가. 2007년과 2008년엔 가을 가뭄으로, 올해는 가을 가뭄에 폭염까지 겹쳐 버섯이 안 나 피해 입은 경우도 자연재해라면 자연재해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서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있다.

 
 여파는 이 뿐만이 아니다. 지역경제까지 휘청거리고 있다. 버섯 산출지역의 경제고리는 ‘버섯 채취꾼-판매업자-택배업자-소비자’ 혹은 ‘채취꾼-판매업자-음식점-소비자’ 등으로 얽히고 섥혀 있다. 게다가 버섯철을 기다려 외지서 원정오는 사람들까지 몰려들면서 지역에 큰 부가가치를 안겨다 준다. 충북 괴산 청천지역의 경우 여름 휴가철 피서인파보다 버섯철 산행인파가 더 많다.
 그런데 올핸 영 아니올시다다. 지난해도, 저지난해도 그랬다. 연 3년째 버섯철 불황이 겹치면서 이미 전업한 사람도 있고 앞으로 전업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버섯만 바라보다간 밥 굶기 십상이라며 넌덜머리를 낸다. 피해가 가장 큰 곳은 야생버섯 전문음식점이다. 줄어든 손님도 그렇거니와 가장 기본적인 물량(야생버섯) 확보도 못해 폐업할 지경이다.


 문제는 또 있다. 지역에 활력이 없어졌다. 적어도 4년전만 해도 이맘때쯤이면 지나가는 개도 버섯과 돈을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버섯과 돈이 흔했던 곳이 버섯산출지였는데 지금은 되레 썰렁해졌다. 오죽하면 “어깨 쳐진 사람은 모두가 버섯관련 업자”란 얘기가 나돌겠는가.


 “올핸 마음먹고 돈 빌려 버섯판매점 내고 차량까지 교체했는데 송이를 몇 kg 팔아보기도 전에 문을 닫게 됐습니다.”

지난 일요일 뒤늦게 내린 비가 그렇게도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는 한 버섯업자의 푸념이 가슴을 마냥 후벼 판다. 이젠 날씨가 지역경제까지 좌지우지하는 시대다.

가을철이면 생각나는 'DDT와 말벌의 아픈 추억'

 
 디디티(DDT)란 살충제가 있었다. 지금은 사용이 금지됐지만 5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정도로 아주 흔하게 사용됐던 농약이다. 살충력이 얼마나 뛰어났던 지 사람들은 아예 만능으로 여겼다. 해서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거의 모든 가정엔 회푸대 종이로 만든 디디티 봉지가 상비약처럼 구비돼 있었다.
모기가 들끓는 시궁창에도, 쥐가 다니는 길목에도, 집앞 남새밭에도, 당시 소득작목 1위였던 담배밭 이랑에도 곳곳이 밀가루처럼 생긴 하얀 디디티 가루가 늘상 뿌려져 있었다. 요즘 같은 가을철엔 더욱더 요긴하게 쓰여졌다. 다름 아닌 벌을 퇴치(예전엔 퇴치한다기 보다는 벌의 애벌레를 얻기 위해 벌집을 따거나 벌굴을 파헤치는 일이 많았음) 하는 데도 디디티만한 게 없었다. 행여 집 근처와 논·밭두렁, 산소 근처에 벌집 혹은 벌굴이 있으면 영락없이 디디티를 뿌려댔다. 신기한 것은 이 가루를 뿌리기만 하면 벌레건 벌이건 맥을 못추고 그 자리서 죽거나 줄행랑 쳤다.


