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새가 전하는 말... 서른여섯번째> 

 

밤꽃은 보면 볼수록 희한한 생각이 든다.

암꽃은 마치 성게 새끼처럼 생겨 앙증맞고 수꽃은 여우 꼬리처럼 생겨 별쭝스럽다.

어디 그 뿐인가.

수꽃에서 진하게 풍겨 나오는 꽃향기는 마치 사람의 정액 냄새와 흡사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그래서 생겨난 게 '6월 밤나무골 과부 몸부림치듯 한다'느니 '과부는 유난히 밤나무골을 좋아한다'느니 하는 쓰잘 데 없는 말들인 지는 몰라도, 정녕 그 냄새를 맡아보면 왜 그런 말들이 생겨나게 됐는지 절로 이해가 갈 만큼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밤꽃이 만발한 숲을 애인과 함께 걸으면 사랑을 성취한다는 속설도 있고 보면 혹시 밤꽃 향기에 여자의 정을 북돋는 독특한 물질이 들어있는 건 아닌지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게 한다.

 

 <위: 밤나무의 암꽃> 

 <아래: 밤나무의 숫꽃>

 

이 같은 생각은 비록 필자만 하는 건 아닌 듯 싶다.

많은 시인들이 밤꽃을 사랑과 연관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 중 이덕이란 시인은 「밤꽃 필 무렵」이란 시에서 이같이 표현하고 있다.

『밤꽃 냄새 알면/ 처녀가 아니라고 했네/ 동네 과부는/ 바람 타고/ 이름을 바꾼다고 했네…』

밤꽃 냄새를 알면 그건 이미 알건 다 알고 해볼 건 다 해본 상태란 얘기다.

김광규란 시인은 또 「오뉴월」이란 시에서 『…승부와 관계없이/ 산개구리 울어대는 뒷산으로/ 암내 난 고양이 밤새껏 쏘다니고/ 밤나무꽃 짙은 향내가/ 동정의 열기를 뿜어냅니다…』라고 했다.

첫 몽정(夢精)한 소년 하나가 그것이 부끄러워 이내 밤나무 밑으로 달아났으나 (자신의 몸에서 나온 정액냄새 같은) 밤나무꽃의 축축한 내음이 온 동네에 퍼져있으니 이미 소문이 난 게 아닌가 두려워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밤꽃만 별난 게 아니다.

밤나무의 종자인 밤에서 어린 싹이 돋아날 때도 다른 나무에서는 볼 수 없는 별쭝스러움이 있다. 즉, 참나무나 소나무 같은 대부분의 나무들은 열매나 씨에서 싹이 트면 그 껍데기가 새싹 머리에 붙어 땅위로 올라오거나 묘목뿌리에 얼마간 붙어있다 썩어 없어지는데 비해 밤 껍데기는 묘목뿌리에 붙은 채 몇 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런 까닭에 밤나무는 근본을 잊지 않는 '효도나무'라 하여 예부터 조상의 위패(位牌)를 만들 때 흔히 밤나무를 써왔다.

다시 말해 밤나무는 조상 숭배의 얼이 담긴 나무인 것이다.

「연감유함」이란 책의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도 밤(산밤)과 관련 있는데, 눈앞의 이익만을 좇거나 간사한 꾀로 남을 농락함을 꼬집은 유명한 고사다.

밤은 또 우리 민족에게 있어 다산과 부귀를 가져다주는 과실로 여겨져 제삿상이나 혼례상에 반드시 올려진 귀중한 제과(祭果)다.

 

바야흐로 밤나무가 꽃을 피우는 계절이다.

시골 마을 어귀나 산자락마다엔 화제의 그 밤나무 수꽃들이 이제 막 꼬리를 내밀고 묘한 냄새 풍길 채비를 차리고 있다.

벌써부터 암내난 고양이 이 시기를 놓칠 새라 이리저리 야옹거리고, 꿀 찾아 날아든 벌 나비도 여기저기 어지럽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특히 올여름에 정녕 사랑을 성사시키고 싶은 연인들이여.

자연이 마련한 '사랑의 계절' 6월이 왔으니 다음주쯤 어디 가까운 밤나무 숲을 찾아 단둘이 거닐어보면 어떨는지...

또한 부부애가 조금쯤은 식었다 싶은 사람들도 더 큰 사랑을 다지는 계기로 밤나무 숲을 한번쯤 찾아보면 어떨는지...

어~ 하다보면 금새가는 게 시간이요 생태계의 이치이니 지금 당장 스케줄 잡아놓고 사랑하는 그이에게 시간 비우라는 통보를 하는 게 좋을성 싶은데...

 

성게와 여우꼬리 같이 생긴 밤꽃이 이내 폈다 지기 전에… 

 

 '흰쥐가 사람 손에 의해 감쪽같이 검은쥐로 둔갑한다.

 비단 털색깔 뿐만이 아니라 피부와 눈동자 색깔까지도 여느 쥐와 마찬가지로 검은빛을 띠게 된다.

그것도 일주일 이상 혹은 한달 이상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게 아니고 단 5~6일이면 모든 생화학 과정이 끝나 언제 흰색을 띠었었나 의아해 할 정도로 빠른 둔갑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흰쥐를 사람 손으로 감쪽같이 검은쥐로 둔갑시키는 '전자 수리술(修理術)'이 몇 해 전 재미 한국인 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성공돼 세계인의 이목을 끈 바 있다.

당시 화제의 주인공은 미국 토머스 제퍼슨대 피부생물학과 부교수인 윤경근박사로, 그는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러지에 발표된 연구보고서에서 유전자 변이를 고치는 유전자 수리기술을 응용해 하얗게 변한 여러 마리의 쥐를 원래의 검은쥐로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윤박사는 검은쥐의 몸 전체가 흰색으로 변하게 된 것은 피부의 색깔을 변화시키는 색소인자인 멜라닌 생산효소를 만드는 유전자에 결함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이 유전자 결함(변이)을 수리해 주면 다시 멜라닌이 만들어져 흰쥐가 원래의 검은쥐로 변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윤박사는 또 변이된 유전자를 정상인 유전자로 수리하는 기술은 DNA의 이상을 발견하고 수리하는 인체의 자연적 DNA 수리기능을 응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유전자가 수리돼 다시 정상적인 멜라닌이 만들어지기까지 생화학 과정이 진행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5~6일 정도라며 일단 수리된 유전자는 영구히 보존돼 유전될 수 있다고 밝혔다.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러지는 윤박사가 성공한 유전자 수리 기술은 유전자 변이로 인해 유발되는 각종 유전질환 치료에 이용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다.

 

그 동안 흰쥐를 비롯해 흰토끼, 흰사슴, 흰참새, 흰까치, 흰뱀(백사)은 물론 '흰사람'인 백자(白子)까지도 학계에서는 '알비노(Albino) 현상'으로 이해해 왔다.

