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불에 놀란 청명 절기

 
 흔히 도깨비불이라 불리는 인광(燐光) 때문에 두 번을 몸서리치게 놀란 적 있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겪은 일로서 지금도 모골이 송연하다. 어느날 친구 세 명과 함께 이웃마을에 놀러갔다가 늦게 돌아오게 됐는데 그날따라 밤하늘이 칠흑같았다. 다행히 깊은 산길은 아니었으나 5리가 넘는 시골길을 어린아이들끼리 걷는 걸 알았던지 커다란 짐승이 뒤따라오면서 잔뜩 겁을 주었다. 해서 모두가 신발을 벗어들고 걸음아 나 살려라 앞만 보고 내달리는데 한참 뒤 개울 건너편에서 갑자기 파란불이 춤을 추며 나타났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커다란 버드나무 고목에서 별안간 푸른 불빛이 널름거리니 모두가 기겁할 수밖에. 그 순간 우린 집단최면이라도 걸린 양 장승처럼 굳어졌다.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외마디 비명은 커녕 숨까지 멎는 듯했다.
 그러길 수십 분, 바람이 잦는가 싶더니 이내 파란불빛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정신을 차려 다들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날 밤 내내 악몽에 시달려야 했고 그 일 이후 우린 그 고목 근처도 가지 않았다.


 또 한 번은 군대 초년병 시절 겪은 일이다. 굴비로 유명한 전남 영광의 한 해안초소에 발령받아 근무할 때인데 그날도 별빛 한 점 없이 무척 컴컴하고 바람까지 불었다. 새벽 한 시쯤 서치라이트 당번이 걸려 혼자 근무하고 있는데 초소 앞바다 수면위로 이상한 불빛이 번쩍거렸다. 혹시나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서치라이트를 다시 비춰보니 영락없는 불빛이었다. 그것도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육지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몹시 긴장됐다. 마른침을 몇 번 삼킨 뒤 분대원들이 자고 있는 내부반의 비상벨부터 누르고 중대본부에 무전을 날렸다. “초소앞 11시 방향에서 수상한 불빛이 빠르게 접근중”이라고 숨넘어가듯 보고했다.
 자던 분대원들이 완전군장으로 나타나고 순찰나갔던 대원까지 합세해 비상배치됐다. 옆 초소도 난리가 났다. 본부 타격대까지 출동해 조명탄을 터트리며 수색에 나섰다. 하지만 결과는 황당했다. 충청도 촌놈이 바닷물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인광을 수상한 불빛으로 오인해 중대원들을 괜히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그 때만큼 뼈저리게 자연현상을 체득한 적도 없다.

 성격은 다르지만 또다른 도깨비불이 있다. 다름 아닌 봄철에 나는 불, 즉 봄불을 일컫는 말이다. 낙엽과 풀은 바싹 말라 있는 데다 바람마저 살랑이니 일단 불이 붙으면 도깨비가 불을 놓듯 여기 번쩍 저기 번쩍 순식간에 번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봄불은 여우불이라는 말도 같은 의미다. 눈에 보여도 끌까 말까한데 보이지도 않는 불이 이리 붙고 저리 옮겨 붙으니 불 가운데 가장 무서운 불이다.

 바야흐로 도깨비 봄불이 극성을 부리는 청명 절기다. 온 산야가 메말라 있고 대기마저 건조한 가운데 여기저기서 산불이 잇따르고 있다. 공무원들이 나서고 수많은 산불감시요원들이 연일 촉각을 곤두세워도 봄불은 여전히 신출귀몰하다. 맑고(淸) 밝아야(明) 할 절기에 산불 연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청명과 한식, 식목일이 겹친 지난 5일 우린 또다른 도깨비불을 봐야만 했다. 북한이 쏘아올린 장거리 로켓의 화염이 그것이다. 다들 쏘지 말라고 경고했는 데도 어린아이 불장난 하듯 쏘아진 커다란 불덩어리에 전 세계인이 경악했다.
 하지만 한반도 남쪽의 우리네보다 더 놀라고 긴장한 곳이 있으랴. 하필이면 일요일까지 겹쳤던 그날 땅에서는 언제 날 지 모르는 ‘그놈의’ 도깨비 봄불 때문에 바싹 긴장하고 하늘에서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그놈의’ 불덩어리 때문에 하던 일도 멈췄던 것이 바로 우리네였다.

생태시계가 망가진 올봄의 이상징후

 
 야생동물의 생태를 관찰하다보면 그들의 정확한 시간개념에 혀가 내둘러질 때가 많다. 얼마나 정확한 지 마치 몸속에 초시계라도 지닌 양 시간흐름을 용케 알아챈다.
야행성인 수달이 먹이활동을 위해 굴밖으로 나오는 시간은 정확히 일몰시간대다.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다른 곳보다 이르게 해가 지는 곳에서도 바깥 출입을 시작하는 시간은 매한가지다. 밖에 나와 해가 넘어가길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컴컴한 굴안에서 잠을 자다 해만 지면 영락없이 모습을 드러내니 기막힐 일 아닌가.
 더구나 그들은 날씨까지도 정확히 알아챈다. 구름이 끼거나 눈·비가 오는 걸 요즘 기상청 보다 더 잘 안다. 해서 행여 날이 궂을라치면 다른 날에 비해 좀더 일찍 나타나 부산 떤다. 또한 겨울철 기온이 급강하해 날씨가 추워지면 출현시간이 더뎌지거나 아예 드러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수달의 이같은 행동은 다분히 학습에 의한 본능으로 앞의 시간개념과는 다소 성격이 다르다. 즉, 날이 궂으면 더한 악천후를 대비해 더 많은 먹이를 먹으려고 부산 떠는 것이며, 갑자기 추워질 경우엔 먹잇감인 물고기들도 활동이 적어져 먹이찾기가 쉽질 않기 때문에 가능한 한 움직이질 않는 것이다. 괜한 게으름이 아니요 그들 나름대로 터득한 자연의 지혜다.


