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달천의 생태 ①어류

 
달래강은 어름치와 황쏘가리의 강이다
괴산호서 본보 취재팀 극적으로 찾아내
수질악화·외래어 유입 어종에 큰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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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을 대표하는 물고기는 무엇일까. 달래강에 사는 모든 물고기가 ‘달래강의 숨결’을 대변하는 귀중한 생명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달래강은 ~의 강이다’라고 할 만큼의 대표적인 어종은 과연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달래강의 대표어종은 어름치(천연기념물 259호)와 황쏘가리(〃190호)다. 비록 이번 취재에서는 단 3마리의 어름치와 1마리의 황쏘가리만 발견됐으나 그 4마리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기에 취재팀은 주저없이 “달래강은 어름치와 황쏘가리의 강이다”고 주장한다.
 
 
■약 20년만의 어름치와 황쏘가리 1호 발견
 

취재팀은 우선 이번 취재에서 ‘달래강의 어름치’를 찾는 데 집중했다. 이유는 지난 1989년 3월부터 1991년 11월까지 서원대 기초과학연구소 손영목박사(어류분류학) 팀이 실시한 충북도산 담수어류 조사서 1마리의 어름치가 마지막으로 발견된 후 20년 가까이 출현 소식이 없기에 그것을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당시 마지막 채집장소인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일대를 중심으로 탐문과 현지 조사를 병행한 결과 이 수역서 어름치는 이미 ‘사라진 물고기’가 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취재범위를 넓혀 취재는 계속됐다. 그 결과 수개월이 지난 8월 초 뜻밖의 희소식을 접하기에 이르렀다. 달래강 3백리 물길 그 어느 곳에서도 어름치의 서식흔적을 찾지 못했던 취재팀은 의외의 장소인 괴산호서 돌연 “이상한 물고기가 간혹 잡힌다”는 한 주민의 증언을 듣게 된 것이다.


즉시 집중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는 지난 8월 8~13일까지 수중 촬영 및 조사 전문가가 초빙된 가운데 이뤄졌다. 결과 또한 뜻밖으로 나타났다.
 

어름치와 황쏘가리가 동시에 발견된 것이다. 어름치는 괴산호 중간수역인 갈은계곡과의 합수지점 부근(수심 1~2m)서 3마리가 발견돼 1마리가 수중카메라에 포착됐고 황쏘가리는 수심 4m 가량의 괴산호 상류수역 바위절벽(괴산군 칠성면 사은리)서 발견돼 촬영됐다.

 

 

 

 

달래강의 어름치(위)와 황쏘가리(아래)
달래강 수계인 괴산호에서 3마리의 어름치와 1마리의 황쏘가리가 발견된 것은 이번 어류분야 취재의 가장 큰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어름치의 발견은 약 20년 만의 일로 아직 달래강 수계서 절종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달래강서 어름치가 확인된 것은 앞서 말한 바대로 약 20년 만의 일이요 황쏘가리의 발견은 처음이다. 전세계에서 우리나라, 특히 한강수계서만 서식하는 희귀어종 황쏘가리는 그동안 달래강 수계서는 주로 중상류 수역서 어부나 낚시꾼들에 의해 가끔 잡힌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전문가들의 조사서 확인되지 않아 서식여부가 불투명했었다.

 

어름치 또한 우리나라 고유종(특산종)으로 멸종직전에 놓여 있는 희소종이다.
 

이번에 발견된 어름치는 몸길이 약 20cm에 몸 표면과 지느러미에 종 특유의 검은 반점과 띠가 선명히 나 있고 모래 바닥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황쏘가리는 몸길이 약 30cm에 온몸에는 특유의 주황색을 띠고 있으며 바위절벽에 은신해 있었다.
 

달래강 수계인 괴산호서 어름치와 황쏘가리가 발견된 데 대해 학계와 전문가들은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달래강 최후의 어름치’를 기록했던 손영목박사(서원대 명예교수, 민물고기보존협회장)는 “달래강 수계서 20년 가까이 어름치가 발견되지 않아 대가 끊긴 게 아닌가 우려했는데 수중촬영을 통해 서식이 확인돼 반갑기 그지 없다”며 “극소수나마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은 괴산호 주변이 사람들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어름치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유지됐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현지조사에 참여한 한 전문가는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이들 희귀어류가 찾아진 것은 그만큼 괴산호 수중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입증한다”며 “앞으로도 계속 건강한 호소 생태가 유지될 수 있도록 관계기관과 지역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달래강 수계의 현주소

 

‘반가운 손님’ 어름치와 황쏘가리가 찾아진 달래강에도 중대한 위기가 찾아들고 있다. 다름 아닌 수질 악화와 외래어 유입 등에 따른 서식환경의 변화가 전 수계를 벼랑끝으로 내몰고 있다.
 

달래강에는 지난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총 48종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에는 주로 맑은 물에서만 서식하는 물고기들이 비교적 많이 살고 있었음은 그만큼 서식환경이 양호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하

 

지만 이젠 그들 숫자가 크게 줄었다. 특히 이번 취재에서는 꾸구리, 돌상어, 배가사리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수질 악화와 서식처 파괴 등 서식환경 변화가 주요인이다. 서식환경 변화는 최근 거세지고 있는 개발 바람으로 인해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물고기들의 숨통을 옥죄는 올가미가 되고 있다.


게다가 3년전쯤 낚시꾼들에 의해 괴산호로 유입돼 확산된 것으로 확인된 블루길과 큰입배스, 떡붕어 같은 외래어종의 급격한 증가 역시 서식어종에 큰 변화를 가져 오고 있다.

 

실례로 예전엔 상류쪽에 그리 많지 않던 누치가 최근엔 현저히 많아진 반면 붕어, 쉬리, 피라미, 갈겨니, 돌마자, 모래무지 등은 크게 줄어들었음은 이를 입증해 준다. 그에 반해 큰입배스는 중상류 수역인 청천지역까지 개체수가 크게 번져 활개치고 있다.

 

달래강의 터줏대감들이 굴러온 돌에 의해 점차 살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외래종 ‘큰입배스’
그동안 외래어종이 유입되지 않아 ‘마지막 보루’로 여겨졌던 달래강 상류에도 최근 낚시꾼들에 의해 큰입배스, 블루길, 떡붕어가 유입돼 급속히 번져나가고 있다. 현지 어부 이진의씨(괴산 청천)가 그물에 잡힌 큰입배스들을 들어보이고 있다.

 

갑자기 개체수가 늘어난 토종어‘누치’
외래어종의 유입과 서식환경 변화로 인해 토종어인 ‘누치’의 개체수가 크게 늘어나는 등 달래강 상류의 어종 분포가 크게 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한가지 유념할 것은 중류 쪽에 있는 괴산댐의 악영향이다. 비록 괴산호 안의 생태계는 취재 결과 댐 건설 51년 만에 기적처럼 되살아난 것으로 밝혀졌지만 <본보 8월 18·19일자, 9월 1·3·4·16·17·26·30일자, 10월 6·7·8일자 보도>, 물줄기를 가로막고 있는 댐 자체는 수중 생태계의 원활한 흐름과 존립을 방해하는 지극히 위협적인 존재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상·하류를 잇는 물고기들의 이동 통로를 완전 단절시킴으로써 가해지는 악영향과 스트레스는 달래강 전 수역의 생태건강도를 크게 감소시키는 가장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최근 댐 상류 수역서 비교적 몸집 큰 뱀장어와 동자개가 자주 출현하고 있음은 수년전부터 이뤄져온 치어 방류사업의 결과로써 앞으로 경제성 어종의 증식분야에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수년전 방류한 은어는 확인되지 않아 대조를 보였다.
 

남한강과 합류 후 한강 향해 ‘새 여정’ 시작
 3백리 물길 마치는 곳에 탄금대 우뚝
합수지점은 끝이 아닌 영원한 시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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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단월 강수욕장을 지난 달래강은 이내 달천교 밑을 흐른다.