 알비노란 동물의 피부나 모발, 눈 등에 색소가 생기지 않는 유전성 질환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백화현상(白化現象)이라 불러왔다.

 하지만 이 알비노에 대한 인식은 동․서양이 크게 달랐다.

 즉, 서양문화권에서는 앞서 말한 대로 '동물 전반에 걸쳐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인 반면 우리 나라와 중국 등 동양문화권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신비 그 자체로 받아들여 일종의 경외심 마저 나타냈다.

 예를 들어 흰까치나 흰사슴이 나타나면 나라가 잘될 길조로 여겨 온 나라가 떠들썩했으며 백사를 잡으면 "그 사람 횡재했다"며 야단이었다.

 이러한 신비관은 그들 생물이 우리 주변에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희귀 동물이란 점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전통적인 신비관은 서양문화인 알비노 이론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차츰 희박해져 고래(古來)로부터 '영약 중의 영약'으로 쳐온 백사마저도 요즘에 와서는 그 약효의 진가성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는 추세였다.

따라서 윤박사의 유전자 수리 기술 실험성공은 의학계로서는 유전질환 치료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진일보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그 동안 백사의 약효를 과신해온 백사 신봉자들(?)에겐 그야말로 자신들의 신비 대상을 일순간에 허물어트리는 '된서리'로 밖에 들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윤박사의 실험으로 백사를 포함한 모든 흰 변이개체가 자연계의 신비이기 보다는 유전자 수리에 의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 하나의 유전질환임이 보다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사나흘 전 충북 진천에서 흰까치가 출현했다.

예전 같으면 길조가 나타났으니 나라가 잘 될징조라고 여겨 난리법석을 떨었을 테지만 새충청일보 등 지방 신문을 비롯한 몇몇 언론에만 보도됐을 뿐 그리 요란스럽진 않았다.

자고 나면 하도 요상스럽고  깜짝깜짝 놀랄 일들이 수두룩하게 일어나는 세상이다 보니 사람들이 그만큼 무감각해졌는지 아니면 그까짓 알비노 생물 하나 가지고 떠들어댈 게 뭐 있느냐는 반응인지는 몰라도, 자연계에서는 적어도 10만분의 1(어떤 학자는 1백만분의 1  정도의 확률이라고 주장하고 있음) 정도의 매우 드문 현상이고 보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새충청일보에 보도된 진천의 흰까치><다른 흰까치 사진을 보려면 이 블로그의 '신문에 난 사진, 안 난 사진' 카테고리를 클릭하세요>

 

알비노로 태어난 그 까치야 보호색을 띠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계에 내버려 두면 스스로 살아남을 확률이 여느 까치보다 훨씬 떨어지겠지만  그것은 자연계의 이치이자 그 까치의 운명이고 어찌됐든 그것이 출현한 지역이 다름 아닌 '충북'이라는 데 필자(서호납줄갱이)의 관심은 더욱 커진다.

왜냐면 1989년과 2005년에 충북 영동에서 잇따라 흰까치가 출현했고 이번엔 충북 진천에서 흰까치가 나타난 것을 비롯해 충북에서만 필자가 직접 확인한 것만 다섯 차례 정도 되는 데다 흰사슴, 흰참새, 백사 등 다른 알비노 동물까지 합치면 무려 20 여 마리나 되는 것을 모두 충북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간 다른 지역에서도 출현했지만 빈도수를 헤아려 보면 충북이 월등히 높아 그동안 마음 속으로 의아해 오던 참이다.

생태 환경 쪽에  연관되는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최소 10만분의 1의 확률을 그처럼 자주 목격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뭔가 있다는 느낌이다.

그 '뭔가 있다'는 느낌은 바로 충북지역을 두고 하는 얘기다. 

남들은 평생에 한번 볼까말까한, 그래서 아주 희귀하다고 하는 그 동물들을 한 사람이 20여 마리나, 그것도 한 지역에서 봤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을 성 싶기 때문이다.

필자 한 사람의 '행운(?)'이라고 친다면야 딱히 할 말이 없겠으나 왠지 그렇게 생각하기엔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최소 10만분의 1이라는 극히 낮은 확률의 동물들이 어느 한 지역에 집중돼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혹시 충북에 까치와 뱀, 참새 등 야생동물들이 유난히 많이 살아서일까?

아니면 충북의 자연 환경이 그런 현상을 잦게 만드는 특별한 무엇이 있어서일까?

괜한 생각이지만 별의 별 생각을 다 해본다.

 

여하튼 화제를 돌려 윤박사가 밝혀낸 그 원리대로 몇몇 과정을 인위적으로 거치면 원래의 색깔로 되돌아갈 수 있는  하나의 자연현상(알비노 현상)이든, 동양의 신비주의에 의한 영물이든 간에 충북, 더 나아가 우리 대한민국에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날이면 날마다 지지고 볶고 싸우고 헐뜯고...

온 나라안이 맨날 벌집 쑤셔 놓은 형국이다 보니 흰까치 출현을 빌미로라도 해서 모두가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얀 색 까치가 몰고온 하얀 색 꿈 소식과 함께....  

 올해 날씨가 심상치 않으면서 그에 따른 여파 또한 심각하다.

지난 겨울기온이 국내 기상관측사상 가장 포근했던 데 이어 2~3월 이후 계속되고 있는 변덕스런 날씨와 최근의 때 이른 여름날씨가 겹치면서 급기야 생태계 곳곳에서 이상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기와 병해충이 조기 출현하는가 하면 극심한 일교차로 인한 농축산물의 생산량 감소마저 우려될 지경이다.

 

기상대 자료에 의하면 지난 겨울 전국 평균기온은 섭씨 2.46도로 평년의 0.43도보다 2.03도 높아 1904년 근대기상관측 시작 이래 가장 높게 나타난 가운데 특히 2월중 전국 평균기온이 4.09도로 평년(0.75도) 보다 무려 3.34도가 높게 나타났다.

그런 데다 지난 2~3월 갑작스런 한파와 이상난동 현상이 두 세 차례 번갈아 찾아온 데 이어 4월 이후에는 잦은 황사와 비, 강한 바람까지 합세하고 있고 최근에는 30도를 육박하는 한 여름 날씨가 계속되는 등 예년에 없던 변덕스런 날씨를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자연생태계에서는 5~7월 산란적기를 맞은 물고기들이 산란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알을 낳지 않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생태학자들을 어리둥절케 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국립수산과학원 이완옥박사는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최근의 이상고온으로 봐서는 물고기들이 앞당겨 산란할 것 같지만 오히려 예년보다 산란시기가 늦어지고 있다. 

이는 잦은 비와 큰 일교차 등으로 인해 하천물 온도가 더디게 올라가 물고기들도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 같다."

