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지구상의 공기를 맑게 해주는 허파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자연생태계의 균형유지에도 더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숲 속의 나무들은 태양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바꾸는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함으로써 공기를 정화한다.

 

또한 광합성 작용으로 만들어진 양분은 자연생태계의 먹이사슬에 흘러들어 에너지 순환의 첫 출발점을 이룬다. 여기서 에너지 순환의 첫 출발점을 이룬다는 것은 먹이사슬 내의 생산자인 나무가 그 다음 단계인 1차 소비자에게 중요한 먹을거리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숲 속의 나무들에겐 항상 먹이사슬 내의 1차 소비자인 곤충 애벌레와 성충들이 모여들고 또 이를 잡아먹으려는 2차 소비자들과 2차 소비자를 포식하려는 3차 소비자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줄지어 모여든다.

 

숲과 나무는 또 온갖 생물들의 서식처이자 삶의 터전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태계 내 분해자 역할을 하는 미생물에서부터 포유류 등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각종 생물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섭식장소와 휴식장소를 제공하고 나아가 종족번식을 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다.

 

그러나 이 모든 역할 가운데 자연생태계의 균형유지에 가장 중요한 역할은 1차 소비자에게 먹이를 제공해주는 '생산자로서의 역할'이다.

 

숲 속의 나무는 그 뿌리부터 줄기와 잎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위가 주요 1차 소비자인 곤충들의 먹이가 되고 있다.

 

곤충에 따라서는 나무의 뿌리만을 갉아먹고 사는 것이 있는가 하면 줄기와 껍질을 파고들어 그것을 먹고사는 것과 이파리를 갉아먹고 사는 것 등 여러 종류가 있으나 곤충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맛이 있는 나무의 진, 즉 수액이다.

 

수액은 나무가 광합성으로 만들어낸 영양분으로 당분과 초산 따위로 이뤄져 있어 나무 줄기의 상처를 통해 밖으로 흘러나올 경우 자연적으로 발효돼 곤충이 좋아하는 시큼한 냄새를 풍긴다.

 

시큼한 냄새에 유혹된 곤충들은 앞을 다투어 수액이 흘러나오는 나무로 몰려들게 되고 몰려든 곤충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수액을 먹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죽음을 불사한 싸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서로간의 경쟁을 피하고 효율적으로 수액을 먹기 위해 생겨난 것이 곤충간의 '시간적 질서'다.

 

다시 말해 곤충들은 아무 때나 수액이 나는 나무로 몰려드는 게 아니고 저 마다의 시간대를 지켜 먹이를 구한다.

 

예를 들어 햇빛이 뜨거운 한낮에는 말벌, 풍이, 점박이풍뎅이, 흰점박이꽃무지, 진딧물, 쌍살벌, 등에류가 모여들고 해가 질 무렵에는 오색나비, 멋쟁이나비, 네발나비, 청띠신선나비 등 주로 나비류가 날아들며 어두컴컴한 밤에는 태극나방, 사랑밤나방, 주홍각박시나방, 배저녁나방,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바퀴, 하늘소 무리가 찾아든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몸집이 작은 개미,파리류는 밤낮없이 나무진에 모여든다.

 

이렇듯 자연생태계는 오묘한 질서와 법칙 아래 균형이 유지되고 발전해 나간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 없이 그저 평화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의 세계에서는 항상 시끌벅적하고 치열한 경쟁이 있는 곳이 숲이며 또 그러면서도 일정한 규칙과 리듬 속에서 균형을 잡아가고 있는 것이 곧 숲 속의 생태계다.

 

하지만 이러한 숲 속 생태계도 아무런 간섭이 없는 자연상태에서만 그같은 법칙과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요 어느 한순간이라도 인위적인 간섭이 끼어 들게 되면 먹이사슬의 균형은 물론 자연생태계의 법칙마저도 순수성을 잃고 삐그덕 거리게 마련이다.

 

어느 숲 속에 사람이 들어가 수액이 흘러나오는 나무를 베었다 치자.

 

그 사람이 한 일은 단순히 나무 한 그루를 베었을 뿐이지만 자연생태계는 그로 인해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된다.

 

우선 수액이 나오는 나무가 베어짐으로써 수액을 먹이로 하는 수많은 곤충들이 먹을 것을 잃고 방황하다 결국 날아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곤충들을 잡아먹고 살던 곤줄박이 등 2차 소비자들도 큰 타격을 입게 되며, 나무 자체를 갉아먹고 사는 또 다른 곤충류와 생물들도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된다.

