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야를 다니다 보면 돌연 믿기지 않는 '실제 상황'을 만나게 된다. 황소개구리도 아닌 토종 개구리가 저보다 큰 무자치를 물고 발버둥치고 있거나 물고기인 동사리가 살모사와 입을 마주 문채 나뒹굴고 있는 모습, 또 유혈목이가 천적인 백로와 왜가리의 목을 감고 사생결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 등 가히 기적이라 할만큼 황당한 사건이 생태계서 벌어지곤 한다.

어찌보면 먹잇감(피식자)의 반란 같기도 하고 약자의 최후 발악 같기도 한 이광경. 하지만 포식자의 입장에선 그들 지위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치욕의 순간이다. 어쨌거나 서로가 생과 사를 걸고 벌이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싸움을 보노라면 이 세상 생명체들이 얼마나 자신의 생명에 집착하는 지를 다시금 생각케 한다.

그렇다면 이들 싸움은 어떻게 끝날까. 대부분 먹이사슬의 상위에 있는 포식자가 이기는 경우가 많으나 간혹 양쪽 모두가 죽고 마는 극한상황까지 벌어진다. 반면 약자인 피식자가 이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설령 이긴다해도 목숨만 부지할 뿐 상대를 집어삼키진 못한다.

비슷한 일이 곤충세계서도 일어난다. 생태계내에서 강자인 말벌이 꿀벌을 공격했다가 화가 난 꿀벌들의 역습으로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는 경우가 그 예다. 이 경우도 말벌은 죽지만 타격은 꿀벌들에게도 만만찮다. 강한 턱과 이빨을 가진 말벌이 순순히 당할 리 없다. 필사적으로 대항한다. 그 결과 싸움이 끝난 자리엔 말벌의 사체 외에도 꿀벌의 사체 또한 부지기수다.

생태계내 먹잇감의 하극상(?)은 이렇듯 희생을 가져온다. 아니 그 희생은 이미 예견된 결과다. 생태계에는 그만큼 비정한 먹이사슬의 법칙이 있다. 피식자는 포식자의 섭식활동에 결과적으로 순응토록 돼 있다. 다만 쉽사리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생존경쟁을 벌이고 필사의 저항을 할 뿐이다. 그 생존경쟁과 저항은 양쪽 모두를 진화하게 하는 모티브가 된다. 이것이 생태계다.

만일 동물계의 먹이사슬에 인간이 끼어들어 한 동물의 먹이체계를 뒤바꿔 놓으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초식성 동물에게 육식성 먹이를 먹도록 강제한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경우가 다 그런건 아니지만 지금 우린 그 엄청난 결과를 '실제 상황'으로 목격하고 있다. 다름아닌 광우병 쇠고기를 둘러싼 작금의 상황이 그 답을 던져주고 있다.

생각해 보자. 이미 알려진 바대로 광우병의 발병 원인은 근본적으로 소의 먹이(사료)에 있다. 20여년 전부터 영국 등지서 젖소의 우유 생산량을 늘리고 비육우를 빨리 살 찌우기 위해 양과 소의 장기, 뼈, 살코기 등을 사료원료로 이용한 게 단초가 된 것이다.

초식성인 소에게 단백질을 공급한답시고 육식성 사료를 섞어 먹인 것이 화근이 돼 결국 광우병이란 해괴망칙한 병을 낳고 말았다.

그결과 전 세계는 광우병의 공포에 휩싸이게 됐고 우린 지금 그 병의 위험성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문제로 전국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촛불시위의 피킷마다 '미친소=미친정부'라며 아우성이다. 이젠 해외 동포들까지 나서 우리의 '미친 정국'을 우려하고 있다.

자고로 먹는 것을 가지고 장난하지 말라 했다. 개도 먹을땐 건드리지도 말라 했잖은가. 그만큼 먹을거리는 인간이나 동물에게 있어 중요하다는 얘기다. 장난도 말고 건드리지도 말라는 건 곧 신뢰성과 안전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제 아무리 약자인 피식자라도 열 받고 궁지에 몰리면 반격하는 게 자연계다. 인간세계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자신의 먹을거리가 누군가에 의해, 그리고 억지에 의해 신뢰성과 안정성을 잃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건 생존의 문제다. 그 어찌 분노가 극에 달하지 않겠는가.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찔레꽃 필 무렵이면 어김없이 흥얼거리게 되는 찔레꽃 노래다. 원곡은 일제 말기인 1942년 가수 백난아가 처음 불렀는데 훗날 이미자가 가사일부를 바꿔 불러 더욱 유명해진 국민가요다. 뜬금없이 찔레꽃 타령을 하는 이유는 요즘이 바로 찔레꽃 피는 철이기 때문이다. 아까시꽃이 막 지고나면 덤불위로 앙증맞은 얼굴을 내미는 찔레꽃. 그 찔레꽃이 필 때면 한 손엔 찔레순을 또 한손엔 삘기를 뽑아들고 산과 들로 내달리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진다.

그런데 이 무렵이면 버릇처럼 의문이 가는게 있다. 바로 찔레꽃의 색깔이다. 노랫가사엔 분명 찔레꽃이 붉게 핀다고 했는데 우리 주변에 피는 것은 거의 모두 희거나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이다. 그러니 의문이 갈 수 밖에.

우리나라에는 털찔레, 좀찔레, 제주찔레 그리고 도감에도 잘 안나오는 요강찔레 등이 있는데 대부분 흰색 계통의 꽃을 피우며 유독 빨간 꽃을 피우는 종은 국경찔레 뿐이다. 하지만 국경찔레는 보기가 매우 드물다. 그런데 하필 '찔레꽃 붉게 피는'이라고 했을까.

