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로 변한 뱃길 세월무상 절로 느껴져
80년 보은 대홍수로 마을마다 아픈 상처 
청원관내 접어들면서 박대천으로 불려져

 

상전변성해(桑田變成海), 즉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했던가.

 

속리천(달래강)을 따라 보은군 산외면 이식리로 접어든 나그네는 세월의 무상함에 발길을 멈춘다.

 

옛날 이곳을 지나던 배들이 쉬어갔다는 주식포(舟息浦)는 지금의 지명인 이식리(梨息里)로 변했고 마을앞 강물은 무릎도 채 안차는 얕은 여울로 변했으니 말 그대로 창해상전(滄海桑田)이요 능곡지변(陵谷之變:언덕과 골짜기가 서로 바뀜)임을 실감케 한다.


이식리에서 잠시 강물에 발을 담그고 사람의 인생살이와 강의 생로병사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잠겨있다 다시 이식2교를 건넌다.

 

물길은 이곳서 산외면과 내북면 경계를 지나 오른쪽 산자락을 끼고 또 한바탕 커다란 S자형을 그리며 호기를 부리는데 그 중간에 만나는 곳이 호룡소(虎龍沼)다. 산외면 이식리서 내북면 봉황리를 향해 이어진 바위산 자락이 마치 호랑이가 누워 눈을 감고 있고 능선에서는 용이 꿈틀거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그 밑을 감도는 물을 호룡소(虎龍沼)라 불렀는데 지금은 흔히 호롱소라 부르고 있다.

 

호롱소에서 호랑이 머리격인 바위 절벽 위 산봉우리는 전국에서 제일 가는 명당으로 알려진 곳인데 지금은 문화 류씨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호롱소 부근은 그 이름 만큼이나 경치 또한 절경을 이뤄 외지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명당도, 명소도 이젠 모두 예전 일이 될 판이니 이곳서도 세월무상을 또 다시 느끼게 한다.

 

최근 진행중인 내북-운암간 도로 공사로 곧 터널이 뚫릴 예정이어서 주변 자연경관이 크게 훼손될 위기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터널과 교량이 지나는 곳이 하필이면 호랑이 머리부분과 호롱소 주변이어서 인근 주민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위기의 호룡소
호랑이와 용의 형상을 한 바위산 밑으로 강물이 휘돈다 하여 이름 붙여진 호룡소는 인근 도로공사로 인해 자연경관이 크게 훼손될 위기에 놓여 있다. 한 주민이 호룡소의 내력을 설명하며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강물마저 호롱소의 슬픈 사연을 아는 지 가냘픈 몸짓으로 호랑이 꼬리 부분의 산자락을 살짝 적시며 모래벌을 향한다.

 

봉황리의 중심마을인 모래벌은 이곳의 지형상 속리천이 휘돌아 흐르면서 곳곳에 모래톱을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수초로 가득 차 예전 모습과는 딴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 앞의 청벽산이 봉황리란 아름다운 지명과 유구한 마을 역사를 전하며 마을 상징으로 우뚝 솟아있다. 봉황리는 이곳 청벽산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봉황 한 쌍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됐다.


하천을 끼고 있는 속리천 유역의 마을 대부분이 지난 1980년도 보은 대홍수때 입은 수해로 뼈아픈 상처를 안고 있듯이 봉황리 모래벌 역시 당시 입은 수해로 마을 전체가 쑥대밭으로 변해 집을 다시 짓고 제방도 높이 쌓는 큰 변화를 겪었다. 현재 마을앞을 지키고 서 있는 느티나무도 당시 제방을 높이면서 밑둥치가 2m 이상 덮여져 높이가 오히려 줄어든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봉황리 모래벌 앞에는 봉황교가 세워져 있고 이 다리 남쪽으로는 달래강의 1차 지류(총 17개) 중 처음으로 만나는 흑천이 흘러든다.

 

흑천은 한남금북정맥이 지나는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서 시작해 염둔·화전리를 거쳐 창리에서 동산·도원리쪽 물길과 합쳐진 후 봉황교 부근서 속리천과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흑천 합류부 지점 도로변엔 '속리산 24km'란 표지판이 서있어 이곳이 달래강 3백리 물길을 따라 발원지로부터 하류쪽으로 대략 5분의 1가량 지난 지점임을 알려주고 있다.


모래벌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면서 마주치는 곳이 청주-보은간 19번 국도가 지나는 청벽산 절벽이다. 이 청벽산 절벽에는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특이한 자연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봉황리 마을의 숨겨진 자랑거리인 '홍두깨물'이다. 이 홍두깨물은 비가 많이 올 때만 청벽산 절벽의 중간 부분 바위틈에서 약 40m 아래로 쏟아지는 장대한 폭포로서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아주 희귀한 현상이다.

 

봉황리의 상징 청벽산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는 마을앞 청벽산에 봉황 한 쌍이 살았다고 하여 이름 지어졌는데 이곳 중턱에는 비가 많이 올때만 나타나는 '홍두깨물 현상'이 마을의 자랑거리로 전해진다
.

 

봉황리 모래벌앞 느티나무는 지난 1980년 보은 대홍수 이후 제방을 높이면서 밑둥치가 2m 이상 파묻힌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청벽산 아래 봉황보에 잠시 머물렀던 물길은 보를 넘으면서 보은군 경계를 벗어나 이내 청원군 관내로 접어드는데 바로 이때부터 속리천이란 이름 대신 '박대천'이란 새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

 

박대천은 청원군 미원면 어암리에 있는 박대소(沼)의 이름을 딴 것으로 달래강이 괴산군 청천지역에서 청천천이란 이명을 갖기 전까지 불려지게 된다.


이름이 바뀌어서일까. 청원군 미원면 운암1리서 박대천으로 불려지기 시작한 달래강은 물흐름이 훨씬 느긋해졌다.