날씨가 하도 이상스러우니 자연계의 물고기들마저 정신을 못차린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하천에 사는 다슬기 껍질에는 예전에는 없던 이물질이 많이 끼고 있는데 이 또한 이상고온에 따른 생태변화로 보고 국립수산과학원 산하 내수면생태연구소가 조사에 나섰단다.  

이상기온은 야생화와 같은 각종 식물들의 생태 시계(時計)에도 영향을 미쳐 개화시기를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실례로  5월 말에서 6월초에 만개하는 철쭉꽃은 이미 5월 초.중순에 만개했으며 6~7월에 피는 것으로 알려진 매발톱꽃은 5월초부터 꽃망울을 터뜨려 식물학자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변덕스런 날씨와 때 아닌 여름날씨의 여파는 결국 농축산업자에게까지 피해를 안겨주고 있다.

대전.충남북 도내 양봉업자에 따르면 "식물의 꽃에서 꿀이 많이 나기 위해서는 밤 기온이 너무 내려가지 않고 일정수준을 유지해야 하는데 최근 잦은 비와 큰 일교차로 밤기온이 많이 내려가 꿀 채취량이 예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며 "4월 이후 계속되고 있는 강한 바람도 꿀 생산량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울먹이고 있다.

이밖에 과수원과 양계장 등에서도 피해가 나타나 가뜩이나 타들어가는 농심에 기름을 붓고 있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서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김모씨(51)는 "지난 봄 갑작스런 한파와 이상난동이 겹치면서 사과나무가 동해를 입은 데다 개화기에 저온현상까지 찾아와 개화율이 크게 낮아졌다"며 피해를 호소했고, 충남 연기군의 한 양계농가는 최근 닭(산란계)들이 갑자기 더워진 낮기온으로 먹이를 잘 먹지 않아 산란율이 크게 떨어졌다고 하소연 했다.

 

한편 농업 생태분야의 전문가들은 최근 충북 영동지역에 출몰하고 있는 갈색여치 떼들의 극성과 서울 대구 등 대도시 중심가에 조기 발생하고 있는 모기 등 해충들도 이상기온에 따라 나타나고 있는 기현상으로 보고있다.

잠자리를 영어로 '드레곤플라이(Dragonfly)'라 한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용(龍)처럼 생긴 파리, 즉 '용파리'가 된다.

서양사람들의 생각에 잠자리가 마치 파리처럼 허물을 벗고 용처럼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붙인 이름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서양인들의 이 같은 시각을 현대 생물학적 관점으로 재해석할 때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잠자리는 탈바꿈할 때 허물을 벗긴 하지만 파리처럼 알-애벌레-번데기-성충 시기를 모두 거치는 완전탈바꿈을 하는 게 아니라 애벌레에서 번데기 시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성충이 되는 이른바 불완전탈바꿈을 하는 곤충이란 사실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잠자리를 드래곤플라이로 지칭하는 서양식 표현에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두 개의 겹눈에 1만~2만8천 개나 되는 수많은 낱눈을 가진 잠자리는 그 생체적 특성상 파리와 같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물체에 매우 둔감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용처럼 날쌘 동작을 하다가도 사람들이 천천히 다가가 손으로 낚아채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금새 포로가 되는 약점을 감안하면, 그들이 잠자리를 용파리로 부르게 된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잠자리는 전 세계에 약 5천 종, 우리 나라에 약 90종 가량 서식하고 있는 흔한 곤충이다.

그러나 이처럼 흔한 곤충인 것과는 달리 정작 그들의 생활사에 대해서는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두 마리의 잠자리가 앞 뒤로 붙어 다닐 때 사람들은 흔히 교미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교미를 하기 위한 전위(前爲) 행동, 즉 밀월여행을 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 행동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나뭇가지나 풀잎에 앉아 정지상태로 교미를 한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마리의 잠자리가 붙어 있을 때 앞의 것이 암컷이고 뒤의 것이 수컷인 줄 아는 데 실은 그렇지 않다.

잠자리 수컷은 산란기가 되면 배우자가 될 암컷을 찾아다니다가 암컷이 자기 영역 안에 들어오면 재빨리 알아채고 즉시 뒤꽁무니에 돋아있는 집게모양의 돌기로 암컷의 머리채를 쥐어잡고 사랑비행을 한다.

예전에 짓궂은 아이들이 잠자리를 잡아 꽁지를 뗀 후 지푸라기나 풀줄기를 꽂아 날려보내면서 엉뚱하게도 '시집보낸다'고 했는데 이는 시집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으라고 황천길로 보낸 것이며, 실제 시집가는 잠자리는 수컷에게 머리채 잡힌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사랑의 포로가 된 암컷인 것이다.

 

매년 여름이면 새빨간 모습으로 하늘하늘 허공을 간지르며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를 볼 수 있다. 그 귀엽게 생긴 고추잠자리를 바라볼 때마다 어릴 적 쑥부쟁이 꽃을 꺾어들고 빙빙 돌리면서 "나마리 동동/ 파리 동동/ 멀리멀리 가면은/ 똥물 먹고 죽는다"(나마리는 잠자리의 방언)는 전래동요를 부르며 온 종일 헛땀을 흘리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 때만 해도 잠자리를 갖고 노는 일이 그렇게도 재미있고 즐거웠는데 요즘 아이들은 도대체 그런 재미를 모르고 자라는 세상이니, 잠자리가 행복해진 것인지 아니면 이 시대 어린이들이 불행해진 것인지 쑥부쟁이 꽃 돌아가듯 머리 속이 온통 빙빙 돈다.

 

이번 주말엔 그 빙빙 도는 머리도 식히고 신선한 공기도 마실 겸 가족들과 함께 가까운 들판에 나가 잠자리 좀 잡아 보면 어떨까.

까치발을 하고 아주 천천히, 떨리는 손을 집게 모양한 채 살금살금 다가가, 잡을 땐 아주 잽싸게…

그런 후엔 잡은 잠자리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다시 살~금 살~금 추억 속으로…

달 표면에는 흔히 '바다'라고 불려지는 부분이 있다.

지구에서 달을 바라다보면 비교적 밝게 보이는 부분이 육지이고 그 중간 중간에 얼룩진 듯 어둡게 보이는 부분이 곧 바다다.

이 바다는 위치와 형태에 따라 '구름의 바다' '동양의 바다' '비의 바다'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달 표면의 바다는 그 모습이 신비스러워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상상에 따라, 혹은 시대에 따라 여러 모습의 신 또는 동식물로 표현돼 왔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인들은 달 표면의 바다 형태를 보고 새의 모습을 닮은 달의 신 '토토'를 탄생시켰으며 멕시코의 아스테카 족은 달을 나타내는 심벌을 토끼와 뱀으로 표현했다.