찔레꽃 피면 우리의 산과 들은 더욱 요란해 진다. 찔레꽃 가사(3절)에도 있듯 아름다운 찔레꽃 피어나면 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 호랑나비는 이리저리 춤춘다. 당시 작사가는 생태달력을 꽤나 알았던 모양이다. 찔레꽃 색깔은 좀 그렇지만.

찔레꽃 필 무렵의 생태달력은 일년 중 가장 부산하다. 우선 찔레꽃이 망울을 터트리면 쏘가리 잡는 어부들부터 발에 땀이 난다. 강가의 어부들은 쏘가리의 산란기와 찔레꽃의 개화시기가 같은 것을 알기에 찔레꽃이 폈다 싶으면 알 밴 쏘가리가 이동하는 여울로 내달린다. 일년을 별러온 호기 아닌가. 찔레꽃이 어부들에겐 참으로 기막힌 '알람'인 셈이다.

찔레꽃 피는 시기는 또 뻐꾸기가 날아와 알낳는 시기이기도 하다. 뻐꾸기가 목청돋워 울어재치면 영락없이 찔레꽃이 피는데 이 무렵 뻐꾸기의 행동을 보면 매우 독특하다. 꾀꼬리나 밀화부리 같은 여름철새는 고향인 우리나라로 날아오면 우선 고단한 날개 추스린 뒤 곧바로 둥지 트느라 여념 없는데 뻐꾸기는 되레 노래만 불러제키며 '남의 집' 넘보기에 정신 없다. 이유인 즉슨 뻐꾸기는 둥지를 직접 틀지 않고 다른 새둥지 찾아 알을 낳기 때문이다. 이를 탁란이라 하는데 본능치고는 고약한 심보다.

찔레꽃 필 무렵이면 농촌 들녘도 무척 바빠진다. 절기로는 소만과 망종 사이다. 바지가랭이 내리고 뭐 볼 시간도 없는게 바로 이 즈음이다. 밭둑에 찔레꽃 피고 앞논 참개구리 정신없이 울어제킬 때면 모내기에다 밭일에다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이 바빠지니 흙묻은 손으로 볼일인들 편히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발등에 오줌 싼다는 말이다. 굽어진 허리 펼 새 없이 방바닥이고 뭐고 등에 대이기만 하면 이내 코고는게 이무렵 농부들이다. 오죽하면 불때던 부지깽이도 거드는 시기라고 했을까.

올핸 봄가뭄이 극심해 농부들이 무진 애를 먹고 있다. 모내기도 서둘러야 하고 보리도 베야 한다. 고구마에다 참깨, 들깨도 심어야 하고 자식들 줄 참외와 수박묘도 이식해야 한다.

풀도 뽑아야 한다. 일거리가 끝이 없다. 그래서 망종(芒種)을 亡終이라고도 한다. 끝을 잊는다는 얘기다.

도시로 나간 자녀들이여 농촌에 뿌리를 둔 도시인들이여 생태달력이 찔레꽃을 피우면 농사달력은 으레 바쁜 농사철이니 대뜸 고향으로 달려가 논배미로 밭뙈기로 뛰어드는 건 어떨는지. 가는길에 시원한 막걸리 받아다 아버지 한잔 삼촌 한잔 따라드리며 FTA다 AI다해 상심한 가슴 달래도 드리고.

1947년 어느 겨울날, 미 군정청의 엘윈 M. 미더라는 사람이 북한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미 농무성 소속의 식물학자로 한국에 파견된 건 식물채집,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 토종식물을 채취해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요즘 말하는 생물자원 스파이격이다.
정상 근처 백운대에 이른 그는 한 나무를 발견하곤 멈춰선다. 이름하여 털개회나무란 나무인데 얼핏 보면 서양의 라일락 같지만 그보다 상품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아는 그였기에 서둘러 종자를 채취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채취해간 12개 종자 중 7개를 발아시켜 새 품종을 만들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한국서 가져온 것이니 그와 연관된 명칭을 붙이고 싶어도 몰래 들여온 게 마음에 걸리고 다른 이름을 붙이자니 마땅한 게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서 자신을 도와주던 여타자수의 성(姓)이 김씨란 걸 생각하고 '미스김 라일락'이란 이름을 짓게 된다. 일설에는 미더박사가 털개회나무란 한국명을 기억하지 못해 한국서 가장 흔한 김씨 성을 땄다고도 한다.

허나 어찌됐건 한국산 털개회나무는 미군정 시대에 졸지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스김이란 묘한 이름을 달고 역수입되기 시작해 지금은 아예 미국산으로 각인된 채 버젓이 우리의 화단에서 진한 '미제 화장품 냄새'를 풍기고 있다.
역시 미국에 비싼 로열티를 주고 역수입되고 있는 잉거비비추도 팔자가 기구하다. 이 꽃의 원종은 본래 한국 특산인 홍도비비추였는데 1980년대 미국 국립식물원 베리 잉거박사팀이 내한해 추위에 강한 식물종자를 찾는답시고 국내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각종 종자를 채취해갔는데 거기에 홍도비비추가 있었다. 잉거박사는 그후 자신의 이름을 딴 잉거비비추로 신품종 등록함으로써 한국산이란 걸 숨긴 채 세계 꽃시장에 유통시켰다.
또 원추리란 야생화도 한국서 미국으로 건너간 후 데이릴리(하루백합)로 개량돼 포기당 3백달러를 호가하는 등 한국산이 미국산으로 개량되거나 둔갑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미 농무성 야생식물 유전자원 데이터베이스에는 현재 1천종이 넘는 한국 고유 식물들이 채집돼 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들은 이제 곡식종자까지 눈독 들이고 있다.