 하늘다람쥐 역시 시간흐름을 정확히 인지한다. 이들 또한 나무구멍 속에 들어앉아 낮동안 잠을 자다가 해가 넘어가는 시간에 맞춰 활동을 시작한다. 봄에서 겨울까지 이어지는 사계절의 해넘이 시간을 족집게처럼 알아챈다. 아마 사람들이 이들처럼 시간흐름을 잘 알아채면 시계란 이기(利器)도 별로 필요치 않았으리라. 하늘다람쥐는 특히 자신이 둥지서 나오는 시간 뿐만 아니라 매일 거쳐가는 텃세권을 마치 노선버스 다니듯 정확한 시간대에 맞춰 거쳐가는 습성이 있다. 참으로 영특한 동물이다.
 다만 하늘다람쥐도 겨울철 몹시 추운 날엔 바깥 활동이 뜸해지는데 이는 체형이 작은 포유동물들의 공통된 습성이다. 아무래도 체내의 피흐름이 원활치 못한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야생동물들이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은 실제로 그들 몸속에 시간을 감지하는 생태시스팀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생명체에 내재된 일종의 생태시계를 통해 그들의 생체리듬과 본능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계의 생태달력은 다름 아닌 이들 생명체의 생태시계와 그를 통해 나타나는 각각의 생체리듬이 모인 총화이다. 식물들 또한 새싹 돋울 시기와 꽃 필 시기, 열매 맺을 시기를 스스로 인지하는 것도 다 이런 기작 때문이다.
 자연이 자연스러운 때는 그 안에 사는 생물들의 생태시스팀이 원활히 작동될 때를 의미한다. 반대로 각 생물들의 생태시스팀이 원활히 작동되지 않을 때엔 각종 부자연스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봄에 여름꽃과 가을꽃이 피고 가을에 봄꽃과 여름꽃이 핀다면 그 어찌 자연스럽다고 하겠는가.


 널 뛰듯 하는 올해 날씨가 실제 느끼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 예사롭지 않을 것이란 전망은 이미 했던 터이지만 요즘 나타나는 징후들을 보면 그야말로 심상찮다.
 4월 하순에나 알을 낳는 원앙들이 3월 중순에 구애행동을 하고 여름철새인 호랑지빠귀가 벌써부터 날아와 “히이 호오” 귀신소리를 낸다. 전국의 양식장 물고기들은 갑작스런 수온변화로 각종 질병이 창궐하고 각 지역 하천에선 이름모를 이끼들이 잉크를 풀어놓은 양 번지고 있다. 음력 2월인데 시골 농가에 모기가 나타나고 해충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각종 생물들의 생태시계가 망가트려져 자연계의 생태달력마저 삐그덕 거리게 하는 게 목하 올 봄의 이상기후요 이상징후다.

직박구리가 가져온 이땅의 최고장

 
 우리 주변에 참새보다 더 흔해진 새가 있다. 참새에 비해 덩치가 훨씬 크고 소리 또한 더 요란하기 때문에 그들이 있는 곳이면 참새는 찍 소리도 못하고 범접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새를 잘 모르고 있다. 이름 뿐만 아니라 모습 역시 생소해 한다.
눈만 뜨면 자연과 접하는 농촌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 하고 도시공원을 찾은 노인들에게 물어봐도 역시 고개를 가로 젓는다. 하지만 모두들 갑자기 수가 많아진 것 만큼은 분명히 인정한다.


 우리나라 터줏대감격인 참새의 생태적 지위를 하루아침에 위협하게 된 이 새,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나라 조류(鳥類) 생태계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이 새는 다름 아닌 직박구리다.
 참새와 같은 참새목에 속하나 몸 길이가 28cm로 참새의 두 배나 되고 몸색깔은 전체적으로 회갈색을 띤 새다. 옛 사람들이 흔히 이 새를 ‘후루룩 빗죽새’라고 불렀을 정도로 우는 소리가 특이해 ‘삣 삣 삐이’ 혹은 ‘삐유르르르르 삐이요’ 하고 시끄럽게 우는 특징이 있다.
 이 새가 어느 새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은 제주도나 남해안에 갔을 때 바닷가 동백나무 숲에서 ‘삣 삣’ 거리며 요란을 떨던 새를 생각하면 된다. 이 새가 과거엔 제주도나 남해안 등지에서만 쉽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본래 한반도의 중부이남에서 번식하는 텃새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국내에서 발간된 조류도감을 보면 한국의 중부이남을 비롯해 일본,타이완,필리핀 등지서 번식하는 남방계의 산림성 조류로 설명돼 있다.


