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잡이 추억
익을 대로 익은 벼이삭이 찰랑찰랑 배부른 소리를 내고 볏잎에선 황금빛 부자 색깔이 더없이 눈부실 즈음이면, 으레 바빠지던 발걸음이 있었다. 두살 위인 옆집 누나와 동네 까까머리 동생들, 그리고 나. 그렇게 이뤄진 예닐곱 명의 개구쟁이 군단은 언제나 닳고 닳은 됫병 하나씩을 옆에 끼고 마을 뒤편 실개울가로 향했다.
목적은 메뚜기잡이. 도착한 실개울가 둑방길은 어느 곳보다도 메뚜기들이 많았다. 개울 옆 논배미에서 날아든 벼메뚜기를 비롯해 덩치가 제법 큰 방아깨비와 풀무치들이 요즘의 곤충농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그득했다. 이들 외에도 더듬이가 유난히 긴 베짱이와 여치, 이름이 특이한 섬서구 같은 다른 메뚜기들도 많았지만, 그들은 '못 먹는 거'라며 잡지 않았기에 '벌레' 그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했다.
둑방길은 금세 난투장으로 변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애먼 '못 먹는 거'까지 뒤섞여 난장판이 됐다. 게다가 누가 많이 잡나 내기라도 한 날이면 온 둑방길은 가을운동회장 만큼이나 시끌벅적했다. 메뚜기가 뛰면 뛰는 대로 날면 나는 대로 정신없이 쫓아가 잡아댔으니,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지금 생각하건대 그 땐 왜들 그렇게 요란을 떨었는지,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한바탕 메뚜기잡이가 끝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병을 맞대보고는 누가 많이 잡았나 등수 매기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장원은 늘 내 차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곤충이든 물고기든 새든, 무엇이건 잡는 데는 선수였던 나였기에 재보나 마나 일등이었다.
메뚜기잡이의 가장 큰 즐거움은 메뚜기들을 들들 볶아 노린내가 나도록 먹는 재미. 메뚜기 중에도 방아깨비나 풀무치 같은 것은 불에 구워 먹어도 가히 일품이었다. 더욱이 노랗게 익은 방아개비 알의 독특한 맛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추억의 맛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가을은 메뚜기잡이로 하루해가 갔다. "어머니는 밭에 나가고 아버지는 장에 가시고/ 나와 내동생 논길을 따라 메뚜기잡이 하루가 갔죠~." 매년 이맘때쯤이면 절로 이 노래(조영남의 '내고향 충청도')가 흥얼거려 지는 것은 바로 그런 추억이 깃든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메뚜기는 사실 엄청난 해충이었다. 추억의 곤충으로 그나마 먹을거리가 없던 시절 배고픔을 잠시 달래주던 존재였기에 망정이지, 본래 모습은 징글징글하던 송충이 만큼이나 해로운 곤충이었다. 하루에 자기 몸무게의 2배 분량을 먹어치우는 대단한 식성으로 농작물을 닥치는 대로 갉아 먹기에 그 피해는 실로 막대했다. 오죽하면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 여호아가 내린 열 가지 심판(재앙) 중의 하나로 메뚜기떼가 등장했겠는가.
하지만 오늘날엔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논과 자연 생태계의 건강도를 가늠하는 생물지표로서 메뚜기류가 반가운 손님 대접을 받고 있다. 각 지자체와 농민단체들이 친환경 특히 무농약 농법의 증거로서 벼메뚜기의 건재함을 앞다퉈 과시할 정도로 귀한몸이 됐다. 우리 농촌이 예전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청신호다. 이와 함께 벼메뚜기잡이를 지역 이벤트로 내세우는 곳들이 갈수록 늘고 있음도 반가운 추세다.
그러나 쓰라린 소식도 들린다. 다름 아닌 북쪽 얘기다. 북한 주민들도 최근 벼메뚜기잡이에 부쩍 나서고는 있는데 그 이유가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란다. 얼마나 혈안이 돼 있으면 그들을 막는 규찰대까지 운영되고 있다니, 남북이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한쪽에선 반가움에 보란듯이 메뚜기를 잡고 다른 한쪽에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몰래 메뚜기를 잡고….
오로지 볶아먹기 위해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오늘따라 서글프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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