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동물로 낙인 찍힌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 된 배경엔 구약성서가 있다. 창세기편에 ‘비둘기가 저녁때가 되어 돌아왔는데 부리에 금방 딴 올리브 이파리를 물고 있었다. 그제야 노아는 물이 줄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기록이 그 단서다.
물의 심판으로 온세상이 홍수로 뒤덮였을 때 방주에 타고 있던 노아가 바깥 정황을 살피기 위해 날려보낸 것이 비둘기요 그 비둘기가 마침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줌으로써 노아 일행이 구원받았다는 얘기다. 올리브나무는 평화를 뜻한다. 따라서 구약성서는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이파리를 물어다 준 매개체, 즉 평화의 메신저로 묘사하고 있다.
 부산의 유엔기념공원은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다. 이곳 추모관 유리창엔 비둘기가 그려져 있고 위령탑엔 올리브 가지와 비둘기 상이 조각돼 있다. 올리브 가지와 비둘기는 평화를 지향하는 유엔의 상징이기도 하다. 


 비둘기는 인류가 가장 먼저 길들인 조류다. 그만큼 가깝게 지내왔다. 때론 식용으로, 때론 전서구나 경주용,공연용으로 길러졌으며 의학에선 실험동물로 이용돼 왔다. 전세계 비둘기는 수백종, 그중 품종 개량돼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종이 집비둘기다. 집비둘기는 거리비둘기(street pigeon)로 불릴 만큼 현대도시의 한 단면을 차지한다.
 동서양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흔히 마주치는 것이 비둘기다.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정원에서 방문객들의 발길에 차일 듯 말 듯 오가다가 뜬금없이 성모상에 올라 흰똥을 싸던 비둘기 모습은 15년이 지났어도 눈에 선하다.
 비둘기하면 생각나는 또 하나의 명소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이다. 그곳엔 집비둘기의 조상격인 양비둘기가 오래전부터 수천마리 살고 있는데 1950년대엔 이런 일이 있었단다. 당시 베네치아 시당국은 비둘기먹이 주는 일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보험회사가 대뜸 그 일을 대신하겠다고 제안해 왔다. 제안은 흔쾌히 받아들여졌고 그 회사는 매번 먹이 줄 때마다 회사 이니셜 글자를 따라 먹잇감을 뿌려줌으로써 기막힌 광고효과를 얻었다. 아침 9시만 되면 먹이를 먹기 위해 날아든 비둘기떼로 순식간에 회사 이니셜이 광장에 쓰여지는 장관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집비둘기가 급기야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됐다. 해서 인터넷에선 목하 찬반양론이 뜨겁다. 반대측은 피해를 준다고 유해동물로 지정,구제하려는 것은 무엇이든 해가 되면 죽인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며 목청을 높이는 반면, 찬성측은 집비둘기를 살찐 닭둘기,돼지둘기 혹은 미운 바퀴둘기로 폄하하며 피해를 입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란다. 동영상 싸이트엔 20여년전의 서울올림픽 개막식이 덩달아 도마위에 올랐다. 성화 점화때 비둘기 몇 마리가 갑자기 타오른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타죽는 장면이 돌연 유포되면서 외국인들로부터 평화를 태워버린 한국인이니 한국인은 야만인이라는 등의 잔말을 듣고 있다.


 개정된 야생동식물 보호법 시행규칙엔 ‘분변 및 털 날림 등으로 문화재 훼손이나 건물 부식 등의 재산상 피해를 주거나 생활에 피해를 주는 집비둘기’를 유해동물로 정하고 있다. 즉,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는 개체(군)만 유해동물이다. 모든 집비둘기가 구제대상은 아니란 뜻이다.
 동법 31조엔 포획 외에 다른 피해억제방법이 없을 때 포획할 수 있으며 포획시에도 생명의 존엄성을 해하지 않도록 명기돼 있다. 피해를 끼친다고 무조건 잡으면 안된다는 의미다.

   이 점들을 명심해 포획허가와 후속조치를 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린 스스로 야만인이 되고 만다.

   그들을 갈 곳 없는 천덕꾸러기로 만든 게 우리들이란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이 땅의 원앙들이 이상해지고 있다

 
 옛날 중국에는 원(鴛)이란 새와 앙(鴦)이란 새가 있었다. 원은 수컷 원앙을, 앙은 암컷 원앙을 일컫지만 당시 사람들은 두 새가 별개의 종인 줄 알았다. 깃털 모습이 워낙 달라서다. 한데 훗날 알고 보니 같은 종이었다. 해서 둘을 합쳐 부르게 된 것이 ‘원앙’이다. 


   중국 진나라 때 최표가 지은 고금주엔 ‘원앙은 자웅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 물새로 그 중 한 마리를 잡으면 나머지 한 마리는 몹시 애태우다 죽고 만다’고 설명돼 있다. 송나라 때 한빙부부(韓憑夫婦) 고사에서 유래된 원앙지계(鴛鴦之契)는 원앙처럼 언제나 함께 다니고 떨어지지 않는 부부의 정을 뜻한다.
 