 이러한 ‘남쪽새’가 충청지역은 물론 경기도와 서울지역까지 우점(優占)하는 등 왜 돌연 한반도를 점령해 가고 있을까. 더욱이 점령 속도도 엄청 빠르게 말이다. 지난 1990년대까지만 해도 중부지역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새가 불과 10년 안팎에 남한지역을 완전히 그들의 텃새권으로 만들어버렸다. 서울에서는 이미 비둘기와 까치 다음으로 많은 새가 됐다. 참새를 세번째 순위에서 몰아낸 것이다.
 우리나라의 조류도감을 전면 수정하게끔 하고 있는 이같은 현상, 국내 조류학계가 공식 논문발표도 하기 전에 전국을 뒤덮어 버린 직박구리의 대란. 이러한 일이 도대체 왜 일어나고 있을까. 이는 한 마디로 이상징후다. 아니 이보다 더 뚜렷한 자연계의 최고장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반도의 기후와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생태계까지 그 못지 않게 급속도로 변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마지막 경고장인 셈이다.
 텃새는 말 그대로 계절이 바뀌어도 이동하지 않고 한 지역에 머무는 새이다. 이는 그 지역에서 나고 자라 생태와 습성이 완전히 그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맞도록 적응한 까닭이다. 그러기에 텃새가 자신의 텃새권을 넓혀나간다는 것은 그들이 살기에 적합한 기후와 환경이 그만큼 넓어졌음을 뜻하는 확실한 증거다.
 다시 말하지만 직박구리는 최소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분명 남쪽에나 가야 볼 수 있었던 남방계 조류였다. 그런데 지금은 참새보다 더 가까운(?) 이웃새가 됐다. ‘가까운’에 물음표를 표기한 것은 그들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데 정녕 우리들은 그들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그로 인해 수백 수천 년을 이어져온 우리 주변의 생태계가 완전히 딴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남의 일인 양 불감증에 빠져있다.
 모성애가 무척 강해 번식기엔 까치도 꼼짝 못하게 하는 억척스러움과 무엇이든 잘 먹는 탐식성의 새 직박구리, 그들이 갑작스럽게 개체수를 불려나가고 있는 이 땅의 생태계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이상한 봄이 또다시 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농촌하면 떠오르는 것이 고목이다. 일종의 랜드마크라 할까.

길을 가다가도 고목이 나타나면 으레 가까운 곳에 마을이 나오고 행여 마을이 없으면 적어도 옛 마을터나 집터가 자리하고 있는 게 우리네 농촌이다.
   그만큼 고목은 우리 농촌을 대표하는 상징물로서 그 자체가 고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예부터 고목은 마을을 지켜온 수호신이자 휴식을 주던 쉼터요 할아버지의 따스한 정을 기억케 하는 매개체였다.
 고목은 또 자연 생태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니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태박물관이었다.
봄이 되면 참새와 찌르레기,원앙이 날아들어 줄기와 가지에 난 구멍마다 둥지 트느라 요란했고 여름이면 서쪽새 깃들어 밤새 불침번 서던 곳이 고목이다. 또 늦가을 돼 서리라도 내릴라 치면 구렁이,무자치 얼어죽을 새라 밑둥치 구멍으로 속속 기어들고 중턱 나뭇가지 구멍으론 귀염둥이 다람쥐 겨울잠 자러 서둘러 들어가던 곳이 바로 고목이다. 또 겨울이 오면 올빼미 눈 부라리며 썩은 나무구멍 찾아 몸 숨기고 터줏대감 부엉이는 밤새 울며 괜한 아이 겁 주던 곳이 마을어귀 고목이었다. 일년내내 딸린 식구 많아 늘 시끄럽고 사시사철 생명이 머물던 생태계의 텃밭이었다.
 

  그러던 고목이 요즘엔 어떻게 됐나.

봄이 와도 찌르레기,원앙은 커녕 참새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고 여름철 서쪽새 울음소리 끊긴 지 오래다. 유구한 마을마다 전설처럼 내려오던 고목나무 속 구렁이 얘기도, 겨울밤이면 머리끝을 쭈뼛쭈뼛하게 만들던 부엉이 소리도 추억속 옛일이 됐다.
 나무는 서있건 만 생명의 발길이 무 잘리듯 단절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온갖 생명이 들끓던 고목들이 왜 이처럼 황량해졌을까. 답은 하나, 우리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고목의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막아버림으로써 생명의 발길을 끊어버린 것이다. 고목의 줄기나 가지에 난 구멍은 새를 비롯한 많은 생명들의 둥지 내지 거소 역할을 해온 중요한 서식환경이다. 참새가 붙박아 살고 찌르레기와 원앙이 날아들며 서쪽새와 올빼미가 찾아든 것도 기실 나무구멍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중요한 곳에 엉뚱한 손을 댐으로써 그곳을 찾던 생명들을 졸지에 갈 곳 없는 미아(迷兒)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나무를 살리기 위한 외과수술이란 미명 아래 전국에 있던 거의 모든 고목의 구멍들을 몰타르와 스치로폼 류로 온통 ‘땜질’한 웃지 못할 처방(?)으로 인해 그곳에 깃들던 생명들로 하여금 집 잃은 설움을 겪게 한 일대 사건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편협한 잣대가 부른 자연파괴 행위다.
 

  수백년을 살아온 고목들은 비바람을 비롯한 모든 자연조건에 적응한 결과로서 가지에 구멍도 생기고 때론 줄기 자체가 텅 빈 채 서 있는 것이 본디 모습이다. 또한 오래된 줄기 가운데엔 죽은 세포가 모여 살아있는 세포를 감싸 보호하는 것이 나무의 섭리다. 그러니 구멍 몇 개 난 들 큰 문제가 안되며 자신의 썩은 구멍으로 인해 죽었다는 나무도 보질 못했다.
 그런데 이같은 자연섭리를 생각지 않고- 순전히 인간의 시각에서- 그것을 도려내고 땜질해 주면 오래 살겠지 하는 단순한 판단이 결국 나무에게도 씻지 못할 생채기를 남기고 생태계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꼴이 됐다.

