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표면에는 흔히 '바다'라고 불려지는 부분이 있다.

지구에서 달을 바라다보면 비교적 밝게 보이는 부분이 육지이고 그 중간 중간에 얼룩진 듯 어둡게 보이는 부분이 곧 바다다.

이 바다는 위치와 형태에 따라 '구름의 바다' '동양의 바다' '비의 바다'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달 표면의 바다는 그 모습이 신비스러워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상상에 따라, 혹은 시대에 따라 여러 모습의 신 또는 동식물로 표현돼 왔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인들은 달 표면의 바다 형태를 보고 새의 모습을 닮은 달의 신 '토토'를 탄생시켰으며 멕시코의 아스테카 족은 달을 나타내는 심벌을 토끼와 뱀으로 표현했다.

 

기록이나 벽화 등에 의해 전해지고 있는 여러 종류의 달의 심벌 가운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역시 토끼와 월계수다.

우리 민족도 달 표면의 바다를 오래 전부터 토끼와 월계수로 보아 왔는데 그것을 확인시켜 주는 유물과 노랫가사가 조선시대의 월기(月旗)와 강강술래다.

즉, 조선시대 의장기(儀仗旗)의 하나인 월기를 보면 둥근 달 속에 토끼가 그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생겨난 강강술래의 노래가사에는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 옥도끼로 찍어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 /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 천년만년 살고지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렇듯 달은 그 민족의 심성과 자연관에 따라 신 혹은 다른 동경의 대상으로 표현돼 오면서 마음 속 깊이 영원한 이상향으로 인식돼 왔다.

 

그런데 그 영원한 이상향이자 마음속 동경의 대상인 토끼가 요즘에 와서 돌연 우리 나라 어린이들에 의해 남획(?)되는 수난을 당하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수난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개작(改作)된 <반달>이란 동요의 노랫가사로 이 노랫가사를 듣노라면 너무나 기가 차 할말조차 잃을 정도다.

우선 그 노랫가사부터 들어보자.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세마리 / 한마리는 찢어 먹고 / 한마리는 구워 먹고 / 한마리는 도망갔네 / 서~쪽 나라로"

어릴 적 꿈을 단 한 순간에 허망하게 망가뜨리는 이 노랫가사는 얼마 전부터 초등학생은 물론 유치원 어린이들 사이에서 불려지는 개작동요란 점에서 우선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인 새싹들의 입에서 어쩌면 그리도 잔혹한 단어들이 동요 속에 끼어 들어 유리알처럼 밝아야만 할 어린이들의 마음을 그토록 어둡고 삭막하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제 아무리 영악한 게 요즘 아이들이기로서니 동경의 대상인 달나라 토끼를 마구 잡아먹을 생각을 했을까.

그것도 입가에 웃음까지 띤 채 한 마리는 찢어먹고 또 한 마리는 구워먹자고 이구동성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기가 차도 너무 차고 놀라워도 이만저만 놀라운 게 아니다.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다.

또한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는 그들의 마음의 표현이자 시대상을 나타내는 거울이다.

그러기에 이 노랫가사 속에 담겨져 있는 어린이들의 마음이야말로 현 시대의 아픈 상처를 그대로 반영해 주는 '우리들의 자화상'이자 '우리 민족의 미래상'이라 할 수 있다.


자고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정한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법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마음이 고와야 동물이든 식물이든 그들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이요 또 그들이 사랑스럽게 보일 때만이 자연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린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달 속의 토끼마저 마구 찢어먹고 구워먹고 싶다며 마음껏 목청 돋궈 노래를 부르고 있쟎은가.

그 철없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 미래의 자연은 어떻게 될 지 저윽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걱정에 앞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아버지로서 한 가지 뉘우칠 게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철없는 아이들의 흑심(?)이 우리 어른들을 본받아 생겨났을 것이라는 데 대한 반성과 자책감이다.

우리들의 이름은 불행히도 '자연 파괴자'다.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자연 환경에 대해선 너도 나도 영락없는 파괴자다.

하지만 그에 대한 뉘우침은 너무나도 인색하다.

더구나 우리가 저지른 자연 환경 파괴의 원죄가 지금 당장 후세에까지 대물림하려 하는 데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저들 태연하기만 하다.

 

우리들은 언제까지 태연하기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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