 

들판 가운데를 흐르는 물길을 따라 인풍정교를 지나 운암교에 올라 서니 왼쪽으로 또 하나의 물길이 합류하고 있다. 두번째 1차 지류인 감천이다. 감천은 청주시 상당산 부근서 시작해 낭성면 지역서 인경천(2차 지류)과 만난 후 다시 미원면 관내를 흐르는 미원천(2차 지류)과 몸을 섞어 운암교 아래서 박대천으로 흘러든다.

 

봉황보

 

인풍정교서 바라본 박대천

 
이곳 감천 합류지점부터는 옛날 용과 신선이 살았다는 옥화9경 지역이다. 옥화9경은 달래강 본류가 통과하는 4개 시.군(보은군, 청원군, 괴산군, 충주시 등으로 지류만 지나는 음성군은 제외) 가운데 가장 짧은 구간을 지나는 청원군 관내 9곳의 절경을 일컫는 바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청원군이 '청원 관광의 간판'으로 내세우는 명소다.


그 중 옥화 1경은 달래강 본류가 아닌 감천(청주-보은간 19번 국도변 운암리) 하류에 있는 청석굴로 이곳에서는 구석기인들의 생활흔적인 찍개와 볼록날, 긁개 등이 발견된 바 있으며 굴에서는 용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감천이 합류하는 운암교에서 하류로 약 1km 가량을 내려가면 옥화2경인 용소(龍沼)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에 있는 용소는 달래강 수계 중 수심이 가장 깊어 절벽위서 내려다 보면 바닥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물빛이 검푸른 게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이 용소에는 먼 옛날 용이 살았는데 그 용이 승천할 때 지나가던 여인네가 보는 바람에 부정을 타서 그대로 떨어져 이무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절벽 면에는 용이 승천할 당시 새겨진 듯한 용의 형상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달래강의 명소 '용소(옥화2경)'
용소에는 먼 옛날 이곳에 살던 용이 승천할 때 지나가던 여인네가 보는 바람에 부정을 타서 그대로 떨어져 이무기가 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절벽 면에는 용이 승천할 당시 새겨진 듯한 용의 형상이 뚜렷이 남아 있어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백두대간과 한남금북정맥이 주요 분수계 역할
동북으로는 백두대간이 낙동강과 경계 지어
서북으로는 한남금북정맥이 금강과 물길 나눠


산과 물을 말할 때 요즘은 흔히 분수령과 마루금,재,분수계,수계란 말들을 사용하는데 이는 뒤에 설명하는 '산경표'에서 나온 개념들이다.


우선 분수령이란 산에 관한 개념으로서, 글자 그대로 물을 나누는 마루, 즉 산의 양쪽 사면이 만나는 곳 혹은 산의 양쪽 사면이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능선과 같은 말이다. 마루금은 이 분수령(능선)을 서로 연결한 금(선)을 뜻하고 말티재,질마재,모래재 등의 '재'는 능선 중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그 반대가 봉우리다.


또 분수계는 하나의 강 유역을 완전히 에두른 분수령의 집합으로 다른 강 유역과 구분되는 영역을, 수계는 분수계로 둘러싸인 안쪽의 전 영역을 일컬을 때 쓰인다. 다만 분수계는 산과 관련된 개념인 반면 수계는 물에 관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달래강(달천) 유역의 분수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대체적으로 달래강이 흐르는 방향인 북쪽을 향해 오른쪽으로는 백두대간을 따라 낙동강과 경계를 이루고 왼쪽으로는 한남금북정맥을 따라 금강과 경계를 이룬다.

 

■백두대간과 달래강

 

백두대간은 남한강 지류인 달래강 유역을 낙동강 유역과 동·서로 구분짓게 하는 중요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속리산 천왕봉을 기점으로 북쪽을 향해 조령산 인근의 마력봉까지 줄달음을 하면서 동으로는 낙동강 물줄기를 일으키고 서로는 달래강 물줄기를 일으킨다.


속리산 천왕봉서 시작해 마력봉까지 이어진 마루금을 따라 가자면, 우선 속리산 연봉인 비로봉,신선대,문장대 등을 차례로 지나 경북 용화와 화북을 연결하는 밤티에 이어 늘재를 만난 뒤 청화산,조항산,대야산,장성봉,희양산,시루봉,이만봉,백화산,황학산으로 이어졌다가 이내 이화령과 조령산,조령3관문을 지나 마지막으로 마력봉을 만난다.


이렇게 이어진 마루금은 대부분 충북과 경북 도계를 지나면서 능선으로 떨어진 빗방울을 둘로 나누는 분수령 역할 뿐만 아니라 양 지역의 문화를 각기 달리 형성시킨 문화적 산파 역할을 해오고 있다.


마력봉에서 백두대간과 갈라져 다시 방향을 바꾼 마루금은 월악산쪽 지릅재를 거쳐 대미산과 남산,마지막재,계명산으로 이어지면서 남한강 본류 수계인 동달천,내사천,충주호 등과 경계를 이룬다.


속리산 천왕봉으로부터 백두대간을 따라 마력봉까지 이어졌다가 다시 충주 관내 계명산까지 이어진 마루금은 달래강의 오른쪽 유역, 즉 동북쪽 유역을 이루는 분수계 역할을 한다.

 

백두대간의 '늘재'
백두대간은 남한강 지류인 달래강 유역을 낙동강 유역과 구분짓는 중요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은 백두대간의 여러 분수령 가운데 하나인 늘재로, 오른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경북 상주시 쪽에서 바라본 늘재 △분수령 안내판 △충북 괴산 송면 쪽에서 바라본 전경 △고갯마루의 백두대간비.

 

백두대간의 '밤티'
속리산 문장대로부터 백두대간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경북 상주시의 밤티. 원내는 경북 용화에서 화북 방향으로 바라본  밤티 모습.

