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잡기 지혜

지금까지의 설명은 대부분 곤충의 ‘살아남기 전략’, 즉 이 지구상의 생태계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아 종(種)을 유지해 가고 있는가 라는 종 특유의 생존전략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곤충의 몸 구조 자체가 복합적인 전략무기라는 것에서부터, 뛰어난 위장술과 의태(擬態), 화려한 체색 뒤에 숨겨진 비장의 무기 등이 모두 그들의 생존전략과 관계된 특징들이요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들의 탁월한 지혜와도 연관이 있는 요소들이다.

 

비록 인간(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기주의)에 의해,  ‘벌레’라는 하찮은 존재로 비하돼 이 땅 위에 존재해 오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방법을 터득하고 발전시켜 숭고한 대내림의 소임을 계속해 오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사고(思考)가 없는 미물이 무슨 지혜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좀 더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거기에는 분명 자연계에 내재된 특별한 지혜가 깃들어 있음을 실감케 한다. 아니 어떤 것은 오히려 인간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오묘하고 신비한 것도 있다.

 

다음에 설명하는 곤충들의 특별한 ‘먹이잡이 방식’도 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먼저 기막힌 모래함정을 만들어 먹이감을 낚아채는 ‘개미귀신’을 보자. 개미귀신이란 명주잠자리의 애벌레를 일컫는 말인데 그들의 주요 먹이감인 개미를 ‘귀신이 곡할 정도의 교묘한 방법으로 잡아먹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개미귀신이 사는 장소는 습도가 낮은 모래밭으로, 애벌레 스스로 깔때기 모양의 함정을 판 후 그곳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개미 등을 잡아먹고 사는 독특한 곤충이다. 특히 개미귀신은 자연물인 모래가 조그만 진동에도 쉽게 허물어지는 특성을 이용해 먹이를 잡아먹는다는 점에서 지혜가 남다른 명석한(?) 곤충이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미귀신이 파 놓은 모래함정은 미세한 모래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아주 작은 개미라 할지라도 일단 그곳에 빠지기만 하면 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계곡’이다. 허우적거릴수록 자꾸만 모래가 허물어지는 데다 깔때기 가장 밑 부근의 모래 밑에 숨어있던 개미귀신이 몸부림치는 먹이감을 향해 모래를 흩뿌리는, 소위 양동작전을 쓰기 때문에 결국은 잡아먹히고 말게 된다.

 

개미귀신은 함정을 만드는 재주도 좋지만 그곳에 먹이감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진동을 통해 잽싸게 알아차리는 예리한 감지력도 겸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걸려든 먹이감을 재빨리 기절시켜 체액을 빨아먹는 강한 입 구조도 갖고 있다.

 

개미귀신이 먹이감을 잡는 장면을 관찰하기 위해 가느다란 풀잎으로 모래함정 안을 살살 건드리면 재미난 현상이 일어난다. 즉, 풀잎의 미세한 진동을 감지한 개미귀신은 처음엔 죽은 듯 가만히 기다렸다가 풀잎(진동)이 어느 정도 함정 밑바닥에 다다랐다 싶으면 이내 모래를 흩뿌리며 나타나 갈고리 모양의 이빨로 공격한다.

 

이때 개미귀신이 나타나는 방향과 속도는 매우 정확한데, 더욱 놀랄 일은 한 두 번 속은 개미귀신은 풀잎의 진동이 가짜라는 것을 금새 알아차리고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영리한(?) 곤충을 그 누가 미물이라고 하겠는가.

 

‘개미귀신과 모래함정’

명주잠자리의 애벌레인 개미귀신은 잘 허물어지는 모래의 성질을 이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곤충’으로서 자신이 파놓은 모래함정에 개미가 빠져 허우적거리면 잽싸게 공격해 체액을 빨아먹는다./자연닷컴

 

곤충 가운데에는 자신의 보호색을 이용해 풀잎 등 자연물의 뒤에 교묘히 몸을 숨기고 있다가 먹이감이 다가오면 잽싸게 달려들어 잡아먹는 무리들도 있다. 보호색은 천적의 눈을 속이는 데도 유용하지만 반대로 그들의 먹이감을 속이는 데에도 유용한 것이다.