 

기록이나 벽화 등에 의해 전해지고 있는 여러 종류의 달의 심벌 가운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역시 토끼와 월계수다.

우리 민족도 달 표면의 바다를 오래 전부터 토끼와 월계수로 보아 왔는데 그것을 확인시켜 주는 유물과 노랫가사가 조선시대의 월기(月旗)와 강강술래다.

즉, 조선시대 의장기(儀仗旗)의 하나인 월기를 보면 둥근 달 속에 토끼가 그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생겨난 강강술래의 노래가사에는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 옥도끼로 찍어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 /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 천년만년 살고지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렇듯 달은 그 민족의 심성과 자연관에 따라 신 혹은 다른 동경의 대상으로 표현돼 오면서 마음 속 깊이 영원한 이상향으로 인식돼 왔다.

 

그런데 그 영원한 이상향이자 마음속 동경의 대상인 토끼가 요즘에 와서 돌연 우리 나라 어린이들에 의해 남획(?)되는 수난을 당하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수난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개작(改作)된 <반달>이란 동요의 노랫가사로 이 노랫가사를 듣노라면 너무나 기가 차 할말조차 잃을 정도다.

우선 그 노랫가사부터 들어보자.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세마리 / 한마리는 찢어 먹고 / 한마리는 구워 먹고 / 한마리는 도망갔네 / 서~쪽 나라로"

어릴 적 꿈을 단 한 순간에 허망하게 망가뜨리는 이 노랫가사는 얼마 전부터 초등학생은 물론 유치원 어린이들 사이에서 불려지는 개작동요란 점에서 우선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인 새싹들의 입에서 어쩌면 그리도 잔혹한 단어들이 동요 속에 끼어 들어 유리알처럼 밝아야만 할 어린이들의 마음을 그토록 어둡고 삭막하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제 아무리 영악한 게 요즘 아이들이기로서니 동경의 대상인 달나라 토끼를 마구 잡아먹을 생각을 했을까.

그것도 입가에 웃음까지 띤 채 한 마리는 찢어먹고 또 한 마리는 구워먹자고 이구동성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기가 차도 너무 차고 놀라워도 이만저만 놀라운 게 아니다.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다.

또한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는 그들의 마음의 표현이자 시대상을 나타내는 거울이다.

그러기에 이 노랫가사 속에 담겨져 있는 어린이들의 마음이야말로 현 시대의 아픈 상처를 그대로 반영해 주는 '우리들의 자화상'이자 '우리 민족의 미래상'이라 할 수 있다.


자고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정한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법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마음이 고와야 동물이든 식물이든 그들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이요 또 그들이 사랑스럽게 보일 때만이 자연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린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달 속의 토끼마저 마구 찢어먹고 구워먹고 싶다며 마음껏 목청 돋궈 노래를 부르고 있쟎은가.

그 철없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 미래의 자연은 어떻게 될 지 저윽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걱정에 앞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아버지로서 한 가지 뉘우칠 게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철없는 아이들의 흑심(?)이 우리 어른들을 본받아 생겨났을 것이라는 데 대한 반성과 자책감이다.

우리들의 이름은 불행히도 '자연 파괴자'다.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자연 환경에 대해선 너도 나도 영락없는 파괴자다.

하지만 그에 대한 뉘우침은 너무나도 인색하다.

더구나 우리가 저지른 자연 환경 파괴의 원죄가 지금 당장 후세에까지 대물림하려 하는 데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저들 태연하기만 하다.

 

우리들은 언제까지 태연하기만 할 것인가.

올챙이 하면 흔히들 개구리 유생만을 일컫는 줄 아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개구리 외에도 두꺼비와 맹꽁이, 심지어 도롱뇽의 새끼까지도 올챙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양서류(兩棲類) 새끼들은 모두 올챙이라 부르며, 따라서 양서류들은 알에서 부화된 다음 유생인 올챙이 시기를 거쳐 어미(성체)가 된다.

양서류란 물과 뭍에서 산다는 뜻이니 어린 올챙이 시절엔 물에서 살다가 어미가 되어서는 땅위로 올라와 일생을 산다.

올챙이가 개구리나 두꺼비 맹꽁이 도롱뇽 등 어미로 자라기까지는 유(有)에서 무(無)로, 혹은 그 반대인 무에서 유로 변하는 '엄청난 변태과정'을 거친다.

올챙이 시절 갖고 있던 아가미가 없어지는 대신 허파가 새로 생겨나고 네 개의 다리가 나타나며 무미목(無尾目)인 개구리 종류는 꼬리까지 사라진다.

올챙이의 변태, 즉 탈바꿈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일어나는데, 특히 올챙이의 꼬리가 없어지는 것은 갑상선 호르몬의 일종인 티록신의 작용에 의해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은 올챙이가 탈바꿈할 때 꼬리가 잘려져 나가느냐 아니면 몸 속으로 흡수되느냐 하는 점이다.

올챙이의 탈바꿈 과정을 눈여겨보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 올챙이의 꼬리가 어느 한 순간에 끊어져 나가는 줄 아는데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호르몬인 티록신의 작용으로 꼬리가 녹아 몸 안으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 올챙이에 티록신을 주사하면 곧바로 탈바꿈하여 꼬리가 없는 꼬마개구리가 되고, 반대로 티록신을 만들어 내는 갑상선을 제거하면 죽을 때까지 어미가 되지 못하고 올챙이로 살아간다.

호르몬의 작용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티록신은 사람의 살 빼는 약의 주원료로도 이용된다고 하니 이를 사용할 땐 올챙이의 탈바꿈 과정을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자연계의 먹이사슬 관계를 보면 얽히고 설킨 게 참으로 많은데 개구리류 역시 그렇다.

물에서 사는 올챙이 시기엔 곤충인 잠자리 유충에게 꼼짝없이 잡아먹히지만 어른인 개구리가 되어서는 되레 잠자리를 잡아먹고 산다.

이를 보면 어릴 적 한을 어미로 자란 후 앙갚음하는 것 같다.

개구리처럼 한(恨) 많은 동물도 없을 성싶다.

올챙이 때는 이것저것, 심지어 물고기들한테까지 잡아먹히다가 겨우 살아남아 개구리가 되어서는 또다시 뱀이나 너구리 맹금류 등의 먹이감으로 희생되니 이보다 더 불행한 삶은 없을 듯 싶다.

더더군다나 요즘엔 황소개구리인지 뭔지 하는 불청객까지 끼어 들어 안방을 차지하고 목숨마저 위협하니 오죽 죽을 맛이겠는가.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개구리들에겐 사람보다 더 한 천적이 어디 있을까.