 

■한남금북정맥과 달래강


속리산 천왕봉으로부터 백두대간이 북쪽을 향해 오른쪽으로 달래강과 낙동강 유역을 나누는 것과는 달리 한남금북정맥은 왼쪽 방향으로 북쪽을 향해 치달으면서 달래강과 금강유역을 구분짓는다.


속리산 천왕봉서 처음엔 남서쪽으로 뻗기 시작한 한남금북정맥은 이어 속리산 관문인 말티고개(현재 속리터널이 인근에 뚫렸지만 여전히 버스노선으로 이용되는 등 관문역할을 하고 있슴)를 지나면서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장구봉,탁주봉,시루산,구봉산,국사봉,머구미재를 지나 청주 인근의 선두산,선도산,상당산으로 접어든다.

 

이어 충북 청원의 미원과 내수읍(초정 약수터)을 잇는 이티재를 지나 구녀산과 좌구산을 넘으면 괴산군의 청천 쪽에서 청안을 넘나드는 질마재가 나오고 이내 칠보산을 거쳐 괴산읍과 증평읍을 잇는 모래재를 지나 보광산,보천고개,행티재를 넘어 음성 관내의 소속리산에 이르게 된다. 소속리산에 다다른 한남금북정맥은 계속해서 경기도 안성의 칠현산을 거쳐 강화도를 향해 달리지만 달래강과의 인연은 소속리산 자락에서 끝을 맺는다.


한남금북정맥에서 갈라져 다시 방향을 튼 마루금은 음성 감우재를 지나 부용산과 수레의산,덕고개,자주봉산,솔고개,평풍산으로 이어지면서 남한강 본류 수계인 청미천과 앙성천,한포천 등과 경계를 이룬다.


이곳까지의 마루금은 달래강의 서남쪽 유역을 이루는 분수계 역할을 한다.

 

한남금북정맥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왕봉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한남금북정맥은 북쪽을 향해 왼쪽 방향으로 치달으면서 달래강과 금강유역을 구분짓는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은 보은 삼년산성에서 바라본 한남금북정맥의 전경으로 오른쪽으로부터 천왕봉과 말티고개가 보인다.

 

■산경표


산경표는 우리 나라의 산이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로 흐르며 어디서 끝나는지를 족보 형식으로 도표화한 지리서다. 저자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여암 신경준으로 알려졌으나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이 동국문헌비고(영조46년, 1770년)에 수록된 신경준의 여지고와 산수고를 바탕으로 편찬된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은 백두산을 시작으로 전국의 산줄기를 1개의 대간과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으로 분류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이후의 산맥 분류 체계와 전혀 다르다. 산경표에서 간(幹)은 줄기를, 맥(脈)은 줄기에서 뻗어나간 갈래를 지칭한다.


백두대간과 한남금북정맥은 이 책의 분류에 따른 것으로 백두대간은 백두산으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커다란 기둥줄기를 일컫고 이 기둥줄기로부터 뻗어나간 2차적인 갈래를 정간과 정맥이라 하는데 한남금북정맥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속리산 천왕봉으로부터 서북쪽으로 뻗은 줄기를 말한다.


흔히 말하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말도 산경표에서 나온 말로 '산 스스로 물을 나누는 경계, 즉 산은 물을 가르지 않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산경도는 산경표를 지도화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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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남쪽 봉우리서 '새 발원지' 찾아내
상환암 위 바위동굴서도 제2 발원샘 발견
삼타수(三陀水) 새롭게 해석해야 할 듯

 

속리산 천왕봉은 동으로는 낙동강, 남으로는 금강, 북으로는 남한강 수계를 나누는 삼파수 지역이다.

 

이곳 천왕봉서 물줄기가 세 갈래로 나뉜다는 것은 곧 천왕봉 자락이 낙동강과 금강, 남한강의 발원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실제로도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은 이곳 천왕봉 지역의 마루금을 경계로 각기 세 갈래로 흘러내려 낙동강, 금강, 남한강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 넓은 의미로 보면 이처럼 물흐름이 시작되는 천왕봉 지역의 각 마루금이 세 강의 발원지인 셈이다.

 

그러나 학술적 개념의 발원지는 '하구 또는 합수점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샘물 형태의 시작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남한강의 한 지류인 달래강은 남한강과 합쳐지는 충주 탄금대 부근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샘물이 진정한 발원지라 할 수 있다.

 

■발원지 탐사

 

그동안 학계서는 남한강 지류인 달래강 발원지를 속리산 상고암 샘물(약수)로 여겨 왔다. 상고암은 속리산 천왕봉 북쪽 비로봉 아래의 천년고찰로 오래 전부터 극락전 옆 바위틈에서 솟는 석간수 샘물을 식수로 이용해 왔는데 이 샘물이 남한강의 주요 발원지이자 달래강의 발원지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달래강의 숨결' 취재팀이 1월부터 최근까지 실시한 총 6차례의 탐사결과 달래강의 발원지는 기존 학설과 달리 천왕봉 바로 아래의 봉수대터 샘물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이번 탐사결과 상고암 샘물은 해발 약 940m에 위치한 반면 새로 찾아진 천왕봉 샘물은 해발 약 1,020m에 있어 '하구 또는 합수점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샘물 형태의 시작점'이란 발원지 요건을 보다 더 충족시키고 있다.