 한쪽에선 인공둥지를 달고 먹이까지 줘 가며 억지로라도 야생동물을 불러들이려 하고 또 한쪽에선 엉뚱한 발상으로 찾아오던 동물마저도 내쫓는 게  우리네다. 전문적인 의견은 무시되기 일쑤이고 들으려하지도 않는다.
 산란철 앞둔 참새가 가까운 고목 놔두고 애써 콘크리트 구멍 찾아 기웃거리는 그 이상한 봄이 또다시 오고 있다.

‘진정한 숲’을 보려면 그대로 둬라

 
 봄을 맞는 산들이 시끄럽다.

   깊은 산 골짜기는 물론 인가 근처 산에서도 굉음이 울려퍼지고 있다. 다름 아닌 나무베는 소리다.
   예전엔 일일이 톱질 해 나무를 베었지만 요즘엔 기계톱으로 하기에 소리가 여간 큰 게 아니다. 엔진이 달린 데다 동시에 여러 대가 가동되기 일쑤이니 소리가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메아리까지 합쳐지면 더욱 요란하다.
 처음엔 낮은 소리였다가 곧바로 찢어질 듯한 고음이 나면 영락없이 나무 하나가 넘어간다. 그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1~2분이다. 길어봤자 5분이 안 걸린다. 수 십 년 살아온 생명이 그렇게 속절없이 끝난다.
 

   요즘 이뤄지고 있는 나무베기 작업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솎아베기 즉 간벌이요 또 하나는 송두리째 베어내는 벌목이다. 공식적인 작업만 두 가지지 뗄나무를 장만하기 위해 몰래 베는 도벌까지 합하면 세 가지다.
 간벌과 벌목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간벌은 나무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잘 자라도록 시원찮은(?) 나무를 솎아주려는 것이며 벌목은 다 키운 나무를 수확하거나 산지 개발 혹은 수종갱신을 위해 허가를 얻은 후 실시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요즘엔 일자리 만들기의 일환으로 해당 기관들이 앞다퉈 작업을 벌이다 보니 산 하나 건너마다 기계톱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다.
 

   문제는 무분별한 나무베기가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벨 곳 안 벨 곳 가리지 않고 무작정 기계톱을 들이댄다. 간벌과 벌목, 일자리 만들기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다.
 특히 간벌은 그 효과가 크다는 걸 익히 안다. 간벌한 산과 안 한 산은 차이가 난다. 나무 자라는 게 다르다. 벌목 역시 수종갱신을 위해선 꼭 필요한 절차요 효과 또한 무시할 게 아니다.
 하지만 그 효과란 것이 문제의 원인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효과냐는 것이다. 정녕 산을 위하고 나무를 위한 것인지 궁금하다.
 쓸만한 나무만 잘 자라게 하는 것이 진정 자연을 위하는 일인가. 그 어찌 산마다 쓸만한 나무만 있어야 하는가.

   자연에는 불필요한 것이 없다. 그러니까 자연이다. 한자(漢子)를 놓고 봐도 그렇다. ‘스스로 자(自) 자’에 그럴 연(然)‘이 합쳐진 게 자연이니 말 그대로 ’스스로 그렇게 된 것‘ 혹은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바로 자연 아닌가.
 

   무참히 잘려나가는 나무 한 그루도 귀중한 생명이거니와 그 나무 한 그루가 잘려져 나감으로써 숲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야 한다. 나무 하나가 쓰러지면 그 공간은 졸지에 혼돈 상태가 된다. 전에 비치지 않던 햇빛이 들어오고 또 그렇게 되면 하층부의 식물이 영향을 받는 등 여파가 도미노처럼 번진다. 
 졸지에 휑하니 뚫려진 숲 환경은 야생동물들을 불안케 한다. 갑자기 바뀐 환경을 그들이 좋아할 리 없다. 또 하나는 굉음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다. 조용하던 산골짜기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굉음은 그 자체가 폭탄이다. 산에 깃들어 사는 동물들이 치명타를 입는다. 난데 없는 소리에 기겁해 달아나야 하고 야행성 동물들은 잠 잘 시간에 괜한 생고생을 해야 한다. 가뜩이나 요즘은 들짐승들이 새끼 갖는 시기다.  
 며칠 전엔 이런 일이 있었다. 지난해 괴산군을 떠들석하게 했던 ’괴산호주변 까막딱따구리‘ 둥지 바로 근처서 별안간 간벌굉음이 울려퍼졌다. 벼락을 맞은 듯한 놀란 가슴으로 즉시 해당부서에 연락해 중단시키긴 했으나 아직도 떨떠름하다.
 

   간벌과 벌목을 하지말라는 게 아니다. 하더라도 나무만 보지 말고 숲생태계도 봐가면서 하라는 얘기다. 아울러 진정한 숲을 보려거든 스스로 그러려니 내버려 두는 일도 한 방법임을 강조하는 바다. 