 

달천교 부근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제법 큰 나루가 있던 곳이다. 동래~한양간 영남대로를 잇던 나루터 대신 들어선 것이 달래강(달천)의 대표적인 다리 달천교다.
 

영남대로 옛길은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쪽에서 유주막거리~충렬사~단호사를 거쳐 이곳 달천 나루를 건넌 다음 주덕으로 이어지던 ‘큰 길’이다. 지금으로 치면 경부고속도로의 중간 길목인 셈이다.
 

현재 달천교는 두 개의 다리가 나란히 서있다. 둘 다 얼마 전 새로 놓인 2차선 다리로 서울·청주 쪽으로 가는 다리는 1990년에, 충주 시내쪽으로 들어가는 다리는 1999년에 각각 세워졌다. 예전 배가 다닐 땐 인근에 뱃사공들이 머물던 집들과 주막촌이 형성돼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질주하는 차량들 사이로 강물을 바라보니 물흐름이 무척이나 여유롭다. 강줄기의 끝자락인 남한강과의 합류점이 얼마 남지 않아 ‘달래강으로서의 생(生)’에 대한 미련에서일까. 아니면 3백리 물길을 잰 몸짓으로 달려온 피곤함 때문일까.
 

지난 여정이 거의 대부분 산골짜기를 지나는 계류였기에 이런 모습이 낯설다. 몇 배로 넓어진 강가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론 시가지가 ‘도회지 빛’을 하고 있다.
 

천왕봉 기슭서 발원해 속리산 골짜기를 흘러내릴 때의 거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갓 시집 온 새색시의 수줍은 발걸음을 하고 있다.
 

다만 그 맑디 맑던 물빛깔은 도처에서 받아들인 인간냄새 때문인지 거무칙칙하고 물내음마저 비릿하다. 안쓰럽다.
 

물소리도 마냥 조용하다. 3백리 본류와 숱한 지류를 지나면서 안고 온 사연과 전설들이 무척 많기에 제법 떠들썩할 법도 한 데 더없이 잔잔하다.   

 
‘달라진 물흐름’은 그렇게 조용히, 그리고 서둘지 않고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합수 직전의 달래강
달래강은 남한강과 합류하기 직전 지류인 요도천과 충주천을 받아들인 후 곧바로 탄금교 아래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앞에 보이는 다리가 1977년 준공된 탄금교이다.

나그네의 발걸음도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그간 정이 든 때문일까.

 

탄금대가 고구마처럼 떠있는 합류점으로 향하는 발길이 왠지 무겁다.


이제 탄금대다.

 

달래강 물길 답사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머릿속에 되뇌 온 취재의 종착지가 아니던가.

 

속리산 천왕봉 발원지서 남한강 합수머리까지 물길 답사의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감회가 새롭다.
 

하지만 탄금대는 단순한 마침표가 아니다. 오히려 달래강이 탄생시킨 방점(傍點)이라고 해야 옳을 성 싶다.

 

달래강의 혼과 얼이 담긴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비록 동서 방향 길이가 1km 남짓하고 남북 방향의 너비가 600m 밖에 안 되는 데다 상대고도(해발고도 106m-최저고도 65m)가 40m밖에 되지 않는, 그야말로 ‘작은 봉우리’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깃든 혼과 얼로 인해 달래강 전 물길을 대표하는 명승지이자 역사·교육의 장으로 우뚝 솟아있지 않은가.

 

 

 

 

탄금대에 세워진 악성 우륵선생 추모비(위)와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 노래비(아래)

 

우선 탄금대(彈琴臺)는 그 명칭이 전해주 듯 가야국의 악성 우륵이 1400여년 전 가야금을 타며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우리나라 국악의 발상지다.

 

또 탄금대는 신립장군이 임진왜란때 천추의 한을 품고 장열하게 최후를 마친 전적지이며 일제강점기때 소설과 시로써 민족정기를 일깨운 독립유공자 권태응선생의 ‘감자꽃’ 노래비가 있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탄금대는 곧 충주시민들의 정서적 고향이자 자랑이다. 그런 탄금대가, 그를 낳은 달래강이 이제 막 ‘달래강으로서의 생’을 마감하려는 곳에 위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니 필연이다. 그 필연은 특히 강 건너편, 즉 금가면 쪽에서 바라보면 더욱 실감한다.

 

그것은 바로 달래강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게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비로소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분명 눈앞에 펼쳐진 합수 광경은 달래강이 남한강과 한 몸이 되어 새로운 본류인 한강을 향해 새 여정을 시작하는 출발점인 것이다.

 

 

남한강 건너편서 바라본 합수 장면
달래강은 충주 탄금대 부근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남한강과의 합수가 끝이 아니다. 남한강과 한 몸이 된 물길은 또 다시 새로운 본류인 한강을 향해 새 여정을 시작한다. 왼쪽으로 보이는 나즈막한 구릉이 충주시민의 정서적 고향이자 자랑인 탄금대이고 오른쪽 다리가 탄금교이다.
 

새로운 출발, 새로운 물흐름을 시작하는 곳에 탄금대는 그렇게 필연으로 서 있다.

 

생각의 초점을 과거 소금배와 세곡선이 다니던 시절로 되돌려 본다.

 

남한강을 거슬러 온 당시 뱃사공들은 이곳 합수머리를 거쳐 달래강으로 올랐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곳이 바로 달래강 뱃길의 시작점임을 뜻하는 것 아닌가.

 

당시의 뱃길은 소금과 같은 해산물의 유입 통로 내지 세곡의 운반로였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외부의 소식이나 문화가 유입된 ‘소통의 길’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3백리 물길을 함께 해온 나그네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달래강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합수지점 탄금대는 끝이 아닌 영원한 시작점이란 것을….<계속>

 

 강을 사이에 두고 무릉리와 도원리 나란히 위치
 
가뭄 끝 장마로 하천·농경지 일시에 해갈 
 청천 뒤뜰숲 피서지로 각광 지역의 랜드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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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화9경의 마지막 명소인 박대소에서 몸을 풀어헤친 강물이 갑자기 거센 몸부림을 친다. 하룻 밤새 몸집도 수십 배 늘고 물빛도 온통 황톳빛으로 변했다. 7호 태풍 ‘갈매기’가 몰고온 집중호우 때문이다.

 

지난 6월 중순 단 한 차례 비다운 비가 내렸을 뿐 예년에 없던 마른 장마로 겨울철부터 내내 바닥을 드러내던 달래강이 하늘의 조화(造化)로 금새 딴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이 자연의 힘이다.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어쩔 수 없던 긴 가뭄이 자연의 조화로 일시에 해결된 것이다. 해서 달래강 주변 사람들은 이제서야 맘을 놓게됐다.

 

‘큰물’이 지나가지 않아 다슬기와 물고기들이 씨 마를까 걱정하던 어부들도, 연일 타들어가던 농작물을 바라보며 “며칠새 해갈되지 않으면 알갱이가 영글지 않아 곡식 먹긴 다 글렀다”고 애간장 녹이던 농부들도, 숲속까지 메말라 올해도 버섯포자 생기긴 다글렀다고 지레 한숨짓던 송이버섯꾼들도 이젠 모두 두 다리 뻗고 잠자게 됐다. 아니 오히려 국지성 호우가 더 내린다는 예보에 장마 걱정까지 하게 됐으니 하룻밤새 인간의 마음까지 간사하게 만들어 놓았다.

 

소리까지 요란해진 강물을 따라 박대소 계곡을 나오니 청원군의 끝동네인 쇠바우와 마주친다. 이 마을 앞에 새로 건설된 삼인교 중간이 청원군과 괴산군의 경계다.