 어디 그 뿐이랴. 어린 애들이 있는 집에서는 소위 ‘이 주머니’란 작은 주머니에 디디티를 넣어 사타구니며 겨드랑에 달아주고는 그것도 모자라 학교 갈때마다 불러 세워놓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하얗게 뿌려주기까지 했다. 그때 그시절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고향의 냄새, 추억의 냄새 하면 곧잘 디디티의 독특한 냄새를 떠올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필자도 어렸을 적엔, 부끄럽지만, 디디티의 위력을 맹신했다가 손가락만한 장수말벌에게 쏘여 까무러쳤을 정도로 된통 당한 적 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겁을 내는 친구들을 꼬드겨 감히 장수말벌 굴을 파헤치려 앞장섰던 것이다. 집에서 몰래 가져간 군용 우의를 걸친 다음 손에 디디티봉지를 들고 말벌이 수없이 드나드는 땅굴을 향해 작업에 들어갔다. 작업이래 봤자 벌굴입구에 디디티를 뿌리는 일이었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살금살금 까치발을 하고 벌굴앞에 다다랐을 때 별안간 목덜미가 두번 따끔했다.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들고간 디디티를 뿌려야겠다는 마음에 봉지에 손을 넣는 순간 또 한번 뒤통수가 따끔했다. 그러곤 기억이 사라졌다. 얼마가 지났는지 깨어나보니 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무모한 짓이었는데 그때 그런 호기를 부리도록 한 것이 다름 아닌 디디티의 위력이었다.


 디디티는 말라리아 퇴치, 해충 구제와 같이 인류에게 공헌한 바도 많고 그것의 살충능력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에게 노벨상도 안겨준 놀라운 발명품이지만, 반감기가 2~15년에 이를 만큼 분해가 잘 안되는 오염물질로서 생물농축 과정을 통해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인간에게도 암을 유발하는 등 위해성이 커 각 국가들이 사용을 금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 1971년 사용이 금지됐으나 사용금지 3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체인구의 20% 이상이 체내에서 디디티 성분이 검출될 만큼 오랜 기간 논란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다.


 바야흐로 벌초·성묘의 계절을 맞아 벌에 쏘여 숨지거나 병원신세를 지는 사고가 빈발하고 있다. 살충제 사용 이후 야생벌의 숫자는 크게 줄었지만 인명피해 사례는 되레 많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생활양식, 특히 음식문화가 바뀌면서 현대인의 체질이 점차 산성화 돼 벌로 인한 피해가 늘었다고 한다. 과거 알칼리 체질일 때에는 벌에 쏘여도 독(산성-pH 5.2~3.5)이 중화돼 죽거나 하는 등의 큰 피해가 없었는데 체질이 산성화 되면서 산성의 독성분에 의한 과민 반응이 더욱 커져졌다는 것이다.
 ‘벌의 계절’이면 생각나는 디디티와 말벌의 추억. 생각만 해도 똥끝이 짜릿하다.

주홍날개꽃매미 확산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것인가

 
 최근 중국매미 신드롬을 낳고 있는 주홍날개꽃매미가 급기야 국립공원 속리산을 비롯한 산간지역까지 확산돼 산림과 과수를 위협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난달부터 자연다큐 ‘위기의 야생’을 연재(본 블로그내 다른 카테고리 참조)하고 있는 필자는 지난 11~12일 충북 보은 속리산 일대에 대한 야생 동식물 남획실태를 취재하던 중 주홍날개꽃매미가 속리산은 물론 같은 국립공원내인 충북 괴산 사담·화양계곡과 경북 용화지역까지 번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들 꽃매미는 더구나 산간지대 경작지까지 침범해 포도,오미자 등 작물까지 피해를 입히고 있다. 주홍날개꽃매미는 그동안 주로 도시지역 아파트 단지와 공원,인근 산림을 중심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뿐 해발고도가 높은 산간지역서 발견되기는 처음이다.