   우리 선조들도 원앙을 금실의 상징으로 여겼다. 혼례때 원앙을 선물하거나 원앙이 그려진 이불(원앙금)과 베개(원앙침)를 혼수감으로 마련해 주고 또 행여나 부부가 토라지면 원앙 고기를 먹게 함으로써 금실을 되찾길 바랐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 인식에 쐐기를 박는 주장이 최근 일부 학자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그 주장인 즉, 원앙들은 해마다 월동지서 자기짝을 골라 ‘한 해 부부’가 되는데, 그것도 암컷이 여러 마리 수컷 중 하나를 골라 짝을 삼는 changing partner를 일삼는다는 것이다. 일년단위의 바람둥이란 뜻이다. 옛 사람들이 들으면 놀라 자빠질 얘기다. 더군다나 신혼부부에게 원앙처럼 잘 살라고 덕담한 사람들은 되레 험한 악담을 한 셈이니 개망신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에 반기를 드는 사람도 있다. 보은군에서 30년 가까이 원앙의 생태를 연구하며 직접 수천 마리를 길러온 김중구씨에 의하면 원앙은 일편단심 한 마리만 사랑하는 지독한 사랑새란다. 몸소 길러보지 않고 관찰해 보지 않았으면 말을 말란다. 다만 집단 사육시 간혹 수컷이 죽어 홀로 남게 된 과부원앙은 다른 수컷들 극성에 얼마 안가 죽고 만단다. 한 마디로 가만 놔두질 않는다고 한다. 균형이 깨진 사랑의 비극이다.


 원앙은 때론 이해 안가는 행태를 보인다. 베일이 많다는 얘기다. 그 중 하나가 동종간 알을 맡기는 탁란(托卵) 여부다. 필자는 이를 강력히 주장한다. 증거가 있다. 원앙은 한 배에 9~12개의 알을 낳는다. 하지만 실제로 야생의 원앙 둥지를 보면 그 보다 훨씬 많은 알이 들어있다. 보통 30개가 넘는다. 많을 땐 40개 이상 발견된 둥지도 있다.


 왜 그럴까. 한 배에 9~12개씩 낳는다는 새가 왜 그렇게 많은 알을 갖고 있을까. 답은 엉뚱한데 있다. 알 주인이 여럿이란 얘기다. 알 크기가 서로 다른 것은 그를 입증한다. 둥지 주인은 한 쌍인데 알 주인이 여럿이라면 뻔하다. 누군가가 둥지 주인 몰래 알을 낳은 것이다. 다시 말해 동종간 탁란을 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왜 탁란을 할까. 알 낳을 장소가 부족해서다. 인간의 엉뚱한 발상 때문에, 나무구멍이란 구멍은 외과수술이란 핑계로 죄다 막아놨으니 급한 김에 남 둥지 찾아 실례를 하게 된 것이다. 또 자연상태의 과부 암컷도 탁란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화되지 않는 무정란이 물증이다. 


 올핸 의문점이 하나 더 생겼다. 때이른 여름날씨가 찾아와 부화 시기가 빨라질 법도 한데 오히려 늦어지고 있다. 그것도 보름 이상 말이다. 원앙은 보통 모내기철을 전후해 알을 까는데 올핸 모내기철이 한참 지났어도 아직 알 품는 둥지가 태반이다. 변덕스런 날씨 탓에 생태시계가 고장 난 듯하다. 사육장에선 부화율과 산란율도 떨어졌다. 보은의 김씨는 “산란기때 30도를 넘는 이상기온이 찾아온 게 원인”이라 말한다.


 이래저래 이 땅의 원앙들이 시련의 시대를 맞고 있다. “케~켓.”  원앙 소리가 슬프게 들리는 이유다.

대청호에서 들리는 한(恨)의 어부사시사

 

1993~4년께 대청호 중류에선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보은관내의 한 가두리양식장에서 그동안 길러오던 큰입배스 수만 마리를 갑자기 방류한 것이다. 이유는 단지 판로가 없어서였다.
당시 필자는 대청호를 수시로 드나들며 수질오염 실태와 외래어종 서식상황 등을 집중 보도하던 터라 그 양식장을 예의 주시하면서 "혹시나 몇 마리라도 뛰쳐나오면 큰일일 텐데" 내심 걱정했었다. 그만큼 큰입배스는 요주의 어종이었다. 한데 몇 마리가 아니라 아예 가두리내 물고기를 몽땅, 그것도 손바닥만큼 자란 것을 쏟아붰으니 어찌 놀라지 않았겠는가. 인천에 산다던 그 양식장 주인은 그 뒤 바람처럼 사라졌고 가두리만 덩그라니 남은 채 한동안 호수위를 떠 다녔다. 그 일 이후 대청호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됐다. 육식성 어종인 큰입배스가 빠르게 확산돼 수중생태계를 초토화 시킨 것이다.


그 일이 있기 전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1980년 12월 2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댐준공식에 참석해 "주변 경치 참 좋네"라고 한 게 계기가 돼 청남대란 뜻밖의 시설이 들어서던 무렵, 한 관변단체가 이순자여사를 초청해 놓고 대청호에 민물고기 치어를 방류한답시고 수만 마리를 풀어준 일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당초 의도했던 토종 물고기가 아닌 전혀 엉뚱한 외래어종이 방류된 것이다.
훗날 알려진 자초지종은 이렇다. 충북도 등 관련기관에 갑작스런 상부지시가 떨어졌는데 내용인 즉 "몇날 며칠까지 붕어,잉어 치어 수만 마리를 구하라"는 것이었다. 해당 직원들은 난감했다. 갑자기 수만 마리를 구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단 붕어나 잉어 치어가 생산되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서 고민 고민 끝에 꿩 대신 닭이면 어떠랴고 급히 구한 것이 불루길 치어였다. 지금은 거의 불려지지 않지만 당시 생소했던 물고기(불루길)를 지역민들이 '(이)순자 붕어'라고 부른 것은 이런 속사정 때문이었다. 뜬금없는 생각인지는 몰라도 당시 불루길이 들통나 방류행사가 취소됐더라면 오히려 대청호의 생태계에 큰 도움이 됐지 않았을까 싶다.