더욱이 천왕봉 샘물은 과거 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전해오는 천왕봉 남쪽 봉우리 아래에 있어 봉수꾼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등 역사성이 있는 데다 거대한 바위틈서 물이 솟기 때문에 갈수기에도 마르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삼각형 모습의 이 샘물은 한 쪽 면의 길이가 1m 이상으로 바위 밑에 있는 샘 치고는 제법 크고 형태도 뚜렷하다. 탐사당시 이 샘물엔 등산객이 갖다놓은 것으로 보이는 낡은 바가지가 놓여있었으나 인근 등산로가 폐쇄된 이후 사용치 않아 샘안에는 낙엽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천왕봉과 새로 찾아낸 달래강 발원지
본보 기획취재팀이 전문가들과 동행 탐사한 결과 달래강의 발원지는 기존 학설과는 달리 천왕봉 바로 아래의 봉수대터 샘물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이 샘물이 남한강 합류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샘물이다. 


취재팀이 상환암과 천왕봉을 잇는 등산로변(비로봉 남쪽사면의 바위굴)에서 찾아낸 굿당터 샘물도 상고암 약수보다 높은 곳(약 960m)에 있고 솟는 물의 양 또한 갈수기인데도 작은 도랑을 이룰 만큼 풍부해 이곳이 제2 발원지로서 중요한 수원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동행 탐사한 박경수씨(71·한국자연공원협회 이사)는 "그동안 상고암 샘물이 달래강의 제1 발원지로 알려져 온 것은 상고암 자체가 속리산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고찰인 데다 이곳 샘물이 예부터 맛 좋기로 소문난 유명세 때문일 것"이라며 "하지만 해발 고도로 보나 계곡의 거리로 보나 천왕봉 밑의 봉수대터 샘물을 제1 발원지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역시 동행탐사자인 김기억씨(향토사학자)는 "그동안 학계가 인정해 온 상고암 약수는 탐사결과 제3 발원지 정도로 봐야 옳을 것 같다"며 "여러 요건으로 보아 천왕봉 봉수대터 샘물을 제1 발원지, 그 다음 상환암 위쪽 굿당터 샘물을 제2 발원지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또 "솟아나는 물의 양으로 보면 상환암 위쪽 굿당터 샘물이 달래강의 주요 수원으로서 가장 뚜렷한 시작점"이라고 말했다.

 

제2 발원지 '굿당터 샘물'
역시 이번에 새롭게 찾아진 상환암 위 굿당터 샘물은 상고암 약수보다 높은 곳에 있고 솟는 물 또한 풍부해 제2 발원지로서 중요한 수원 역할을 하고 있다. 탐사 당시 4월 중순인 데도 동굴내에 얼음이 남아 있다.

 

■발원지와 삼타수(三陀水)의 관계


취재팀은 발원지를 탐사하는 동안 속리산내 주민들로부터 "속리산에는 예부터 삼타(三陀) 약수가 있었다"는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이는 옛 문헌에 나오는 속리산 삼타수가 지금까지의 해석과는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는 최초의 귀중한 정보다. 다만 삼타 약수가 정확히 어떤 약수를 지칭하는 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우원명 속리산관광협의회장(61)은 "예전 어른들로부터 천왕봉 남쪽 봉우리의 샘물(취재팀이 찾아낸 샘물과 동일)을 상탕(上湯), 팔각정 위쪽 돼지바위 부근의 샘물을 중탕(中湯), 남산 정상부의 샘물을 하탕(下湯)이라 하여 삼타 약수로 부르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에 반해 박경수씨(한국자연공원협회 이사)는 "소천왕봉 약수와 경업대 약수, 남산 약수를 속리산 3대 약수 혹은 삼타 약수로 부른다"고 말했다.


어쨋거나 이들 증언은 용재총화의 속리산 삼타수를 정확히 이해하는데 귀중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즉, 조선 중종때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 권3에 '기우자 이행이란 사람이 물맛을 잘 구별할 줄 알았는데 그는 충주의 달천수를 제일로 삼고 한강의 우중수(牛重水)를 두번째로,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를 세번째로 꼽았다"는 대목이 보이는데, 과연 이것이 오늘날 학계의 해석처럼 '물길을 세 갈래로 나눈다'는 뜻의 삼파수(三波水·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점을 던져준다.


왜냐면 그렇게 풀이할 경우 삼타수의 범주에 속리산서 각기 갈라져 내리는 달래강물과 낙동강물, 금강물이 모두 포함돼 그 중 어느 물을 지칭하는지가 더욱 불분명해질 뿐 아니라, 기우자 이행이 과연 이들 세 강물을 구분하지 않고 한 물줄기로 보아 다른 강과 물맛을 비교했을까도 의문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속리산 삼타수는 주민들의 증언처럼 속리산 내의 세 곳 약수를 지칭하든지, 아니면 세 강의 발원이 되는 샘물 중 어느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행이 비교한 세 곳의 물이 모두 '한강수계'란 점을 감안하면 남한강 지류인 달래강의 발원지내 샘물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또한 삼타수의 타(陀) 자가 흔히 불교서 사용하는 용어란 점에서 옛날 속리산에 있던 어느 세 곳 사찰의 약수를 지칭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달래강 발원지로 알려져 온 상고암 약수는 지금도 전국적으로 물맛 좋기로 이름난 데다 샘물 왼쪽 바위에 팔공덕수(八功德水)란 글귀가 새겨있어 이것이 중국의 차(茶) 고전인 서역기의 '팔덕(八德-좋은 물의 기준인 여덟가지 덕, 즉 가볍고 맑고 차고 부드럽고 맛있고 냄새없고 마시기에 알맞고 탈이 없어야 한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아가 삼타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관해서도 전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기존 발원지 상고암 약수
달래강 발원지로서 그동안 학계가 인정해 온 상고암 약수는 바위에 새겨진 '팔공덕수' 글귀처럼 특유의 단맛과 부드러운 맛을 지니고 있어 중국 문헌의 팔덕(八德) 및 용재총화의 삼타수(三陀水)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고암 주지 성중스님이 약수의 유래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달래나 보지…" 슬픈 남매 사연 담은 설화 대표적
물맛 좋아 달천(甘川), 수달 많이 살아 수달천(獺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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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달천)은 사연이 참 많다. 특히 명칭 유래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와 기록이 전한다.