 

다리가 없던 시절 마을주민들은 불편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 강 건너 괴산군쪽 마을인 삼인리 사람들이 청원군 지역에 있는 논밭으로 일을 하러 왔다가도 속리산쪽 하늘에 검은 구름만 비치기만 하면 부랴부랴 강을 건너야 했단다. 그렇지 않고 우물쭈물 일욕심을 더 냈다간 갑자기 불어난 강물에 발이 묶여 물이 줄 때까지 마냥 생고생을 했단다. 속리산 지역이 워낙 비가 많은 다우지역이라 이 쪽의 ‘동네 날씨’ 갖고는 상류쪽 강우량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번에 불어난 강물도 속리산 쪽의 영향이 크다는 주민들의 말을 듣고는 다리를 건너 괴산군 청천면 관내로 들어서니 왼쪽으로 한들보가 눈에 들어온다. 청천~용화간 도로가 지나는 강평교 다리 위에서 한들보를 바라보니 이제껏 봐온 다른 보와는 규모가 비교 안 될 만큼 커 보인다. 청천지역에서 가장 넓은 들판을 끼고 있어 한들보라고 했다는 데 그 유래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들보를 넘어선 강물은 또 다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 이름이 청천지역을 흐른다 해서 붙여진 ‘청천천’이다. 본래 청천면은 조금전 지나온 삼인교 중간 경계지점부터 시작되나 청천 사람들의 관습상 한들보 바로 아래부터를 청천천이라 부르고 그 위를 박대천이라 부르고 있다.

 

불어난 물에 한들보에서 떨어지는 강물이 장관을 이룬다. 넓이 100m가 넘는 보막이에서 동시에 떨어져 한바탕 굽이친 후 하얀 포말을 만들며 몸을 사리는 모습이 마치 수문을 닫았다 연 것처럼 일사분란한 게 아주 볼 만하다.

 

모처럼만의 ‘큰물’, 그리고 장관
 태풍 ‘갈매기’가 몰고온 집중호우로 물이 불자 한들보에서 떨어지는 강물이 장관을 이룬다. 넓이 100m가 넘는 보막이에서 동시에 떨어져 한바탕 굽이친 후 하얀 포말을 만들며 몸을 사리는 모습이 아주 볼 만하다.

한참 넋을 잃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데 지나가던 사람들도 합세해 연신 ‘폰카’를 눌러댄다. 모두들 근래 보기 드문 광경이란다.

 

한들보 아래 귀만리로 들어서는 다리는 벌써 물이 목까지 찬 채 물위에 떠 있다. 다릿발은 아예 물에 잠겨 보이질 않는다.

 

이 다리 바로 아래 오른쪽으로는 속리산 뒤쪽(경북 용화)에서 흘러내려오는 신월천이 합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강폭은 더 넓어지고 강물도 훨씬 많아졌다.

 

귀만리 앞 다리를 지나 한들(강평들)을 거친 강물은 청천면 소재지 인근으로 흘러들어 환경지킴이 공원 뒤 잠수교서 방향을 동북방향으로 약간 틀어 청천 뒤뜰숲(후평숲)을 스치며 질주한다. 환경지킴이 공원은 이 지역 주민들이 용화지역의 온천개발을 저지한 기념으로 세운 곳으로 달래강 수질과 자연환경을 지키려는 염원과 의지를 담고 있다.

 

청천 뒤뜰숲은 속리산 법주사 입구의 야영장숲(오리숲내 소나무숲)과 청원 미원의 금관숲과 더불어 ‘달래강 3대숲’이라 부를 만큼 명성이 자자한 청천지역의 명소다. 강가 옆으로 펼쳐진 모랫벌 위로 수십~수백년 된 참나무와 소나무, 느티나무들이 마치 하천가에 펼쳐놓은 파라솔처럼 즐비하게 서있는 모습은 이 지역을 찾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불과 10년전까지만 해도 여름 휴가철이면 멋진 경관과 자연숲이 선사하는 시원한 바람, 강수욕, 여울낚시 등을 즐기기 위해 하루평균 수백~수천명이 찾아왔으나 국가 금융위기 이후 찾아온 장기적인 경기 침체 여파로 지금은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다.

달래강과 청천 뒤뜰숲
 청천 뒤뜰숲은 속리산 법주사 입구의 야영장숲(오리숲내 소나무숲)과 청원 미원의 금관숲과 더불어 ‘달래강 3대숲’이라 부를 만큼 명성이 자자한 청천지역의 명소다.

청천 뒤뜰숲을 반바퀴 돌며 섬 아닌 섬을 만들어놓은 강물은 이내 방향을 다시 틀어 고성리 고연마을을 향해 줄달음 친다. 청천뒤뜰에서 고연마을까지는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닫지 않는 계곡형 하천으로서 바닥에는 커다란 바위가 수없이 깔려있어 쏘가리,뱀장어,대농갱이 같은 경제성 어종이 많이 서식하나 워낙 인적이 드물어 불법어로가 성행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찻길을 통해 고연마을로 접어드는데 천변에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누런 암소가 평화롭게 되새김을 하면서 낯선 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비가 갠 틈을 타 동네주민이 매놓은 것이다.

고향의 풍경
 청천 뒤뜰숲을 지나 계곡이 휘도는 고연마을로 접어드는데 천변에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누런 암소가 평화롭게 되새김을 하면서 낯선 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연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물머리를 튼 강물은 고성리 성암 못미쳐 도로변에 커다란 자연보를 형성해 놓은 후 다시 방향을 틀어 도원리를 향한다. 도원리 건너편 신도원은 청안 부흥쪽에서 흘러내리는 압항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이 일대의 금평·신도원·도원(원도원)리 하천변에는 최근 팬션과 민박집이 크게 늘어 이 지역의 새로운 수입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압항천이 청천천(달래강)으로 흘러드는 신도원리(중리) 합류지점에는 인근 무릉리에서 내려오는 조그만 실개천도 함께 합쳐지는데 그 물빛 만큼이나 동네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강 건너는 도원(원도원)이요, 합수머리가 있는 곳은 신도원, 실개천이 흘러내려오는 곳은 무릉이다. 이들 이름을 합쳐보면 ‘무릉도원’ 아닌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도원경처럼 끝없이 너른 땅과 기름진 논밭, 풍요로운 마을과 뽕나무, 대나무밭은 비록 없더라도 청천천과 인근 산들이 어우러진 이곳 산천경계가 결코 그에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 지역 선인들의 혜안을 읽을 수 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무릉리 안쪽에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자연을 벗삼아 사는 한 남자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행방을 모른단다. 외지서 들어왔다는 그도 처음에는 이곳 지명을 듣고 나름대로의 ‘이상향’을 꿈꾸며 들어와 그렇게 살다 바람처럼 어디론가 또 다른 도원경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장마철 이색 낚시
 비가 내려 달래강에 큰물이 흘러가면 각 다리나 천변에는 상류로 이동하는 눈동자개,메기,뱀장어 등을 잡으려는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이색적인 광경을 연출한다.

여울로 변한 뱃길 세월무상 절로 느껴져
80년 보은 대홍수로 마을마다 아픈 상처 
청원관내 접어들면서 박대천으로 불려져

 

상전변성해(桑田變成海), 즉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했던가.

 

속리천(달래강)을 따라 보은군 산외면 이식리로 접어든 나그네는 세월의 무상함에 발길을 멈춘다.

 

옛날 이곳을 지나던 배들이 쉬어갔다는 주식포(舟息浦)는 지금의 지명인 이식리(梨息里)로 변했고 마을앞 강물은 무릎도 채 안차는 얕은 여울로 변했으니 말 그대로 창해상전(滄海桑田)이요 능곡지변(陵谷之變:언덕과 골짜기가 서로 바뀜)임을 실감케 한다.


이식리에서 잠시 강물에 발을 담그고 사람의 인생살이와 강의 생로병사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잠겨있다 다시 이식2교를 건넌다.

