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백사의 죽음
지난 여름 어느날 한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흰 바탕에 붉은 줄무늬가 있는 뱀이 무슨 뱀이냐"고 물어왔다. 뜬금없는 질문에 "국내에 그런 뱀이 어디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낼 테니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잠시 뒤 사진이 전송돼 왔다. 확인해 보니 정말 흰바탕에 붉은 색 무늬가 선명한 뱀이었다. 백사였다. 무늬로 보아 '백사 중의 백사'라는 능구렁이(능사) 백사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뱀의 상태가 온전해 보이질 않았다. 똬리를 튼 것도 부자연스러웠다. 들고 찍은 다른 사진 속에서도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사연을 물으니 기막힌 일이 있었다. 그 후배가 전날 밤 청원 미원의 한 도로를 지나는데 차앞 쪽에서 희고 커다란 뱀 하나가 기어가더란 것이다. 처음 보는 뱀이라 신기해 구경도 할 겸 지나가길 기다리느라 잠시 멈춰서는 순간 곧이어 뒤따라 오던 차가 그만 그 뱀을 치고 지나간 것. 차를 멈추게 할 겨를도 없었던 데다 그 차의 운전자가 미처 뱀을 보지 못한 것이다.
뱀은 즉사했다. 안타깝지만 어쩌랴. 차를 다시 출발하려는데 뱀 종류가 궁금했다. 난생 처음 보는 뱀이기에 더욱 그랬다. 해서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뒤 도로 밖으로 치워 놨단다. 물론 그 뒷날 다시 가봤지만 그 뱀은 온데 간데 없었단다.
백사가, 그것도 능사백사가 어떤 동물인가. 긴다난다 하는 땅꾼도 평생 한 번 볼까말까 한다는, 전해지는 얘기로는 한 번 보기만 해도 운수대통한다는 귀하디 귀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그 능사백사가 로드킬 당했다. 야밤을 택해 이 쪽에서 저 쪽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려다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백사를 보는 시각은 동서양이 다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신비스러운 존재, 영물로 여기고 있다. 보양 보신문화가 뿌리깊은 우리나라에선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영약으로 믿는 이가 많다. 산삼은 저리가라란다. 필자는 15년 전 백사 1마리를 수천만원 주고 달여먹는 사람을 직접 본 적 있다. 지금도 인터넷상에 1억2천만원을 호가하는 능사백사주(酒)가 올라와 있다. 혹자는 그까짓 뱀 1마리가 무슨 영약일까 의심을 품겠지만 백사 전문가들은 여느 뱀에게는 없는 삼산화황(SO3)과 사포닌 성분이 들어있다고 믿고 있다.
일본에서는 백사를 신성시하고 있다. 백사를 모시는 신사가 있을 정도다. 또한 백사를 국가지정 천연기념물(1972년 지정)로 보호하고 있기도 하다. 야마구치현 이와쿠니시에는 백사기념관도 있다. 박제와 함께 살아있는 백사를 전시하고 있다.
반면 서양에서는 자연적인 현상, 즉 알비노(Albino)로 보고 있다. 알비노는 돌연변이에 의한 백화(白化)현상이다. 하지만 그들도 알비노의 출현 확률 만큼은 극히 드물게 보고 있다. 생물 종에 따라 다르지만 뱀의 경우 최소 10만분의 1정도로 매우 희귀한 현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같은 종 10만 마리 가운데 많아야 1마리 가량 태어날 정도이니 그들도 분명 예삿일로 보지는 않는 듯하다. 그들도 일부 동물원에 알비노 뱀을 전시하고 있다.
뱀 잡이가 성행했던 1980~9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약 10마리의 백사가 잡혔다. 그 중 능사백사는 고작 1~2마리에 불과했다. 그러니 수천만원을 호가할 수밖에.
로드킬 문제가 비단 귀한 동물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귀한 동물이든 여느 동물이든 심각한 건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능사백사보다도 더 귀하고 소중한 생명이 속절없이 희생당하고 있음을 잠시도 잊어선 안 된다. 도로는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사선(死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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