주홍날개꽃매미가 이처럼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가장 우려되는 것은 고사목 발생과 같은 직접적인 피해다. 불과 3~4년전 국내 발생초기만 해도 나무 수액을 빨아먹을 뿐 직접 고사시키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금년 6월 국내 처음으로 충북 청주지역서 가죽나무 30여 그루와 황벽나무 10여 그루가 이 곤충의 습격으로 3년만에 집단 고사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피해가 점차 가시화 되고 있다. 또한 이 곤충이 수액을 빨아먹는 이른바 기주식물도 처음엔 가죽나무와 참죽나무 등 일부 식물만 해당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조사결과 포도·호두·황벽·때죽·자작·고로쇠·무화과·두릅 나무와 심지어 초본류인 엉겅퀴,담쟁이덩굴까지 포함되는 등 증가 추세다.


 상황이 이런 데도 당국은 여전히 나몰라라다. 주홍날개꽃매미 문제가 연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고 매스컴에도 자주 오르내리고 있으나 뚜렷한 메아리가 없다. 전국 실태조사는 커녕 긴급방제 대책을 강구한다는 얘기도 없다. 기껏해야 일부 지자체가 나서 “각기 알아서 피해예방에 힘써달라”고만 하는 정도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작금의 신드롬도 기실 따지고 보면 당국의 안일한 태도가 빚은 결과다. 예를 들어 발생초기에 서둘러 이 곤충의 정체성만이라도 정확히 파악해 홍보하고 대책을 강구했더라면 지금의 사태로까지는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1970년대 발간된 국내 곤충도감에 엄연히 발견 기록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최근 중국으로부터 화물에 묻어 들어왔느니 태풍·황사에 휩쓸려 들어왔느니 하는 등의 억측이, 그것도  ‘여러 입’을 통해 난무하면서 결국 작금의 신드롬을 빚고야 말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첫 발생 이후 지금까지 3~4년이 지나도록 국민들 사이에서 신드롬은 자꾸만 커져 가고 있고 주홍날개꽃매미 개체수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전국이 조만간 접수(?)될 판국인 데도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은 물론 실제 피해정도와 효과적인 구제책을 속시원히 내놓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다량 발생 원인도 근래의 환경변화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기후 등 환경인자가 변하게 되면 제 아무리 균형을 유지하려는 속성을 가진 자연 생태계라 할 지라도 어딘가엔 무방비나 다름없는 ‘빈 구멍’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더구나 변화된 환경을 선호하는 생명체가 있을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최근 한반도 해수역을 완전 점령하다시피한 엄청난 숫자의 해파리 떼와 목하 전 세계인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신종 플루도 결국 환경변화가 가져온 최악의 시나리오다.


 미리 알아서 대처는 못할지언정 이미 피해가 커져가는 상황에서 왜들 머뭇거리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사후약방문도 유분수지 배 건너간 뒤 손 흔들어봤자 애간장만 탈 뿐 이들 생물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고 피해 역시 없던 일이 될 리 만무다.  

버림 받았던 ‘피’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피라는 야생풀이 있다. 벼와 생김새가 흡사하나 생명력과 번식력,생장력 면에서는 벼를 훨씬 능가하는 근성있는 풀이다. 얼마나 근성있는 풀인가는 논밭을 한 해, 아니 단 한 철만 묵혀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온통 피논 피밭으로 변한다. 한 마디로 피투성이가 된다.
해서 농부들은 피라면 넌덜머리를 낸다. 작물 특히 벼의 생육을 저해하는 등 농사에 해가 많아서다. 오죽하면 피사리란 농작업까지 생겼겠는가. 피사리는 주로 품앗이를 통해 논의 피를 ‘작정하고 뽑아내던’ 전통 농작업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던 농촌풍경 중의 하나였다. 