 

물길은 이곳서 산외면과 내북면 경계를 지나 오른쪽 산자락을 끼고 또 한바탕 커다란 S자형을 그리며 호기를 부리는데 그 중간에 만나는 곳이 호룡소(虎龍沼)다. 산외면 이식리서 내북면 봉황리를 향해 이어진 바위산 자락이 마치 호랑이가 누워 눈을 감고 있고 능선에서는 용이 꿈틀거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그 밑을 감도는 물을 호룡소(虎龍沼)라 불렀는데 지금은 흔히 호롱소라 부르고 있다.

 

호롱소에서 호랑이 머리격인 바위 절벽 위 산봉우리는 전국에서 제일 가는 명당으로 알려진 곳인데 지금은 문화 류씨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호롱소 부근은 그 이름 만큼이나 경치 또한 절경을 이뤄 외지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명당도, 명소도 이젠 모두 예전 일이 될 판이니 이곳서도 세월무상을 또 다시 느끼게 한다.

 

최근 진행중인 내북-운암간 도로 공사로 곧 터널이 뚫릴 예정이어서 주변 자연경관이 크게 훼손될 위기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터널과 교량이 지나는 곳이 하필이면 호랑이 머리부분과 호롱소 주변이어서 인근 주민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위기의 호룡소
호랑이와 용의 형상을 한 바위산 밑으로 강물이 휘돈다 하여 이름 붙여진 호룡소는 인근 도로공사로 인해 자연경관이 크게 훼손될 위기에 놓여 있다. 한 주민이 호룡소의 내력을 설명하며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강물마저 호롱소의 슬픈 사연을 아는 지 가냘픈 몸짓으로 호랑이 꼬리 부분의 산자락을 살짝 적시며 모래벌을 향한다.

 

봉황리의 중심마을인 모래벌은 이곳의 지형상 속리천이 휘돌아 흐르면서 곳곳에 모래톱을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수초로 가득 차 예전 모습과는 딴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 앞의 청벽산이 봉황리란 아름다운 지명과 유구한 마을 역사를 전하며 마을 상징으로 우뚝 솟아있다. 봉황리는 이곳 청벽산에 아주 오랜 옛날부터 봉황 한 쌍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됐다.


하천을 끼고 있는 속리천 유역의 마을 대부분이 지난 1980년도 보은 대홍수때 입은 수해로 뼈아픈 상처를 안고 있듯이 봉황리 모래벌 역시 당시 입은 수해로 마을 전체가 쑥대밭으로 변해 집을 다시 짓고 제방도 높이 쌓는 큰 변화를 겪었다. 현재 마을앞을 지키고 서 있는 느티나무도 당시 제방을 높이면서 밑둥치가 2m 이상 덮여져 높이가 오히려 줄어든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봉황리 모래벌 앞에는 봉황교가 세워져 있고 이 다리 남쪽으로는 달래강의 1차 지류(총 17개) 중 처음으로 만나는 흑천이 흘러든다.

 

흑천은 한남금북정맥이 지나는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서 시작해 염둔·화전리를 거쳐 창리에서 동산·도원리쪽 물길과 합쳐진 후 봉황교 부근서 속리천과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흑천 합류부 지점 도로변엔 '속리산 24km'란 표지판이 서있어 이곳이 달래강 3백리 물길을 따라 발원지로부터 하류쪽으로 대략 5분의 1가량 지난 지점임을 알려주고 있다.


모래벌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면서 마주치는 곳이 청주-보은간 19번 국도가 지나는 청벽산 절벽이다. 이 청벽산 절벽에는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특이한 자연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봉황리 마을의 숨겨진 자랑거리인 '홍두깨물'이다. 이 홍두깨물은 비가 많이 올 때만 청벽산 절벽의 중간 부분 바위틈에서 약 40m 아래로 쏟아지는 장대한 폭포로서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아주 희귀한 현상이다.

 

봉황리의 상징 청벽산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는 마을앞 청벽산에 봉황 한 쌍이 살았다고 하여 이름 지어졌는데 이곳 중턱에는 비가 많이 올때만 나타나는 '홍두깨물 현상'이 마을의 자랑거리로 전해진다
.

 

봉황리 모래벌앞 느티나무는 지난 1980년 보은 대홍수 이후 제방을 높이면서 밑둥치가 2m 이상 파묻힌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청벽산 아래 봉황보에 잠시 머물렀던 물길은 보를 넘으면서 보은군 경계를 벗어나 이내 청원군 관내로 접어드는데 바로 이때부터 속리천이란 이름 대신 '박대천'이란 새 이름으로 흐르게 된다.

 

박대천은 청원군 미원면 어암리에 있는 박대소(沼)의 이름을 딴 것으로 달래강이 괴산군 청천지역에서 청천천이란 이명을 갖기 전까지 불려지게 된다.


이름이 바뀌어서일까. 청원군 미원면 운암1리서 박대천으로 불려지기 시작한 달래강은 물흐름이 훨씬 느긋해졌다.

 

들판 가운데를 흐르는 물길을 따라 인풍정교를 지나 운암교에 올라 서니 왼쪽으로 또 하나의 물길이 합류하고 있다. 두번째 1차 지류인 감천이다. 감천은 청주시 상당산 부근서 시작해 낭성면 지역서 인경천(2차 지류)과 만난 후 다시 미원면 관내를 흐르는 미원천(2차 지류)과 몸을 섞어 운암교 아래서 박대천으로 흘러든다.

 

봉황보

 

인풍정교서 바라본 박대천

 
이곳 감천 합류지점부터는 옛날 용과 신선이 살았다는 옥화9경 지역이다. 옥화9경은 달래강 본류가 통과하는 4개 시.군(보은군, 청원군, 괴산군, 충주시 등으로 지류만 지나는 음성군은 제외) 가운데 가장 짧은 구간을 지나는 청원군 관내 9곳의 절경을 일컫는 바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청원군이 '청원 관광의 간판'으로 내세우는 명소다.


그 중 옥화 1경은 달래강 본류가 아닌 감천(청주-보은간 19번 국도변 운암리) 하류에 있는 청석굴로 이곳에서는 구석기인들의 생활흔적인 찍개와 볼록날, 긁개 등이 발견된 바 있으며 굴에서는 용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감천이 합류하는 운암교에서 하류로 약 1km 가량을 내려가면 옥화2경인 용소(龍沼)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다.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에 있는 용소는 달래강 수계 중 수심이 가장 깊어 절벽위서 내려다 보면 바닥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물빛이 검푸른 게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이 용소에는 먼 옛날 용이 살았는데 그 용이 승천할 때 지나가던 여인네가 보는 바람에 부정을 타서 그대로 떨어져 이무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절벽 면에는 용이 승천할 당시 새겨진 듯한 용의 형상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달래강의 명소 '용소(옥화2경)'
용소에는 먼 옛날 이곳에 살던 용이 승천할 때 지나가던 여인네가 보는 바람에 부정을 타서 그대로 떨어져 이무기가 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절벽 면에는 용이 승천할 당시 새겨진 듯한 용의 형상이 뚜렷이 남아 있어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산자락이 품을 연 곳으로 속리천은 흐르고

최상류 대부분 전형적인 산골 풍경 멋진 풍경

일부구간 하천정비사업으로 점차 옛 모습 잃어


산경표의 원리에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말이 있다. 산은 스스로 물을 나눈다는 뜻이니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뜻과도 같다.


또 산경표에서는 두 능선 사이에 반드시 계곡이 있고 두 계곡 사이에는 반드시 능선이 있다고 본다. 또한 물길은 능선보다 낮은 곳에서 시작해 서로 끊기지 않고 이어져 흐르니 산 없이 시작되는 강이 없고 강을 품지 않은 산이 없어 결국 산과 강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 흘러온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룬 뒤 바다로 흘러가듯 이 산 저 산줄기가 모여 정간과 대간으로 흘러들고 마침내 백두산으로 향하니 이 모든 것이 한반도의 산과 강을 이룬다는 것이다.