 

숲 속의 나무는 생태계 내 소비자들의 먹이로서 뿐만 아니라 숲 속 생태계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로서의 역할도 하기 때문에 나무 한 그루가 베어지면 그 베어진 공간을 통해 갑자기 많은 양의 햇빛이 들어옴으로써 숲 속의 저층 생태계도 커다란 영향을 받게 돼 음지식물이 말라죽고 대신 양지식물이 싹을 틔우는 등 변화가 오게 된다.

 

사람이 저 혼자 살아갈 수 없듯이 자연 속의 생물들도 서로 얽히고 섥힌 관계 속에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역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숲 속의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나무라 할지라도 그것의 존재이유는 있는 것이요 숲 속 생태계의 균형유지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숲 속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곤충 한 마리라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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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의 공생(共生)과 기생(寄生)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생태계 내에서 곤충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천적의 공격을 피해 목숨을 구하는 일과 에너지원의 섭취를 위해 그들 스스로 먹잇감을 구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 곤충 자체가 이 지구상의 생태계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인 만큼 소위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범주’를 벗어나 독단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먹히지 않으면 먹어야 하는 것이 생태계의 원리요 법칙이다.

 

그러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천적으로부터 도망쳐야 하고 또 그와 반대로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는 식물체든 동물체든 자신의 먹잇감이 되는 것을 찾아 그것을 섭취해야만 한다. 그것이 숙명이다.

 

그러나 생태계내의 모든 생물들이 오로지 먹고 먹히는 관계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더 복잡한 관계로 서로 얽히고 섥혀 있는 것이 생태계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공생(共生)과 기생(寄生) 또한 이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있는 생태계의 관계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즉, 공생과 기생이란 독특한 방법을 통해 먹이를 구하거나 이로움을 취하는 곤충들도 우리 주변에 상당수가 존재한다.

 

먼저 공생을 보자. 공생(共生)이란 ‘서로 다른 생물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상리공생(相利共生)과 편리공생(片利共生)이 있다. 상리공생은 말 그대로 공생자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로운 관계를 말하며 편리공생은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되 어느 한 쪽만 이로운 관계를 의미한다.

 

이렇듯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뒤에 설명하는 기생(寄生)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공생관계에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개미와 진딧물의 관계이다. 진딧물은 뾰족한 입을 이용해 식물체의 수액을 빨아먹은 후 꽁무니에 단물을 배출하는 습성이 있다. 진딧물이 내는 이 단물은 개미의 중요한 먹이가 되기 때문에 진딧물이 있는 곳에는 대부분 개미가 모여들기 마련이다.

 

진딧물이 단물을 배출해 내는 이유는 단순히 개미에게 먹이를 제공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달콤한 먹이를 제공하는 대신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는 보다 근본적인 의도가 담겨져 있다.

 

이러한 의도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달콤한 수액을 손쉽게 얻어먹게 된 개미들은 그 대가로 진딧물의 천적인 무당벌레 등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적극 퇴치해 주는데 이로써 이들의 관계는 서로에게 이로움을 주는 관계, 즉 공생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사는 종은 아니지만 외국의 어떤 불개미는 진딧물의 무리를 아예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가 흙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그곳에 진딧물이 살도록 하는 것도 있다고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가까이에 두고 보호해 가며 단물을 얻어먹겠다는 그들만의 심오한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곤충 가운데에는 자기 스스로 먹잇감을 구하지 못하고 다른 곤충의 몸이나 알에 기생(寄生)하며 살아가는 얌체족(?)이 있다.

 

곤충의 기생관계는 양측 혹은 어느 한 쪽이 이로움을 취하는 공생관계와는 달리 기생자가 일방적으로 이로움을 취하고 기생을 당하는 쪽(이를 숙주라고 함)은 피해를 입는 관계를 의미한다.

 

기생을 하는 곤충, 즉 기생곤충 가운데에는 맵시벌과 좀벌(이들을 기생벌류라 함), 사마귀수시렁이 등과 같이 곤충류에 기생하는 것들도 있다.

 

 

 

'기생곤충의 벌레혹'

얼핏 보기에는 나무열매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팽나무에 생긴 기생곤충의 벌레혹(알집)이다.(위 사진) 이 벌레혹을 갈라보면 씨앗 대신 기생곤충의 애벌레만 가득하다(아래 사진)./자연닷컴

 

맵시벌이나 좀벌은 하늘소, 사슴벌레 등 다른 곤충류의 알과 애벌레, 번데기에 알을 낳아 그 속에서 자라도록 함으로써 결국 숙주인 하늘소와 사슴벌레 등에게 ‘죽음’이라는 심각한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이처럼 기생관계를 통해 숙주를 죽게까지 하는 것을 ‘포식기생’이라고 한다.