미국서 최근 품종 개량을 위해 이용된 35 종의 콩 종자 가운데 무려 6종이 한국 토종콩이란 사실은 그들 욕심이 종전의 야생식물 수준을 넘어서 그 이상의 것을 넘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수 생물자원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가져다 마치 자기네 것인 양 이름 붙여 역수출하는 그들. 자국 이익이라면 상대국 형편쯤이야 발바닥 때만치도 여기지 않는 그들. 그 속내를 훤히 알기에 앞으로의 일이 걱정된다. 곡식 종자까지 손댄 마당에 토종한우 등 가축 종자까지 넘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를 둘러싼 작금의 상황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마저 든다. 한우를 유독 좋아하는 우리 국민성과 입맛을 역이용해 행여 유전자 장난을 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만일 그럴 경우 급기야 '미국산 한우'란 이상야릇한 소가 유입되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진다.

석유 한 방울 안 나 매번 개 끌려가듯 유가가 치솟는 나라에서 그나마 갖고 있던 생물자원은 이미 거의 다 빼내가져 그 주권을 지키고 싶어도 더이상 지킬 것도 변변찮은 나라. 세계는 이미 수십년전 발들여놓은 종자전쟁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고 있는데 이제 겨우 그 전장터로 '소총' 들고 나선 나라. 국민건강주권과 검역주권은 한·미 FTA로 이미 다 포기했다고 어린 학생까지 나서 연일 울분터트리는 나라. 경작지와 생산량 급감으로 식량주권마저 불안정한 이 나라에 대체 남은 주권은 무엇인가.

누가 미물이고 누가 영물인가


자연 생태계에는 새끼에 대한 사랑이 유난히 강한 동물이 있다.
예를 들어 꼬마물떼새를 비롯한 물떼새류와 원앙이, 꿩, 쏙독새 등은 알을 낳아 둔 둥지 근처나 어린 새끼가 있는 곳에 낯선 침입자가 나타나면 어미새는 마치 부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몸이나 날개를 갑자기 늘어뜨려 금방 잡힐 것처럼 보이거나 한쪽 날개가 부러진 것처럼 옆으로 누워 날개를 푸드덕거리기도 하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넘어지기까지 한다. 그러면 침입자는 그 행동에 현혹돼 잡으려고 달려들게 마련인데 어미새는 그때마다 잡힐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도망치며 침입자를 먼곳으로 유인한다. 어미새의 목숨을 담보로 알과 새끼를 보호하는 강한 모성애를 엿볼 수 있다.

또 꾀꼬리와 때까치, 파랑새는 둥지 가까이에 천적이 다가가면 큰 경계음을 내며 잽싸게 공격한다. 행여 둥지를 건들라치면 마치 사생결단을 한 것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얼굴과 머리를 마구 공격하는데 특히 어린이와 여자는 어떻게 용케 알고 더욱더 악()을 써 혼비백산하게 만든다. 이 역시 목숨을 건 강한 새끼사랑이다.

새 가운데에는 또 새끼가 어미를 도와 동생들을 기르거나 둥지를 트는 등 '가족애'가 유난히 두터운 새도 있다.
앞서 말한 꾀꼬리가 그 주인공인데 지난해 태어난 1년생 새끼 꾀꼬리는 이듬해 어미가 둥지 틀 때 함께 재료를 물어다 틀고 또 동생들이 태어나면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줌으로써 어미에게 은혜를 갚는다. 또한 둥지에 침입자가 나타나면 어미보다 더 맹렬히 공격해 동생들을 지켜낸다.
이경우 1년생 새끼를 조류학에서는 '헬퍼(Helper)'라 부르는데 이 헬퍼의 행동은 실제로는 어미가 되기 위한 학습과정이나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한 효조(孝鳥)가 없고 더한 가족애도 없을성 싶다.

곤충도 강한 자식사랑을 보이는 게 있다. 수서곤충인 물자라는 암컷이 수컷 등에 알을 낳으면 수컷은 부화할 때까지 업고 다니며 애지중지 보호한다. 또 에사키뿔노린재는 자신의 알을 몸으로 감싼채 꼼짝 않고 부화할 때까지 보호한다.

물고기도 자식사랑이 유난히 강한 게 있다.

우리나라에 사는 열동가리돔과 줄도화돔은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이 입으로 받아 부화할 때까지 넣고 다니며 보호한다. 수컷의 입이 부화장인 셈이다. 자신은 먹을 것도 못 먹어가면서 오로지 새끼만 보호하는 참으로 기특하고 영특한 부성애다.

또 해마라는 물고기는 수컷 배에 육낭(育囊)이 있어 암컷이 낳은 알을 받아 부화할 때까지 살신보란(殺身保卵)한다. 열거하자면 끝없는 이러한 동물들의 자식사랑은 그 내면을 알면 알수록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경외감마저 든다. 자연은 인간의 어머니라 했던가. 사유(思惟)가 없는 이들 동물도 자식과 부모, 가족을 사랑하는 지고지순의 본능을 갖고 종족 유지에 최선을 다하는 게 대자연의 이치다.

하물며 인간사는 어떤가. 걸핏하면 어린 핏덩이를 남의 집앞이나 화장실에 내다버리고 자식들은 어버이를 돈 없고 늙었다는 이유로 마구 학대하거나 홀로 살게하는 현대판 고려장이 난무한다.