 피사리는 한때 우리나라 전시·동원행정의 상징이기도 했다. 윗사람 말 한마디가 그대로 정책결정에 반영되던 뼈아픈 시절의 뼈아픈 시달림이 바로 피사리였다. 특히 도로변의 논을 경작하던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피사리를 해야 했다. 공무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행여 윗사람이 차를 타고 지나치다가 “저 논 꼴이 왜 저 모양이야”라고 중얼거리기라도 했다간 그 날짜로 모가지가 댕강 했으니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주 다급할 땐 면(面) 직원 모두 동원돼 허겁지겁 피 이삭만 잘라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피가 본래부터 천덕꾸러기는 아니었다. 구황작물로서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원산지인 인도로부터 언제 어떻게 한반도에 전래됐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주 먼 옛날부터 중요한 식량자원으로 재배돼 왔다. 그것도 한반도서 재배된 최초의 작물로서 말이다.(청동기 유적인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 유적의 피 관련 유물이 이를 입증함)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오곡의 하나로 불릴 만큼 주요 작물로 재배돼 온 피는 농업발전,경제성장과 더불어 사람들의 배가 불러지면서 서서히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까지도 근근이 명맥이 유지됐으나 결국 1965년 이후 불어닥친 통일벼 증산 열풍으로 경작지가 급속히 줄어들면서 지금은 아예 곡물로서 취급도 못 받는 버림 받은 풀이 돼버렸다.
 ‘잡곡피(재배피)’는 본디 그의 조상격인 야생 돌피나 물피,강피와 모양·생태는 비슷하나 이삭이 크고 낟알도 굵은 등 유전자원적 가치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작물로서 퇴출 당한 후부터는 여느 피처럼 쓰잘 데 없는 풀로 전락했다. 졸지에 뒤웅박 팔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잡곡피를 신소득 작목으로 새롭게 육성하려는 노력이 충북도농업기술원(이하 충북농기원)에 의해 시도되고 있어 주목 받고 있다. 충북농기원은 지난 3년간의 연구 끝에 잡곡피를 기계로 심어 재배하는 기술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충북농기원은 이를 위해 농촌진흥청으로부터 피 유전자원 21종을 분양받아 수차례의 이앙시험을 한 결과 최근 10a(300평)당 207kg의 피를 수확했다. 벼 수확량에 비하면 그리 많진 않지만 다른 잡곡에 비하면 결코 적은 소출이 아니다. 게다가 밥을 지으면 부드럽고 구수한 데다 단백질,비타민,칼슘,인,철분,식이섬유가 풍부해 웰빙식으로도 그만이다.
 또 재배가 쉽고 생육기간도 짧아 3개월이면 수확이 가능하다. 척박하고 염분이 많은 토양에서도 잘 자라며 생육에 필요한 물 요구량도 적고 병충해에도 강하다.
 해서 충북농기원은 잡곡피를 지역특화작목으로 육성하는 한편 기능성 식품도 개발해 농가소득 향상에 기여할 계획이란다. 반가운 일이다. 유전자원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준 충북농기원에 박수를 보낸다.


 버림받은 풀에서 신소득 작목으로 새롭게 태어난 피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식탁에 올라올 지 자못 궁금하다. 피란 식물을 모르는 신세대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지도 궁금한 일이고….

과거 기상자료가 무용지물이 된 세상

 

5년전 태평양 마셜제도 상공서 직경 10mm짜리 빗방울이 관측된 바 있다. 당시 세계언론은 사상 최대의 자이언트 빗방울이 발견됐다고 떠들어댔다.
혹자는 10mm짜리 빗방울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했을 지 모르나 그 이전까지 관찰된 사상 최대 빗방울이 직경 8mm였다는 점과 보통 빗방울의 지름이 1~2mm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분명 예삿일은 아니었다. 학자들에 의하면 빗방울 크기는 1기압 상온서 직경 6mm일 때가 한계란다. 직경 6mm가 넘으면 표면장력이 견디지 못해 부서지거나 구형이 아닌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과학적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는 아주 희귀한 흔적이 우리나라에 남아 있다. 경남 고성군 동해면의 공룡화석 산지와 진주시 진성면 조류화석 산지에 있는 1억년전의 빗방울 자국이 그것으로 가장 큰 것의 직경이 11㎜이다. 특히 이 빗방울 자국은 바깥 윤곽이 거의 원에 가깝다는 점에서 당시 흔적이 생길 때의 날씨가 수직으로 비가 쏟아진, 요즘으로 치면 바람없는 날 국지성 호우가 들이붓 듯 엄청난 빗줄기가 쏟아졌음을 짐작케 한다. 
마셜제도 상공서 관찰된 자이언트 빗방울에 비하면 크기는 불과 1mm 차이가 나지만 내용에 있어선 비길 바가 못된다. 왜냐면 '마셜제도의 빗방울'은 지상이 아닌 구름속에 머물고 있던 빗방울이었지 지상에 떨어진 빗방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빗방울은 떨어지면서 작아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비록 화석상의 흔적이긴 하지만 당시 쏟아졌던 '한반도 남쪽의 빗방울'이 이 지구상에 떨어진 사상 최대의 빗방울이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갖게 한다. 다만 이러한 생각 이면엔 1억년이란 시간적 격차와 그간에 있었을 기후 및 대기, 환경 변화를 무시한 중대한 착오가 있지만 말이다.