별스런 봄날씨 결코 예삿일 아니다

 
 산과 들이 10여일전 모습과는 딴판이다. 설연휴 동안 전국을 빙판길로 만들었던 폭설 흔적은 온데간데 없고 어느새 언덕마루엔 아지랑이가 살랑이고 냇가에선 버들강아지가 복슬복슬 피어나고 있다. 여우같은 날씨 탓에 불과 며칠만에 한겨울서 곧바로 봄을 맞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례적인 ‘정월속 삼월날씨’가 이어지면서 바빠진 건 자연계의 동식물이다. 새들은 새들대로 들짐승은 들짐승대로 성급한 기지개 켜고 때아닌 신혼살림 준비에 분주하다. 마을앞 까치부부는 벌써 둥지를 반 이상 틀고 제 짝 한눈팔세라 구애행동에 열올리고 있다. 수십마리 떼지어 날던 참새들도 어느덧 제 둥지 찾아 각자의 텃새권을 확보하고 달라진 목소리를 낸다.
 겨우내 얼어붙어 제대로 활동 못했던 달래강 수달부부도 이젠 곧잘 나타나 사랑다툼에 여념없다. 다른 동물보다 일찍 새끼 깐 수리부엉이도 늘어난 식구에 몸이 달았는지 쉰 목소리를 내며 분주히 날아들고 앞개울변 암고라니는 만삭의 몸으로 신랑따라 뒤뚱인다. 예년 같으면 아직 이동시기가 멀었을 청둥오리도 요즘들어 북쪽 향해 망향가 부르는 횟수가 잦아졌고 겨우내 뒷동산 배회하면서 작은 새들의 간을 콩알만하게 만들던 말똥가리의 행동도 이젠 예사롭지 않다. 
 때이른 봄날씨에 꿀벌도 제정신이 아니다. 아직은 벌통안에 똘똘뭉쳐 체온 유지할 철인데 갑작스런 기온상승에 서툰 날갯짓 했다가 이내 내려앉아 벌벌 떠는 모습이 안쓰럽다.
 식물들 역시 춘심을 못이겨 생활리듬이 빨라졌다. 앞집 울타리 매화나무 꽃망울이 아침 저녁으로 모습을 달리하고 밭둑 쑥밭에선 금방이라도 “쑥~”하고 새싹이 돋을 것처럼 꿈틀댄다.  
 바빠진 건 사람도 마찬가지다. 농부는 농부대로 도시인은 도시인대로 발걸음이 달라졌다. 과수원 하는 이웃주민들은 꽃눈이 더 커지기 전에 가지치기를 마쳐야 한다며 돈내기 하듯 가위손 놀리기 바쁘고 파종 앞둔 고추농가들은 비닐하우스 손질하랴 묘판 손질하랴 바지춤 내려가는 것도 모른다.
 도시인들 역시 성급한 봄나들이에 야외행렬이 잦아졌다. 도시근교 벌판엔 벌써부터 나물 캐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각 산 등산로엔 이른봄 산행을 즐기려는 발길이 줄을 잇는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달라지고 바빠지는 게 자연계요 인간사다. 하지만 올 봄맞이는 유난히 별스럽다. 아니 별스럽다 못해 걱정스럽다. 죽 끓듯 변덕스런 날씨가 가져온 이상기온이 결코 달갑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널뛰듯 갑자기 오른 기온 덕에 서민들 난방비 걱정은 덜었지만 그 이상으로 걱정되는 것이 농축산물과 자연생태계 피해다.
 갑자기 찾아온 이상기온이 장기화 되고 극심한 일교차에 겨울안개까지 연일 끼는 것 자체가 농축산 일과 생태계에 큰부담을 주고 있다. 동식물의 생태시계 혼돈에 따른 조기 개화와 조기 산란, 병충해 극성 등이 우려되고 가축들에겐 호흡기 질환과 집단폐사까지 걱정된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철이다. 절기로야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은 음력 정월이요 양력으로도 이월이다. 우수 이전의 입춘추위도 있고 꽃샘추위도 있기 마련인 게 이즈음이다. 한 마디로 냉해마저 우려된다는 얘기다.


 행여 큰추위가 다시 오면 안되겠지만, 그래도 못 믿을 게 이즈음 날씨이고 보면 이대로 앉아 보고만 있을 문제가 아니다. 기상청과 농민들은 날씨변화에 더욱 긴장하고 농축산 당국과 지자체는 예찰 및 지도 강화 등 대책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작금의 가뭄사태가 말해주듯 최선의 방책은 철저한 사전대비밖에 없다. 피해가 나타난 뒤에 특별재해지구 선포니 뭐니 해봤자 말짱 사후약방문이다.
 올 대보름달은 왠지 밝게 보이지만은 않다.

득신과 올 농사, 그리고 기상 예측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옛말 가운데 득신(得辛)이란 게 있다. 본래는 음력 정월 상순에 첫 번째 드는 신일(辛日)을 일컬었으나 매년 연초에 벼농사의 풍흉을 점치던 일종의 풍습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정월 초하루에 신일이 들면 일일득신, 초이틀에 들면 이일득신, …, 초열흘에 들면 십일득신이라 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일, 이일…'이라는 그해의 득신일수로, 바로 이 득신일수가 벼농사의 풍흉을 예측하는 점괘 역할을 했다. 즉, 그 해의 득신일에 따라 벼의 개화 기간이 좌우되고 또 그 기간의 장단에 따라 풍흉이 결정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일일득신인 해는 하룻동안, 이일득신인 해는 이틀동안,…, 십일득신인 해는 열흘동안 벼꽃이 핀다고 믿어 벼농사 작황이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벼는 개화 기간에 따라, 또 그 기간 동안의 기후여건에 따라 작황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개화 기간이 너무 짧거나 길어도 덜 좋다. 따라서 선조들은 벼의 개화기를 벼가 장가드는 시기라 하여 중요시했으며 그 기간이 길고 짧냐를 득신일에 비춰 헤아려 보고는 미리 풍흉을 점쳐 대비했던 것이다. 벼농사에 가장 좋은 득신일은 5일이며 4일과 6일은 비교적 양호, 그밖의 득신일은 흉작 내지 작황이 별로 좋지 않다고 믿었다.