 

곤충 세계의 무법자로 알려진 사마귀는 자신의 몸색깔과 비슷한 풀잎 뒤에 숨어있다가 지나가는 먹이감을 재빨리 낚아채곤 하는데 사마귀는 특히 먹이감을 홀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좌우로 흔드는 곤충으로도 유명하다.

 

‘간 큰 잠자리’

곤충계의 무법자로 잘 알려진 사마귀는 자신의 보호색을 이용하거나 몸을 좌우로 흔들어 먹이감을 유인하는 습성이 있다. 사진은 죽은 듯 가만히 있는 사마귀를 휴식처로 착각해 등 뒤에 내려앉은 위험천만한 잠자리 모습./자연닷컴

 

일부 곤충들은 자신의 유충을 위해 먹이감을 사냥하는 것들도 있다.

 

실례로 나나니벌이란 곤충은 산란기가 되면 나방 애벌레를 독침으로 마비시킨 후 자신의 집으로 물고와 그곳에 알을 낳아두는데 이는 얼마 후 태어날 자신의 애벌레가 그것을 먹고  자라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다.

 

나나니벌의 이 같은 ‘큰 뜻’을 잘못 이해한 옛 어른들은 나나니벌이 다른 곤충의 애벌레를 자신과 닮게 하는 신통력이 있다고 믿어 이름도 ‘나나니벌’이라 붙인 것이다. 그들이 보기엔  굴로 들어가는 나나니벌이 분명 다른 종류의 애벌레를 물고 들어갔는데 나중엔 그 애벌레 가 나나니벌이 되어 나오기에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실제 나나니벌이 다른 벌레의 애벌레를 물고 들어간 구멍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보면 나나니벌이 내는 소리가 마치 “나 닮아라 나 닮아라” 하는 소리로 들릴 때가 있다.

 

조롱박벌이란 곤충도 배짱이와 같은 먹이감을 잡은 후 집으로 물고가 그곳에 알을 낳는 습성이 있는데 이 또한 자신의 유충을 위한 모성애의 지혜이다.

 

이밖에 나무좀류의 어떤 종은 자신의 유충을 위해 나무구멍 안에 균을 배양하는 믿지 못할  곤충도 있다.

 

곤충 세계에는 이처럼 인간이 잣대로 지어낸 소위 ‘지혜’라는 말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 못할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 양식을 나타내는 무리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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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이변과 곤충

 