해서 말인데 아주 먼 옛날의 한반도 기후와 환경은 오늘날과 크게 달랐던 것 같다. 앞의 화석 산지가 이미 밝혀줬 듯 이 땅의 주인이 공룡인 적도 있었고 어느 시기엔 코뿔소,코끼리,하이에나,원숭이 같은 동물들이 떼지어 사는 등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기온과 그에 따른 자연환경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코뿔소 등의 뼈화석은 대청호변의 두루봉동굴 유적서 실제 출토된 바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 국가들이 축적해 온 과거 기상자료들이 기후변화로 인해 더이상 쓸모없게 됐다고 한다. 유엔산하 세계기상기구(WMO)는 최근 "농업과 수력발전, 태양열 등의 분야에서 사업전략을 세우는데 지금까지는 과거의 기상자료가 절대적이었지만 지금은 강수량과 온도에 대한 예상치가 더 중요해 졌다"면서 "과거는 더이상 미래를 위한 지침이 되지 못한다"고 밝혔다.


과거의 자료는 과거의 자료일 뿐 변화된 기상현상을 더이상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작금의 기상패턴이 얼마나 달라졌으면 과거의 기상자료가 무용지물이 됐겠는가.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자연현상을 보고 날씨를 점치는 관천망기(觀天望氣)가 제법 족집게 같은 기상예보 역할을 했는데 그 마저도 현실에 맞지 않거나 틀리는 경우가 많아졌으니 말하면 뭣하겠는가. 제비가 낮게 날면 비 올 징조라 했는데 이젠 날씨를 점치기는 커녕 제비 자체를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세상이 됐다. 아침에 거미줄이 보이면 맑아지고 개미가 장을 치면 비가 온다한 것 또한 비슷한 상황이 됐다.


청개구리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 "돌아도 단단히 돌았다"는 핀잔을 듣게 된 오늘날, 농부들이 애써 기록해 온 영농일기까지도 낙서장이 될 판이니 어찌 슬픈 변화가 아니겠는가. 무릎이 저릴 때마다 서둘러 비설겆이 하던 옛 어른들의 모습이 문득 그리워진다.

큰씨앗 하나가 흙으로 돌아가다

 
 질경이란 풀이 있다. 길섶과 마당가, 들판 어디서나 흔하게 자라는 풀로서 사람들이 아무리 밟아도 또 뙤약볕이 아무리 내리쬐고 가뭄이 든다해도 여간해 죽지않는 속성이 있다. 오죽하면 질경이라 했겠는가. 옛 이름은 차전초(車前草)다. 수레바퀴에 짓밟혀도 언제 그랬냐며 다시 살아난다 해서 붙여졌다.
옛 사람들은 질경이의 모진 특성을 통해 그해 일기를 점쳤다. 즉 질경이가 생기를 잃고 시들시들 자라거나 말라 비틀어지면 그해엔 큰가뭄이 찾아든다고 믿은 것이다. 질경이를 농사 지표식물로 부르는 이유다.


