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잡던 시절의 작은 소망을 생각하며

 

 

나 어릴때 작은 소망은/ 계곡에 숨어있는 개구리 잡아 노랗게 구워서/ 다리는 뚝 떼어 소금찍어 내가 먹고/ 검은 알은 엄마 드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노는 것이었다네/ 나 어릴때 작은 소망은/ 진달래 먹고 찔레 꺾어먹으며/ 냇가에 나가 버들피리 꺾어불며/ 가재와 미꾸라지 잡아 고무신에 담고/ 다슬기 잡으며 노는 것이었다네….
강순병시인의 '작은 소망'이란 시의 일부다.

 

그렇다.

1960~70년대만 해도 이 땅의 코흘리개 아이들은 무시로 들과 산 찾아 개구리 잡고 꽃과 열매 따 먹으며 놀았다. 그게 생활이요 삶이었다. 지금이야 먹을거리가 지천하고 놀거리도 많지만 그 때만 해도 자연이 곧 주전부리 창고요 놀이터였다.

우선 봄이 되면 너도나도 산을 찾았다. 칡뿌리 때문이었다. 굵직한 알칡을 토막내 주머니에 잔뜩 넣고는 턱이 얼얼하도록 씹고 다녔다.

개구리잡기도 성행했다. 장순병시인은 계곡에 사는 산개구리 잡아 구워먹는 게 작은 소망이었다고 했지만 그 시절 흔히 잡아먹던 개구리는 논과 개울가에 살던 참개구리였다. 지금은 참개구리든 산개구리든 함부로 잡아먹을 수 없지만 그 땐 물고기잡이처럼 예사로 여겼다.
진달래와 찔레순,삘기(띠의 어린순),아까시꽃,감꽃도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의 주전부리였다. 또한 꿀맛이 일품인 원추리와 꿀풀, 한번 손 댔다 하면 입주위가 새까맣도록 따먹던 버찌와 오디, 손가락에 가시 찔리는 것도 잊은 채 정신없이 따먹던 산딸기와 멍석딸기, 도토리 익을 무렵이면 누렇게 익어 알이 빠지던 개암, 늦서리 내려야 쭈글쭈글 익던 고욤도 잊지못할 계절의 별미였다.

모내기철이면 으레 써레질하는 논으로 달려가 올미 주워먹고 여름이면 저수지에 들어가 마름 따다 삶아먹는게 일이었다. 또한 동네앞 논둑에선 동무들과 쭈그리고 앉아 껌풀(떡쑥) 뜯어 한입 물고는 "껌이 되라" 주문하며 오물오물 씹던 빛바랜 추억도 있다.
뿐만 아니다. 소나무 속껍질인 송기를 먹는다고 어린 가지 꺾어 겉껍질 벗긴 다음 앞니에 대고 하모니카 불듯 좌우로 빨고 다녔으며 무의 꽃대인 장아리를 먹기 위해 무밭을 기웃거리고 아까시나무 새순을 잘라 입에 물고다니기도 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보리와 밀에 생긴 깜부기병을 무슨 귀한 먹을거리인 양 보는 대로 입에 털어넣고는 볼에 묻은 깜부기가루가 우스워 깔깔대기까지 했다. 또 가을이면 벼메뚜기 말고도 풀무치,방아깨비 잡아 구워먹고 벌집 따다가 애벌레를 볶아먹어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던 게 그 시절이다.

 

40~50년 전의 일을 알지 못하는 세대들은 웬 뜬금없는 얘기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농작물 외에는 웬만한 건 대부분 자연에서 구했던 그 시절엔 늘 먹고 겪었던 실제 상황이다. 세월이 바뀌고 먹을거리,놀거리가 풍부해진 오늘날 굳이 그 옛날의 먹을거리,놀거리로 되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 때 그 시절 어린이들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며 그곳에서 먹을거리,놀거리를 스스로 찾아냄으로써 자연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즐겼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돈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맛있는 음식과 놀이기구를 즐길 수 있는 요즘 어린이들. 하지만 개구리를 보면 외계동물 만난 것처럼 자지러지고 산에 가면 산딸기를 보고도, 들에 가면 오디를 보고도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런 어린이들이 허다하기에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부모들이여, 요즘의 모광고처럼 학부모만 되려 하지 말고 하루만이라도 진정한 부모가 되어 자녀들과 함께 자연을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자연처럼 있는 그대로를 깨우쳐주는 것도 없쟎은가. 지금 산야엔 오디,산딸기같은 자연의 메뉴가 그득하다.(2010년 6월 15일)

선유동에 새겨놓은 자랑스러운(?) 이름들

 

괴산 선유동을 찾았다. '계곡의 잠수부' 물까마귀를 촬영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새끼 먹이주는 장면을 촬영하다 중간에 어떤 정신나간 행락객이 벌거숭이 새끼들을 몽땅 가져가는 바람에 찍지 못한 뒤 일년을 별러왔다.