옛 선조들의 기막힌 논리를 생각하며 눈앞에 펼쳐진 속리산 자락을 보니 옛말이 틀림없다.

 

속세를 잠시 떠났던 속리산 자락이 넉넉한 품을 이제 막 열기 시작하는 곳으로 속리천(달래강 최상류) 물머리가 삐죽이 내밀고 그 바로 옆으로 '국민소나무' 정이품송이 600년 전설의 모습으로 우뚝 서있다.


숱하게 속리산을 드나들었어도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다.

 

물길에 서서 물과 산의 개념으로 바라보니 더욱더 새롭다. 본류(남한강)랑 만나는 곳이 북쪽이니 좀더 빠른 그쪽을 향해 물길을 틔울 법도 한데 정반대 방향인 남쪽을 향해 점잖게 머리를 틀고 있으니 이 또한 속리산의 매력이자 달래강의 멋이 아닌가 싶다.


천변에 자란 달뿌리풀이 한 길 가량 자라있다. 사내리 집단지구시설에서 처음으로 '인간냄새'를 맡으면서 BOD를 품었다고는 하나 물빛이 아직은 꽤나 맑은 표정이다. 물가엔 검은 듯 푸른 모습의 물잠자리 떼가 산란기를 맞아 사랑을 나누느라 정신없이 오가고 둑방에는 앙증맞은 엉겅퀴가 망울을 터트린 채 바람에 하늘거린다.

 

인근 도로로 관광객이 수없이 드나들며 도시내음을 전해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전형적인 산골 풍경이다.

 

속리천과 정이품송
속세를 잠시 떠났던 속리산 자락이 넉넉한 품을 이제 막 열기 시작하는 곳으로 속리천 물머리가 삐죽이 내밀고 그 바로 옆으로 '국민소나무' 정이품송이 600년 전설의 모습으로 우뚝 서있다. 숱하게 속리산을 드나들었어도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다.


다시 물길을 타고 상판교를 지나 중판리 쪽을 향하니 말티고개 쪽 골짜기서 내려오는 실개천과 만난다.

말티고개 정상은 익히 알려진 대로 천왕봉서 시작한 한남금북정맥의 마루금이다. 고개 너머는 금강수계요 속리산 쪽은 속리천(달래강·남한강) 수계다.


이 지점부터 한동안은 왼쪽으로 한남금북정맥 능선을 두고 흐른다. 따라서 인근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빗물은 그대로 속리천의 몸이 된다.


하천이 한바탕 휘도는 곳으로 둑방길을 따라 들어가니 중판리 점말교가 나타난다. 다리위에 서서 물이 흘러드는 위쪽을 바라보니 물길이 가냘프다.

 

봄부터 계속되는 가뭄으로 하천물이 바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점말교 바로 아래에 최근 '무전원자동수문'이 세워져 물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훨씬 많아졌지만 이곳 역시 텅 비어 있다. 올들어 한 차례, 그것도 개나리꽃 필 무렵에 단 한번 물이 넘치고 말았으니 가뭄정도가 어떤지 상상이 가리라.


이 자동수문은 보은군청 이호천담당(경제사업단 특허개발담당)이 직접 개발한 것으로 수질과 수량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최신형 수문이다. 보은군청은 앞으로 이 자동수문을 속리천 곳곳에 더 설치해 연중 맑은 물이 흐르도록 한다는 방침이어서 그 효과가 기대된다.

 

 

무전원자동수문
봄부터 계속되는 가뭄으로 현재 속리천은 바닥을 보이고 있다. 오죽하면 중판리 자동수문으로 올들어 한 차례, 그것도 개나리꽃 필 무렵에 단 한번 물이 넘치고 말았으니 가뭄정도가 어떤지 상상이 가리라. 물이 넘칠 때의 모습(위)과 현재 모습(아래).

 

중판리 자동수문 아래에는 30년전(1979년) 건설된 '희망의 다리'가 고목처럼 누워있다.

 

인근에 속리터널이 뚫리면서 교통량이 많아지자 바로 아래에 중판교가 신설돼 다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그런 탓인지 다리 입구에 새겨진 희망의 다리란 이름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인다.

 

보은군과 대한석유공사가 이 다리를 건설할 당시만 해도 이 지역 주민들에게 '밖의 세계로 통하는 희망'을 주기 위해 야심찬 이름을 붙였으련만 세월이 흐르면서 퇴물로 전락한 채 피서객들의 주차장과 그늘막 역할을 할 뿐이다.

 

속리천도 세월처럼 그렇게 흘렀으리라. 뒤에서 밀려오면 밀려오는 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채지 않고 미련없이 낮은 곳만을 향해 줄달음 쳤으리라.


잠시 세월무상에 젖었다 발길을 돌리려니 새로 들어선 중판교 초입에 낯익은 돌탑이 금줄을 두르고 서있다. 동네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었단다. 자연을 아는 순수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물길을 따라내려가다 속리산면의 하수처리상황은 어떨까 궁금해 하천옆(중판리)에 세워진 속리하수처리장을 잠깐 들렀다. 보은군이 지난 2003년부터 한국수자원공사에 위탁해 관리운영해 오고 있는 이 하수처리장은 하루 처리용량 4천톤 규모로 인근의 상판·중판·사내·갈목리 일원 하수를 총13km의 차집관거를 통해 걸러내고 있다. 방류구를 살펴보니 비교적 맑은 물이 속리천으로 흘러들고 있다.


다시 도로로 나와 속리터널 앞을 거쳐 하류로 향하니 오른쪽으로 문화마을(중판2리)이 보일 쯤 하판교가 나타난다. 물길은 계속해서 왼편에 한남금북 마루금을 끼고 도로와 평행으로 달린다.


'샨띠와남'이란 독특한 이름의 요가수련원을 지나니 북암리와 마주친다. 마을 앞 세강교 아래엔 수령 3백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 역사를 대변하듯 마을간판처럼 서있고 왼쪽 수백m 위쪽으로 하천변 바위 절벽과 조화롭게 자란 소나무가 고풍스런 자태로 객을 반긴다.


37번 국도를 따라 산모퉁이를 한바퀴 휘돌고나니 백현리 마을이다. 백현교로 들어서자 다리 아래 개울가 모습이 지금까지 보여온 자연하천의 모습과 확연히 다른 게 어색해 보인다. 최근에 마친 하상정비 사업으로 둑방엔 철망이 깔리고 하천바닥은 편평하게 다듬어져 '죽은 느낌'을 주고 있다.

 

 

속리천과 한남금북정맥의 멋진 만남
37번 국도를 따라 보은군 속리산면과 산외면 경계를 지나니 잠시 뒤 백석2교가 쉬어가라고 객을 부른다. 다리 건너 왼쪽 빈터로 들어서자 한폭의 동양화가 수면위에 떠있다. 한남금북정맥의 능선이 인근 농경지와 어울어져 물위에 비친 게 여간 멋진 게 아니다.

 

또 한바탕 휘도는 산모퉁이 중간에 속리산면과 산외면 경계가 있고 이어 나타나는 백석2교가 잠시 쉬어가란다. 다리 건너 왼쪽 빈터로 들어서자 한폭의 동양화가 수면위에 떠있다. 한남금북정맥의 능선이 인근 농경지와 어울어져 물위에 비친 게 여간 멋진 게 아니다. 지는 석양이 아쉬워 발길을 돌리니 백석1교가 지난 겨울의 모습을 떠올린다. 찬 바람이 불던 늦겨울 예비탐사차 이곳을 찾았을 때와 물빛이 확연히 다른 게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계속>

"천왕봉서 물머리 일으켜 3백리 물길 시작" 
실질적인 시작점은 백두대간 마루금
'속리천'이란 이명으로 최상류 흘러

 

 

■달래강 물길의 시작점


달래강 물길은 그동안 속리산 비로봉 아래 상고암 약수로부터 시작된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번 탐사 결과 달래강의 제1 발원지는 천왕봉 아래의 봉수대터 샘물임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달래강 3백리 물길은 바로 이 샘물로부터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물론 실질적인 물흐름이야 천왕봉서 문장대를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학계서 인정하는 강의 시작점은 '하구 또는 합류지점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샘물 형태의 물뿌리(水源)'이기에 천왕봉 봉수대터 샘물이 진정한 '달래강의 시작점'인 것이다.


