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출현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수렵(사냥)이다.

 

그 만큼 수렵은 고대인들에게 있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절대적인 생존수단이었다.

 

고대인 스스로 들짐승을 잡아먹지 못하면 굶어죽거나 거꾸로 그들의 먹이가 될 수 있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이 짐승을 잡는 방법, 즉 수렵방법이요 사냥도구였다.

 

따라서 수렵은 야생열매를 따먹는 채집활동과 함께 가장 오래된 인류의 생존수단이었다.

 

그러나 인류문명이 발달하면서 수렵의 가치는 절대적인 생존수단에서 점차 놀이 또는 무인들의 심신단련을 위한 방법으로 변모해갔고 또 한편으로는 약렵(藥獵:녹용 등을 얻기 위한 사냥)과 같은 돈벌이 수단으로 자리잡아 갔다.

 

역사적 기록으로는 기원전에 이미 그리스에서 왕족이나 무인계급들이 토끼나 멧돼지 사냥을 하였다고 전하며 중국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1200년경에 각각 매사냥을 했다고 전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 시대에 왕이 관원들과 함께 수렵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이 무예를 익히고 심신을 단련하는 수단으로 산천을 돌아다니며 수렵을 즐겼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왕이 수렵하는 것이 연례행사로 자리잡았으며 특히 매를 기르고 훈련하는 응방과 응사까지 두어 사냥에 나섰다.

 

수렵은 사용하는 도구에 따라 전통적으로 총기수렵과 그물수렵, 함정수렵 등으로 나뉘는데 그 종류별로 각기 지켜야할 엽도(獵道)가 있어 이를 준수해가며 짐승을 잡아왔다.

 

예를 들어 총기수렵인 경우 새끼를 데리고 있는 짐승은 절대로 쏘지 않아야 하며 땅에 있는 날짐승은 하늘로 날린 다음 쏘는 것이 하나의 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엽도도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잊혀져 오늘날에 와서는 서치라이트에 불법 개조된 인마 살상용 총기까지 동원한 싹쓸이식 남획이 일년 내내 판을 치고 있고 겨울철만 되면 온갖 산야에 독극물과 올무, 덫이 즐비하게 놓여져 들짐승을 옴쭉달싹도 못하게 하고 있다.

 

매년 봄이 되면 들짐승들은 새끼를 낳는다.

 

그러나 많은 짐승들이 지난 겨울을 나면서 인간에 의해 짝을 잃었거나 상처를 입은 까닭에 새끼를 낳지 못하고 방황하기 일쑤다.

 

인간의 보신주의가 휩쓸고 간 자리에 '겨울의 상처'만 깊게 남아 들짐승들로 하여금 슬픈 계절을 맞게 하고 있는 것이다.

 

갈 길은 멀구요 행선은 더디니~

 

어린 시절 매를 길러본 적 있다. 지금이야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불법행위지만 그 당시엔 야생의 매를, 그것도 어린 새끼를 내려다 기르는 일이 그리 별쭝맞은 짓이 아니었다.
매라고 해야 붉은배새매 아니면 황조롱이가 대부분이었으나 두 종 모두 매라고 불렀다. 맹금류인 두 종이 분류학적으로 서로 다른 무리란 걸 안 건 먼훗날의 일이었다. 붉은배새매(현재 천연기념물 323-2호)는 수리과이고 황조롱이(천연기념물 323-8호)는 매과로서, 둘은 날개의 생김새가 확연히 달랐다. 수리과인 붉은배새매는 날개 끝이 갈라져 있는 반면 매과인 황조롱이는 날개 끝이 갈라져 있지 않고 길고 뾰족했다. 당연히 나는 모습도 달랐다.


그러나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 식탐이 유난히 많았다. 어릴수록 그랬다. 개구리면 개구리, 쥐면 쥐, 살아있는 것이면 종류 불문하고 잡아다 주는 족족 무섭게 받아 먹었다. 그러니 성장속도도 매우 빨랐다.
또 영리했다. 참새는 물론 박새, 멧새, 딱새, 때까치, 밀화부리, 물총새, 소쩍새, 올빼미, 심지어 쏙독새까지 별의별 새들을 다 길러봤지만 이들 매처럼 영리한 새는 별로 보질 못했다. 우선 사람을 잘 알아봤다. 누가 누군지 신통방통할 정도로 잘도 구별했다. 그 만큼 주인도 잘 따랐다. 하루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5리가 넘는 학교까지 졸졸 따라와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매 하면 지금도 떠오르는 단어가 긴장감이다. 부리부리한 눈, 갈고리 같은 부리, 낫처럼 날카로운 발톱(매류의 속명인 Falco는 낫을 뜻하는 라틴어 Falx에서 유래), 금방이라도 비상할 것 같은 날렵한 날개 등 몸 생김새부터가 늘 긴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야성(野性)까지 강했다. 온갖 정성을 다해 길러 놓으면 십중팔구는 야성을 보이며 배신하기 일쑤였다. 먹잇감도 잘 받아먹고 말을 잘 듣다가도 돌연 집을 뛰쳐나가거나 딴전을 피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게 바로 야생 매의 특성이요 죽기 전까지 버리지 못하는 게 야성이었다.

