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울 무렵의 농촌

 

요 며칠 사이에 매미 울음소리가 달라졌다. 유례없던 폭염 탓에 유난히도 쩌렁쩌렁 울어대더니만 이젠 지쳤는지 쉰 목소리를 내고 있다. 베짱이와 풀무치 소리도 점점 풀이 죽어가고 있다. 반면 귀뚜라미 소리는 갈수록 커져만 간다.
잠자리 날갯짓도 달라졌다. 며칠 전만 해도 사뿐사뿐하던 날갯짓이 비에 흠뻑 젖은 것처럼 마냥 굼뜨게만 보인다. 반쯤 해진 날개로 힘겹게 날아다니는 잠자리도 보인다.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숲속 다람쥐도 행동이 달라졌다. 무언가를 자꾸만 물어나른다. 어치와 동고비 역시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며 월동 준비를 하고 있다. 겨울이 오려면 아직도 두 세 달은 족히 남았건만 무슨 까닭인지 깨나 부지런을 떨고 있다. 인간 세계의 조급증이 자연계로 옮겨 붙은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여름철새들의 행적도 묘연해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울음소리가 들려오던 꾀꼬리는 벌써 사라졌고 귀신 울음소리 같던 호랑지빠귀 소리도 안 들린 지 꽤 오래됐다.
번식을 위해 각기 흩어져 있던 텃새들도 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원앙과 흰뺨검둥오리들이 떼지어 나는 것은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참새들 역시 큰 무리를 이뤄 이 논 저 논 넘나들며 허수아비를 놀려댄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동구밖 오솔길에는 쑥부쟁이와 구절초가 한들한들 꽃을 피운다. 어머니 품 냄새 같은 향기로 이 나비 저 나비 불러들여 가을 정취를 더한다. 미련 많은 꿀벌들의 날갯짓도 더없이 빨라졌다.
시골길 옆으로는 억새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냇가에는 달뿌리풀과 갈대들이 저마다 키재기하며 하늘을 간질이고 있다. 아침 저녁 불어오는 바람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가을 들판은 이제 막 황금 빛으로 일렁이고 있다.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세찬 비가 쏟아질 때만 해도 "흉년 들겠네" 모두들 걱정이 태산 같더니만 다행히도 가을 햇볕이 좋아 농부들 시름이 반쯤 사라졌다.
도토리 나무는 가을 들판을 바라보고 열매를 맺는다고 했는데, 올핸 얼마나 열매를 맺었는지 궁금하다. 으름도 그렇고 다래와 머루도 얼마나 달렸는지 궁금하다. 시절로 보면 으름은 이미 다 익어 벌어졌을 테고 다래와 머루도 먹음직스럽게 익기 시작했을 시기다.
산밤도 얼마 안 있으면 밤송이가 벌어질 태세이고 어린 시절 동심이 묻어 있는 보리수나무 열매도 살이 올라 붉기 시작했다.
산에서는 물푸레나무와 산진달래가 이파리를 떨어뜨리고 있다. 송이와 능이 철이 오고 있다는 징표다. 물푸레나무와 산진달래는 산골 사람들의 시계 역할을 한다. 물푸레나무와 산진달래가 이파리를 떨어뜨리는 만큼 그들의 발걸음도 빨라진다.
농촌의 가을은 이래저래 사람들을 바쁘게 만든다. 벼베기 하랴 밭곡식 거둬 들이랴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 인삼 농가에선 인삼 캐기 바쁘고 과수 농가들은 이 과일 저 과일 따다 시장에 내느라 코가 열자다. 씨앗 뿌리는 망종 절기 만큼이나 눈코 뜰 새 없는 시기가 요즘이다. 발등에 오줌 싸고 불 때는 부지깽이도 부려먹는다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일년 중 가장 바쁘게 일 해야 하는 시기에 하늘만 바라보며 한숨 짓는 농가들이 있다. 고추 농가들이다. 징글징글하게 쏟아진 지난 여름 비에 몽땅 피해 입어 밭마다 거둬들일 고추가 없으니 막상 '할 일'이 없단다. 비싼 고춧값도 빛 좋은 개살구다. 내다 팔 고추가 없는데 값만 비싸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내년 농사를 짓기 위해선 고춧대라도 뽑아야 하는데 일 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어느 고추 농사꾼의 푸념이 영화속 워낭소리 만큼이나 가슴을 할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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