 

사마귀수시렁이는 이름 그대로 사마귀의 알집에 알을 낳아 거기서 깨어난 애벌레들이 사마귀의 알을 먹고 자라게 한다.

 

곤충 가운데에는 식물에 기생하는 것들도 있다.

 

혹벌이란 곤충은 밤나무나 참나무의 잎과 어린 가지에 ‘벌레혹’을 만들어 그 안에서 자신의 유충을 키운다. 집주변의 밤나무나 참나뭇가지 혹은 이들 나무의 잎 뒷면에 작은 구슬 모양의 돌기가 무수히 나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이 혹벌이 만들어 놓은 벌레혹이다.

 

이 벌레혹을 칼로 절단해 보면 그 안에는 희고 둥그스름한 알 또는 애벌레가 들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생곤충의 벌레혹은 구슬모양 이외에도 꽃처럼 생긴 것, 열매처럼 생긴 것 등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또한 천적의 눈을 속이기 위한 곤충의 지혜로 볼 수 있다.

 

특히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팽나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벌레혹은 어찌나 나무열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전문가가 아니고는 쉽게 구별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의태술(擬態術)’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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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의 법칙, 강한 자는 사라진다

 

요즘 유난히 자주 눈에 띄는 동물이 있다. 다람쥐다. 비록 산골 숲속이 아니더라도 도시근교의 야산과 공원, 심지어 학교운동장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 다람쥐다.
계절이 가을인 만큼 그들이 먹이 모으느라 분주히 움직이기에 자주 마주치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개체수 자체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최근 산행을 다녀왔거나 밤 주우러 갔다온 사람들 마다 "곳곳이 다람쥐 천지"라고 말 할 정도로 숫자가 많아졌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갑자기 많아진 야생 고양이 때문에 먹잇감인 다람쥐 숫자가 급감하고 있다고 각 언론들이 앞다퉈 보도했는데, 20년도 채 안 된 지금에 와서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야생 고양이 천국이 아닌 다람쥐 천국이 돼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현실은 그렇다.
자연 생태계에는 야생 고양이만 다람쥐의 천적 노릇을 하는 게 아니다. 뱀도 있고 족제비, 오소리, 담비, 삵, 너구리도 있다. 맹금류인 올빼미와 매 무리도 대표적인 천적이다.
먹이사슬내의 약자인 다람쥐로서는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모험일 정도로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천적이다. 도토리 하나 밤톨 하나를 주워도 맘 편히 먹지 못하는 게 다람쥐다. 밤과 낮, 하늘과 땅 가리지 않고 온통 천적으로부터의 위험 뿐이니 어느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신세다.
그러나 어쩌랴. 먹이사슬의 법칙은 늘 약자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고 강자는 그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명과 생태계 질서를 유지해 나간다. 약자의 희생이 당연시 되는 게 자연 생태계의 논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약자인 다람쥐는 여전히 건재할까. 1990년대 중반기 상황으로는 얼마 안 가 다람쥐는 사라지고 야생 고양이만 들끓을 것으로 예상됐는데 야생 고양이의 숫자가 늘기는커녕 되레 줄어든 느낌이 드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약육강식의 논리대로라면 먹이사슬의 아랫단계로 내려 갈수록 점점 개체수가 줄어들거나 사라져야 할 텐데, 오히려 최하위 단계인 다람쥐는 사라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엔 그 숫자가 더욱 늘었음은 무슨 까닭일까.
거기에 더하여 국내 먹이사슬의 최상위 단계인 호랑이와 표범, 늑대, 여우가 이미 멸종된 것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먹고 먹히는 힘의 논리대로라면 이들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한반도 생태계를 지배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은가.
답은 간단하다. 강한 자는 사라진다는, 아니 강한 자부터 사라진다는 생태계의 법칙 때문이다. 이를 거꾸로 하면 약한 자는 남는다는 뜻이니 결국 자연 생태계를 끝까지 유지시켜 나갈 최후 보루는 다람쥐와 토끼 같은 약자들이다.
약자는 비록 약할 망정 강자가 갖고 있지 않은 여러 장점을 갖고 있다. 첫째, 겸손함과 부지런함이다. 호랑이가 사라진 곳에선 늑대가 늑대가 사라진 곳에선 여우가 왕 노릇 한다고, 먹이사슬의 윗단계로 올라 갈수록 우쭐대고 뽐내며 게으른 습성이 있지만 약자인 다람쥐와 토끼는 힘이 없기에 스스로 낮출 줄 알고 부지런을 떤다.
둘째,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과 생명력, 번식력이 뛰어나다. 푸른숲에서 민둥산으로, 민둥산에서 또 다시 푸른숲이 되기까지 숱한 서식환경 변화를 겪어오는 동안 이 땅의 최상위 동물들은 이미 사라졌거나 쇠퇴한 반면 최하위 동물인 다람쥐와 토끼들은 여전히 건재한 것은 바로 뛰어난 환경적응력과 생명력, 번식력 때문이다.
맹수는 배가 고파야 사냥한다. 힘이 있기에 그 힘만 믿다보니 생긴 습성이다. 하지만 다람쥐와 토끼는 늘 움직이며 먹어댄다. 한 치 앞을 모르기 때문이다. 비록 한 치 앞을 모르는 삶이지만 절대 포기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게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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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뱀의 꾀꼬리 포식, 그 생생한 장면을 찍다