택지개발이다 도로건설이다 하여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고 그것도 모자라 들판마다 농약을 들이부어 숨통을 죄는가 하면 걸핏하면 몸보신 한답시고 경칩때는 금방 낳은 알을 홀짝 홀짝 들이마시고, 겨울엔 깊은 잠 자는 걸 억지로 잡아내 통째로 소금구이에 매운탕까지 끓여 술안주로 애용하니 개구리 팔자 영 말이 아니다.

 

개구리를 좋아하는(?) 건 우리 한국사람들만 그런 줄 알았더니 요즈막엔 중국사람들까지 나서 북한 산(産) 개구리의 내장에 붙어있는 기름(지방)덩어리를 고가로 사다 먹는다고 하니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정저지와(井底之蛙)란 말이 있다.

우물안 개구리란 뜻이니 이 말의 본뜻을 사람들은 두고두고 되씹어볼 일이다.

우물 안에 갇혀있는 개구리 모양으로 빠꼼히 뚫린 하늘 한자락만 치켜볼 게 아니라 자연과 생태계란 커다란 세계를 바라보고 넓게 생각해야 한다.

여름철 개구리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상막한 세상에서 살지 않으려면 말이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라.

그리고 들판에 나가 개구리 울음소리를 '가슴'으로 들어보라.

그것이 노랫소리로 들리는 지 한 맺힌 통곡소리로 들리는지 말이다.

얼마 전 무려 한 달 동안을 작정하고 산행 한 적 있다.

산행이라고 해봐야 집 근처의 속리산 자락을 등산로가 가리키는 대로 그저 오르내린 일이었기에 산사나이들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30일을, 그것도 하루평균 7시간 이상씩 강행했으니 나름대로 ‘산타기’를 했다고 떠들어댈 법 하다.

더구나 매일 동이 틀 무렵 산자락을 밟기 시작해 어떨 때는 해가 뉘엿뉘엿해서야 하산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보통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리 한 달 동안을 산에 오른 뒤끝이 한여름에 고뿔 들린 머리통처럼 영 말이 아니다.

피로가 겹쳐서도 아닌데 왠지 안 볼 걸 본 것처럼 기분이 마냥 찝찝하기만 하다.

왜 그럴까?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하루가 지나고, 10일이 지나고, 30일이 지나고….

작정한 대로 한 달이 지나면서 마음속엔 온통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만 늘어갔기 때문이리라.

가는 곳마다 쓰레기요, 발 닿는 곳마다 ‘버려진 양심’뿐이니 괜한 내 자신이 민망스러워 혀가 연신 차지고 얼굴까지 후끈거렸다.

쓰레기의 종류도 다양해 각종 음료수병은 물론이거니와 맥주캔과 소주병, 우유팩, 일회용 컵, 일회용 도시락, 비닐봉지, 담배갑, 비옷(우의) 등등….

아니 심지어는 요즘 아주 보기 드물어진, 일명 됫병이라 불리는 한 되들이 소주병까지 버젓이 ‘인간의 흔적’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참으로 의아한 일이다.

어떤 애주가(?)길래 한 되들이 깡소주를 산으로 들고 올라와 들이키고는 저렇게 비양심적으로 자신의 주량을 흔적으로 남겨 놨단 말인가.

쓰레기마다 버려져 있는 상태도 갖가지였다.

그냥 되나가나 버려진 것, 돌로 지그시 눌러 놓은 것, 바위틈바구니에 억지로 쑤셔 넣은 것, 나뭇가지에 보란 듯이 꽂아 놓은 것….    

그들을 보는 순간 순간 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언젠가 TV 드라마 속에서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이 가끔 생뚱맞게 내던지는 “아유, 쪽팔려!”란 말.

진짜로 쪽팔렸다.

그리고 산에 대해 정말로 민망했다.

누가 버렸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산사나이들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러고 싶어도 그러질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굴까.

산나물 캐는 사람들? 아니면 상춘객? 그것도 아니면 그냥 놀러온 사람들?

아무도 모를 것 같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산이 알고, 또 그들 자신도 잘 알 것이다.


진짜로 자연에 대해 미안해하고 쪽팔려야 할 사람들이 요즘 부쩍 늘고 있다.

IMF인지 국가부도인지 하는 엄청난 사태가 온 나라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난 그 이후,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주5일제가 시행된 뒤부터 자연을 찾는 이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자연을 훼손시키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사람들이 덩달아 많아졌다.

행락철만 되면 계곡과 하천, 바닷가가 넘쳐나는 쓰레기와 오물로 중병을 앓는다.

저수지와 호수 등 낚시터도 예외가 아니다.

쓰레기 수거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는 곳이야 억지로라도 치우기 때문에 후유증이 비교적 덜 한 편이지만 대부분은 그 후유증이 몇 년이고 이어진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연을 훼손시키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들의 행위를 되레 당연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우리의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가 바로 코앞에서 행해지는 데도 누구 하나 관심 갖고 제지하려 들지 않는다.

너는 너 대로 “나 하나쯤이야” 하고, 나는 나대로 “그까지 것쯤이야” 한다.

환경파괴 무감각증이 이 사회에 만연한 지 오래요, 자연을 소중한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찮게 여기는 인간이기주의가 팽배한 지 오래다.


우리도 한 때 버리고 싶어도 버릴 게 없었고, 설령 버린다 한들 쉽사리 분해되는, 지극히 자연친화적인 물건들을 ‘숙명처럼’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소풍을 간들, 천렵을 간들 되돌아올 땐 빈 도시락과 솥단지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사회가 조금 더 발전한 후에도 나무도시락 등 자연분해가 쉽게 되고 태워도 별 문제 되지 않는 간단한 쓰레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젠 시대가 변했다.

움직일 땐 으레 자동차가 필수가 됐고 ‘움직인 후의 부산물’은 거의 모두가 자연환경에 해가 되는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한 번 버려지면 자연분해 되는데 수십 수백 년이 걸리고 불로 태우면 인체에도 해로운 성분이 배출된다.

제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시대가 변한다 한들 인간생활에 있어 자연은 가장 소중한 가치로 남을 것이다.

자연환경이 건강한 상태로 유지돼야 인간의 삶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사랑이 꼭 거창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부터 쓰레기 하나라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조그만 실천이 바로 자연사랑의 시작이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마음가짐도 나로 인해 소중한 자연이 망가져가고 있다는 생각으로 바꿔야 한다.

자연을 하찮게 여기는 인간이기주의가 결국 자연과 인간을 함께 말살시킨다는 생각을 가슴속 깊이 새겼으면 한다.

지금 당장 나 자신부터...

 아까시나무가 우리 나라에 처음 심겨진 것은 1891년 일본인 사까끼가 중국 상하이에서 묘목을 구입해다 인천 공원에 심은 것이 효시다.