다만 이번에 함께 찾아진 비로봉 남쪽사면의 굿당터 샘물(제2 발원지-상환암과 천왕봉을 잇는 등산로변 바위굴 샘물)과 기존의 발원지로 알려진 상고암 약수(제3 발원지)도 달래강의 주요 시작점으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 발원 샘물들은 각기 몸을 일으켜 법주사쪽 골짜기로 흘러들면서 달래강의 최상류 수역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 천왕봉의 봉수대터 샘물은 서북방향으로 물흐름을 시작해 산의 중허리 쯤에서 제2 발원샘인 굿당터 샘물과 몸을 섞은 다음 이내 상환암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다가 잠시 은폭동 폭포서 몸을 떨군 다음 비로산장 아래 삼거리(등산로를 따라 경업대·상고암 방면과 상환암·천왕봉 방면으로 나눠지는 갈림길)서 비로산장쪽으로부터 흘러오는 물길과 하나가 된다.

 

발원 샘물의 합수
천왕봉과 비로봉에서 각기 발원한 달래강 물머리는 비로산장 아래 삼거리(천왕봉·상환암쪽 등산로 입구)에서 서로 만나 비로소 하나의 물줄기를 이룬다. 왼쪽이 상고암·경업대쪽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 오른쪽이 비로봉 남쪽사면과 천왕봉·상환암쪽서 내려오는 물줄기.


비로산장쪽의 물길이란 다름 아닌 상고암 약수로부터 시작한 물줄기와 경업대·입석대쪽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상고암 입구 삼거리(경업대 방면과 상고암 방면의 갈림길)서 만나 비로산장을 거쳐 내려오는 물길을 말한다.


이들 주요 발원지 물길의 특징은 처음엔 석간수 형태의 샘물을 이루다가 샘물 밖을 벗어나 물흐름을 시작하면 다시 돌과 바위틈으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췄다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길 수십 차례씩 반복하면서 앞서 말한 합류점(비로산장 상·하부)에 와서야 비로소 계곡수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


이들 물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갑자기 물은 보이지 않고 돌과 바위 밑으로 졸졸거리며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이른바 건천지역이 유난히 많다. 그러다가도 여름철 장마 기간이 돼 유수량이 많아지면 물길이 겉으로 드러나 크고 작은 폭포와 급류를 이루는 등 새하얀 물줄기가 온 골짜기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비로산장 아래부터 제법 계곡수 형태를 띠기 시작한 달래강 물길은 다시 세심정 부근서 문장대쪽 물줄기와 합쳐지면서 몸집을 불린 뒤 조선 세조대왕이 피부병을 고쳤다는 목욕소를 지나 태평교 밑에서 사내저수지로 흘러든다.


사내저수지는 달래강이 속리산서 물머리를 일으킨 후 미처 산자락을 벗어나기 전에 만나는 첫 인공 구조물로서 인근 법주사를 비롯한 속리산면 일대의 주요 상수원 역할을 하고 있다.


보은군이 관리하는 사내저수지 상수원은 자연유하식 식수전용댐으로서 총 14만2,500톤의 저수용량을 갖고 있다. 보은군은 이곳 상수원을 통해 모두 485가구 1,759명의 주민들에게 하루 1,238톤의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보은군은 지난 1988년부터 사내저수지를 포함한 속리산 자연환경보전지역내 계곡들을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발원지에서 사내저수지까지
달래강은 처음엔 석간수 형태의 샘물을 이루다가 샘물을 떠나 물흐름을 시작하면 다시 돌과 바위틈으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췄다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길 수십 차례 반복하면서 비로산장과 세심정 부근에 와서야 비로소 계곡수 형태를 띤다. 세심정 부근서 문장대쪽 물줄기와 합쳐진 달래강 물길은 목욕소를 지나 태평교 밑에서 사내저수지(맨 오른쪽)로 흘러든다.

 

■속리천의 이름으로


사내저수지를 지난 물길은 법주사 바로 앞에서 동암쪽 계곡수와 만나면서 '속리천'이란 이름으로 사내리를 향해 물머리를 남쪽으로 튼다. 속리천은 달래강 물길이 발원지로부터 흘러내려 오면서 처음으로 얻게되는 '법정 하천(지방 2급 하천)으로서의 명칭'이다. 따라서 이곳부터는 계곡수 형태를 벗어나 비로소 '자연하천'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고 수량도 많아진다.


속리천이란 이름은 달래강이 하류로 내려가면서 구간에 따라 달리 불려지는 여러 이명(異名) 중의 하나로, 물길이 청원군 미원면 관내로 접어들어 '박대천'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기 전까지의 명칭이다.

 

속리천이란 이름으로
사내저수지를 지난 물길은 법주사 바로 앞에서 동암쪽 계곡수와 만나면서 '속리천'이란 이름으로 사내리를 향해 물머리를 튼다.


법주사를 지난 물길은 다시 야영장 부근서 남산쪽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물길과 합류한 후 사내리 집단시설지구(상가지역)와 법주사를 잇는 다리를 지나 하천내에 설치된 분수대서 잠시 몸을 풀어헤친 뒤 묘봉쪽서 내려온 물길과 합쳐져 정이품송을 향해 줄달음질 친다.


법주사에서 사내리 집단시설지구까지 흐르는 동안 달래강 물길은 처음으로 '인간냄새'를 맡으면서 물빛도 달라지고 수질도 드디어 'BOD'를 띠기 시작한다.


상가지역 건너편 사낙골을 지나 대형버스 주차장을 옆으로 끼고 산모퉁이를 도니 이내 '국민 소나무' 정이품송이 600여년의 전설을 머리에 인 채 물길을 반긴다.

 

하지만 우산을 펼쳐 놓은 듯 말끔하던 예전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태풍에 잘려져 나간 상처를 허공에 떠 받들고 누런 솔잎에다 흉칙한 철기둥을 버팀목 삼아 근근이 서 있는 게 여간 측은해 보이는 게 아니다.

 

현재의 병색도 병색이거니와 그 병색을 더욱 짙게 만든 것이 다름아닌  인근 하천의 습기, 즉 달래강(속리천) 물길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안쓰럽다.

 

바로 옆으로 도로 공사를 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뿌리를 흙으로 깊게 덮는 바람에 물빠짐이 불리해져 화근이 된 데다 인근 하천에서는 끊임없이 수분을 과잉공급해 물과는 상극인 소나무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이다. 유일한 '벼슬나무'이기에 수시로 링거주사를 맞는 호강(?)을 누리고는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병색이 짙어지는 것을 보면 그 명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달래나 보지…" 슬픈 남매 사연 담은 설화 대표적
물맛 좋아 달천(甘川), 수달 많이 살아 수달천(獺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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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달천)은 사연이 참 많다. 특히 명칭 유래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와 기록이 전한다.

 

우선 충주를 중심으로 널리 알려진 달래강 설화부터 들어보자.


"먼 옛날 친남매가 길을 가다 소나기를 만났다. 때는 여름인지라 앞서가던 누나의 얇은 옷이 비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뒤따라가던 남동생은 어쩔 수 없이 누나의 드러난 몸을 보게�고,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심성이 착했던 남동생은 자신이 엉뚱한 생각을 한 게 죄스러워 그만 돌로 아랫도리를 쳐 죽고 말았다.
한참 뒤 남동생이 따라 오지않는 것을 안 누나가 이상히 여겨 되돌아가보니 아뿔사, 동생이 아랫도리에 피를 흘리며 죽어있지 않은가. 이를 본 누나는 그제서야 전후사정을 알아채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하는 말이 '차라리 달래나 보지, 말이나 해 보지…' 그랬다는 것이다."