이유도 모른채 가족들과 헤어져 험한 세상을 방황하는 미아들이 부지기수고 알량한 돈 몇푼과 성적 욕구 때문에 남의집 귀한 자식 유괴해 목숨 끊는 비정한 사건이 연일 터진다. 우리가 미물이라 깔보는 동물들은 자식사랑 부모사랑 가족사랑이 변치않는데 사람들은 그 반의 반도 못 따라 가는 이들이 허다하다. 허니 누가 미물이고 누가 영물인가. 자식과 부모,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5월 가정의 달이다.

철쭉꽃이 폈다. 그것도 흐드러지게 폈다.

대전,청주 등 도회지 부근에선 이미 지난달 24일께 철쭉꽃이 폈고 속리산 뒷자락의 사담 계곡엔 28~29일께부터 피기 시작했다.
철쭉꽃만이 아니다.

눈송이처럼 희게 피는 팥배나무꽃도 사담계곡에 흐드러지게 피어 제모습을 알리고 앙증맞고 기이한 모습의 매발톱꽃도 온통 꽃망울을 터트렸다.
문제다. 이들 꽃이 핀 게 문제가 아니고 '이르게' 핀 게 문제다.

혹자는 꽃 몇 종 이르게 폈다고 뭐 그리 호들갑 떠나 할 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다.

철쭉꽃과 팥배나무은 보통 5월 중순께나 핀다. 그런데 올해엔 4월 하순께 피기 시작했다. 매발톱꽃은 더하다. 보통 6~7월에 피지만 요즘 어딜 가나 만개했다.
이미 진 꽃도 있다. 대개 5월 이후 꽃을 피우는 귀룽나무는 올해엔 4월 하순 꽃이 폈다 진 후 지금은 열매까지 맺혔다.

아그배도 꽃잎을 떨군 지 오래다.

왜 그럴까. 날씨 때문이다.

날씨가 하도 이상스러우니 꽃들마저 개화시기에 혼란이 온 것이다.
요즘 날씨를 보라.

5월초인데 낮기온은 벌써 한여름을 방불케 하고 아침 저녁으론 되레 썰렁하다. 봄과 한여름 날씨가 공존해서다.

어떨 땐 수은주가 곤두박질쳐 극심한 일교차를 보인다. 얼마전 괴산,보은 등 내륙지역에 엄청난 된서리가 내린 데 이어 오늘(6일) 또 다시 서리가 왔다.
올해엔 유난히 날씨가 변덕스럽다.

예년에 비해 무더위가 훨씬 이르게 찾아온 데다 두 세 차례 썰렁한 날씨가 반복되면서 한여름인지 봄인지 종잡을 수 없게 하고 있다.
날씨가 이러니 생태달력인들 온전할 리 없다.

봄에는 봄꽃이, 여름엔 여름꽃이 펴야 정상적인 생태달력인데 봄꽃과 여름꽃이 한 데 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생태계 곳곳에서 이상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모기와 병해충이 조기 출현하고 산란기를 맞은 물고기들이 알을 낳지 않고 방황(?)한다.

또 큰 일교차와 지난번 내린 된서리로 농축산물이 피해를 입었다.
이른바 '양봉철'이 왔어도 식물의 꽃에서 꿀이 적게 만들어지는 바람에 양봉업자들이 울상이다. 극심한 일교차 때문이다.
냉해가 더한 곳은 고추재배 농가와 과수농가다. 애써 심은 어린 고추묘는 지난 된서리에 얼어죽거나 잎이 말라 다시 심어야 할 판이고 이제 막 꽃을 떨군 사과,배,복숭아는 어린 열매가 동해를 입어 과육이 기형으로 자라는 피해를 입게 됐다.
또 산란계를 키우는 양계농가에서는 때이른 무더위로 닭들이 먹이를 잘 먹지 않아 산란율이 크게 떨어졌다고 하소연이다.

가뜩이나 조류인플루엔자로 멍든 가슴 날씨로 인해 더욱더 찢어진단다.

기후는 변한다.

지구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계속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기후변화는 그 속도가 너무 빠르게 나타난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수 백년 동안에 이뤄질 기후변화가 불과 몇십 년만에 나타나고 있고 그 속도는 점점더 빨라지고 있다.
생태계는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생태계는 갈팡질팡한다.

계절의 흐름과 밤낮의 길이를 감지하는 '생태시계'가 온전히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우이지만 동식물의 생태시계가 아예 고장나면 어떻게 될까.

여름철새와 겨울철새의 구분이 없고 각종 해충이 시도 때도 없이 들끓게 될 것이다. 생태계내의 계절적인 질서가 깨져 말 그대로 혼돈의 세계가 오게 된다.

현실은 어떤가.

봄과 여름은 물론 사계절의 경계가 모호해진 한반도. 그래서 봄꽃과 여름꽃이 함께 피고 여름철새인 백로,왜가리가 겨울에도 이동하지 않는 이상해진 생태계.

우린 지금 혼돈의 세계, 무질서의 세계에 이미 살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심각성도 모른 채….

바야흐로 산나물철을 맞아 온 산이 산나물 밭이다.

이웃집 할머니 봄나물 캐러 들로 나서던게 엊그제 같은데 요즘엔 산으로 향한다. 세월 참 빠르다. 봄인가 싶더니 여름이고 봄나물 나왔다 하니까 산나물이다.