봄볕도 봄볕이었지만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산벚나무의 연분홍과 또 이제 막 새이파리를 내밀기 시작한 온갖 나무의 연두색이 어우러져 더없는 호시절을 시위하고 있었다.

도시 보다 늦게 피어난 개나리며 진달래가 계곡으로 이어진 도로변과 산자락을 온통 딴세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난 겨울 눈 덮인 고갯길을 아찔한 가슴으로 넘나들땐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 모습인가.

때가 되니 앞 다퉈 제 존재를 알리는 만물들의 생명력에 새삼 감동이 일 즈음, 계곡 왼편으로 선유동문(仙遊洞門)이란 음각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안쪽으로 구곡이 있고 이곳이 관문이란 뜻이다.

약 500년전 퇴계 이황이 인근에 들렀다가 절경에 반해 장장 아홉달을 머물면서 구곡(九曲)을 설정하고 경승을 노래했던 곳이 선유동구곡이다. 18세기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어떤 사람은 선유동을 금강산 만폭동과 비교해 웅장한 점은 조금 모자라지만 기이하고 묘한 것은 오히려 낫다고 한다. 대개 금강산 다음으로 이만한 수석(水石)이 없을 것이니, 당연히 삼남 제일이 될 것이다"라고 평했던 곳이다.
선유동이란 이름 자체가 신선이 노닐던 곳(신라 최치원선생이 이름 지었다고 함)인 만큼 각 곡에 깃든 전설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신선들이 금단을 만들어 먹었다는 연단로(4곡)와 나무꾼이 나무 하러 가다가 바위 위에서 신선들이 바둑 두며 노니는 것을 구경하는 동안 도끼자루가 썩어 없어졌다는 난가대(6곡), 또 다른 나무꾼이 바둑 두는 신선들을 구경한 뒤 집에 돌아와 보니 5대손이 살고 있더라는 기국암(7곡), 퉁소를 불며 달을 희롱하던 신선이 머물렀다는 은선암(9곡) 등이 그것이다.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바둑 구경했다는 그 나무꾼의 몰입(?)을 떠올리며 열심히 물까마귀 둥지를 찾고 있는데 커다란 바위벽 중간에 심상찮은 이끼 덩어리가 매달려 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나 다를까. 물까마귀 한 마리가 들어앉아 알을 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낯선 방문객이 궁금했던지 머리를 한번 내밀었다가 들이밀고는 특유의 흰 눈꺼풀을 연방 깜박였다.


부화할 때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되돌아 나오는데 꺼림칙한 글씨들이 발목을 잡았다. 각 곡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면 옆에 버젓이 사람 이름들을 새겨 놓은 것이다. 경치 좋은 곳에 놀러와 술 한잔 걸치니 엉뚱한 생각들이 들었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서라도 천년세세 남기고픈 헛된 욕심이 발로했던지, 정으로 아주 깊숙이 파놓았다. 큰 글씨는 무려 한 아름이나 됐다. 공들인 글씨체로 보아 짧은 시간에 새긴 것이 아니다. 글자마다 끼어 있는 이끼가 세월까지 말해주고 있었다.