따라서 우리 나라 아까시나무 도입의 첫째 목적은 조경 혹은 관상용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898년 일본 철도회사가 인천 월미도에 다량 식재했는데, 이 때의 목적은 철도침목으로 활용키 위해서였다.

그후 한일 합방이 되자 총독부가 사방용과 연료용 등의 목적으로 원산지인 북미와 중국으로부터 종자를 수입해다 전국에 심기 시작했는데, 그 절정기인 1926년부터 1940년 사이에는 무려 9천3백98만 그루가 심겨졌다.

14년 동안 1억 그루 가까이 심겨진 셈이다. 

해방 후에는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전국의 산야를 복구키 위해 대대적으로 심겨져 한때 인공조림한 나무의 10%에 육박할 정도로 많이 식재됐으며 그후에도 사방,조림용으로 계속 심겨져 오다 산림녹화가 어느 정도 끝난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인공식재가 중단됐다.

 

일본에 아까시나무가 도입된 것은 우리 나라보다 약간 이른 1875년 일본인 쓰다가 오스트리아 비엔나 만국박람회에 참가했다가 가로수로 심겨진 아까시를 보고 종자를 구입해 온 것이 시초다. 도입 초기 일본에 소개된 아까시나무의 이름은 '니세아카시아' 즉 '가짜아카시아'였다.

이때 '가짜'란 말을 붙인 것은 학명인 'Robinia pseudo-acacia L'의 pseudo를 그대로 번역한 때문이다.

학명, 특히 종소명에 수도(pseudo)가 붙은 것은 열대지역의 진짜 아카시아와는 다르다는 뜻이다.

이후 일본에서는 明石屋樹 즉 '아까시야 노끼'로 불려졌으며 이 명칭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아까시나무'로 정착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식물명의 한국명은 그 동식물을 첫 번째로 학계에 발표한 학자의 뜻을 따라주는 게 관행으로 돼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아카시아나무'란 이름 대신  '아까시나무'로 이름 지어져 학계에 처음 소개됐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의 '아카시아'란 명칭은 Acacia 계통의 학명을 나타내는 용어일 뿐이며 정확한 한국명은 '아까시나무'다.

즉, 아카시아 혹은 아카시아나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아까시나무에 대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인식은 매우 좋지 못하다.

일제 침략기에 일본인에 의해 처음 들여와진 데다 장소 가리지 않고 뿌리를 내리는 엄청난 생명력과 번식력으로 경작지는 물론 조상의 묘까지 마구 침투해 들어와 망나니짓을 하니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대로 아까시나무가 우리 나라에 최초 도입된 것은 조경 혹은 관상용이요 그 이후 일제 강점기 때에도 사방과 연료용으로 주로 심겨졌을 뿐(당시 일본 국내에서도 식재가 권장되었슴)이며 실제 산림녹화에도 크게 공헌해 왔다.

더욱이 오늘날에는 우리 나라 꿀 생산량의 70%를 아까시나무서 채취할 만큼 중요한 밀원으로 자리잡아 있다.

그러나 어찌됐건 아까시나무는 우리 나라 귀화식물의 대표격으로 기존 식물 생태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왔을 뿐만 아니라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라는 노랫말처럼 국민가요 또는 동요 속에 끼어들거나 추억 속에 잠재된 채 국민정서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도입 1백 여 년만에 우리 나라 전역에 완전히 터를 잡은 아까시나무.

한 많은 우리 역사처럼 그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치렁치렁 매단 하얀 꽃의 자태와 코끝에 스며드는 매혹적인 향기로, 5월하면 생각나는 계절의 전령사로서 아련한 우리 고향의 정취를 대변해주는 건 사실이다.

40대 이상의 어른들에겐 어릴 적 사방공사용으로 쓰일 어린 묘목이나 씨를 받아 학교에 가던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그 아까시나무가 지금 막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어머니의 버선코처럼 생긴 독특한 꽃모양이 유난히 인상적인 그 아까시나무가 짙은 향기를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그 향기를 맡으니 아련한 추억과 함께 또다시 버릇처럼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왜 하필 '아까시나무'라고 한국명을 지었을까?

나뭇가지에 '까시'(가시)가 나 있어 찔리면 '아'프기 때문에 '아까시'나무라고 한건 아닌지...

우리 국민 대부분이 '아까시'와 '아카시아'를 구분않고 혼동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나무 이름을 '버선나무'라는 새이름을 지어주면 어떨는지.

어머니의 하얀 버선코를 닮은 꽃잎을 보면 볼수록 '버선나무'란 이름이 꼭 어울릴 것같다는 생각을, 철이 들고 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늘 떨궈내지 못하고 버릇처럼 해오고 있다.

어머니 버선코를 닮은 버선나무....

향기가 좋은 버선나무꽃...

아니면 버선꽃나무?

어쨋든 올해도 하얀 아까시나무꽃 향기와 함께 여름은 우리곁에 와있다.

한반도 산야가 떠들썩하다.

봄나물에 이어 산나물을 뜯는 이른바 '산나물 시즌'을 맞아 발길 닿는 곳마다 산나물 채취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낮은 산이건 깊은 산이건 불문하고 떠들썩하다.

이들 가운데엔 가벼운 산행차림으로 바람 쐴 겸 등산 삼아 이 산 저 산 오르며 나물을 뜯는 도회지 부부들도 있고, 소일거리 삼아 경로당 친구들과 어울려 야산 언저리를 돌며 나물을 뜯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있으며 시장에 내다 팔 요량으로 큰 바구니 둘러메고 바삐 산나물을 뜯는 아낙네들도 눈에 띈다.

게중에는 산삼만을 골라 캐려는 '전문꾼'들도 더러 끼어있다.

목적과 동기는 다르지만 모두가 신바람이 난듯 콧노래까지 들려온다.

필자가 사는 속리산 뒷자락도 예외는 아니어서 4월 이후 지금까지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온통 산나물 뜯는 사람들 천지다.

기실 산나물은 물론이거니와 버섯철의 온갖 버섯들도 정작 산아래 사는 지역주민들은 뒤늦게서야 맛만 보는 경우가 많은데 올해도 그런 모양이다. 일철 나선 이후 지금껏 눈코 뜰새 없이 바쁘기만 한 농촌사람들에겐 산나물이 눈에 들어올리 만무다.

비가 내려 일을 못하게 되는 날이면 몰라도 바쁜 농사철에 일부러 바구니 들고 산나물 뜯으러 가는 '정신 나간 농민'들은 없다.

 

허나 필자의 시간적 여유는 그들보단 좀 나은 편이라 지난 휴일엔 모처럼만에 산에 올랐다.

향긋한 취나물 한줌 뜯어다 기름 한 방울에 깨소금 송송 뿌려 무친 다음 큰 그릇에 밥 비벼먹는 재미가 꽤나 괜찮기 때문에 며칠 전부터 벼르고 별러 산바람을 쐬게 된 것이다.