이 무렵을 전후해선 또 초어,백련어,떡붕어,향어 등 다른 외래어종도 잇따라 유입돼 무방비 상태였던 대청호내 수중생태계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앞서 말한 큰입배스 사건이 일어났으니 불난 데 휘발유를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외래어종이 전 수역을 점령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청호는 그런대로 먹고 살 만한 터전이었다. 모두가 만족치는 않았어도 부지런히 그물 치고 물질 하면 최소한 쌀걱정은 안했다. 기자가 아는 한 어부는 당구용 큣대로 만든 쏘가리 작살 하나로 3층짜리 빌딩 짓고 아들 딸 교육까지 시켰다. 그 때가 16년전 일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떤가. 과거 어느 몰지각한 어심(漁心) 때문에 또는 무책임한 단체와 관련 공무원 몇몇으로 인해 대청호는 말 그대로 외래어종 천국이 돼 버렸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 맞아 죽는다고, 무심코 풀어준 외래어종에 소중한 토종 물고기 생태계가 완전히 짓밟혔다. 붕어,잉어 놀던 곳엔 불루길이 판 치고 쏘가리,꺽지 알 낳던 바위절벽 밑은 팔뚝만한 큰입배스의 아지트로 변했다. 붕어,잉어 잡던 어부들은 기름값도 안 나온다며 그물 안 친지 오래고 쏘가리 잡던 잠수부들은 소일거리로 배스나 잡아 '패대기 치는' 서글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댐이 준공된 지 내년이면 30년, 대청호 어민들은 지금 호수 밑바닥의 칠흑같은 절망감으로 한(恨)의 어부사시사를 부르고 있다. "앞 물에 배 띄워도/그 많던 토종고기 어디 가고/생뚱맞은 물고기만 날뛰는가/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부보 부보(Bubo bubo),  바보 바보?”

 
 야묘(夜猫)라 불리던 새가 있다. 수리부엉이다. 여기서 묘는 삵이다. 소리없이 접근해 쥐도 새도 모르게 멱을 따는 게 삵이니, 밤중에 나타나 졸지에 먹잇감을 채가는 삵이 곧 야묘다. 섬뜩하다.
수리부엉이는 달갑잖은 새로 인식돼 왔다. 기이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 도깨비뿔 같은 귀깃, 어린애 만한 몸집, 딱딱거리며 위협하는 큰 부리, 한 번 움켜쥐면 놓지 않는 발톱 등 생김새부터가 비호감이다. 울음소리도 쭈뼛하다.

 부엉이가 달갑잖은 존재로 인식케 된 데엔 어른들의 장난기 어린 으름장도 한몫했다. 시도때도 없이 우는 아이에겐 “저기 부엉이 온다”고 어르고 밤에 자주 싸돌아다니는 아이에겐 “부엉이한테 잡혀간다” 겁줌으로써 부엉이는 곧 두려움으로 각인됐다. 할아버지 무릎 베고 옛날 이야기 들을라치면 으레 배경음악처럼 낮게 깔린 부엉이 소리가 저멀리 들리는가 싶다가도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질 때쯤이면 어느새 뒤꼍 느티나무로 옮겨와 기겁하게 한 것이 부엉이다.

 부엉이 소리가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음은 속설과 기록에도 나타난다. 우리말에 부엉이가 마을을 향해 울면 상을 당한다는 말은 그만큼 부엉이가 불길한 일을 몰고다닌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엔 태조,세조 등 여러 임금이 궁궐 가까이서 부엉이가 울면 서둘러 거처를 옮기고 해괴제(解怪祭)를 지냈다 전한다. 해괴제는 부처에서 땀이 흐르는 일처럼 기괴한 일이 있을 때나 지내던 신풀이다.

 하지만 때론 부(富)를 가져오는 새로도 인식됐다. 속담에 부엉이가 새끼 3마리를 낳으면 대풍 든다는 말이 있다. 육식성인 부엉이가 3마리의 새끼를 키우기 위해선 수많은 들쥐를 잡아 날라야 하기에 생긴 말이다. 새끼 3마리를 키우려면 하룻밤에 수십 마리를 잡아야 한다.
 부엉이는 욕심도 많아 먹잇감을 보는 대로 잡아다 쌓아 놓는다. 해서 옛 어른들은 부엉이집 하나만 맡아도 횡재했다고 했다. 부엉이가 잡아오는 먹잇감엔 닭,꿩,토끼 심지어 어린 고라니까지 있어 그 중 일부만 슬쩍 갖다 먹어도 고기걱정은 안했단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살림이 늘어나는 것을 부엉이살림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부엉이의 습성을 빗댄 말이다.
 부엉이는 부부애가 강해 한번 짝 맺으면 평생 함께 살아가는 것은 물론 시시때때로 짝짓기하는 새로도 알려졌다. 다른 새와 달리 혹한의 1~2월에 산란해 번식기가 끝나도 오랜 기간 줄곧 사랑을 나누면서 금슬을 확인한다.