산나물은 종류가 많다. 대표격인 취나물만도 곰취, 참취, 수리취, 분취, 미역취, 개미취, 좀개미취, 벌개미취, 바위취, 병풍취 등 10가지가 넘고 고사리, 고비, 원추리, 참나물, 어수리, 솜대, 모싯대, 박쥐나물, 어리병풀, 우산나물, 물레나물, 남산제비꽃 등 그 수가 엄청나다.

전해오는 말에 소가 먹을 수 있는 건 사람이 먹어도 된다고, 적당히 데쳐 우려내면 웬만한 새싹은 나물이 된다.

그러나 이 철에 나는 새싹이라고 무턱대고 먹어선 크게 후회한다. 맹독성 식물 때문이다. 초오류(草烏類)인 투구꽃, 놋젓가락나물, 그늘돌쩌귀 등과 앉은부채류가 바로 요주의 식물이다.

특히 초오류는 옛날 사약재료로 이용됐을 만큼 독성이 무척 강하다.
또 앉은부채나 애기앉은부채는 잎이 배추처럼 소담해 먹는 나물로 오인하기 쉬우나 먹는 즉시 설사한다. 어찌나 설사가 심한지 이것에 한 번 당했던 사람들은 '호랑이배추'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호랑이처럼 무섭다는 얘기다.

비온뒤 고사리 돋듯 한다더니 최근 내린 비로 온 산에 나물이 지천하면서 가는 곳마다 사람 또한 천지다.

웰빙 붐 타고 부쩍 늘어난 산나물애호가들이 너도 나도 산으로 나서기 때문이다. 재미도 재미거니와 산채의 독특한 맛과 건강까지 챙길 수 있으니 일거삼득이란다.
많은 세시풍속이 자취를 감춰가고 있으나 산나물 뜯기만큼은 오히려 성행하고 있다. 아니 성행 정도가 아니라 극성이다.

산나물 뜯으러 가는데 심지어 관광차 빌리고 인터넷으로 회원 모집해 원정까지 나서니 극성 아닌가.

산나물 뜯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폐해 또한 속출하고 있다. 산과 생태계가 된통 홍역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게 중에는 아주 작정한 듯 되나가나 싹쓸이 해가는 이들도 있다. 씨를 지울 태세다. 먹성 좋은 멧돼지떼가 며칠 굶은 후 지나간 것처럼 아예 쑥대밭을 만들어 놓는다.

두릅나무와 엄나무는 성한 가지가 없다. 해도 너무 한다.

과욕의 대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행여 희귀한 것이 눈에 띄면 영락없이 뽑아제친다.

깽깽이풀, 복수초, 노루귀 같이 희소성 높은 야생화는 물론 오갈피·느릅·헛개나무 등 몸에 좋다는 나무와 분재용 나무가 주 표적이다.

 

이쯤하면 산도둑이요 절도다. 거기다 산불까지 종종 내니 정도가 극에 달한다. 산으로서는 최악의 계절이다.

상황이 이러니 당국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다. 산림청이 칼을 빼 들었다.

산림청은 최근 산나물과 산약초를 불법채취하다 적발되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리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현행법에는 임산물을 절취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도록 돼 있다. 중벌이다.

이젠 관계기관의 허가 내지 산주인의 동의를 얻어야만 산나물을 뜯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중죄인 취급 받는다.

이에대한 반발도 많다.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풍습을 법으로 막는다니 너무하단 얘기다. 게다가 각 산마다 누가 주인인지를 알아 동의 얻고, 매번 행정관서 찾아 허가받아야 한다니 말이 되느냐며 볼멘소리까지 한다.

하지만 자초한 화다. 자연이 베푼 선물을 자기만 독차지하려는 얌체족들의 과욕이 낳은 결과다.

산나물 뜯는 것까지 법의 잣대로 철퇴를 가하게 된 세상,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꺾세 꺾세 고사리 꺾세' 정겹던 노랫가락이 비가(悲歌)처럼 맴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방역복과 장화, 마스크를 착용하고 한 손엔 부대를 든 사람들. 그들이 거리를 좁히자 한쪽으로 닭과 오리가 내몰린다.

영문도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닭과 오리들. 맨앞 무리가 억지로 떠밀려 웅덩이로 떨어지거나 잽싼 손아귀에 잡혀 부대에 넣어지자 뒤쪽 무리가 난리 친다. 죽음을 아는듯 발버둥 치지만 소용없다. 외마디 비명들이 파편처럼 튄다. 아수라장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쪽에선 굴삭기가 흙을 퍼담는다.

홀로코스트의 현장이 이랬을까.
차마 눈 뜨고 못 볼 생지옥, 바로 가금류 살처분 현장이다.

처참한 이 장면들이 잇따라 보도되면서 또다시 나라안이 'AI(조류 인플루엔자) 신드롬'에 빠졌다.

닭과 오리 사육농가는 물론 사료·식품업계까지 초비상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치킨 사달라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며 조용해졌고 닭고기와 계란 매장, 심지어 삼계탕집, 오리요리집까지 발걸음이 뜸해졌다.

무의식적인 연쇄반응인지 경험적인 훈련인지 파장이 빠르게 번지고 있다.

지난 2003년 이후 벌써 세번째다.
아니 세번째도 세 번째지만 이번엔 그 피해가 사상 최대일 것이라는 게 문제다. 관련 업계의 줄도산이 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또다시 검은 그림자가 전국을 뒤덮고 있다. 걱정이다. 왜 이럴까.

잊을 만하면 터지고 잠잠하다 싶으면 날벼락이다. 속이 상한다. 그래서 묻고 싶다.