 
 지난 2일엔 평생 한번 볼까말까 하는 진기한 광경을, 그것도 야외 사진촬영 현장에서 생생히 목격했다. 생태사진을 하는 사람으로서 대단한 행운이라 생각한다.
   그날 아침 카메라 가방을 챙기면서 오늘은 어디로 향할까 생각하다 문득 며칠전 꾀꼬리 소리가 들렸던 괴산의 한 밤나무숲이 떠올라 서둘러 집을 나섰다. 현장에 도착하니 꾀꼬리 한쌍이 날카롭게 경계음을 냈다. 낯선 방문객이 침범했다는 자기들만의 신호였지만, 새 울음소리만 들어도 그들의 속내를 알 수 있기에 오히려 “우리 둥지 이 근처에 있소” 라는 고백처럼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위를 살핀 지 3분도 안돼 나뭇가지에 매달린 둥지가 눈에 들어왔다. 둥지 한구석으론 불그스레한 새끼 주둥이까지 보였다. 몸집이 어느 정도 자라 있다는 증거다. 직감은 적중했다. 부화한 지 열흘 이상 지난 새끼 4마리였다.


 위장텐트를 치고 곧바로 사진촬영에 들어갔다. 꾀꼬리의 먹이장면은 이미 몇 년 전 촬영한 바 있으나 그 땐 필름카메라였다. 해서 올핸 기필코 디지털카메라로 다시 찍기로 마음먹어 오던 터였다.
 망원 카메라를 설치하고 기다리길 3시간여. 말이 3시간여지 불과 1㎡도 안 되는 좁은 텐트안에서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꼼짝 않고 갇혀 있기란 여간 인내심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무릎에 쥐가 나고 허리가 저려도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조건 참고 기다려야 했다. 한데 그 놈(?)의 꾀꼬리 어미들은 왜 그리 의심이 많은지. 웬 낯선 사람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 이상한 물체속에 들어가는 것을 본 어미들은 계속 경계음만 낼 뿐 먹이를 물어다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2개의 배터리 중 하나는 이미 소진한 상태여서 조바심까지 생겼다.


 그래도 오기가 있지, 너희들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고 막 다짐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니터에 이상한 장면이 나타났다. 둥지안에 있던 새끼 한 마리가 돌연 공중으로 떠오르는 게 아닌가.

    눈을 의심했지만 우선 셔터부터 눌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날개가 다 자라지도 않은 어린 새끼가 공중부양하듯 허공으로 떠올라 날개를 푸드득 거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면을 확대해 보았다. 아뿔사! 뱀이었다. 1m쯤 되는 커다란 누룩뱀 하나가 나무에 기어올라 새끼를 낚아챈 것이다. 잡힌 새끼는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 쳤지만 소용 없었다.

     이미 날카로운 이빨에 머리를 물려 입안으로 반쯤 들어간 상태였다. 놀란 건 어미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끼가 뱀에게 잡혀먹히는 것을 본 어미들은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다. 캬~아 캬~아! 최악의 비상사태를 알리는 어미들의 다급한 콜음(CAll音)이 일순간 숲속을 뒤덮었다. 평소 낯선 사람이 둥지 근처만 지나가도 잽싸게 공격하는 꾀꼬리지만 그날따라 속수무책이었다.


 손에 땀이 났다. 더위도 잊혀졌다.

   아프리카 밀림에서나 볼수 있을 법한 야생의 먹이사슬 현장을 생비디오로 보며 사진촬영하는 행운이 나에게도 오다니,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기회를 놓칠 세라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동영상을 합쳐 2백컷을 찍었다.