 부엉이는 높은 벼랑에 둥지를 튼다. 기자가 최근 확인한 10여개의 둥지 모두 탁 트인 수십 길 바위절벽에 있다. 천적 때문이기도 하지만 큰 몸집을 던져 쉽게 날고 또 밖에선 곧바로 날아들기 위한 지혜다.
 전국의 부엉바위,부엉고개,부엉골,부엉산은 부엉이가 살았거나 현재 살고 있는 곳이 많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한 김해 봉화산 부엉이바위도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터넷상 자유백과사전인 위키백과엔 ‘…경사가 급해 등산객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알려졌다가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올라 투신한 곳으로 알려지게 됐다“고 적혀 있다. 국민장의 ’노란‘ 처연함이 눈에 선하고 추모행렬이 아직 줄을 잇는데 백과사전엔 벌써 과거형으로 올라있다. 인생무상이다.

 일명 자살바위로도 불렸다는데, 어쨋거나 부엉이가 살던 부엉이바위서 전직 대통령이 부엉이처럼 몸을 던졌다.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처럼 말이다.
 수리부엉이의 학명은 ’Bubo bubo‘다. 울음소리서 유래한 학명이 노 전 대통령의 별명인 바보를 연상케 함은 아이러니일까. 부디 자유롭게 날개 펼쳐 훨훨 날길 기원한다. 부보 부보, 바보 바보?.

농부는 소를 버리고 역사는 풍경을 잃었다

 
 중국 갑골문엔 쟁기그림이 있다. 힘 력(力)을 뜻하는 상형문자다. 그 시기는 사람의 노동력으로 농사짓던 때여서 쟁기질 하려면 당연히 힘이 필요했기에 쟁기는 곧 힘의 상징이었다.

   고대중국인들은 또 여럿이 힘을 합하는 것을 쟁기 3개로 표현했다. 이것이 훗날 ‘힘합할 협’자가 됐는데 발상이 기막히다. 쟁기 한 둘 보단 세 개로 땅을 갈면 훨씬 쉽게 일을 마칠 수 있었기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중국의 갑골문보다 앞선 이집트 상형문자에도 쟁기가 나타난다. 쟁기의 역사가 매우 오래됐음을 시사한다. 학자들은 이들 상형문자를 들어 서양에선 BC 4000년께, 동양에선 BC 3000년께 쟁기가 출현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쟁기의 출현은 농업발전사에서 가히 혁명적인 일이다. 나뭇가지나 타제석기 혹은 괭이와 따비로 농사 짓던 구문명에서 새로운 문명사회로 접어들게 한 일대 사건이다. 일부에선 쟁기를 원시자연사회서 문명사회로 전이케 한 상징물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선 어느 시기에 쟁기가 도입됐을까. 북한에선 평북 염주서 출토된 유물을 들어 BC700년께로 주장하나 남한에선 믿지 않는다. 대전 괴정동 출토 농경문(農耕紋) 청동기에 따비로 땅 가는 모습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경문이 그려진 그 시대(청동기시대)엔 아직 쟁기가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삼국유사 신라 유리왕조에 처음으로 쟁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들어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쟁기 이후의 또 다른 혁명은 소를 이용한 쟁기질, 이른바 우경법의 시작이다. 중국에선 BC 3세기경에, 우리나라에선 신라 지증왕 3년(502년)에 우경이 시작됐다. 중국에선 이집트의 쟁기가 전래된 지 27세기 여만에, 우리나라에선 중국으로부터 쟁기가 들어온 지 4세기만의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농업발전사의 판도가 뒤바뀌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경운기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다. 이상야릇한 기름냄새와 함께 딸딸딸 거리는 낯선 기계음이 1960년대 이후 우리 농촌에 울려퍼지면서부터 꿈에도 못 그리던 기계화 영농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후 불과 반세기만에 우리 농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웬만한 농가는 수천만원이 넘는 트랙터를 갖게 됐고 이앙기,관리기 등 각종 농기계가 소와 사람을 대신하게 됐다. 우경법이 도입된 지 15세기 만에 우경 발상국을 능가하는 선진 기계화영농국이 됐다.

 반면 변한 것들도 많다. 모내기철이 와도 들녘에선 풍악과 농요가 들리지 않고 여러 사람이 품앗이하는 모습도 사라졌다. 좁은 논두렁을 곡예하듯 밥광주리 이고 가던 시골 아낙의 애잔한 모습이 사라진 대신 자장면과 식당밥을 실어나르는 오토바이, 밥차가 시멘트포장 농로를 숨가쁘게 드나든다. 숭늉 대신 전화 한 통에 배달된 다방커피로 입가심하고 걸쭉한 막걸리 대신 PET병에 담겨진 생맥주로 농심을 달랜다.    
 모내기철 생태달력도 달라졌다. 기계화 영농으로 모내기철이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예전엔 보리이삭이 다 익을 즈음 모를 냈는데 지금은 보리밭이 푸르스름할 때 모내기를 한다. 무논 형태도 달라졌다. 예전보다 훨씬 작은 모를 기계로 심게 되면서 무논 깊이가 눈에 띄게 얕아졌다. 일년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문전옥답도 가치를 잃었다.

 워낭소리와 함께 사라진 농부들의 소몰이 소리도 빛바랜 추억이 됐다. 해서 어느 시인은 우리농촌의 잃어버린 풍경을 이렇게 읊는다.
 ‘새벽 안개에 쇠똥냄새 배어나면/할아버지는 삽작문을 나섰다/외양간에는 녹슨 쟁기,소는 보이지 않는다/소는 외출 중/갈빗살과 차돌박이로 분류된 지 오래이다/농부는 소를 버렸고/소는 쟁기를,역사는 풍경을 잃었다’고….