AI를 막을 근본처방은 없는가. 정녕 없다면 그 피해만이라도 줄일 방도는 없는가.

우선 방역체계부터 생각해 보자. 지금껏 당국은 뒷북치기 일쑤였다. 발병하고 확산된 뒤에야 비로소 '잊고 있던 할 일'이 생각난 듯 허겁지겁 역학조사니 고병원성 확인작업이니 야단법석을 떤다.

한번도 어느 지역에 AI 발생이 우려되니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는 사전예고를 들어본 적 없다. 사전 및 상시 예찰시스팀이 미비해서다.

또 하나 발병 및 확산 경로에 대한 관심 소홀이다. 지금까지 숱한 지역, 숱한 농가에서 AI가 발생했어도 지역별·농가별 발병 및 전파경로에 대한 자세한 분석결과가 나오질 않는다.

어떻게 발생해 어떤 경로로 주로 전파되는지를 알아야 효과적으로 차단할 게 아닌가. 그런 데도 안한다. 그러니 제대로된 방역이 이뤄질 리 만무다.

 

일단 발병하면 서둘러 끌어묻는 살처분 과정에도 문제 있다. 전 세계 대부분 국가가 고병원성 AI 발생시 조속한 살처분 정책을 펴고 있기에 그 자체를 반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과정이 문제다.

제 아무리 병에 걸렸다하더라도 그들도 생명체인 이상 굳이 잔혹하게 대할 필요는 없잖은가.
사전방역에 실패해 발병케 한 것도 부끄러운데 그들을 마구 대하기 일쑤고, 또 무슨 자랑거리라고 공개적으로 땅에 끌어묻는가.

국보 1호가 불 탄 건 국민적 수치라 한나절도 안돼 급히 천막 두르면서 농민이 애써 기른 가축은 병 들었다는 이유로 공개처형하듯 천막 한 조각 두르지 않고 버젓이 살처분한다.

제발 부탁한다. 국민 정서를 위해 최소한 임시 가리개라도 두른 상태서 작업()하길 당부한다.

또 아무리 급하더라도 지하수 오염도 생각하길 바란다. 그들이 썩으면 그 썩은 물이 어디로 가겠는가. 얇은 비닐 한 두겹으로 그 엄청난 침출수를 막겠다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닭과 새는 본래 닭대가리 행동, 새대가리 행동을 않는다. 사람이 그렇게 볼 뿐이다.

괜한 닭, 괜한 새 얕잡아 보지 말고 이참에 우리 스스로 닭대가리, 새대가리 같은 짓 안하는 지 깊이 반성할 일이다.

 

AI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변종을 만들어가고 방역체계는 되레 뒷걸음질 치니 걱정거리가 자꾸만 늘어난다.

제 아무리 변이를 거듭하는 AI 바이러스라 하더라도 인간의 건강까지 넘 봐서는 안되는데, 마음이 영 놓이질 않는다.

미국에서는 소고기 협상에 따른 쓰나미가, 국내에서는 AI 발생에 따른 날벼락이 축산농가들의 혼을 몽땅 빼앗아가고 있는 이 현실. 이 암울한 현실이 우리의 뿌리, 농촌을 더욱 더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청남대 초입 대청호변엔 한반도 역사의 뿌리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유적지가 있었다. 이름하여 두루봉 동굴이라 하는 것인데, 지금은 동굴은커녕 산 밑자락까지 파헤쳐져 수십길 낭떠러지로 변한 흉물의 역사터다. 하지만 이 유적이 갖는 중요성 때문에 현행 교과서에 이름이 번듯하게 올라있는 '실체없는 선사유적지'다.

이 동굴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해는 1976년. 당시 모 광산이 석회암 채취를 위해 발파하던 중 예사롭잖은 동물뼈가 나와 충북대와 연세대 박물관이 긴급 발굴에 착수, 1983년까지 숱한 유물을 찾아냈다. 특히 이곳에서는 4만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에 살았던 두명의 사람뼈(그중 하나는 5세 가량의 '흥수아이'로 명명)와 동물뼈, 각종 석기 등 그 시대 생활상과 환경 생태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발굴 종료 25년이 지난 오늘 이 동굴을 새삼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이 동굴서 발견된 진달래과의 꽃가루 때문이다. 발굴 당시 이 동굴에선 3백43개의 꽃가루가 검출됐는데 유독 진달래과 꽃가루만이 굴 입구서 1백57개나 발견됐다.

진달래과는 산성토양을 좋아하는 식물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알카리성 토양인 석회암 동굴에서, 그것도 굴입구서 꽃가루가 집중 발견된 것일까.

발굴조사자였던 충북대 이융조교수는 "그 시대 사람들이 이미 꽃의 아름다움을 알고 주거지를 꾸미기 위해 일부러 갖다놓은 미의식"이라며 "이로 보아 이들 구석기인은 세계 최초로 꽃을 생활화한, 이른바 '꽃을 사랑한 첫 사람들(the first flower people)'로 생각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흥수아이를 포함한 두루봉 구석기인들은 큰원숭이, 쌍코뿔이, 옛코끼리, 크로쿠타, 하이에나 같은 들짐승이 우글거리는 삶의 전장 속에서도 꽃을 꺾어다 집앞을 장식하고 감상하는 심미안과 여유를 가졌던 것이다.

혹자는 웬 뜬금없는 아프리카 동물이냐고 하겠지만, 실제 발굴에서 이들 짐승뼈가 상당수 나왔다. 그만큼 그 시대엔 따뜻했고 동물상도 달랐다.

