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이 땅의 코흘리개 아이들은 많은 시간을 자연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자연이 좋아서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이 그랬습니다.

집안일을 도울 때를 제외하고는 늘 동무들과 함께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시간 보내는 게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마주하게 되는 게 자연에서 나고 자란 먹거리였습니다.

당시엔 주전부리란 게 별도로 없었고 자연에서 눈에 띄는 먹을거리가 모두 주전부릿감이요 허기를 달래던 요깃거리였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동물과 관련한 추억의 먹거리를 살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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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jRUSNG8xy8

생명과 추억이 사라진 가을들판

 

가을이 깊어가면서 들판에 빈 논이 늘어나고 있다. 벼베기와 탈곡을 동시에 하는 콤바인이 숨 가쁘게 지나간 자리에 벼그루터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쓸쓸하다. '지난 1년'을 송두리째 내어준 결과가 처량하다. 여름날 그 따갑던 햇볕이 내리쬘 때만 해도, 폭풍우가 모든 걸 삼켜버릴 듯이 휘몰아칠 때만 해도 농부들의 희망과 근심이 논배미 가득 넘실거렸는데, 이젠 그나마도 없다.
알곡이 털린 지푸라기마저 돈이 된다고 다들 걷혀진다. 되돌려지거나 남겨지는 그 무엇도 없다. 지난 1년의 흔적이 고작 논바닥에 낙인처럼 찍힌 콤바인 자국과 몸통 잘려나간 벼그루터기 뿐이다. 예전의 논과는 분위기와 모습이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다.
우선 생명이 없다. 친환경 농법을 하는 몇몇 논을 제외하고는 그 흔하던 벼메뚜기도 뛰지 않고 개구리도 놀라 방황하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벼베기가 한창이거나 끝난 논배미에는 졸지에 의지할 곳 없어진 벼메뚜기와 개구리들이 혼비백산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건만 지금은 고요하다. 빈 논배미에 뛰어들어 들판이 떠나가도록 흙범벅을 하던 개구쟁이들도, 벼이삭을 줍던 아낙네들의 굽은 허리도 이젠 볼 수 없다. 하물며 미꾸라지를 잡느라 이 논도랑 저 논도랑 후비며 다니던 가을천렵꾼들이 보일 리 만무고 새뱅이와 붕어 잡느라 둠벙물을 퍼내던 정경이 보일 리 더더욱 만무다.
알몸을 드러낸 논배미들의 모습 또한 무척 달라졌다. 경지정리로 비뚤배뚤하던 논두렁은 일직선으로 변했고 그에 따라 논 형태도 네모 반듯한 두부판처럼 변했으며 높다랗던 논두렁은 있는 둥 마는 둥 그저 다른 논과의 경계표지 쯤으로 낮아졌다.
논이 물을 담는 저수지로서의 역할을 뒤로 하고 벼를 생산하는 한낱 공장으로서의 역할만 중시되다 보니 그 구조 또한 많이도 변했다. 그 중 눈에 띄는 변화가 논배미에서 둠벙과 논도랑이 사라진 점이다. 대신 논배미 마다에는 하천 혹은 저수지와 연결된 수로가 설치돼 있거나 관정 하나씩 관행처럼 파져 있다. 언제나 필요하면 수로의 문을 열면 되고 전기 스위치만 올리면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오니 둠벙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됐으며, 논물을 모으거나 흘려 보내는 논도랑 역시 농법 변화와 함께 필요성이 사라져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소 쟁기질 대신 트랙터로 논을 갈고 손모내기 대신 이앙기로 모를 내며 퇴비 대신 화학비료를 쓰고 피사리 대신 제초제를 쓰는 현대 농법이 보편화하면서 논 모습이 크게 변한 것이다.
하지만 편리함과 수확량 증대라는 '얻은 것' 이면에는 '잃은 것' 또한 많다는데 우리 농촌의 아픔이 있다. 특히 우리가 잃은 것 중에는 논 둠벙과 도랑이 사라지면서 불러온 논 생태계 파괴는 쉽사리 돌이킬 수 없는 크나큰 손실이다. 앞서 말한 생명의 부재가 바로 논에서 둠벙과 도랑이 사라진 뒤에 찾아든 재앙이다.
논 둠벙과 도랑은 단순히 물을 대고 유지하는 수원(水源)으로서가 아닌, 논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지탱해 온 소중한 생명그릇 이른바 비오톱(Biotope)이었다. 논 둠벙이 생명을 잉태하고 보듬으며 증식·보급해 주는 생태 창고 같은 역할을 해왔다면 그 창고와 논을 연결해 주는 고리 역할을 한 것이 논도랑이었다. 논에 물이 괴어 있을 땐 자연스레 논과 둠벙, 도랑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논에 물이 없을 땐 온갖 생명들이 숨어드는 피난처 역할을 한 것이 둠벙이요 그 피난처로의 안내길이 되어 준 게 논도랑이다.
논 둠벙과 도랑이 사라진 들판, 생명도 사라지고 우리의 추억도 함께 사라졌다. 이제 막 벼베기가 끝난 논에서 더없는 황량함만이 맴도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사라진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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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잡이 추억