괴산군과 청원군의 너무나 이상한 허가


 괴산·청원 관내의 달래강 중상류에선 요즘 이해 안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강줄기는 같은데 내용은 너무나도 판이한 다슬기 채취허가가 남으로써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냉가슴을 앓고 있고 자연생태계는 자연생태계대로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한쪽에선 앞뒤가 맞지 않는 허가로 인해 허가받은 주민들이 되레 마음놓고 다슬기를 잡지 못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고, 다른 한쪽에선 씨를 지우든 말든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는 식의 싹쓸이 허가를 내줘 가뜩이나 사라져가는 유전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


 괴산군은 지난해 6월 청천·칠성·괴산·감물 등 4개 지역 작목반에게 1년간의 다슬기 채취허가를 내줬다. 그런데 말로는 다슬기 채취허가이지 속으로는 다슬기를 잡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아리송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1개 작목반당 허가한 그물 갯수부터가 작목반원들을 우롱하고 있다. 지역당 1개씩인 작목반에 하루 2채씩의 그물만 사용토록 허가함으로써 반원수가 50명인 청천면은 25일을, 46명인 칠성면은 23일을, 11명인 괴산읍은 5.5일을, 13명인 감물면은 6.5일을 기다려야 개인적으로 그물을 사용할 수 있다. 요즘 이뤄지는 다슬기 채취가 대부분 그물끌기에 의존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원들은 자기 차례 기다리다가 굶어죽기 십상이다. 반원들은 거의 다 다슬기잡이가 직업이자 밥벌이 수단이다. 돌아가면서 하루 몇 시간씩 할당제로 운영한다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순번 기다리다 날새울 건 뻔하다.


 다음은 그물 규격이다. 다슬기 잡으라고 허가한 그물코의 한쪽 길이가 5cm를 넘어야 한단다. 작목반원들의 표현을 빌면 이는 갈퀴로 다슬기를 잡으라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피라미 잡는데 잉어그물 쓰는 격이다. 그물코가 5cm이상이면 다슬기가 주먹만 해야 한다. 반원들은 또 잡을 수 있는 다슬기의 크기를 1.5cm 이상으로 못박은 것도 현실을 외면한 처사라고 지적한다. 달래강서 잡히는 다슬기는 주로 1.5cm 이하인데 그 이상의 것만 잡으라면 말이 되냐는 것이다.
 괴산군청 담당자는 수산자원보호령 등 관련법규대로 허가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다고 하나 해당 작목반원들의 심기는 편치 않다. 심지어는 “다슬기 채취허가가 되레 다슬기를 잡지 못하게 하는 족쇄”라고 입을 모은다.


 청원군은 어떤가. 청원군은 올해 처음으로 지난 2월 미원면 옥화9경어업계(계원수 19명)에 다슬기 채취허가를 내줬다. 한데 산란기 포획금지,자원보호,환경오염방지 등 기본조건만 제시했을 뿐 괴산군이 규제한 허가 그물수라든가 그물규격, 채취 가능한 다슬기 크기 제한 등은 규제하지 않았다. 허가기간도 5년이나 된다. 한 마디로 5년간은 알아서 잡으라는 것이다. 괴산군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판이하다. 허가내용만 보면 전혀 딴 나라 같다. 물줄기는 같은데 지자체가 다르다고 해서 이렇게 판이한 허가가 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안 갈 정도다.
 이로 인한 부작용은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허가된 지 불과 2~3개월 만에 다슬기가 ‘귀한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꾼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두 지자체를 무조건 나무라는 건 아니다. 지방자치시대에 주민들의 요구를 묵살할 수 없는 속사정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도가 문제다. 제 아무리 관련법규가 있다하더라도 상식과 현실을 무시한 행정이라면 정도가 지나치다. 반대로 주민들이 요구한다고 해서 관련법규마저 완전히 무시한다면 그 또한 도를 넘어선 행정권 남용이다.

 

   달래강 특산물인 다슬기가 더 이상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도록 지자체와 주민 모두가 다시금 생각을 바꿨으면 한다.

새들의 울음소리엔 사연이 있다

 
 “제집 죽고 자석 죽고 서답빨래 누가 할꼬.”

    얼핏 들으면 징글히도 박복한 어느 홀아비의 신세타령처럼 들리겠지만 엉뚱하게도 경남지역 사람들이  멧비둘기 울음소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구구~ 에에~” 울어대는 소리가 마치 “마누라 죽고 자식도 죽었으니 속옷빨래는 누가 할꼬”라며  한탄하는 것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 민간설화에는 또 소쩍새 울음소리와 관련한 다음의 이야기가 전한다. 먼 옛날 지독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밥주기가 아까워 아주 작은 솥으로 밥을 짓게 했는데 결국 밥을 지어도 먹을 것이 없게 된 며느리는 굶어죽었고 그 불쌍한 넋이 소쩍새가 되어 밤마다 솥이 적다고 한탄하게 된 것이 소쩍새 울음소리란 것이다. 또 옛 어른들은 소쩍새가 “소탱 소탱”하고 울면 솥이 텅텅 빌 정도로 흉년이 들고 “솟쩍다 솟쩍다”하고 울면 솥이 적을 정도로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새는 비록 같은 종일지라도 계절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 게다가 일부 새는 지역에 따라 높낮이가 다른 사투리까지 쓴다. 그러니 같은 종의 새소리라도 듣는 사람에 따라 달리 들을 수 있고 표현 역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국내에 나와있는 조류관련 서적 대부분도 각 종의 울음소리가 제각각 표현돼 있다.
 세계적 멸종위기종 크낙새도 이같은 울음소리의 ‘제각각 해석’으로부터 명칭이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1800년대 후반 유럽인들이 대마도와 한반도에서 이름모를 새를 채집, 런던 동물학 잡지에 첫 발표하면서 이 새의 울음소리를 ‘클락(Clark)’으로 표현함으로써 훗날 크낙새로 불리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내학자들은 이 새의 울음소리를 ‘끼이약 끼이약’ 혹은 ‘클락 콜락’으로 표현하고 있다.