 

우선 충주를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달래강 설화부터 들어보자.


"먼 옛날 친남매가 길을 가다 소나기를 만났다. 때는 여름인지라 앞서가던 누나의 얇은 옷이 비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뒤따라가던 남동생은 어쩔 수 없이 누나의 드러난 몸을 보게�고,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심성이 착했던 남동생은 자신이 엉뚱한 생각을 한 게 죄스러워 그만 돌로 아랫도리를 쳐 죽고 말았다.
한참 뒤 남동생이 따라 오지않는 것을 안 누나가 이상히 여겨 되돌아가보니 아뿔사, 동생이 아랫도리에 피를 흘리며 죽어있지 않은가. 이를 본 누나는 그제서야 전후사정을 알아채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하는 말이 '차라리 달래나 보지, 말이나 해 보지…' 그랬다는 것이다."


이같은 슬픈 얘기가 전해지면서 그때부터 달래강이란 이름이 생겼고 누나가 동생을 끌어안고 통곡한 곳은 달래고개라 불렀다 한다.

 

다음은 달천에 관한 유래다.


때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됐는데 이 때 이여송이 명군의 장수로 들어오게 됐다. 이여송의 아버지(이성량)는 본래 조선사람이었으나 철령위로 도망가 살았기에 이여송 역시 근본이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망각한 채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며 중요한 혈을 끊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여송 휘하의 한 장수가 충주지역을 지나다 갈증이 나자 맑게 흐르는 강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달고 좋아 감천(甘川)이라 한 것이 훗날 달천으로 변했다고 한다.


물맛이 달고 맛있다는 뜻의 또다른 이명으로는 단냇물, 달냇물 등이 있으며, 충주 인근의 달천동,단월동,단호사와 같이 '달' 혹은 '단'자가 들어간  지명은 한자어에 상관없이 모두 '단 물맛'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또 일설에는 동국여지승람에 달천(獺川)으로 표기돼 있는 점을 들어 본래 이 강에는 예부터 수달(獺)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수달내라는 뜻의 달천(獺川)으로 불리다가 후에 '달' 자가 채음돼 달래강(達川)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달래강 인근에서는 조선초부터 수달피가 진상됐다는 얘기가 전한다.


달천과 관련된 다른 기록으로는 이중한의 택리지에 '속리산 정상에서 동으로는 낙동강, 서로는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며 북으로는 충주의 달천(達川)이 되어 한강으로 흘러든다'고 적혀있다. 또 조선시대 동람도에는 충주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산천,덕천,달천(獺川)으로 각각 표기하고 있어 당시에도 달천이란 이름과 함께 여러 명칭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덕을 입은 강, 즉 덕천(德川)이란 이명도 전한다. 조선시대 벌미란 마을의 한 사내가 자신의 집으로 탁발 온 스님의 권유에 따라 달천에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병자(病者)가 다리 덕에 목숨을 건지게 되자 그 병자를 업고왔던 노인이 '과연 덕을 입은 강이로구나(於是 彼德之川也)' 한 것이 전해져 덕천이란 이름이 생겼다 한다.

 

달래강은 지금도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최상류인 보은 속리산지역에선 속리천, 청원 금관~어암리 부근에선 박대천, 괴산 청천부근에선 청천강 혹은 가무내(현천), 괴산읍 부근에선 괴강(槐江) 등으로 불리다가 충주시 달천동에 이르러서야 달래강이 된다.


속리천은 발원지인 속리산에서 이름을 따왔고 박대천은 인근 어암리(충북 청원군 미원면)의 박대소(沼)에서 유래됐으며, 청천강은 괴산 청천지역을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청천지역, 특히 화양동 부근에서 불리는 가무내는 '검은 내(현천.玄川)'란 뜻으로 인근 강바닥이 검은 바위와 돌로 돼 있어 물이 검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괴강은 괴산지역 주민들이 특히 달래강을 대신해 부르는 이름으로 괴산(槐山)의 '괴(槐)' 자를 따왔다.

 

 

�달래강의 다른 이름 '박대천'
달래강은 지금도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최상류인 속리산 부근에선 속리천, 청원 미원 부근에선 박대천, 괴산 청천부근에선 청천강 혹은 가무내(현천), 괴산읍 부근에선 괴강(槐江) 등으로 불린다.

< 청천천의 겨울>

 

 <가무내(현천)의 봄 전경>

 

<속리천의 겨울>

 

   
도도한 물흐름 달래강
  달래강 3백리 물길은 유독 계곡이 많아선지 더욱더 도도히 흐른다. 그 도도한 물흐름은 이 고장 특유의 문화와 전통을 탄생시킨 '역사의 터전'이자 주민들의 삶과 생을 이어준 '생명의 요람'이다. 125km 물굽이에 대한 심층 탐사를 통해 달래강의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하고 참다운 가치를 발굴해냄으로써 내일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한다.(사진은 옥화5경인 금봉서 바라본 달래강 전경)  
 
숱한 설화와 사연 안고 도도한 물흐름

심층탐사 통해 참 가치 발굴 비전 제시

역사·생태·문화·개발·보전방안 재조명



◇ 삶의 젖줄, 역사의 터전

   
 
   
 
예부터 물맛이 달다하여 단내(달래,甘川) 혹은 수달이 많이 산다해서 수달내(달천,獺川), 덕을 입은 강이라하여 덕천(德川)으로 불리던 달래강. 속리산 천왕봉에서 물머리를 시작해 충주 탄금대 부근서 남한강과 하나 되기까지 총연장 125km를 남에서 북으로 굽이치며 흐르는 커다란 물줄기다.