무릎 밑까지 올라가는 긴 장화에 나무 지팡이 들고 다낡은 시장바구니 옆구리에 끼니 영락없는 '촌놈 모습'이다. 뒤따라 오는 마나님 모습도 별로 나아보이는 게 없다.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산이 있으니 몇 발짝 안가 산골짜기가 눈에 들어왔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집에서 들이키는 공기와 사뭇 다름을 느낄 즈음 한 뼘 이상 자란 돌미나리와 거렁배 나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텃밭에 난 채소 뜯듯 몇 이파리 뜯어 손에 들고 좀더 들어가니 계곡물 소리가 우릴 반겼다. 손을 모아 계곡수를 떠 목을 축인 후 눈을 돌려보니 갸냘픈 달래가 수줍은 몸짓을 하고 있다.  그 옆자락엔 고사리가 꼬물꼬물 고개를 내밀고 있고.

조심스럽게 뜯은 후 허리를 펴는데 이번엔 나무 그늘사이로 참나물과 참취가 눈에 들어온다.

향긋한 냄새에 취해 감탄사를 연발하다 보니 발밑에서 원추리와 산마늘, 잔대싹이 하늘거린다.

이쯤이면 됐다싶어 발길을 되돌리려는데 두릅나무와 엄나무가 서있다. 

 

산을 내려오면서 자연에 대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자연이 있기에 힘 안들이고도 그야말로 맛깔스런 신토불이 식단을 차릴 수 있게 된게 아닌가. 초여름에 들어선 요즘 이 철에 맞는 산나물로, 그것도 이 지역서 나는 산나물로 입맛을 돋울 수 있게 됐으니 이 아니 신토불이 식단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연이란 참으로 고마운 존재요 소중한 존재다.

이러한 고마움과 소중함은 자연에 대한 조그만 배려만 있으면 저절로 우러나오기 마련.

그러나 자연에 대한 티끌만한 배려도 없이 자연으로부터 혜택만 받으려고 하는 인간이기주의적인 사람들이 더러 있어 마음이 편칠 않다.

사실 우리가 산에 올랐던 날도 그런 편치 않은 마음을 갖고 산을 내려왔다. 우리가 산에 올랐을 때 곳곳에서 마구잡이로 나물을 채취한 흔적을 봤기 때문이다. 어떤 두릅나무는 허리가 잘린 채 죽어가고 있었고 어떤 엄나무는 순이란 순은 모두 떨궈진 채 앙상한 가지에 가시만 달고 있는 등 말 그대로 목불인견이었다.

아마도 그 나무들을 그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들은 자연에 대한 고마움과 배려를 생각하기 보단 자기 욕심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다음 해에도 그곳을 찾을 것이다. 그것도 올해 가졌던 부푼 마음(?)을 가지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요 실수다. 올해 잘려져 나간 나무가 내년에 싹 틔울 리 없고 갈퀴로 긁듯  싹쓸이 해간 곳에 산나물이 돋아날 리 없다. 자연은 정직한 대신 냉정하다.

자연은 대해준 만큼 우리에게 혜택을 준다. 그런 혜택이 바로 오늘 누리고 있는 쾌적한 공기와 같은 공익적 가치요 각종 자원이다. 산나물 역시 자연이 베푸는 혜택이요 선물이다.

 

산림청이 최근 산나물 불법 채취행위를 집중단속하게 된 동기도 자연이 베푸는 혜택과 선물을 그저 받으려고만 하는 얌체족들을 엄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오죽하면 산림청까지 나서 나물 뜯는 것을 단속하려 했겠는가. 나물과 나물뜯기는 먼 옛날 우리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먹을거리요 풍습중의 하나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일종의 관습행위를 법의 잣대로 옳다 그르다 판가름해야 하는 판이니 "오호, 통재!"다.

산나물 뜯으러 가는데 관광차를 빌리고 인터넷 카페를 통해 회원을 모집해 댄다니 한편으론 잘됐다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참으로 말세란 생각도 든다.

산나물도 산주(山主)와 시.군의 허락을 받아 뜯어야 하고 인근 주민들이 산에 올라도 마음 편히 산나물을 뜯지 못하는 참으로 기막힌 세상이 온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산나물과 산약초를 불법으로 채취하다 적발되면 7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단다. 한 마디로 '중죄인' 취급을 한다는 얘기다.

"함부로 산나물 뜯으면 중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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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가운데 참나무란 나무가 있다.

예부터 쓸모가 많아 '진짜 나무'란 뜻에서 이름마저도 '참'나무라 붙여졌으니 기실 이 보다 더 훌륭한 나무가 또 어디 있을까.

지역에 따라 종류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전 국토의 70%를 산이 차지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손쉽게 볼 수 있는 나무가 바로 참나무다.

따라서 우리 나라 사람 치고 참나무란 이름을 못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흔하게 분포하고 있는 나무가 이 나무다.

하지만 너무나 흔한 탓인지, 아니면 비슷한 건 무조건 두루뭉실 싸잡아 같은 종으로 여기는 우리 나라 특유의 국민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참나무의 참됨'을 너무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우선 참나무란 명칭은 본래 한 가지 나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참나무과에 딸린 여러 나무를 통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참나무라고 하면 상수리나무뿐만 아니라 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등 도토리 열매를 맺는 여섯 가지의 우리 나라산 참나무류가 모두 포함된다.

 

그렇다면 도토리는 무엇이고 상수리는 무엇인가.

정확히 말해 도토리는 참나무과 나무에 열리는 모든 열매를 뜻하는 포괄적인 말이고, 상수리는 상수리나무에 열리는 열매, 즉 상실(橡實)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상수리나무를 참나무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 상수리 하면 으레 참나무 열매로 통하고 있다.

반면 '굴밤'이란 말은 졸참나무 열매를 뜻한다.

이들 나무의 열매와 깍지는 얼핏보면 서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실은 약간씩 다르다.

즉, 상수리나무 열매와 굴참나무 열매는 약간의 타원형을 이루는 구형에 깍지에는 비늘같이 생긴 까끄라기가 열매 쪽으로 돋아있고, 떡갈나무 열매는 꼭지가 큰 동그스름한 구형에 깍지에는 수없이 많고 가는 까끄라기가 바깥쪽으로 젖혀져 나있다.

또한 졸참나무 열매는 이름과 같이 가늘고 긴 원통형에 깍지에는 까끄라기가 없으며, 갈참나무와 신갈나무 열매는 졸참나무 열매처럼 깍지에는 까끄라기가 없지만 열매모양은 약간 도툼한 구형을 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

 

그 다음으로 자주 혼동되는 것은 참나무에 속하는 각 나무의 특징과 열매를 맺는 기간이다.