 질경이를 예로 들었지만 기실 풀만큼 생명력이 대단한 것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질기고 모진 것이 풀이다. 사람 목숨이 고래힘줄보다도 질기고 모질다고는 하나 풀의 생명력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들이 대지를 덮는 과정을 보자. 우선 봄이 되면 가장 먼저 돋는 게 그들이다. 어떤 건 얼음과 눈이 채 녹기도 전에 고개를 내민다. 사람 손으로도 뚫기 힘든 언땅을 연약한 새순으로 밀쳐낸다. 날씨가 풀려 봄비가 내리면 약속이라도 한 양 너도나도 모습을 드러낸다. 절기따라 돋아나는 풀의 종류도 갖가지다. 여름철 특히 장마철 이후엔 온통 그들 세상이다. 대지는 그야말로 온갖 풀들로 뒤덮이고 만다.


 농경지의 풀은 가히 위력적이다. 흙을 갈아 엎어놔도 순식간에 풀밭으로 변한다. 뽑고 또 뽑고 안간힘을 다해 매일같이 뽑아대도 뒤돌아서면 돋아오르는 게 풀이다. 해서 약 오른 사람들은 마치 끝장이라도 낼 것처럼 독한 제초제 사다 들이붓지만 그마저 소용없다. 비 한 번 오면 원상태다. 인류가 농삿일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벌이고 있는 전쟁이 바로 풀과의 전쟁이다.


 이렇게 질기고 질긴 풀의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한마디로 풀씨의 수명에 있다. 거의 무한한 수명을 가졌기에 뽑고 또 뽑아도 무한정 돋아나는 게 그들이다. 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명아주와 들개미자리 씨의 수명은 무려 1,700년이란다. 1,700년전에 떨어진 씨가 1,700년후에 햇빛을 보고 온도와 수분이 적당해지니까 곧바로 발아되더란 얘기다. 흔히 생땅이라고 하는 절개지(특히 퇴적층)서 돌연 풀이 돋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고학에서도 풀씨는 무시 못 할 존재다. 유적 발굴 현장엘 가보면 한구석에서 열심히 흙을 체로 치거나 물로 걸러내는 것을 볼 수 있다. 풀씨(꽃가루 포함)를 찾기 위해서다. 유적층에서 찾아진 풀씨는, 아무리 작지만 당시대의 식물상과 기후 등을 알게 해주는 귀중한 단서다.


 풀이라고 해서 일년연중 무한대로 크는 건 아니다. 어느 시기가 되면 성장을 멈추고 씨앗을 잉태한다. 비록 씨앗을 맺지 않는다해도 더이상 크지 않는 시기가 있는데 그 때가 바로 요즘이다. 절기로 치면 처서다. 이 때가 되면 따갑던 햇볕이 누그러져 띠와 수크령 등 각종 풀들이 더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에 예부터 농부들은 논두렁 밭두렁을 깎고 산소에도 벌초를 하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생명력을 자랑하던 풀들도 성장을 멈추기 시작한다는 처서일(23일)에 공교롭게도 이 시대의 ‘큰씨앗’ 하나가 영원한 삶의 고향 흙으로 되돌아갔다. 속담에 처서에 비가 오면 흉년이 든다고 했는데, 다행히도 그날 비는 오지 않았지만 우리 정치사의 큰별이 진 것에 많은 국민이 하염없이 가슴으로 빗줄기를 맞았다. 그의 별명이 인동초였듯 긴 겨울 모진 고통 다 잊어버리고 부디 평안한 마음으로 고이 잠들길 빈다.
 인동초의 다른 이름인 노옹수(老翁鬚)처럼 인자한 할아버지로 영원히 기억되리라. 또한 그가 뿌린 씨앗이 나라발전의 밀알이 되어 이 땅에 더없는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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