야생곤충의 생활사를 관찰하다 보면 뜻밖의 상황을 접하는 경우가 많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알이 부화시기가 지났어도 부화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든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종이 태어나 눈을 의심케 하기도 한다. 앙증맞게 생긴 어린 사마귀의 부화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몇날며칠을 기다렸건만 도대체 새로운 생명의 기미가 보이질 않아 알집을 헤집어 봤더니 속이 텅 비어 있다거나 가까스로 새 생명이 태어나긴 했는데 종이 다른 사마귀수시렁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그런 사례다.
또 애벌레에서 성충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돌연 죽음을 맞는다든가 반쯤 날개돋이한 상태에서 도중에 허물벗기를 멈추거나 날개돋이는 마쳤으나 상태가 불완전해 곧바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다. 오랜 기간 애벌레로 땅속 생활하다가 어렵사리 땅밖으로 기어나와 성충이 되려던 순간 훼방꾼인 개미를 만나 졸지에 숨을 거두는 매미 애벌레와 반쯤 날개돋이한 채 미처 배부분을 탈피 못해 풀이삭에 매달린 채 죽는 잠자리 애벌레, 머리와 몸통은 멀쩡하게 태어났지만 속날개가 불완전해 가뜩이나 짧은 성충 시기를 더욱 앞당겨 마감하는 풍뎅이가 그 같은 경우다.
그런가 하면 날개돋이를 마쳐 이제 막 첫 비행을 앞둔 순간 천적에게 속절없이 잡혀 먹히는 불운도 있다. 알-애벌레-번데기 과정을 거쳐 날개돋이까지 마쳤으나 날개를 말리는 과정에서 돌연 천적인 사마귀 눈에 띄어 당랑권의 희생이 되는 나비들이 그 예다.
야생곤충의 세계는 이처럼 삶 자체가 모험이요 각 단계의 성장 과정마다 위험과 역경의 연속이다. 1초 앞을 장담치 못하는 그 숱한 위험과 역경을 벗어나 성충으로서의 대임(종족 번식)을 마쳐야 비로소 한 세대의 생활사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러나 곤충의 세계에도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이 있다. 진화하는 과정에서 유전자에 새겨진 지혜다.
호랑나비를 예로 들어보자. 짝짓기를 마친 암컷은 부지런히 탱자나무나 산초나무 등의 운향과 식물을 찾는다. 알을 낳기 위해서다. 굳이 그들 나무를 찾아가는 것은 알에서 태어날 애벌레를 위한 배려다. 호랑나비 애벌레는 그들 나무 이파리 외엔 절대 먹질 않는다. 알을 낳아도 잎 뒷면에 붙인다. 천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다. 생존 전략은 그 뿐만이 아니다. 부화한 애벌레는 1령에서 4령까지 새똥 같은 위장색을 띤다. 5령도 푸르스름한 보호색을 띤다. 또 어느 정도 자란 애벌레는 위기가 닥치면 머리에서 노란 뿔 같은 것을 내밀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번데기로 변할 때도 한 가닥의 실을 토해내 자신의 몸을 지탱할 수 있도록 나뭇가지에 붙잡아 맨다. 마치 아기를 업을 때 포대기를 둘러매는 모양새다. 기막힌 지혜다.
창과 방패의 논리 같은 곤충의 세계는, 그래서 들여다 보면 볼수록 신비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러한 신비와 지혜도 앞서 말한 뜻밖의 상황에선 그저 무색할 뿐이다. 더구나 기상악화와 같은 악조건을 만나게 되면 더더욱 속수무책이다. 올해처럼 큰비와 거센 바람이 잦을 경우엔 그야말로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사람도 맥없이 당하는데 그들이라고 온전할 수 있겠는가. 재앙 수준의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곤충알에 내리치는 빗방울 하나의 위력이 사람 머리위로 4륜구동 승용차 한 대가 날아드는 것과 같은 정도이니 요즘 끊임없이 내리붓는 물폭탄 아래선 어떻겠는가.
가는 곳마다 부화 안 된 각종 곤충알과 탈피 또는 날개돋이 도중에 죽거나 불완전하게 우화해 힘겹게 살아가는 곤충들이 유난히 많은 올해. 곤충의 세계에도 지난 겨울의 혹한 이후 계속되고 있는 기상이변의 여파가 '현재진행형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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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뎅아 풍뎅아 빙빙 돌아라!

 

 