슈퍼컴퓨터로 기후예측을 하고 과학영농기술이 발달한 요즘 세상에 웬 뜬금없는 구닥다리 풍습을 들먹이냐고 할 지 모르나, 득신일에 따른 풍흉 예측이 벼농사에 큰 도움을 준다는 주장이 있기에 한번쯤 참고해 볼 필요성이 있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또한 올해의 경우 득신일로 봐선 대흉작이 예고돼 이에 대한 대비책이 요구된다는 경계의 의미도 있다.

득신일에 따른 풍흉 예측이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가는 진천의 코시바이오란 회사가 내놓은 최근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2001년 이후 8년 동안의 득신일과 벼작황을 대비한 결과 선조들의 예측이 놀랄만큼 맞아떨어지고 있다.
실제로 득신일이 4일이었던 2001년엔 재해가 적고 일조량이 넉넉해 풍작이었던 반면 득신일이 1일이었던 2002년도엔 태풍 루사 등 악천후로 쓰러짐 피해와 일조량이 부족해 흉작이 들었고 득신일이 7일이었던 2003년도에도 태풍 매미와 냉해 등으로 20여년만의 흉작이, 득신일이 2일이었던 2004년도에도 겨울철 이상기온에 가뭄과 백엽고병까지 발생해 흉작이 들었다.
또 득신일이 8일이었던 2005년도에도 잦은 국지성 호우로 침관수와 불임(不姙)이 발생해 흉작이 있었던 반면 득신일이 4일이었던 2006년도엔 별다른 재해 없이 평년작을 웃도는 작황을 이뤘으며 득신일이 9일이었던 2007년도엔 도복 및 백엽고병 발생과 등숙률(여뭄) 저조로 평년작에도 못미치는 흉작을 기록했다. 2008년도엔 득신일이 가장 좋다는 5일인 가운데 재해가 없고 일기도 양호해 사상 최대의 풍작이 나타났다.

8년간의 사례지만 이만하면 기막힐 정도 아닌가. 가히 족집게 수준이다.
그렇다면 올 작황은 어떨까. 올해는 정월 초하루가 신미일(辛未日)이니 일일득신이다. 득신일로 보면 최악이다.

앞의 자료도 도복과 병해충이 발생하고 일조량까지 부족해 흉작이 우려된다고 예측하고 있다. 대풍이 와도 시원찮을 판에 흉작이 예상된다니 걱정이다. 가뜩이나 이 예측의 이면엔 올여름 기상예보까지 포함돼 있다.

잊혀진 풍습이지만 선조들의 오랜 경험과 슬기가 담긴 득신. 그 경험칙의 의미를 되새겨봄으로써 올해의 난관을 슬기롭게 헤쳐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 올해처럼 일일득신이었던 2002년도엔 태풍 루사가 지나갔음을 꼭 상기했으면 한다. 우린 이미 대가뭄 속에 있다.

수렵철, 짐승도 떨고 사람도 떨고 있다

 
며칠전 청원ㆍ괴산 경계의 한 마을에선 별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130kg이나 되는 커다란 멧돼지가 마을옆 봇도랑에 빠져 죽은 것이다. 시멘트 구조물이긴 하지만 너비와 높이가 고작 1m 남짓하고 물도 말라있는 봇도랑이기에 모두들 의아해 했다.

위급상황이 벌어지면 사냥개도 쉽게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민첩하고 괴력을 발휘하는 야생 멧돼지가, 그것도 자기 키의 한 길도 채 안 되는 도랑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객사하다니. 총에 맞아 창자가 밖으로 나와도 그것을 씹어가면서 덤벼들고 또 덫에 걸리면 발목을 끊고라도 도망치는 악착스러움과 강한 생명력을 가진 멧돼지이기에 의아심은 더욱 컸다.
주민들에 의하면 당시 그 멧돼지는 특별한 외상도 없었고 병들어 쇠약한 상태도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얼마나 발버둥 쳤으면 발굽이 다 까지고 두눈은 부릅뜬 채 앞발을 난간에 걸치고 죽었단다.

 
또 엊그제엔 이런 일도 겪었다.

멧돼지가 죽은 곳서 아주 가까운 농로를 지나치다 고라니와 마주쳤다. 대낮에 고라니와 마주친 게 이상한 게 아니라 그 고라니의 행동이 이상했다. 맞은 편서 황급히 달려오던 고라니는 차를 보자마자 맹수를 만난 양 뒤도 돌아보지 않고 똥줄이 빠져라 달아났다. 헌데 뛰는 모습이 영 이상했다. 한쪽 다리를 저는 것이었다. 깨금발을 뛰듯 엉덩이를 실룩거리던 그 고라니는 한참 뒤 다른 장소서 다시 마주쳤을 때도 역시 기겁을 했다.
당시 필자는 겨울철 야생동물을 촬영하느라 좁다란 농로를 매우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던 중이어서 평소 같으면 고라니가 그렇게 까지 놀라 허둥대진 않았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데 별안간 하천 건너편서 총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게 답이었다. 총소리를 듣는 순간 두 가지 의문점이 풀린 것이다.