이름을 이곳저곳 헤아려보는 동안 자신의 직위까지 새긴 글자가 눈에 띄었다. 관찰사 조○○. 18세기의 문신이다. 먼길 힘들여 왔으니 떡하니 이름을 남겨두고 싶었나 보다. 요즘 같으면 꿈도 못 꿨을 텐데. 바위 높이와 글씨의 정교함으로 보아 기다란 사다리와 솜씨있는 석수(石手)가 동원됐을 것이니 행차 전에 아예 준비했던 건 아니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멋진 시 한 수였다면 그럭저럭 이해라도 했을 텐데. 당시 명을 받아 '높으신 분들' 이름을 새겨야 했던 석수들과 뒷일을 맡았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구곡을 빠져나오는 내내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청남대 초입 대청호변엔 한반도 역사의 뿌리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유적지가 있었다. 이름하여 두루봉 동굴이라 하는 것인데, 지금은 동굴은커녕 산 밑자락까지 파헤쳐져 수십길 낭떠러지로 변한 흉물의 역사터다. 하지만 이 유적이 갖는 중요성 때문에 현행 교과서에 이름이 번듯하게 올라있는 '실체없는 선사유적지'다.

이 동굴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해는 1976년. 당시 모 광산이 석회암 채취를 위해 발파하던 중 예사롭잖은 동물뼈가 나와 충북대와 연세대 박물관이 긴급 발굴에 착수, 1983년까지 숱한 유물을 찾아냈다. 특히 이곳에서는 4만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에 살았던 두명의 사람뼈(그중 하나는 5세 가량의 '흥수아이'로 명명)와 동물뼈, 각종 석기 등 그 시대 생활상과 환경 생태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발굴 종료 25년이 지난 오늘 이 동굴을 새삼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이 동굴서 발견된 진달래과의 꽃가루 때문이다. 발굴 당시 이 동굴에선 3백43개의 꽃가루가 검출됐는데 유독 진달래과 꽃가루만이 굴 입구서 1백57개나 발견됐다.

진달래과는 산성토양을 좋아하는 식물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알카리성 토양인 석회암 동굴에서, 그것도 굴입구서 꽃가루가 집중 발견된 것일까.

발굴조사자였던 충북대 이융조교수는 "그 시대 사람들이 이미 꽃의 아름다움을 알고 주거지를 꾸미기 위해 일부러 갖다놓은 미의식"이라며 "이로 보아 이들 구석기인은 세계 최초로 꽃을 생활화한, 이른바 '꽃을 사랑한 첫 사람들(the first flower people)'로 생각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흥수아이를 포함한 두루봉 구석기인들은 큰원숭이, 쌍코뿔이, 옛코끼리, 크로쿠타, 하이에나 같은 들짐승이 우글거리는 삶의 전장 속에서도 꽃을 꺾어다 집앞을 장식하고 감상하는 심미안과 여유를 가졌던 것이다.

혹자는 웬 뜬금없는 아프리카 동물이냐고 하겠지만, 실제 발굴에서 이들 짐승뼈가 상당수 나왔다. 그만큼 그 시대엔 따뜻했고 동물상도 달랐다.

두루봉 구석기인이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란 건 아직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이 두루봉을 찾았던 것은 피난처인 동굴과 함께 인근에 금강이란 물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강이 곧 생명수요 삶의 터전이었던 '과거의 금강 사람들'이다.

강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금강을 젖줄 삼아 삶의 뿌리를 이어가는 이 시대 이 지역 사람들 또한 '오늘의 금강 사람들'이다.

바야흐로 꽃 피는 계절 4월을 맞아 온갖 꽃들이 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벚꽃과 개나리, 목련이 피고지는가 싶더니만 시골 산자락에도 각종 제비꽃과 괴불주머니, 현호색, 양지꽃 등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진달래 역시 산 양지쪽 능선을 따라 한창 붉은 물감을 흩뿌리고 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더니 하루가 다르게 산빛이 변한다. 말 그대로 만화방창(萬化方暢)이니 화란춘성(花爛春盛)이다.

먼 옛날 두루봉 사람들이 사냥갔다 돌아오는 길에 진달래꽃을 한아름 꺾어나르던 시기도 요즘 같은 시기였으리라. 단지 기후가 다르고 생태계가 달라 당시 진달래가 어떤 종이고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할 뿐이다.

야생상태서 그날그날 의식주를 해결하느라 고단한 삶을 살았을 과거의 금강 사람들. 그러면서도 봄꽃 한아름에 환한 미소지으며 내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을 그들. 그들이 남긴 삶의 흔적은 온 데 간 데 없는데 그 옆으론 오늘의 금강 사람들이 오염시킨 강물만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진달래 흐드러진 언덕너머로 요절한 흥수아이의 일그러진 잔영이 아지랑이처럼 현기증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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