 


요즘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북한 땅이 있다. 우리측 서해 5도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는 북녘 땅, 바로 장산곶과 사곶, 해주, 옹진반도, 개머리 해안, 무도 등 '연평도 도발'의 근원지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지역이 어떤 곳인가. 예부터 해류의 소용돌이가 심하고 험한 바위와 암초가 많아 해난사고가 유난히 많았다는 곳 아닌가. 해서 바다 쪽으로 가장 튀어나온 장산곶사(長山串祠)에서는 봄·가을이면 으레 제를 올렸고 효녀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다는 전래소설 '심청전'의 배경이 됐던 곳이며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드니~"로 시작되는 몽금포타령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이들 지역, 특히 장산곶과 해주는 '매'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이 지역 매는 특별히 장산곶매라 불리는데 사냥 나가기 전날 밤 자기 둥지를 부수면서까지 부리를 가는 속성이 있다"고 했던 곳이다.

 

그런 곳에서, 정말로 공교롭게도, 포성을 앞세운 긴장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오랫동안 해난사고가 잇따랐던 이유에서일까. 아니면 매의 본고장으로서 매의 못된(?) 습성만 본받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심술궂은 매사냥꾼의 '시치미 떼는 기질'이 남아서일까. 걸핏하면 엉뚱한 행동으로 서해 5도 주민은 물론 우리나라 국민 나아가 전세계인들을 마냥 경악케 하고 있다.
"갈 길은 멀구요 행선은 더디니~." 몽금포타령의 장단은 언제쯤에나 '한반도의 화음'으로 울려퍼질는지. 갈 길은 계속 멀어지고 행선도 점점 더 더뎌지는 것 같아 속이 울렁거린다.

자연과 인간을 잇는 '상생의 가락지'를 기대하며…

 

매사냥꾼을 수할치라 불렀다. 수할치들은 매사냥 가기 전 자신들의 이름과 사는 곳이 적힌 표식을 매의 꽁지깃에 달았는데 그것이 이른바 시치미다.

그 시치미는 매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냥 보낸 매가 되돌아오지 않았을 때 누구 누구의 매란 증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간혹가다가 그 시치미를 떼어 버리고는 자기 매라 벅벅 우기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땐 으레 승강이가 벌어졌다. 어릴 때부터 길러서 낯이 익은 주인 수할치는 "분명 내 매"라 주장하고 시치미를 뗀 사람은 "자기 매"라 주장하니 안 시끄러울 리 없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말이 '시치미를 떼다'다.


시치미는 중세 유럽에서도 사용됐다. 프랑스 왕 헨리4세는 매사냥중 매를 잃어버렸는데 하루 뒤 2000여km나 떨어진 말타란 곳에서 찾았다.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으면, 시속 90km의 놀라운 속도로 그 먼거리까지 달아난 매를 다시 손 안에 넣게끔 해준 것이 바로 시치미다. 

시치미는 조류연구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오늘날 흔히 이용되는 가락지(링)의 원조가 된 것이다. 새 다리에 부착하는 가락지는 새의 이동경로 뿐만 아니라 생존율,수명,분포,번식지,월동지,기생충 전파와 같은 다양한 정보를 파악하는데 매우 긴요하게 이용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전설같은 일화가 있다. 때는 1965년, 일본 도쿄의 국제조류보호연맹 아시아지역본부에 북한으로부터 한 건의 문의가 들어왔다. 당시 북한의 저명한 조류학자 원홍구박사가 평양 만수대 부근서 한 마리의 북방쇠찌르레기를 채집했는데 다리에 일본측 일련번호가 새겨진 가락지가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농림성(農林省) JAPAN C7655'라는 표식으로 보면 분명 일본의 누군가가 달아 날려보낸 것이 틀림없으나 북방쇠찌르레기는 일본에 살지도 않고 이동할 때 일본 땅을 거치지도 않으니 "너무나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이상한 건 일본측도 마찬가지였다. 해서 생각 끝에 한국의 새박사 원병오박사에게 문의한 결과 기막힌 사연이 밝혀졌다. 문제의 가락지를 단 이가 다름 아닌 원병오박사요 그 가락지를 확인한 이가 원박사의 친아버지인 북한측 원홍구박사였던 것. 새 가락지 하나가 전쟁으로 갈라졌던 부자간의 핏줄을 다시 이어준 뜻밖의 연결고리가 된 것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산과 들로 새를 쫓아다닌 경험 덕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류학자가 된 원병오박사는 1957년 북방쇠찌르레기가 서울서 번식한다는 사실을 첫 발견한 이후 63년부터 가락지 표식을 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국산이 없어서 일본 것을 빌려 사용했다고 전한다.
요즘도 철새를 관찰하다 보면 다리에 가락지가 부착된 새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그 많고 많은 새들 가운데 눈에 띄는 가락지 표식.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부자(父子) 새박사간의 기막힌 인연을 이어준 행운의 가락지다. 가락지는 역시 다리에 끼건 손가락에 끼건 어떤 연(緣)을 잇게 해주는 매개체인가 보다.

지금 이 땅에는 수많은 철새들이 겨울을 나고 있다. 얼마 안 있으면 고향 찾아 떠날 그들이긴 하지만 그들 모두는 이 땅에 존재가치를 지닌 귀중한 생명들이다. 최근 들어 조류인플루엔자 매개체란 의심 때문에 졸지에 '간 졸이는 삶'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보호할 의무는 우리에게 있다. 그들이 건강해야 우리 삶도 건강할 수 있는 법. 그 옛날 남의 매에서 시치미를 잡아떼듯 우리가 결코 그들을 외면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철새들의 마지막 안녕을 기원하며 아울러 새들의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의 건투를 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