 새소리는 조류연구가들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종을 구분하거나 암수를 구별할 때 또는 둥지를 찾을 때 단서가 되는 것이 새소리이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도 생태사진을 찍기 위해 새를 찾아 나설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새소리다. 딱따구리류의 드러밍(Drumming)을 비롯해 일반적인 새들이 번식기에 내는 Song과 그외의 울음소리인 Call을 구분할 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들의 ‘소리’에 귀기울인 경험 덕분이다.

 어제는 그러한 경험 덕을 톡톡히 봤다. 지난 3월 중순 둥지 짓는 것을 처음 발견한 이후 4월 내내 관찰해 오던 물까마귀 둥지가 어느날 졸지에 빈 둥지가 된 것을 보고는 크게 상심했었는데 바로 어제, 괴산 선유동서 알 품는 물까마귀 둥지를 새로 찾아낸 것이다. 몇년 전 그 곳서 한 쌍을 목격한 일이 생각 나 혹시나 하고 찾아갔더니 기다렸다는 듯 “찌이 찌이” 독특한 소릴 내는 게 아닌가. 직감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바위 뒤쪽을 살펴보니 영락없이 이끼로 지어진 둥지가 매달려 있고 그 안엔 어미새 1마리가 들어앉아 목하 새생명을 탄생시키느라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데 그날은 가슴 아픈 일도 겪었다. 돌아오는 길에 보름전 찾아놓은 원앙 둥지가 궁금해 들렀더니만 아뿔싸! 30개가 넘는 알이 몽땅 사라졌다. 인근 주민에게 물으니 사람 소행이란다. 처절한 마음으로 이번엔 강변의 꼬마물떼새 둥지를 찾았다. 역시나였다. 알 4개가 사람 발길에 무참히 밟혀 깨져 있었다. 기가 막혔다.

 가장 숭고한 대내림의 임무를 위해 자연계에선 일생일대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것을 보듬어야 할 인간계에선 무자비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있다. Song을 부르던 새들이 사람만 만나면 갑자기 경계음(Call)을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나물 철의 간 큰 공고, 간 부은 사람들(4월 28일자)

 
 “산나물산행 공지. 산행지-경기도 적성(이름모르는 산). 산행일시-5월 9일 토요일, 시간·만남 장소 추후 공지. 회비-계산중.”

    국내 모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올라있는 한 공지사항이다. 내용은 산나물철을 맞아 함께 산나물 뜯으러 가자는 회원모집 공고다. 이 사이트에는 현재 이 것 외에도 여러 팀의 산나물산행 공지가 올라와 있다. 다른 포털사이트도 마찬가지다. 두릅,취나물 등 특정 나물을 뜯으러 가자는 팀들도 있다. 심지어 나물 뜯은 후 삼겹살 파티와 옻나무백숙을 즐기자는 문구도 보인다.
산나물이 웰빙시대의 건강식품으로 각광받으면서 산나물산행이 하나의 테마여행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새 풍속도다. 산나물 트레킹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산나물을 뜯으러 간다는 데 조금도 시비 걸 생각은 없다. 다만 요즘 돌아가는 세상물정을 좀 알고나 공지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한 마디로 이 공지는 ‘간 큰 호객행위’요, 이 글을 게재한 사람들은 ‘간이 부은 사람들’이다.
 현행법상 산나물을 포함한 임산물의 굴·채취는 산림소유자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능하다. 즉, 본인소유의 산림내에서는 임의채취가 가능하나 타인소유의 산림에서는 산주 동의없이 굴·채취하면 모두 범법행위다. 위반시는 산림절도죄에 해당돼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된다.(산림법 116조,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 73조)
 얼마나 센 법조항인가. 혹자는 그깟 산나물 좀 뜯었다고 절도죄를 뒤집어씌워 중죄인 취급한다니 너무한 게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 오죽하면 그런 법조항을 만들었겠는가. 함부로 산에 들어가지 말라고 곳곳에 입산금지 푯말을 붙여놔도 “너는 짖어라”며 안중에도 없어한다. 산나물을 뜯는 것도 그렇다. 정도껏만 뜯으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마치 선수권대회라도 여는 양 여기저기서 혈안이다. 한 번 간 곳은 두 번 다신 안갈 것처럼 쑥대밭을 만들어 놓는다. 원추리,우산나물,다래순,더덕… 등 남아나는 게 없다. 노루떼 멧돼지떼가 훑고 간 자리같다.
 그러니 산주인인들 좋아할 리 없고 인근 주민인들 반길 리 만무다. 자연 시비도 잦다. 해서 이번엔 산림청과 지자체가 나서서 집중단속을 펼친단다. 특히 산림청은 동호회원을 모집해 관광버스 등을 동원한 무분별한 산나물 채취행위를 집중 단속하고 헛개나무와 엄나무 같은 약용수종과 산삼,난초 같은 희귀식물의 굴·채취 행위도 경찰과 함께 단속한단다.