우선 상수리나무부터 보기로 하자.

상수리나무는 잎이 좁아 밤나무 잎과 비슷하며 열매(상수리)는 꽃이 핀 이듬해 가을에 익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상수리란 말은 본디 상수라에서 왔으며 조선시대 선조가 피란 길에 도토리묵을 해먹은 데서 유래됐다.

떡갈나무는 참나무류 중에서 잎이 가장 크고 넓으며 잎에는 독특한 향과 방부성의 성분이 들어있어 예부터 떡을 찌거나 보관할 때 이용돼 왔고 열매인 도토리는 꽃이 핀 그해 가을에 익는다.

떡갈나무의 줄기는 흰빛을 많이 띠며 주로 추운 지방에서 잘 자라 경기 강원 이북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면 상수리나무는 남쪽지방인 영호남에 많이 분포한다.

갈참나무는 나무껍질의 주름이 유난히 깊은 특징이 있고 졸참나무는 참나무 가운데 도토리가 가장 작은 특징이 있으나 갈참나무 열매와 함께 가장 맛이 좋아 최상급으로 친다.

굴참나무는 상수리나무와 매우 흡사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굴참나무의 잎 뒷면에는 흰털이 빽빽이 나 있어 잎 뒤가 희게 보인다는 점이다.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오뉴월에 살랑바람을 타고 산허리를 하얗게 수놓는 나무가 바로 굴참나무다.

그러나 상수리나무는 이러한 흰털이 없다. 굴참나무는 또 코르크층이 두터워 병마개와 굴피집의 지붕을 만드는데 이용된다.

신갈나무는 잎의 모양과 크기가 사람의 발바닥과 비슷해 옛날엔 짚신이 헤어지면 깔개 대용으로 이용됐다.

이들 나무 중 굴참나무만 상수리나무처럼 꽃이 핀 이듬해에 열매를 맺고 나머지 갈참나무와 졸참나무, 신갈나무는 떡갈나무처럼 꽃이 핀 그 해에 열매를 맺는다.

 

이들 참나무류의 열매, 즉 도토리는 그냥 먹으면 맛이 떫지만 그 가루 속엔 녹말성분이 많아 예부터 '도토리쌀'을 빚은 다음 밥과 떡을 지어먹거나 앙금을 내 묵을 쑤어 먹는 등 구황식물로 애용돼 왔다.

지금으로부터 약 5백60년 전인 세종 16년에 경상도 기민(飢民) 담당관리가 임금께 올린 상서문에서 '흉년에 대비한 구황식물로는 도토리가 제일이고 그 다음은 소나무 속껍질'이라고 보고한 내용을 보더라도 도토리가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중요한 연명(延命)식물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또한 떡갈나무의 수피는 적룡피(赤龍皮)라 해서 염료를 얻는 중요한 자원이었으며 그 잎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 잎을 쪄서 말린 것을 포장해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그밖에 신갈나무, 굴참나무 등 기타 참나무들도 각각의 쓸모에 의해 중요한 자원 역할을 해오는 등 우리 민족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막역한 나무가 참나무였다.

요즘에도 참나무 열매는 건강에 좋다하여 도토리막걸리와 묵, 빈대떡이 인기를 끌고 있으며 도토리의 특별한 성분을 이용한 폐수정화 처리방법도 개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참나무류는 이 외에도 산림생태계의 유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예를 들어 참나무류의 겉껍질은 야생벌이 집을 짓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재료이며 줄기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수액은 각종 풍뎅이류와 사슴벌레류, 벌류, 나비류 등의 주요 먹이가 되고 있고 오래된 나무의 줄기 속(구멍)과 뿌리 부근은 각종 곤충들이 즐겨 찾는 주요 서식장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소중한 참나무류들이 요즘 들어 수난을 당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

가을철만 되면 도토리를 따려는 사람들로부터 사정없이 뭇매를 맞아대고 나무 줄기는 예리한 톱날에 송두리째 베어져 버섯종균을 키우거나 숯을 굽는데 이용되고 있다.

자연자원을 활용하려는 측면에서 볼 때는 이 같은 일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일로 여겨지겠지만 천연림을 이루고 있는 참나무 숲들이 아무런 대안 없이 마구 훼손될 경우엔 일반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엄청난 피해를 자연생태계는 감수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숱하디 숱했던 사슴벌레와 풍뎅이들이 이제는 자취를 감추어 그 모습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시골 아이들이 자꾸만 늘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참나무 숲의 무분별한 훼손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최근 들어서는 참나무 에이즈라 불리는 시들음병이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어 관계당국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가뜩이나 소나무재선충병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이번에는 참나무에 ‘몹쓸병’이 번지고 있으니 불난 집에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격이다.

참나무시들음병의 병원균은 레펠리아균이며 이를 매개충인 광릉긴나무좀이 옮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신갈나무와 떡갈나무 등 참나무류가 피해를 입게 되며 이병에 감염되면 나무속에서 병원균이 번지면서 수분이동 통로를 막고 그로 인해 나무가 죽게 된다.

보통 요즘 같은 5월 중순부터 참나무류에 침입해 병을 옮기는데 병에 감염된 나무는 7~8월부터 빠르게 말라죽고 고사된 나무는 겨울에도 마른 잎이 붙어 있어 쉽게 구별된다.

또 감염된 나무를 자세히 살펴보면 매개충이 침입한 직경 1mm 가량의 작은 구멍이 보이고 구멍주변과 뿌리부근 땅위에 나무가루 같은 배출물이 쌓여 있다.

참나무시들음병은 지난 2004년 8월 경기도 성남시 이배재에서 처음 발생한 이후 올들어 경기 강원 경북 충북 등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 병이 처음 발생한 2004년에는 전국 18개 시·군·구가 피해를 입은데 이어 2005년에는 23개 시·군·구에서 발생해 피해를 줬다.

하지만 올해는 61개 시·군·구로 급속히 퍼지고 있다니 그야말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은 존재하고 있을 때 보전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방법이다.

사라지고 나서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후회해야 이미 때늦은 일이요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 주변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참나무 숲을 바라보면서 문득 '참나무에 곁낫걸이'란 우리 속담 한 구절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제 능력과 주제는 생각지도 않고 감히 함부로 덤벼든다’는 것이 이 속담이 갖고 있는 속내평이니,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는 사람들의 속내와 귀중한 나무에 공연히 침입해 병원균을 마구 옮겨대는 광릉긴나무좀의 행패(?)가 이 속담이 뜻하는 의도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의 산야 그 어느 곳을 둘러봐도 숲다운 숲이 보이지 않는 요즘.

우리 민족의 기상을 대변해온 소나무에 이어 ‘진짜 나무’로 불려져온 참나무마저도 그 늠름한 자태를 잃어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진짜 말세가 오려고 이러는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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