조선초 성현의 <용재총화>에 '조선 제일의 물맛'으로 기록될 만큼 물맛 좋기로 유명했던 달래강은 지금도 주민들의 중요한 생명수이자 젖줄로서 숱한 설화와 사연을 안고 도도한 물흐름을 하고 있다.

3백리 물길로 이어지는 본류와 지류 곳곳에는 수려한 자연경관을 빚어 청풍명월의 멋을 한껏 더해놓고, 각 고을 마다엔 삶의 숨결을 불어넣어 이 고장 특유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탄생시켜 놓았다. 이른바 중원문화의 한 뿌리이다.

백두대간과 한남금북정맥을 분수계로 하여 동으로는 낙동강, 남·서로는 금강과 물굽이를 달리하는 달래강 유역은 속리산을 중심으로 화양계곡과 쌍곡계곡, 옥화9경, 수주팔봉, 수옥정폭포, 용추폭포 등 수많은 계곡과 명소를 아우르고 있다. 또 그 품안에는 멸종위기종이자 천연기념물로서 소중한 자연자원인 수달과 하늘다람쥐, 까막딱따구리, 미선나무, 망개나무 등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물줄기 주변엔 '국민 소나무' 정이품송을 비롯해 그 부인격인 정부인송, 용이 틀임하는 듯한 기괴한 모습의 용송(왕소나무) 등 이름난 소나무들이 천년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호서제일의 가람 법주사, 우암 송시열의 화양서원과 만동묘, 벽초 홍명희의 삶과 혼이 깃든 괴강변,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충민사, 우륵의 가야금 선율과 신립장군의 호국얼이 배 있는 탄금대 등이 지역민의 자긍심을 키우는 역사와 문화의 산실로 남아 있다.

또한 물 맑고 공기 좋아 곳곳이 청정지역인 달래강 유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특산물이 산출되고 있다. 봄·여름이면 산과 들에 온갖 나물들이 지천하고, 가을이면 송이,능이,싸리버섯 등 각종 버섯이 쏟아져 나온다. 인근 농경지에서 생산되는 인삼은 충북의 대표적인 농산물로서 한국 인삼농업의 역사를 다시 쓰는 주역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고 사과, 복숭아, 고추, 절임배추, 논콩 역시 전국에 충북 농업을 알리는데 앞장서 온 효자 농산품이다.

달래강 물길은 곧 이 지역 주민들의 삶과 생을 이어준 요람이자 터전이요, 애환과 기쁨을 함께 해온 역사의 증인이자 동반자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달래강에도 변화를 재촉하는 시대의 거센 바람이 불고 있다. 다름 아닌 온천개발과 댐건설을 둘러싼 논란이 십수 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데다 최근엔 대운하 통과 예상지역으로 부각되면서 주민들을 또다시 찬반논란의 장으로 내몰고 있다. 지역의 위기냐, 발전의 계기냐를 놓고 주민들은 심한 갈등까지 빚고 있다.

이에 지역 환경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심혈을 기울여온 충청타임즈가 달래강 3백리 물길에 대한 심층취재를 통해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하고 참 가치를 발굴해냄으로써 내일을 향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달래강의 설경
  달래강에 눈이 내렸다. 계곡과 바위, 물,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 놓았다. 설경에 묻힌 달래강이 금새라도 숱한 전설을 통해낼 것 같다.  
 


◇ 달래강의 참모습 재조명

이번 기획취재에서는 △달래강의 현황(발원지 및 지리현황)을 비롯해 △역사(유래, 속리산 삼파수와의 관계) △문화(명승유적, 설화, 민속) △달래강 사람들 △특산물 △생태(식물상, 어류상, 조류상, 포유류상, 곤충류상, 양서파충류상 및 주요 동식물) △보전과 개발(관리·개발 실태와 보전방안) 등이 주요 내용으로 다뤄질 예정이다.

취재팀은 달래강의 사계(四季)를 담기 위해 이미 지난 1월부터 사전 취재에 들어가 문헌·자료 조사와 함께 주요 지역에 대한 예비 답사, 겨울철새 및 발원지 탐사 등을 실시한 바 있으며, 이어 오는 10월까지 달래강 물길 전 수역에 대한 현지 답사 및 탐사를 통해 달래강의 참모습을 심층 취재 보도한 후 11∼12월 중에는 보전방안 등 결론 도출을 위한 지상 토론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특히 역사 문화와 생태 분야는 각계 전문가들을 초빙해 동행 취재 및 탐사를 실시하고, 희귀종으로서 우리나라 주요 자연유산이자 천연기념물인 하늘다람쥐와 수달, 까막딱따구리 등에 대해서는 현장 잠복 취재및 촬영을 통해 상세한 서식현황과 생태를 밝힐 계획이다

대부분의 새들은 집짓기의 명수다.

파랑새처럼 남의 둥지를 빼앗아 새끼를 치는 종도 있고 뻐꾸기처럼 아예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그 둥지 주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새끼를 기르도록 하는 종도 있지만, 많은 새들은 집짓기의 타고난 선수들이다.
송곳 같이 뾰족한 부리로 나무와 흙을 쪼아 기다란 구멍을 뜷고 그 속에 둥지를 마련하는 딱따구리와 물총새류를 보면 목수들도 가히 놀랄 만큼 기막힌 기술력을 보인다. 그들의 둥지 안을 들여다 보면 드릴로 파낸 듯 대패로 밀어낸 듯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뾰족한 부리로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흔히 볼 수 있는 까치집도 그냥 지어진 게 아니다. 한 마디로 철옹성 같다. 무려 1천600여 개나 되는 나뭇가지를 이리 얽고 저리 얽어 매우 견고하게 짓는다. 바닥에는 진흙을 깐다. 공학의 개념을 배운 것도 아닌데 바람 부는 방향과 세기 등 주변 여건까지 고려해 둥지를 튼다. 그러니 비가 와도 잘 새지 않고 태풍이 불어도 까딱없다. 설령 나무가 뿌리째 넘어가 땅바닥에 내동갱이 쳐져도 겉만 약간 부서질 뿐 벽체와 바닥은 멀쩡하다.