 

익을 대로 익은 벼이삭이 찰랑찰랑 배부른 소리를 내고 볏잎에선 황금빛 부자 색깔이 더없이 눈부실 즈음이면, 으레 바빠지던 발걸음이 있었다. 두살 위인 옆집 누나와 동네 까까머리 동생들, 그리고 나. 그렇게 이뤄진 예닐곱 명의 개구쟁이 군단은 언제나 닳고 닳은 됫병 하나씩을 옆에 끼고 마을 뒤편 실개울가로 향했다.
목적은 메뚜기잡이. 도착한 실개울가 둑방길은 어느 곳보다도 메뚜기들이 많았다. 개울 옆 논배미에서 날아든 벼메뚜기를 비롯해 덩치가 제법 큰 방아깨비와 풀무치들이 요즘의 곤충농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그득했다. 이들 외에도 더듬이가 유난히 긴 베짱이와 여치, 이름이 특이한 섬서구 같은 다른 메뚜기들도 많았지만, 그들은 '못 먹는 거'라며 잡지 않았기에 '벌레' 그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했다.
둑방길은 금세 난투장으로 변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애먼 '못 먹는 거'까지 뒤섞여 난장판이 됐다. 게다가 누가 많이 잡나 내기라도 한 날이면 온 둑방길은 가을운동회장 만큼이나 시끌벅적했다. 메뚜기가 뛰면 뛰는 대로 날면 나는 대로 정신없이 쫓아가 잡아댔으니,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지금 생각하건대 그 땐 왜들 그렇게 요란을 떨었는지,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한바탕 메뚜기잡이가 끝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병을 맞대보고는 누가 많이 잡았나 등수 매기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장원은 늘 내 차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곤충이든 물고기든 새든, 무엇이건 잡는 데는 선수였던 나였기에 재보나 마나 일등이었다.
메뚜기잡이의 가장 큰 즐거움은 메뚜기들을 들들 볶아 노린내가 나도록 먹는 재미. 메뚜기 중에도 방아깨비나 풀무치 같은 것은 불에 구워 먹어도 가히 일품이었다. 더욱이 노랗게 익은 방아개비 알의 독특한 맛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추억의 맛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가을은 메뚜기잡이로 하루해가 갔다. "어머니는 밭에 나가고 아버지는 장에 가시고/ 나와 내동생 논길을 따라 메뚜기잡이 하루가 갔죠~."  매년 이맘때쯤이면 절로 이 노래(조영남의 '내고향 충청도')가 흥얼거려 지는 것은 바로 그런 추억이 깃든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메뚜기는 사실 엄청난 해충이었다. 추억의 곤충으로 그나마 먹을거리가 없던 시절 배고픔을 잠시 달래주던 존재였기에 망정이지, 본래 모습은 징글징글하던 송충이 만큼이나 해로운 곤충이었다. 하루에 자기 몸무게의 2배 분량을 먹어치우는 대단한 식성으로 농작물을 닥치는 대로 갉아 먹기에 그 피해는 실로 막대했다. 오죽하면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 여호아가 내린 열 가지 심판(재앙) 중의 하나로 메뚜기떼가 등장했겠는가.
하지만 오늘날엔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논과 자연 생태계의 건강도를 가늠하는 생물지표로서 메뚜기류가 반가운 손님 대접을 받고 있다. 각 지자체와 농민단체들이 친환경 특히 무농약 농법의 증거로서 벼메뚜기의 건재함을 앞다퉈 과시할 정도로 귀한몸이 됐다. 우리 농촌이 예전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청신호다. 이와 함께 벼메뚜기잡이를 지역 이벤트로 내세우는 곳들이 갈수록 늘고 있음도 반가운 추세다.
그러나 쓰라린 소식도 들린다. 다름 아닌 북쪽 얘기다. 북한 주민들도 최근 벼메뚜기잡이에 부쩍 나서고는 있는데 그 이유가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란다. 얼마나 혈안이 돼 있으면 그들을 막는 규찰대까지 운영되고 있다니, 남북이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한쪽에선 반가움에 보란듯이 메뚜기를 잡고 다른 한쪽에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몰래 메뚜기를 잡고….
오로지 볶아먹기 위해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오늘따라 서글프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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