두루봉 구석기인이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란 건 아직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이 두루봉을 찾았던 것은 피난처인 동굴과 함께 인근에 금강이란 물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강이 곧 생명수요 삶의 터전이었던 '과거의 금강 사람들'이다.

강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에 있어 중요한 요소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금강을 젖줄 삼아 삶의 뿌리를 이어가는 이 시대 이 지역 사람들 또한 '오늘의 금강 사람들'이다.

바야흐로 꽃 피는 계절 4월을 맞아 온갖 꽃들이 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벚꽃과 개나리, 목련이 피고지는가 싶더니만 시골 산자락에도 각종 제비꽃과 괴불주머니, 현호색, 양지꽃 등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진달래 역시 산 양지쪽 능선을 따라 한창 붉은 물감을 흩뿌리고 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더니 하루가 다르게 산빛이 변한다. 말 그대로 만화방창(萬化方暢)이니 화란춘성(花爛春盛)이다.

먼 옛날 두루봉 사람들이 사냥갔다 돌아오는 길에 진달래꽃을 한아름 꺾어나르던 시기도 요즘 같은 시기였으리라. 단지 기후가 다르고 생태계가 달라 당시 진달래가 어떤 종이고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할 뿐이다.

야생상태서 그날그날 의식주를 해결하느라 고단한 삶을 살았을 과거의 금강 사람들. 그러면서도 봄꽃 한아름에 환한 미소지으며 내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을 그들. 그들이 남긴 삶의 흔적은 온 데 간 데 없는데 그 옆으론 오늘의 금강 사람들이 오염시킨 강물만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진달래 흐드러진 언덕너머로 요절한 흥수아이의 일그러진 잔영이 아지랑이처럼 현기증을 일으킨다.

온 산야가 시끌벅적하다.

우수 경칩 이후 들려오기 시작한 봄의 소리, 생명의 소리가 청명을 지나면서 더욱 요란해지고 있다.
계절이 바뀌었음이리라.

겨울철새들이 혹한을 무대 삼아 멋진 군무와 운율을 펼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계절은 벌써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를 향해 달리고 있다.
계절이 바뀌면 대자연은 스스로 무대를 바꾸고 바뀐 무대엔 새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것이 곧 생태시계요 자연의 이치다.
봄은 소리없이 온다고 했던가.

하지만 생태계의 봄은 생물들의 사랑노래로부터 시작된다.

겨우내 움츠렸던 개구리들이 땅위로 기지개를 켜자마자 부르는 게 바로 사랑의 세레나데다. 생태계를 깨우는 서곡이자 봄을 알리는 전령가인 셈이다.
그 뒤를 잇는 게 텃새들의 합창이다. 참새와 박새 같은 텃새들이 생명의 계절 잉태의 계절, 봄이 되면 일제히 사랑노래를 쏟아놓는다. 사람이 사춘기가 되면 변성기를 맞듯 새들도 짝짓기철이 오면 울음소리가 바뀐다. 평소의 울음소리와 짝 찾아 사랑 나눌 때의 소리가 다르고, 둥지 틀어 새끼 기를 때 소리가 다르다. 산란철에 천적을 만나면 더욱 독특한 경계음을 낸다.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다.

 
4월은 바야흐로 텃새들의 산란철이다.

부산히 움직이고 재잘거리며 열심히 사랑을 나눠야 '대(代) 내림'이란 숭고한 사명을 마칠 수 있다.
지난 4월 4·5일, 속리산 천왕봉 숲속에선 말 그대로 '대자연의 교향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무심코 들으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소리겠지만, 계절 따라 상황 따라 울음소리가 변하는 새들의 생태와 속내를 알고 있는 필자로선 하나하나의 울음소리도 예사롭게 들을 수 없었다.
고운 빛깔의 곤줄박이 수컷이 암컷을 차지하려고 먹이를 문 채 애절하게 유혹하는 소리, 그에 화답하듯 재잘대며 교태부리는 암컷, 뭐에 뾰루퉁해졌는지 난 데 없이 사랑다툼 하는 진박새 부부, 그 사이에서 먹이를 찾다 황급히 달아나며 서로를 부르는 쇠박새 부부, 고목 둥치에 뒤늦게 둥지를 파느라 낯선 객이 오는지도 모르고 나무를 쪼는 청딱따구리 수컷, 그 옆나무서 망을 보다 수컷에게 경계신호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청딱따구리 암컷, 깊은 골짜기를 타고 멀리서 들려오는 멧비둘기의 구애소리….
사랑과 평화, 긴장과 경계의 신호가 서로 엇갈려 얼핏 들으면 불협화음처럼 들리지만 결코 그들의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세상 어떤 오키스트라가 이처럼 절묘하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낼 수 있을까. 달래강 발원지 탐사를 위해 세 번째 올랐던 당시 산행은 그래서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9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온 나라 안이 시끄럽다. 시끄럽다 못해 활극장을 방불케 한다.

모두가 저만 잘났다고 아우성이다. 민생이야 어떻든 내 알바 아니라며 온갖 고성과 손가락질로 상대방 비난에만 열 올리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수라장이다.

땅도 같고 계절도 같은데 인간계와 자연계가 내는 현재음(現在音)이 이렇듯 확연히 다르다.

한쪽에선 사랑과 생명의 하모니가 울려퍼지는데 다른 한쪽에선 협잡과 이기로 가득 찬 불협화음이 난무하고 있다.
대자연의 소리도 생태계가 건강히 유지될 때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 법.

하물며 우리 사회는 어떠랴. 서로 존중하고 정도를 지켜 나갈 때 비로소 사랑과 화합의 합창이 울려퍼지지 않을까.