"풍뎅아 풍뎅아 마당 쓸어라/ 풍뎅아 풍뎅아 빙빙 돌아라…." 가사와 음이 생각날둥말둥 아스라이 맴도는 노래, 어린 시절 여름이면 유행가처럼 불러댔던 노래. 여기에 또 이런 노래도 있었다. "쓸어라 쓸어라 마당 쓸어라/ 손님들 들어온다 마당 쓸어라…."
이른바 풍뎅이 노래들이다. 지역에 따라선 풍뎅이를 풍딩이, 핑등이, 핑겡이로 불렀으니 명칭만 달랐을 뿐 가락과 장단은 거의 비슷했으리라.
이 노래들은 놀이 동요다. 어린이들이 풍뎅이를 잡아 가지고 놀면서 부르던 노래다. 하지만 그 이면엔 섬뜩함이 있었다. 오늘날 정서로는 동물학대다.
우선 풍뎅이를 잡으면 다리부터 떼어내고 머리를 두세 바퀴 돌렸다. 그런 다음 땅바닥에 뒤집어 놓고는 이내 손뼉과 바닥을 치면서 경쟁하듯 노래를 불러댔다. "풍뎅아 풍뎅아 빙빙 돌아라~." 졸지에 다리 잘려지고 목 돌려진 풍뎅이는 그저 본능적으로 날갯짓하면서 빙글빙글 돌아댔다. 여기서 빙글 저기서 빙글 정신없이 돌아댔다.
문제는 그 다음. 다리 잘리고 목까지 돌아간 풍뎅이가 무한정 돌리는 만무. 한 번 용 쓰던 풍뎅이가 멈추면 재빨리 2단계 수순으로 들어갔다. 다시 힘 내라며 손뼉과 바닥을 연방 쳐대고, 그래서 안 되면 입으로 훅~훅 불고, 그래도 안 되면 남은 겉날개마저 떼어내 결국 돌게 만들었다. 이젠 "쓸어라 쓸어라 마당 쓸어라~."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잔인한 짓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친구들과 만나면 으레 하던 장난이었으니 풍뎅이는 늘 애먼 희생물이었다.
희생물이 어디 풍뎅이 뿐이었는가. 잠자리는 잡아서 시집 보낸다며 꼬리를 잘라내고 풀이삭을 끼운 뒤 괜히 날려보냈다. 그 때 잠자리를 잡으면서 불렀던 노래가 "잠자리 동동 파리 동동/ 멀리멀리 가면은 똥물 먹고 뒈진다~"였다. 시집이 아닌, 되레 황천길로 보내면서 똥물 먹고 뒈진다고 엄포 놨으니 놀이치곤 너무했던게 아니었나 싶다.
또 찝게벌레로 불렸던 사슴벌레는 잡는 족족 싸움꾼을 만들어 대리만족했고, 방아깨비와 풀무치 역시 걸핏하면 잡아 괜한 시달림을 줬다. 요즘이야 다양한 장난감들이 나와 있지만 30~40년 전만 해도 주변의 곤충과 초목들이 그것을 대신했다. 그만큼 흔하기도 했다. 동물학대란 말은 나돌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그런 놀이들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바야흐로 곤충의 계절 여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숲은 숲대로, 들과 하천변은 그곳대로 온갖 곤충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일부 곤충, 특히 애벌레 시절의 곤충은 흔히 '벌레'라 부르지만 보는 눈에 따라선 그것을 그저 징그럽고 흉한 벌레로 볼 수도 있고 신비로운 생명체로도 볼 수 있다.
우리 주변의 곤충들은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종에 따라 즐겨 먹는 먹이와 자주 찾는 지역이 따로 있다. 풍뎅이나 사슴벌레는 주로 참나무 숲속을 서식 근거지로 삼는 반면 호랑나비는 인가 탱자나무를, 제비나비는 산길 옆 산초나무를 좋아한다.
종마다 애벌레와 성충 시기가 따로 있듯 하루 중에도 활동하는 시간이 각기 다르다. 나비·잠자리·매미류는 주로 한낮에, 풍뎅이·사슴벌레·나방류는 대부분 밤에 나타난다.
남은 휴가철, 더욱이 어린이가 있는 가정이라면, 물놀이 피서나 명승지 여행도 좋지만 가까운 산야로 나가 곤충 체험을 하면 어떨까 싶다. 낮과 저녁, 밤 언제든지 좋다. 직접 잡아 느껴보게도 하고 잡은 것을 도로 놔주게도 함으로써 생명의 소중함과 신비로움을 깨닫게 하면 좋을 성 싶다. 예전의 '쓴 추억들'을 기억하는 가장들에겐 더욱더 권하는 바다. 다만 이번엔 노래만 부르고 실제 놀이는 흉내만 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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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를 영어로 '드레곤플라이(Dragonfly)'라 한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용(龍)처럼 생긴 파리, 즉 '용파리'가 된다.