 이런 와중에 “산나물 캐러 가자”고 대놓고 선전하는데 그 어찌 ‘간 큰 호객, 간 부은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인터넷상에 올라있는 공지사항 어느 곳에도 산주의 동의를 구했다는 문구는 보이질 않는다. 그러니 들키면 절도죄인 건 뻔한데 함께 가서 일 저지르잔다.
 산나물은 이제 중요한 산림자원이다. 산나물이 지역특산물인 고장에서는 해마다 축제를 열어 지역경제를 살찌우는 중요 자원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또 산촌에 사는 주민들은 봄철엔 산나물 뜯어 여름 나고 가을엔 버섯 따서 겨울을 나는 소중한 생명줄이자 돈줄이기도 하다. 헌데 재미삼아, 그것도 무슨 동호회다 거창한 이름까지 붙여가지고 떼지어서 도둑질(?) 하자며 부추기는 건 지나쳐도 보통 지나친 게 아닌가 싶다.

 “이제나 저제나 벼르고 별러서 며칠전엔 두릅순과 옻순을 따러 뒷산에 올라갔더니만, 젠장 두릅은 몽땅 낫으로 목을 쳐가고 옻나무는 아예 껍질까지 벗겨가 허탕치고 말았지 뭐요.” 수십년을 속리산자락에서 두릅순과 옻순을 따다 장에 팔았다는 한 촌노의 푸념이 두릅가시에 손톱밑을 찔린 것만큼이나 찡하게 아려온다.

물고기 없는 하천을 정녕 보고 싶은가

 
 경상도 해안지역에 가면 육침고기,침쟁이,해방고기로 불리는 물고기가 있다. 정식 명칭은 큰가시고기로 커봐야 10cm를 넘지 않는 소형종이다. 이름에  ‘큰’ 자가 붙은 것은 국내 가시고기류 가운데 가장 크기 때문이다. 이 물고기 특징은 몸에 가시가 나 있는 것 외에도 수컷의 새끼사랑이 유달리 강하다는 점이다. 2000년 출간돼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던 소설 ‘가시고기’는 이 물고기의 부성애가 모티브다.
  

   바다를 오가는 이 물고기는 생활사도 독특하다. 새끼때 바다로 내려가 자란 큰가시고기는 봄이면 강으로 올라와 산란 준비를 하는데 그 일을 수컷이 도맡는다. 수컷은 우선 웅덩이를 판 다음 수초 등을 물어다 둥지를 짓는다. 산란둥지가 완성되면 수컷은 본격적인 구애작전에 나서 ‘눈맞은 암컷’을 유인해 신방을 차린다.
 

   종 특유의 행동은 이 때 발현된다. 암수컷이 은밀하게 그들만의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수컷이 암컷의 꼬리잔등을 가볍게 톡톡 쳐주면 암컷은 이에 순순히 응한다. 대를 잇기 위한 스킨십이다. 수컷의 노력으로 자극 받은 암컷은 그제서야 요동치며 알을 갈긴다. 수컷의 방정도 이때 이뤄진다. 알을 낳은 암컷이 떠나면 곧이어 수컷의 눈물겨운 부성애가 시작된다. 행여나 둥지가 침범 당할까봐 잠시도 한눈 팔지 않는다. 쉬기는 커녕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이윽고 새끼가 부화해 둥지를 떠나면 그때서야 조용히 생을 접는다. 얼마 뒤엔 썩은 몸마저 새끼들에게 먹힌다.


 이런 과정을 유난히 지켜본 이가 있다. 네덜란드 출신의 영국학자인 옥스퍼드대학의 니코 틴버겐(Nikolaas Tinbergen) 교수다. 그는 무려 13년간 큰가시고기의 산란행동을 관찰했다. 그 결과 암컷이 수컷에게 유인당하는 요인은 산란철 붉게 변하는 수컷의 혼인색이며, 알을 밴 암컷은 (수컷이 아니더라도) 꼬리잔등만 쳐주면 산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른바 해발인(解發因)의 원리다. 이 업적으로 틴버겐은 1973년 노벨상을 탔다.


 오랜 가뭄과 변덕스런 날씨에도 자연계의 생태시계는 어김없이 물고기 산란철을 가리키고 있다. 끊길 듯 말 듯 쫄쫄쫄 흐르는 계곡물에서도, 곳곳에 바닥을 드러낸 채 낮은 수위를 보이고 있는 각 강과 호수 안에서도 물고기들은 일년거사를 치르느라 무척이나 분주해졌다. 아니 바빠진 것도 바빠진 것이지만 그 어느해보다 수량(水量)이 적은 불리한 환경속에서 각기 유리한 산란터를 선점키 위해 처절히 몸부림치고 있다.
 쉬리,돌마자 같은 여울성 물고기들은 그나마 남아있는 여울이 다행인 듯 앞다퉈 알을 쏟아내고 있고 돌 표면에 알을 붙이는 꺽지,동사리도 부쩍 좁아진 공간에 서로 알 붙일 터 찾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다.
 하천생태계가 2년째 위기에 놓여 있다. 지난해도 봄가뭄 때문에 물고기들이 산란에 어려움을 겪더니만 올해도 상황이 퍽 좋질 않다. 곡우에 맞춰 비가 왔지만 안심할 수 없다. 물고기 산란율이 떨어지면 하천생태계는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산란철에 더욱 기승부리는 남획행위다.