 덕분에 소중한 경험과 자료를 얻었다. 하지만 아쉬움도 크다. 사흘을 더 그곳을 찾고도 어미가 먹이주는 장면은 찍지 못한 것이다. 첫날의 끔찍함 때문인지 그날 이후 나만 나타나면 처절한 CALL음을 내며 도무지 촬영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를 보면 누룩뱀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결국 연민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우리 생태계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누룩뱀의 포식장면, 그 생생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으니 여간 뿌듯한 게 아니다.

 
   
 
   
 
산야를 다니다 보면 돌연 믿기지 않는 '실제 상황'을 만나게 된다. 황소개구리도 아닌 토종 개구리가 저보다 큰 무자치를 물고 발버둥치고 있거나 물고기인 동사리가 살모사와 입을 마주 문채 나뒹굴고 있는 모습, 또 유혈목이가 천적인 백로와 왜가리의 목을 감고 사생결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 등 가히 기적이라 할만큼 황당한 사건이 생태계서 벌어지곤 한다.

어찌보면 먹잇감(피식자)의 반란 같기도 하고 약자의 최후 발악 같기도 한 이광경. 하지만 포식자의 입장에선 그들 지위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치욕의 순간이다. 어쨌거나 서로가 생과 사를 걸고 벌이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싸움을 보노라면 이 세상 생명체들이 얼마나 자신의 생명에 집착하는 지를 다시금 생각케 한다.

그렇다면 이들 싸움은 어떻게 끝날까. 대부분 먹이사슬의 상위에 있는 포식자가 이기는 경우가 많으나 간혹 양쪽 모두가 죽고 마는 극한상황까지 벌어진다. 반면 약자인 피식자가 이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설령 이긴다해도 목숨만 부지할 뿐 상대를 집어삼키진 못한다.

비슷한 일이 곤충세계서도 일어난다. 생태계내에서 강자인 말벌이 꿀벌을 공격했다가 화가 난 꿀벌들의 역습으로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는 경우가 그 예다. 이 경우도 말벌은 죽지만 타격은 꿀벌들에게도 만만찮다. 강한 턱과 이빨을 가진 말벌이 순순히 당할 리 없다. 필사적으로 대항한다. 그 결과 싸움이 끝난 자리엔 말벌의 사체 외에도 꿀벌의 사체 또한 부지기수다.

생태계내 먹잇감의 하극상(?)은 이렇듯 희생을 가져온다. 아니 그 희생은 이미 예견된 결과다. 생태계에는 그만큼 비정한 먹이사슬의 법칙이 있다. 피식자는 포식자의 섭식활동에 결과적으로 순응토록 돼 있다. 다만 쉽사리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생존경쟁을 벌이고 필사의 저항을 할 뿐이다. 그 생존경쟁과 저항은 양쪽 모두를 진화하게 하는 모티브가 된다. 이것이 생태계다.

만일 동물계의 먹이사슬에 인간이 끼어들어 한 동물의 먹이체계를 뒤바꿔 놓으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초식성 동물에게 육식성 먹이를 먹도록 강제한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경우가 다 그런건 아니지만 지금 우린 그 엄청난 결과를 '실제 상황'으로 목격하고 있다. 다름아닌 광우병 쇠고기를 둘러싼 작금의 상황이 그 답을 던져주고 있다.

생각해 보자. 이미 알려진 바대로 광우병의 발병 원인은 근본적으로 소의 먹이(사료)에 있다. 20여년 전부터 영국 등지서 젖소의 우유 생산량을 늘리고 비육우를 빨리 살 찌우기 위해 양과 소의 장기, 뼈, 살코기 등을 사료원료로 이용한 게 단초가 된 것이다.

초식성인 소에게 단백질을 공급한답시고 육식성 사료를 섞어 먹인 것이 화근이 돼 결국 광우병이란 해괴망칙한 병을 낳고 말았다.

그결과 전 세계는 광우병의 공포에 휩싸이게 됐고 우린 지금 그 병의 위험성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문제로 전국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촛불시위의 피킷마다 '미친소=미친정부'라며 아우성이다. 이젠 해외 동포들까지 나서 우리의 '미친 정국'을 우려하고 있다.

자고로 먹는 것을 가지고 장난하지 말라 했다. 개도 먹을땐 건드리지도 말라 했잖은가. 그만큼 먹을거리는 인간이나 동물에게 있어 중요하다는 얘기다. 장난도 말고 건드리지도 말라는 건 곧 신뢰성과 안전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제 아무리 약자인 피식자라도 열 받고 궁지에 몰리면 반격하는 게 자연계다. 인간세계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자신의 먹을거리가 누군가에 의해, 그리고 억지에 의해 신뢰성과 안정성을 잃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건 생존의 문제다. 그 어찌 분노가 극에 달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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