멧돼지가 비명횡사하고 고라니가 깨금발로 달아나던 장소는 다름 아닌 청원군 경계와 바로 이웃한 지역이다. 청원군 지역은 올겨울 순환수렵장이 운영되는 곳이다.

해서 이곳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연일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고 졸지에 사냥밥 신세가 된 야생동물들은 살길 찾아 인근 타지역으로 몸을 피하고 있다. 봇도랑에 빠져 죽은 멧돼지 역시 청원지역서 사냥꾼에 쫓겨 ‘피난’하다 기진맥진해 참변을 당했다.  

비록 청원 뿐만 아니라 진천,음성,제천 등 순환수렵장이 운영되고 있는 지역의 야생동물들은 요즘 편안할 날이 없다.

그들이 얼마나 불안해 하는가는 그들의 행동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어찌나 사람을 무서워하는지 달리던 차가 멈춰서는 시늉만 해도 즉각 달아나거나 긴장한다. 총을 쏠까 두려워서다.

지자체마다 돌아가면서 순환수렵장을 운영하는 이유는 유해조수를 구제하고 건전한 수렵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그러기에 제도 자체를 탓하는 건 아니다.

늘어난 들짐승 때문에 농사철 내내 밤잠 설치는 산간주민들의 애타는 농심도 잘 알고 있고 1년을 학수고대하며 수렵철을 기다려온 엽사들의 기분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일부 몰지각한 엽사들의 그릇된 총질로 인해 야생동물들이 수난 당하고 농촌주민들이 불안에 떠는 등 부작용이 심각한 데 있다.

예전의 엽도(獵道)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날짐승이 땅이나 물위에 있을 땐 절대 쏘지 않고 한번 놓친 들짐승은 뒤쫓지 말아야 함에도 기필코 잡겠다는 듯 막무가내다.

인가에선 총소리를 내지 않는 게 도리인데 걸핏하면 지붕과 마당위로 총알이 날아든다.

주민들은 하소연하고 싶어도 총 든 이들이기에 함부로 말도 못한다.
짐승도 떨고 사람도 떠는, 그래서 더 으스스해진 곳이 요즘의 순환수렵장 부근 산간마을이다.

언제까지 풍선만 불어댈 것인가

 
 충북도청서 경제부처 합동 지역경제설명회가 열리던 지난 7일 괴산 불정·감물지역 주민들을 만났다. 정부가 추진중인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와 관련해 ‘최근 이 지역 주민들이 달천댐 건설을 관계기관에 건의했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주민들의 답변은 이러했다. “어느 누구도 댐 건설을 건의한 적은 없다. 다만 주민 대다수가 댐 건설을 희망하고 있고 또 언젠가는 댐이 건설될 것으로 믿고 있다. 오죽하면 댐 건설을 반대하던 사람들까지도 마음을 돌리겠는가.”
 의외였다. 달천댐 건설 재추진 논란이 일던 2006~7년까지만 해도 댐 얘기만 꺼내면 고개를 젓거나 화를 내던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왜 그럴까. 불과 1년여 전까지만 해도 옆사람 눈치보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주민들이 이젠 대놓고 댐 얘기를 하니 이유가 궁금했다.
 “댐요? 이왕에 들어설 것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들어서는 편이 주민들을 살리는 겁니다. 이거야 원, 사람이 살 지역입니까.”
 댐 건설 예정지로 거론된 후 지역사회가 묘하게 돌아가면서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얘기다. 그 첫번째 이유는 댐 건설 예정지로 지목된 후 부동산 거래가 뚝 끊기고 상권까지 죽었으며 집과 창고가 낡아도 수리할 생각조차 안하고 논에 객토도 안한다는 것이다. 수리하고 객토해 봤자 보상을 더 받는 것도 아니라며 아예 손을 놓고 있단다. 한 마디로 의욕상실증에 빠져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역인심이 갈수록 흉흉해지고 있음을 들고 있다. 지역에 경조사가 있어도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조해 봤자 추후 댐이 건설돼 서로 흩어지면 헛부조가 될 게 뻔하다는 생각에서다. 깜짝 놀랄 일이다. 댐 얘기가 주민들의 의욕을 앗아가고 인심까지 변하게 만들었으니 이야말로 큰 부작용 아닌가.
 대화도중 궁금증 하나가 늘었다. 왜 이곳 주민들이 지금같이 달천댐 건설을 기정사실처럼 믿게 됐는가. 답은 간단했다. 정부가 아직까지 달천댐 계획을 완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지난 2007년 7월, 당시 건설교통부가 댐 건설 장기계획 변경보고서에 ‘남한강 달천수계 댐 후보지는 해당 지자체와 협의를 완료한 후 추진한다’고 명시한 것을 괴산군이 “이는 사실상 백지화를 선언한 것”이라 해석해 언론에 보도됐으나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주민은 없다는 설명이다.
 국가의 댐건설 장기계획은 그 성격상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또 다시 추진될 것으로 주민들은 믿고 있다. 다만 중요한 건 언제 삽을 대느냐인데 그 시기가 줄곧 오리무중이어서 지금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권도엽 국토해양부 1차관이 충북도청을 방문, 달천댐 건설 재추진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상황을 봐야 한다”라면서도 “남한강 수계는 댐이 절대 부족한 상황”이라느니 “희생과 양보가 필요하다”느니 아리송한 답변만 늘어놓음으로써 가뜩이나 혼란스런 지역정서에 기름을 잔뜩 부었다. 실체없는 변죽만 또다시 울린 셈이다.
 언제까지 이처럼 풍선만 불어댈 것인가. 언제까지 자꾸만 말장난할 것인가.