알 낳기 위해 한곳으로 몰려드는 습성을 악이용해 동시다발적으로 싹쓸이 포획을 한다. 마치 소탕작전 같다. 그물 한 번에 수십,수백 마리의 물고기가 그것도 터질 듯이 알 밴 어미들이 일시에 몰살 당한다. 물고기가 산란하면 큰 일이라도 일어나는 양 어떤 곳에선 동네사람 모두가 나선다. ‘해발인의 계절’을 맞아 숭고한 본능을 발현하기도 전에 숱한 물고기가 떼죽임 당한다.

 매년 반복되는 산란철 물고기 남획. 이대로 가다간 하천생태계가 끝장날 판이다. 물고기가 사라진 하천을 그렇게도 보고들 싶은가.

똥 같은 세상, 에라 똥이다

 
 어린아기의 똥은 건강 리트머스다. 해서 엄마들은 흔히 똥의 상태를 통해 아기 건강을 체크한다. 똥이 노란지 푸른지, 아니면 묽은지 된지, 자주보는지 적당한 시간에 보는지, 점액은 없는지 등을 살펴봄으로써 말 못하는 아기의 건강을 가늠한다. 어떤 엄마는 굳이 냄새까지 맡아본다. 구수하면 OK, 구리면 걱정부터 하며 약가방을 찾는다.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나이 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 스스로 제똥을 관찰하는 게 다를 뿐이다. 쾌변이면 기분 좋고 시원찮으면 꺼림칙해 한다. 제 아무리 권력 있고 돈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제똥 상태 앞에서는 고개 숙인다. 그만큼 똥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중요함에도 누구나 똥 얘길 꺼린다. 아니 무슨 금기사항이나 되는 것처럼 고상 떨기 일쑤다. 대놓고 똥 얘길 하면 천하다거나 거친 사람 취급한다. “내 안엔 똥이 없다”는 식이다.


 똥은 생태학에서도 중요한 대상이다. 생태조사를 할 땐 어느 지역에 어느 종의 동물이 서식하는지 추적케 하는 중요 단서다. 또 그 동물이 언제 지나갔는지, 크기는 어느 정도이고 몇 개체가 서식하는지 등을 알려주는 주요 잣대다. 짐승똥은 또 그 주인의 습성도 말해준다. 예를들어 오소리와 너구리는 꼭 자신들만 애용하는 이른바 똥자리를 따로 마련해 놓고 매번 볼일을 보지만 그 양상이 다르다. 오소리는 대개 똥굴을 파고 그 앞에 눗거나 한 장소에 널찍이 누는데 반해 너구리는 똥굴을 파지 않고 한 장소에 수북이 쌓이도록 눈다.
 또한 짐승똥은 상냥스럽게도 주인장의 식성까지 알려준다. 검은색에 질고 마디가 없으며 쉽게 썩으면 오소리똥이요 똥자루가 비교적 굵고 비닐 조각 등 이물질이 섞여 있으면 너구리똥인 경우가 많다. 오소리는 딱정벌레나 지렁이 같은 무척추동물을 즐겨 먹고 너구리는 도토리같은 식물 열매서부터 쥐,새,쓰레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먹이를 먹기 때문이다.
 짐승똥은 일종의 신호 역할도 한다. 맹금류인 황조롱이는 쥐가 싼 똥에서 발산되는 자외선을 감지해 쥐가 숨은 장소와 마릿수까지 감지한다. 더욱더 신기한 것은 똥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는 동물도 있다는 점이다. 일부 곤충의 애벌레들은 천적이 다가오면 냄새가 지독한 똥을 순간적으로 분사해 위기를 모면한다. 똥은 또 영역 표시 역할도 한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매일밤 야간순찰을 돌며 자신의 똥자리가 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다.


 우리말에 똥줄이란 말이 있다. 원뜻은 급하게 내깔기는 똥줄기를 일컫지만 흔히 관용구로 사용된다. 다급한 사태에 부닥쳐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 상태에 있을 때 ‘똥줄이 타다’란 말을 쓰고 혼이 나서 매우 급할 때는 ‘똥줄이 빠지다’란 표현을, 몹시 두려워 겁을 낼 때는 ‘똥줄이 당기다’란 표현을 쓴다.
 목하 우리사회에는 똥줄이 타고 빠지고 당기는 사람들이 꽤나 여럿 있어 보인다. 구린돈에 얽혀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전직 대통령 패밀리와 주변 인물들이 바로 그들이다. “내 안엔, 적어도 우리 식솔들 안엔 전혀 구린 똥은 없을 것”이라고 임기중 입만 열면 떠들던 게 불과 몇 년 전인데 벌써 뒷간 갔다온 걸 잊은 모양이다.


 똥의 속성은 어쨋든 구린 것이다. 다만 그 주인장의 상태에 따라 구린 정도가 다를 뿐이다. 자신은 구리지 않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구린지 안 구린지, 아니면 헛방구인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다. 속내야 어떻든 국민을 기만한 파렴치에 속이 매스껍다. 누구는 ‘똥줄 빠지게’ 벌어도 평생 못 만져볼 돈을 빚얘기 한 마디에 덥석 주고 받았다니, 똥 같은 세상이다. 에라, 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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