 


꾀꼬리와 때까치, 밀화부리는 물론 붉은머리오목눈이(일명 뱁새)와 개개비처럼 덩치 작은 새들도 정교하게 집을 짓는다. 자기들만의 명당자리를 찾아 풀잎과 뿌리, 나뭇가지, 심지어 폐비닐 같은 각종 재료들을 물어다 적재적소에 꼼꼼히 이용한다. 사람의 손기술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다.

 

집짓는 기술만 뛰어난 게 아니다. 둥지의 위치에 따른 안전성도 고려한다. 천적으로부터 자신과 새끼를 보호하고 아울러 안정적인 먹이 공급을 위한 본능이자 진화의 결과이다. 앞에서 말한 '명당자리'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요즘 들어 딱새와 할미새, 박새류처럼 인가 근처 혹은 인가내 구조물에 둥지를 트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는 것도 속내는 안전성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천적에 비해 안전하고 인가 주변이 다른 곳에 비해 먹이 구하기가 쉽다고 믿는 것이다.

 


앞날의 일기를 내다보고 둥지 위치를 정하는 새들도 있다. 천연기념물 어류인 어름치가 그해 강수량을 예견해 산란탑 위치를 수심이 깊거나 얕은 곳으로 정하듯, 쇠물닭이나 깝작도요 같은 일부 물가새들도 나름대로의 일기전망에 따라 둥지 위치를 정한다. 예를 들어 번식기간 중 비가 많이 올 것 같으면 둥지를 평소보다 높은 곳에 짓고 그와 반대면 낮은 곳에 짓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새들의 이같은 지혜로움도 때론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올해 같은 경우다. 얼마나 날씨가 극성스러우면 새들의 본능으로도 예측하지 못하는 이변 아닌 이변이 일어나겠는가.
사정은 이렇다. 달래강(달천)에서의 번식 생태를 기록하기 위해 약 20일 전부터 관찰해 오던 쇠물닭 둥지와 깝작도요 둥지가 있었는데, 이번에 내린 장맛비로 하나는 둥지 전체가 떠내려가고 또 하나는 알이 몽땅 물에 잠겨 곯는 사태가 벌어진 것. 쇠물닭은 쇠물닭대로, 깝작도요는 깝작도요대로 이른바  안전 수위를 정해 둥지를 틀었건만 예기치 못한 악천후로 인해 한 해 새끼 농사를 모두 망치는 뼈아픈 시련을 겪어야 했다.

 

졸지에 피붙이를 잃고 허공을 헤매는 생명체가 어디 이들 새 뿐이겠냐마는, 그동안 온갖 정성 들여 알을 품던 쇠물닭과 깝작도요 어미들, 또 불빛을 비추면 알 속에서 꼼지락 거리며 어엿한 생명력을 느끼게 했던 어린 새끼들, 그 가엾은 존재들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 마음이 편하질 않다.

 

자연이 자연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이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예측불허의 시대'. 그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더 빨리 다가오고 있다.

쫓겨난 수달가족

 

 야생동물의 흔적을 찾아내고는 심장이 뛸 만큼 반가워한 적이 있다. '위기의 야생'을 취재하던 지난해 겨울 얘기다.
 엄동설한에 달래강변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니는데 상류 쪽 어느 지점에 이르자 얼음판 위로 심상찮은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길게 이어진 발자국 사이 사이로 마치 사람이 붓을 끌고 다닌 것 같은 꼬리 흔적까지 나 있는 것으로 보아 그토록 찾으러 다녔던 수달임이 틀림 없었다. 가슴이 뛰었다.
 

 더욱 흥분한 것은 크기가 다른 여러 개의 발자국과 배설물, 먹이 흔적, 영역 표시 등 보다 확실한 흔적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곧바로 추적에 들어갔다. 주요 이동 노선과 먹이 장소, 배설 장소, 텃세 표시를 위해 몸을 비벼대는 장소 등을 꼼꼼히 살펴본 뒤 물가에서 산으로 이어진 발자국을 따라갔다. 여러 개의 발자국은 어느 한 급경사면의 바위굴 앞에서 동시에 사라졌다. 굴 입구를 들여다 보니 반들반들했다. 보금자리까지 찾아낸 것이다.
 

 

 촬영은 이튿날부터 시작됐다. 우선 동굴에는 몇 마리가 사는지, 어느 지점을 통해 물가로 이동하는지, 잡은 먹잇감은 어떻게 먹고 얼음판 위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 등을 기록하기 위해 촬영장소를 강 건너편에 잡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첫째 날도 둘째 날도 수달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달은 보통 해가 떨어질 무렵에 보금자리를 나서는데 연 이틀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름대로 은폐한답시고 위장망까지 동원했는데도 눈치를 챘던 모양이다.
 

 너무 깔본 탓이다. 해서 장기전으로 갔다. 면도날 같은 강바람이 연일 몰아쳤지만 한 번 시작한 일 수달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 보자는 식으로 무작정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매복했다. 그러길 일주일여. 수달들도 지쳤는지 아니면 '저 이상한 존재'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님을 알았는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달가족은 셋이었다. 큰 개 만한 어미 둘에 1년생으로 보이는 새끼 한 마리가 가족을 이뤄 살고 있었다. 촬영 시작 보름쯤 돼서는 카메라 앞까지 다가와 두리번거리는 대범함도 보였다. 그만큼 친해졌다.
 