 
 4대강 살리기 프로젝트도 그렇다. 모두 다 좋으라고 하는 사업이니 믿고 따라오라고만 외쳐댈 뿐 구체적인 내용은 여전히 안개속이다. 사업착수일은 앞당겨져 눈앞인 데도 실체는 줄곧 ‘기대하시라’다. 
 풍선은 자꾸 불면 터진다. 제 아무리 깜짝쇼도 좋고 기밀유지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풍선만 불어대면 무대도 열기 전에 터져 날아가고 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속이 썩어 문드러져가는 달천강 주민들, 나아가 국민들 생각좀 했으면 한다.

새해엔 ‘로드킬’ 없는 세상을 꿈꾸자

 
 두 달 전 일이다. 괴산호 생태 탐사를 위해 산막이란 마을에 들어가 있는데 괴산 청천의 한 후배로부터 긴급 연락이 왔다. 화양동 계곡으로 통하는 도로변에 엄청 큰 새가 죽어있다며 숨 넘어가는 소릴 한다.

   예감이 좋질 않아 곧바로 달려갔더니 역시나 였다.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종인 수리부엉이였다. 덩치와 발톱,부리로 보아 1년도 채 안된 유조였다. 특별한 외상은 없는데 몸속 뼈가 다 으스러졌다.

   로드킬(Road kill)이다. 자기 혼자 먹이잡이 나왔다가 지나가는 차량에 부딪혀 횡사한 것이다. 위에 내용물이 있나 보니 비어 있었다. 얼마나 배가 고파 기진맥진했으면 지나가는 차량도 못보고 피하지 못했을까.

   설령 어린 개체라 하더라도 시력과 청력하면 그 어떤 야생동물보다도 뛰어난 밤의 제왕 수리부엉이가 아니던가.
 

   지난 주엔 달래강의 겨울철새를 촬영키 위해 충주 인근 수주 팔봉쪽으로 향하는데 바로 앞차가 느닷없이 급정거 하면서 휘청거렸다. 아차 싶어 차밑을 보니 금새 피가 흥건했다. 너구리였다. 야행성이라 주로 밤에 활동하지만 그 역시 굶주린 배를 참지 못하고 한낮에 먹을거리 구하러 나왔다가 참변을 당했다.
 또 3일 전엔 청원군 미원면 달래강변 도로서 고라니 한 마리가, 그 이튿날엔 비슷한 장소서 족제비 한 마리가 처절한 죽음을 맞았다. 생활권이 괴산 청천인 데다 야생동물이 많이 사는 달래강변을 자주 찾다 보니 요즘 들어 로드킬 당한 야생동물 사체들을 부쩍 많이 보게 된다.

 
 야생동물의 로드킬을 볼 때마다 아쉬운 것이 있다. 바로 우리의 무관심이다.

   지나는 운전자들은 대부분 목격 순간만 잠시 얼굴을 찡그릴 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내 집 강아지가 그렇게 됐다면 아마 그렇게 황급히 지나치진 않을 것이다. 또 자신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들짐승을 직면했다면 얼마나 당황하고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란 생각도 별로 않는다.
 당국의 노력도 너무나 미흡하다. 최근 들어 환경부가 인터넷 웹진을 통해 로드킬의 심각성을 알리고는 있지만 그에 대한 대책은 까마득하다. 고속도로 혹은 신설도로에 전시품처럼 만들어 놓은 생태도로란 것도 실로 가관이다. 어린아이에게 밧줄위를 걸어 강물을 건너라는 격이다. 야생동물들은 서커스단의 조련된 동물이 아니다.

      
 로드킬 당한 사체들을 신속히 제거 처리하지 않는 것도 큰 문제다. 오죽하면 도로마다 로드킬 당한 동물들의 사체가 오고 가는 차량에 의해 짓밟히고 또 짓밟혀 아예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있는 곳이 즐비하겠는가.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들의 처분(?)은 늘 까치와 까마귀 몫이 된다. 이동통로가 졸지에 사선(死線)으로 변한 것도 억울할 판인 데 짓밟히고 짓찟기고 형체도 없이 ‘노상분해’되는 팔자가 곧 우리나라 야생동물들이다.
 기왕 나온 김에 까치와 까마귀 얘기 좀 더 해야겠다. 요즘의 까치와 까마귀를 자세히 보라. 그들이 왜 도로변을 맴돌고 있는가. 바로 로드킬 때문이다. 그들은 항시 도로변을 맴돌고 있다가 로드킬 사체가 발견되면 곧장 몰려든다. 사고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오는 견인차 같다. 질주하는 차량도 겁내지 않는다. 우리의 무관심은 결국 까치와 까마귀들의 행동까지 변화시켰다.


 이젠 로드킬 방지를 위한 특단이 필요하다. 단순히 전시행정에 그치지 말고, 국내 전 도로를 그야말로 안전한 도로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로드킬 없는 도로, 그것은 곧 사람도 안전한 도로다.
 우리의 무관심이 까치와 까마귀들의 행동까지 뒤바꾸어 놨으니, 이번엔 우리의 관심으로 그들을 더 이상 로드킬 사체나 탐내는 ‘걸조(乞鳥)의 굴레’에서 벗어나게끔 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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