입후보자를 포함한 정치인들이여. 선거종반으로 갈수록 적극 투표의사를 가진 사람수가 줄고, 부동층이 느는 이유를 아는가.

그대들이 무시해온 유권자·국민들의 '낮은 소리'가 표심이 되어 결국 '천둥소리'를 낼 것이란 걸 정녕 아는가.

이 글은 '언론의 언론'이라 불리는 '미디어 오늘'지에 실린 기사의 내용입니다.(2008년 3월 13일자)

서호납줄갱이의 한(恨)
[만화로 만난 언론계 사람들, 시즌2]세번째 이야기-충청타임즈 김성식 환경전문기자
2008 년 03 월 13 일 목16:09:27 이용호 연재작가
   
   
 

천연기념물 제454호 미호종개. 충북 음성군에서 발원하여 금강으로 흐르는 미호천에서만 서식한다는 미꾸리과 어류다. 폐수오염, 골재채취로 인한 수량 감소 등으로 하천 생물들은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 

멸종만은 허락할 수 없었다. 미호천으로 출근하기 일쑤였고, 산란장면을 찍기 위해 밤새는 건 일상이 됐다.

지난해 12월, 끝내 35편에 이르는 기획취재 <미호종개 시리즈>를 완결하고 만다. 사전 취재기간을 합쳐 꼬박 18개월이 걸린 작업이었다. 학계에선 난리가 났다. 첫 연재가 시작되자 우려 반 기대 반이었던 것이 연재가 계속 되자 격려로, 결국엔 ‘과분한’ 찬사로 이어졌다고.

단일 어종에 관한 연구로는 ‘기념비적인’ 보고서로 평가받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미 ‘바이블’로 통한다. 어떤 교수가 “등골이 오싹할 만한 자책의 매”라고 표현할 만큼 <미호종개 시리즈>는 학자들의 반성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80년대 말 처음 라틴학명인 ‘익수키미아 초이(Iksookimia choi)’로 알게 된 후, 늘 밀린 숙제와 같은 존재였던 미호종개 연구. 20년 만에 그 한을 풀었단다.

김성식 기자.
검은 머리카락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완전’백발의 중년이다. 중 2때부터 염색약을 발랐다고. 어느덧 충청도에서만 기자생활 20년이다. 안 가본 곳이 없다. 늘 환경전문기자였다.  

‘새 박사’ 윤무부 교수를 존경했고, 조류학자가 되고 싶었다. 행정학과를 졸업했고, 기자가 됐지만, 그가 걷는 길은 어릴 적 꿈꿨던 그 길과 다르지 않다. 사진기자에게 접사사진을 부탁했지만 “현장 찍는 것도 바쁜데~”라는 대답만 돌아 올 뿐. 결국 직접 접사카메라를 들었다. 그 사진이 수만 장에 이른다. 방대해서 정리할 엄두도 안 난다. 지역기자의 출장비로는 필름값 감당도 힘들었다고.

남편이 집안 일 말고 다른 일에 ‘미치면’ 아내는 괴롭다. 그의 아내 역시 그랬다. 그렇다고 고집을 꺾을 순 없는 노릇. 게다가 일도 여럿 벌였다. 청주 시내에 사업자등록을 하고 생태교실을 열었다. 참가회원들을 인솔하고 들로 산으로 바다로 생태체험을 다녔다. 급기야는  증평군 청천면에 양어장까지 차렸다.

“이놈들이 어떻게 알을 낳고 살아가는지, 자연 상태에 가장 가까운 양식방법은 뭔지. 그런 고민들 하는 곳이죠.”
그런 고민 끝에 특허도 냈다. <인공여울을 이용한 쏘가리 양식 방법>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방법”이라며 돈 되는 특허는 결코 아니란다.

“1990년 인가요? 제가 3년차 기자였을 때니까. 낙동강 상류에서 한강이북에 서식하는 북방종개가 발견됐어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1주일 간 역학조사를 벌였죠. 조사 결과 한강, 금강, 낙동강이 한줄기였고, 소백산맥이 솟아 3갈래로 갈라 놨다는 학설을 유추했죠. 생물 한 종에 대한 연구가 지질학적 수수께끼를 푼 셈이죠.”

생물 한 종이 갖는 환경적, 과학적, 역사적 의미가 그에겐 사명이다. 대운하에 대한 소견을 그의 블로그(http://blog.daum.net/koomlin)에서 인용해본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 남쪽으로 서로 갈라져 흐르는 우리나의 강 수계는 이른바 서한 아지역과 동북한 아지역, 남한 아지역이라는 세 개의 독특한 민물고기 분포구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어류상이 양양 남대천과 다르고 낙동강과 다른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중 필요한 물줄기를 이어 운하로 이용한다 하니 한반도 생태계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97년도 <금강의 생태>라는 기획보도로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3년간 매일 썼던 환경칼럼을 3권의 책으로 엮었고, <전문기자의 환경이야기>, <금강 1천리>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서호납줄갱이의 한(恨)을 공감하고 싶어 하는 자연인’이라 부르고 있다.
서호납줄갱이. 환경파괴와 인간들의 무관심속에 지금은 멸종된 토종 물고기다. 표본마저 미국 땅엘 가야 볼 수 있는 기구한 운명의 물고기. 그 슬픔을 알기에 더더욱 그가 지금의 길을 고집하지 않나 싶다.

“그깟 고기 살려서 뭐하냐?”는 핀잔도 들었을 법 하지만, 그의 ‘인간과 자연, 그리고 생태계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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