 그로부터 4개월뒤, 수달가족의 여름나기는 어떠한지가 궁금해 다시 그 자리를 찾았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수달가족이 보이질 않았다. 물가 바위 위에 그많던 배설물도 오래된 것 외에는 보이질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예감이 좋질 않아 보금자리를 가봤다. 아뿔싸, 바위굴 앞에 서있던 나무들은 온데간데 없고 웬 뜬금없는 토종벌통 3개가 문지기처럼 서있었다. 굴 안을 들여다 보니 썰렁한 채 풀까지 자라나 있었다.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또 그로부터 일년여가 지난 엊그제(2010년 12월 24일), 수달가족도 보고 싶고 또 미련도 남아 있어 혹시나 하고 다시 그 자리를 찾았다. 역시나였다. 흥분에 들뜨게 했던 발자국도, 먹다만 물고기뼈와 비늘도, 배설물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일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되돌아오지 않을까. 얼마나 두려웠으면 인근에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멀찌감치 달아났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3마리가 동시에 굴밖으로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뚱뒤뚱하면서 물속으로 뛰어들던 귀여운 수달가족. 팔뚝만한 잉어를 잡아서는 자랑스러운 전리품인 양 한참을 가지고 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우둑우둑 씹어먹던 '먹보' 수달가족. 얼음판 위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썰매를 타듯 미끄러지며 정답게 장난치던 개구쟁이 수달가족….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서려는데 문득 소름끼치는 불길함이 스쳤다. "혹시 벌통이 놓이던 그 때 수달가족이 아예 싹쓸이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닐까?"

감꽃과 마른 장마

 

 

감나무는 참으로 묘하다.

감을 열매 맺지만 그 씨는 이상하게도 감나무가 아닌 돌감나무나 고욤나무를 잉태한다. 다시 말해 감씨에서는 감나무가 나지 않는다. 돌감나무나 고욤나무가 난다.
제 아무리 크고 튼실한 씨를 골라 심어도 결과는 같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세상사 이치가 감나무에서만큼은 예외다.

열리는 결과물 즉 감과 돌감, 고욤만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 마디로 감나무의 본바탕이 돌감나무 혹은 고욤나무이니 그 씨에서 돌감나무나 고욤나무가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씨는 그 자체로 묘목을 만들면 열매가 퇴화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해서 예부터 좋은 감나무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접붙이기를 해왔다. 근연종인 돌감나무 또는 고욤나무를 대목으로 하여 원하는 감나무의 새순이나 눈을 접붙여 크고 맛있는 감이 열리도록 한 것이다.
맛있는 수박을 얻기 위해 박이나 호박묘에 수박순을 접붙이는 이치와 같다. 다만 수박씨에선 박이나 호박묘가 나지 않고 수박묘가 나는 것만 다르다. 감나무는 그만큼 독특하다.


감나무는 또 꽃을 2년에 걸쳐 피우는 특성이 있다. 매년 6월말경 꽃을 피우지만 그 꽃눈은 이미 전년도 7~8월경에 분화돼 4개의 꽃받침이 될 부분을 만들어놨다가 그대로 월동한 후 꽃잎과 암수술 등을 갖춰 꽃을 피운다.
감꽃은 그 해 여름철 일기를 점쳐주는 꽃으로도 알려져 있다. 즉 감꽃이 피었다가 시든 뒤 곧바로 떨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붙어있는 해는 장마철이라도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른 장마의 징후란 뜻이다.
자연현상을 보고 일기를 점치는 것을 관천망기(觀天望氣)라 하는데 감꽃을 통해 본 올해의 관천망기가 어쩜 그렇게도 꼭 들어맞는지 감탄할 지경이다.

며칠전 일이다.

꽃이 지고 난 뒤에 앙증맞게 커가는 감을 촬영하기 위해 어느 감나무 밭을 찾았는데 많은 감들이 말라붙은 꽃을 그대로 둘러쓰고 있었다.
순간 스쳐 지나간 생각이 옛 어른들의 관천망기요 요즘 날씨, 특히 충북지역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마른장마 현상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장마철이 아직은 많이 남았으니 두고 볼 일이지만 지금까지의 일기로 봐서는 감꽃이 점쳐준 그대로다. 장마철에 감질나는 비만 오니 기상청 일기예보보다 되레 정확하단 생각마저 든다.

큰 비가 올 것이라던 지난 주말도 그랬고 월드컵 16강전이 펼쳐지던 2주전 주말도 겁만 잔뜩 줬을 뿐 말 그대로 마른비의 연속이다. 게다가 6월 둘째주 이후 계속 주말에만 비소식이 있고 정작 비는 찔끔거리기만 한다.

충북지역의 대표적인 하천인 달래강은 5월 이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예년 같으면 이미 한 두 번쯤은 큰물이 내려갔을 테지만 올핸 단 한 번도 물다운 물이 내려가지 않았다. 물은 물대로 탁한 빛을 띠고 있고 곳곳에 이끼와 수초가 무성히 자라 다른 강을 보는 듯하다.
본격적인 피서철이 왔어도 뚝 끊어진 피서객들의 발길에 주변 상인들은 한숨만 짓고 있다. 한 철 벌어 일년 먹고 사는 그들로서는 손해가 막심하다.
생태계도 말이 아니다. 비같은 비가 내려야 물고기들이 산란할 텐데 뱃속에 알만 잔뜩 실은 채 갈팡질팡하는 물고기들이 태반이다. 물고기들의 이동도 뜸하니 어부들은 그물치기를 포기했다. 2007년부터 내리 3년째 가을가뭄으로 버섯철을 망친 달래강변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걱정은 벌써 가을을 향하고 있다.

비는 너무 많이 와도 탈이요 너무 적게 와도 탈이다.

장마철이 끝나기 전에 어서 적당한 비가 오면 좋으련만, 언제쯤 그런 약비가 올지 적이 걱정이다

 

 

달래강 수계에서 덫에 걸린 수달, 그 안타까운 모습을 통해 우리의 자연보호 의식을 되돌아보게 하는 충격적인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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