서양사람들의 생각에 잠자리가 마치 파리처럼 허물을 벗고 용처럼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붙인 이름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서양인들의 이 같은 시각을 현대 생물학적 관점으로 재해석할 때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잠자리는 탈바꿈할 때 허물을 벗긴 하지만 파리처럼 알-애벌레-번데기-성충 시기를 모두 거치는 완전탈바꿈을 하는 게 아니라 애벌레에서 번데기 시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성충이 되는 이른바 불완전탈바꿈을 하는 곤충이란 사실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잠자리를 드래곤플라이로 지칭하는 서양식 표현에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두 개의 겹눈에 1만~2만8천 개나 되는 수많은 낱눈을 가진 잠자리는 그 생체적 특성상 파리와 같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물체에 매우 둔감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용처럼 날쌘 동작을 하다가도 사람들이 천천히 다가가 손으로 낚아채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금새 포로가 되는 약점을 감안하면, 그들이 잠자리를 용파리로 부르게 된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잠자리는 전 세계에 약 5천 종, 우리 나라에 약 90종 가량 서식하고 있는 흔한 곤충이다.

그러나 이처럼 흔한 곤충인 것과는 달리 정작 그들의 생활사에 대해서는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두 마리의 잠자리가 앞 뒤로 붙어 다닐 때 사람들은 흔히 교미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교미를 하기 위한 전위(前爲) 행동, 즉 밀월여행을 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 행동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나뭇가지나 풀잎에 앉아 정지상태로 교미를 한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마리의 잠자리가 붙어 있을 때 앞의 것이 암컷이고 뒤의 것이 수컷인 줄 아는 데 실은 그렇지 않다.

잠자리 수컷은 산란기가 되면 배우자가 될 암컷을 찾아다니다가 암컷이 자기 영역 안에 들어오면 재빨리 알아채고 즉시 뒤꽁무니에 돋아있는 집게모양의 돌기로 암컷의 머리채를 쥐어잡고 사랑비행을 한다.

예전에 짓궂은 아이들이 잠자리를 잡아 꽁지를 뗀 후 지푸라기나 풀줄기를 꽂아 날려보내면서 엉뚱하게도 '시집보낸다'고 했는데 이는 시집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으라고 황천길로 보낸 것이며, 실제 시집가는 잠자리는 수컷에게 머리채 잡힌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사랑의 포로가 된 암컷인 것이다.

 

매년 여름이면 새빨간 모습으로 하늘하늘 허공을 간지르며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를 볼 수 있다. 그 귀엽게 생긴 고추잠자리를 바라볼 때마다 어릴 적 쑥부쟁이 꽃을 꺾어들고 빙빙 돌리면서 "나마리 동동/ 파리 동동/ 멀리멀리 가면은/ 똥물 먹고 죽는다"(나마리는 잠자리의 방언)는 전래동요를 부르며 온 종일 헛땀을 흘리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 때만 해도 잠자리를 갖고 노는 일이 그렇게도 재미있고 즐거웠는데 요즘 아이들은 도대체 그런 재미를 모르고 자라는 세상이니, 잠자리가 행복해진 것인지 아니면 이 시대 어린이들이 불행해진 것인지 쑥부쟁이 꽃 돌아가듯 머리 속이 온통 빙빙 돈다.

 

이번 주말엔 그 빙빙 도는 머리도 식히고 신선한 공기도 마실 겸 가족들과 함께 가까운 들판에 나가 잠자리 좀 잡아 보면 어떨까.

까치발을 하고 아주 천천히, 떨리는 손을 집게 모양한 채 살금살금 다가가, 잡을 땐 아주 잽싸게…

그런 후엔 잡은 잠자리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다시 살~금 살~금 추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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