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층까지 파고 든 '말밥 중독', 어째 이런 일이…
말에겐 질주 본능이 있다. 최대시속 60~70km로 달린다. 사람은 죽도록 달려봤자 시속 38km도 못 뛴다. 100m를 9.58초에 달리는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도 시속 37.58km다. 속도로만 보면 말이 사람 보다 2배 가량 빠르다.
그러나 힘과 지구력을 따지면 사람은 비교대상이 아니다. 말은 짐을 싣거나 수레를 달고서도 먼거리를 달릴 수 있지만 사람은 그렇질 못하다. 사람이 애초에 말을 동경하고 길들이게 된 근본 동기다.
말은 겁이 많다. 덩치만 클 뿐 뒷발질 외엔 특별한 공격력이 없어서다. 위기가 닥치면 지레 겁부터 먹고 무작정 도망친다. 전력을 다해 줄행랑 치는 것이 최대 방어수단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잘 달릴 수 있는 신체구조를 갖추게 됐고 그런 기질이 대표적인 유전인자가 됐다.
말의 질주 본능은 그들이 길들여진 후에도 줄곧 강요 받았는데 그것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바로 경마다. 초기의 전차경마가 됐든 훗날 사람을 태우고 달리는 기마경주가 됐든, 무조건 빨리 달려 상대를 이기게끔 훈련됐다. 경주마에 대한 사람들의 욕심은 급기야 자연교배의 순리를 벗어나 인위적으로 혈통을 만들어 가는 선택사육 풍조까지 낳았다. 오늘날 경마를 흔히 혈통스포츠(Blood Sports)라 부르는 것도 그만큼 혈통이 중요시 된 때문이다.
오죽하면 부모혈통과 조상내력이 담긴 인증서류가 있어야만 경주마로 등록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 씨받이용 종마 가격으로, 현재 외국산 씨수말 한 마리 값이 무려 30억원대란다. 게다가 그들 종마의 씨만 받는 교배료마저 1천만원이 넘는다. 놀랄 노자다.
얼마 전 한 지인과 만난 자리서 우연히 경마얘기가 나왔다. 요즘 뭐하고 지내냐는 물음에 그가 대뜸 "말밥 주러 다닌다"고 답해 말꼬리를 물게 됐다. "아니 웬 겨울에 말밥을 주러 다니냐"고 의아해 했더니 그 왈, "말밥이 그냥 말밥이 아니라 돈으로 주는 말밥 즉 경마를 하러 다닌다"는 것이다.
평소에 화투장도 안 잡는 그였기에 한편으론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말밥이란 말이 재미있기도 해 "재미는 봤냐"고 되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굴색이 금세 변하며 한마디로 신세 망쳤단다. 이번 겨울에만 수천만원을 날렸다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질 않았다. 경마장엘 가보면 공사장 날품팔이에서부터 농사 짓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말밥'에 목줄 대고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란다. 그러면서 "나도 큰일이지만 그들도 큰일이다"며 혀를 찼다. 그는 청주 외곽서 벼농사 짓는 농사꾼이다.
이렇듯 최근 경마가 서민층에까지 파고 들면서 심각한 후유증을 낳고 있다. 각 지역에 경마장이 늘어난 데다 화상경마장과 사설경마장까지 운영되면서 사행성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건전한 스포츠로써가 아니라 한탕주의가 판치는 도박장으로 변질돼 피해자가 크게 늘고 있다.
문제는 경마를 단순한 레저로 보지 않고 인생의 목적인 양 심취했다가 결국 중독성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그들 대부분이 경마를 마치 자신과의 싸움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 전문가는 인터넷 글을 통해 "경마가 무슨 도(道)인가. 경마와 싸우고 자신과 싸우고, 왜들 힘들게 경마를 하는가"라고 물은 뒤 "욕심을 버리고 그저 재미삼아 즐길 것"을 조언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얼마 안 있으면 농사철인데 눈만 감으면 말 달리는 모습이 자꾸 아른거려 일이 손에 잡힐 지 모르겠다"는 그 지인의 때늦은 걱정이 아직도 가슴을 후벼 판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까지 왔는가.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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