이같은 슬픈 얘기가 전해지면서 그때부터 달래강이란 이름이 생겼고 누나가 동생을 끌어안고 통곡한 곳은 달래고개라 불렀다 한다.

 

다음은 달천에 관한 유래다.


때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게 됐는데 이 때 이여송이 명군의 장수로 들어오게 됐다. 이여송의 아버지(이성량)는 본래 조선사람이었으나 철령위로 도망가 살았기에 이여송 역시 근본이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망각한 채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며 중요한 혈을 끊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여송 휘하의 한 장수가 충주지역을 지나다 갈증이 나자 맑게 흐르는 강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달고 좋아 감천(甘川)이라 한 것이 훗날 달천으로 변했다고 한다.


물맛이 달고 맛있다는 뜻의 또다른 이명으로는 단냇물, 달냇물 등이 있으며, 충주 인근의 달천동,단월동,단호사와 같이 '달' 혹은 '단'자가 들어간  지명은 한자어에 상관없이 모두 '단 물맛'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또 일설에는 동국여지승람에 달천(獺川)으로 표기돼 있는 점을 들어 본래 이 강에는 예부터 수달(獺)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수달내라는 뜻의 달천(獺川)으로 불리다가 후에 '달' 자가 채음돼 달래강(達川)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달래강 인근에서는 조선초부터 수달피가 진상됐다는 얘기가 전한다.


달천과 관련된 다른 기록으로는 이중한의 택리지에 '속리산 정상에서 동으로는 낙동강, 서로는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며 북으로는 충주의 달천(達川)이 되어 한강으로 흘러든다'고 적혀있다. 또 조선시대 동람도에는 충주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산천,덕천,달천(獺川)으로 각각 표기하고 있어 당시에도 달천이란 이름과 함께 여러 명칭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덕을 입은 강, 즉 덕천(德川)이란 이명도 전한다. 조선시대 벌미란 마을의 한 사내가 자신의 집으로 탁발 온 스님의 권유에 따라 달천에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병자(病者)가 다리 덕에 목숨을 건지게 되자 그 병자를 업고왔던 노인이 '과연 덕을 입은 강이로구나(於是 彼德之川也)' 한 것이 전해져 덕천이란 이름이 생겼다 한다.

 

달래강은 지금도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최상류인 보은 속리산지역에선 속리천, 청원 금관~어암리 부근에선 박대천, 괴산 청천부근에선 청천강 혹은 가무내(현천), 괴산읍 부근에선 괴강(槐江) 등으로 불리다가 충주시 달천동에 이르러서야 달래강이 된다.


속리천은 발원지인 속리산에서 이름을 따왔고 박대천은 인근 어암리(충북 청원군 미원면)의 박대소(沼)에서 유래됐으며, 청천강은 괴산 청천지역을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청천지역, 특히 화양동 부근에서 불리는 가무내는 '검은 내(현천.玄川)'란 뜻으로 인근 강바닥이 검은 바위와 돌로 돼 있어 물이 검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괴강은 괴산지역 주민들이 특히 달래강을 대신해 부르는 이름으로 괴산(槐山)의 '괴(槐)' 자를 따왔다.

 

 

�달래강의 다른 이름 '박대천'
달래강은 지금도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최상류인 속리산 부근에선 속리천, 청원 미원 부근에선 박대천, 괴산 청천부근에선 청천강 혹은 가무내(현천), 괴산읍 부근에선 괴강(槐江) 등으로 불린다.

< 청천천의 겨울>

 

 <가무내(현천)의 봄 전경>

 

<속리천의 겨울>

 

   
도도한 물흐름 달래강
  달래강 3백리 물길은 유독 계곡이 많아선지 더욱더 도도히 흐른다. 그 도도한 물흐름은 이 고장 특유의 문화와 전통을 탄생시킨 '역사의 터전'이자 주민들의 삶과 생을 이어준 '생명의 요람'이다. 125km 물굽이에 대한 심층 탐사를 통해 달래강의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하고 참다운 가치를 발굴해냄으로써 내일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한다.(사진은 옥화5경인 금봉서 바라본 달래강 전경)  
 
숱한 설화와 사연 안고 도도한 물흐름

심층탐사 통해 참 가치 발굴 비전 제시

역사·생태·문화·개발·보전방안 재조명



◇ 삶의 젖줄, 역사의 터전

   
 
   
 
예부터 물맛이 달다하여 단내(달래,甘川) 혹은 수달이 많이 산다해서 수달내(달천,獺川), 덕을 입은 강이라하여 덕천(德川)으로 불리던 달래강. 속리산 천왕봉에서 물머리를 시작해 충주 탄금대 부근서 남한강과 하나 되기까지 총연장 125km를 남에서 북으로 굽이치며 흐르는 커다란 물줄기다.

조선초 성현의 <용재총화>에 '조선 제일의 물맛'으로 기록될 만큼 물맛 좋기로 유명했던 달래강은 지금도 주민들의 중요한 생명수이자 젖줄로서 숱한 설화와 사연을 안고 도도한 물흐름을 하고 있다.

3백리 물길로 이어지는 본류와 지류 곳곳에는 수려한 자연경관을 빚어 청풍명월의 멋을 한껏 더해놓고, 각 고을 마다엔 삶의 숨결을 불어넣어 이 고장 특유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탄생시켜 놓았다. 이른바 중원문화의 한 뿌리이다.

백두대간과 한남금북정맥을 분수계로 하여 동으로는 낙동강, 남·서로는 금강과 물굽이를 달리하는 달래강 유역은 속리산을 중심으로 화양계곡과 쌍곡계곡, 옥화9경, 수주팔봉, 수옥정폭포, 용추폭포 등 수많은 계곡과 명소를 아우르고 있다. 또 그 품안에는 멸종위기종이자 천연기념물로서 소중한 자연자원인 수달과 하늘다람쥐, 까막딱따구리, 미선나무, 망개나무 등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물줄기 주변엔 '국민 소나무' 정이품송을 비롯해 그 부인격인 정부인송, 용이 틀임하는 듯한 기괴한 모습의 용송(왕소나무) 등 이름난 소나무들이 천년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호서제일의 가람 법주사, 우암 송시열의 화양서원과 만동묘, 벽초 홍명희의 삶과 혼이 깃든 괴강변,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충민사, 우륵의 가야금 선율과 신립장군의 호국얼이 배 있는 탄금대 등이 지역민의 자긍심을 키우는 역사와 문화의 산실로 남아 있다.

또한 물 맑고 공기 좋아 곳곳이 청정지역인 달래강 유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특산물이 산출되고 있다. 봄·여름이면 산과 들에 온갖 나물들이 지천하고, 가을이면 송이,능이,싸리버섯 등 각종 버섯이 쏟아져 나온다. 인근 농경지에서 생산되는 인삼은 충북의 대표적인 농산물로서 한국 인삼농업의 역사를 다시 쓰는 주역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고 사과, 복숭아, 고추, 절임배추, 논콩 역시 전국에 충북 농업을 알리는데 앞장서 온 효자 농산품이다.

달래강 물길은 곧 이 지역 주민들의 삶과 생을 이어준 요람이자 터전이요, 애환과 기쁨을 함께 해온 역사의 증인이자 동반자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달래강에도 변화를 재촉하는 시대의 거센 바람이 불고 있다. 다름 아닌 온천개발과 댐건설을 둘러싼 논란이 십수 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데다 최근엔 대운하 통과 예상지역으로 부각되면서 주민들을 또다시 찬반논란의 장으로 내몰고 있다. 지역의 위기냐, 발전의 계기냐를 놓고 주민들은 심한 갈등까지 빚고 있다.

이에 지역 환경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심혈을 기울여온 충청타임즈가 달래강 3백리 물길에 대한 심층취재를 통해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하고 참 가치를 발굴해냄으로써 내일을 향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달래강의 설경
  달래강에 눈이 내렸다. 계곡과 바위, 물,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 놓았다. 설경에 묻힌 달래강이 금새라도 숱한 전설을 통해낼 것 같다.  
 


◇ 달래강의 참모습 재조명

이번 기획취재에서는 △달래강의 현황(발원지 및 지리현황)을 비롯해 △역사(유래, 속리산 삼파수와의 관계) △문화(명승유적, 설화, 민속) △달래강 사람들 △특산물 △생태(식물상, 어류상, 조류상, 포유류상, 곤충류상, 양서파충류상 및 주요 동식물) △보전과 개발(관리·개발 실태와 보전방안) 등이 주요 내용으로 다뤄질 예정이다.

취재팀은 달래강의 사계(四季)를 담기 위해 이미 지난 1월부터 사전 취재에 들어가 문헌·자료 조사와 함께 주요 지역에 대한 예비 답사, 겨울철새 및 발원지 탐사 등을 실시한 바 있으며, 이어 오는 10월까지 달래강 물길 전 수역에 대한 현지 답사 및 탐사를 통해 달래강의 참모습을 심층 취재 보도한 후 11∼12월 중에는 보전방안 등 결론 도출을 위한 지상 토론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특히 역사 문화와 생태 분야는 각계 전문가들을 초빙해 동행 취재 및 탐사를 실시하고, 희귀종으로서 우리나라 주요 자연유산이자 천연기념물인 하늘다람쥐와 수달, 까막딱따구리 등에 대해서는 현장 잠복 취재및 촬영을 통해 상세한 서식현황과 생태를 밝힐 계획이다

대부분의 새들은 집짓기의 명수다.

파랑새처럼 남의 둥지를 빼앗아 새끼를 치는 종도 있고 뻐꾸기처럼 아예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그 둥지 주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새끼를 기르도록 하는 종도 있지만, 많은 새들은 집짓기의 타고난 선수들이다.
송곳 같이 뾰족한 부리로 나무와 흙을 쪼아 기다란 구멍을 뜷고 그 속에 둥지를 마련하는 딱따구리와 물총새류를 보면 목수들도 가히 놀랄 만큼 기막힌 기술력을 보인다. 그들의 둥지 안을 들여다 보면 드릴로 파낸 듯 대패로 밀어낸 듯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뾰족한 부리로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흔히 볼 수 있는 까치집도 그냥 지어진 게 아니다. 한 마디로 철옹성 같다. 무려 1천600여 개나 되는 나뭇가지를 이리 얽고 저리 얽어 매우 견고하게 짓는다. 바닥에는 진흙을 깐다. 공학의 개념을 배운 것도 아닌데 바람 부는 방향과 세기 등 주변 여건까지 고려해 둥지를 튼다. 그러니 비가 와도 잘 새지 않고 태풍이 불어도 까딱없다. 설령 나무가 뿌리째 넘어가 땅바닥에 내동갱이 쳐져도 겉만 약간 부서질 뿐 벽체와 바닥은 멀쩡하다.

 


꾀꼬리와 때까치, 밀화부리는 물론 붉은머리오목눈이(일명 뱁새)와 개개비처럼 덩치 작은 새들도 정교하게 집을 짓는다. 자기들만의 명당자리를 찾아 풀잎과 뿌리, 나뭇가지, 심지어 폐비닐 같은 각종 재료들을 물어다 적재적소에 꼼꼼히 이용한다. 사람의 손기술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다.

 

집짓는 기술만 뛰어난 게 아니다. 둥지의 위치에 따른 안전성도 고려한다. 천적으로부터 자신과 새끼를 보호하고 아울러 안정적인 먹이 공급을 위한 본능이자 진화의 결과이다. 앞에서 말한 '명당자리'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요즘 들어 딱새와 할미새, 박새류처럼 인가 근처 혹은 인가내 구조물에 둥지를 트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는 것도 속내는 안전성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천적에 비해 안전하고 인가 주변이 다른 곳에 비해 먹이 구하기가 쉽다고 믿는 것이다.

 


앞날의 일기를 내다보고 둥지 위치를 정하는 새들도 있다. 천연기념물 어류인 어름치가 그해 강수량을 예견해 산란탑 위치를 수심이 깊거나 얕은 곳으로 정하듯, 쇠물닭이나 깝작도요 같은 일부 물가새들도 나름대로의 일기전망에 따라 둥지 위치를 정한다. 예를 들어 번식기간 중 비가 많이 올 것 같으면 둥지를 평소보다 높은 곳에 짓고 그와 반대면 낮은 곳에 짓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새들의 이같은 지혜로움도 때론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올해 같은 경우다. 얼마나 날씨가 극성스러우면 새들의 본능으로도 예측하지 못하는 이변 아닌 이변이 일어나겠는가.
사정은 이렇다. 달래강(달천)에서의 번식 생태를 기록하기 위해 약 20일 전부터 관찰해 오던 쇠물닭 둥지와 깝작도요 둥지가 있었는데, 이번에 내린 장맛비로 하나는 둥지 전체가 떠내려가고 또 하나는 알이 몽땅 물에 잠겨 곯는 사태가 벌어진 것. 쇠물닭은 쇠물닭대로, 깝작도요는 깝작도요대로 이른바  안전 수위를 정해 둥지를 틀었건만 예기치 못한 악천후로 인해 한 해 새끼 농사를 모두 망치는 뼈아픈 시련을 겪어야 했다.

 

졸지에 피붙이를 잃고 허공을 헤매는 생명체가 어디 이들 새 뿐이겠냐마는, 그동안 온갖 정성 들여 알을 품던 쇠물닭과 깝작도요 어미들, 또 불빛을 비추면 알 속에서 꼼지락 거리며 어엿한 생명력을 느끼게 했던 어린 새끼들, 그 가엾은 존재들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 마음이 편하질 않다.

 

자연이 자연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이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예측불허의 시대'. 그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더 빨리 다가오고 있다.

쫓겨난 수달가족

 

 야생동물의 흔적을 찾아내고는 심장이 뛸 만큼 반가워한 적이 있다. '위기의 야생'을 취재하던 지난해 겨울 얘기다.
 엄동설한에 달래강변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니는데 상류 쪽 어느 지점에 이르자 얼음판 위로 심상찮은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길게 이어진 발자국 사이 사이로 마치 사람이 붓을 끌고 다닌 것 같은 꼬리 흔적까지 나 있는 것으로 보아 그토록 찾으러 다녔던 수달임이 틀림 없었다. 가슴이 뛰었다.
 

 더욱 흥분한 것은 크기가 다른 여러 개의 발자국과 배설물, 먹이 흔적, 영역 표시 등 보다 확실한 흔적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곧바로 추적에 들어갔다. 주요 이동 노선과 먹이 장소, 배설 장소, 텃세 표시를 위해 몸을 비벼대는 장소 등을 꼼꼼히 살펴본 뒤 물가에서 산으로 이어진 발자국을 따라갔다. 여러 개의 발자국은 어느 한 급경사면의 바위굴 앞에서 동시에 사라졌다. 굴 입구를 들여다 보니 반들반들했다. 보금자리까지 찾아낸 것이다.
 

 

 촬영은 이튿날부터 시작됐다. 우선 동굴에는 몇 마리가 사는지, 어느 지점을 통해 물가로 이동하는지, 잡은 먹잇감은 어떻게 먹고 얼음판 위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 등을 기록하기 위해 촬영장소를 강 건너편에 잡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첫째 날도 둘째 날도 수달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달은 보통 해가 떨어질 무렵에 보금자리를 나서는데 연 이틀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름대로 은폐한답시고 위장망까지 동원했는데도 눈치를 챘던 모양이다.
 

 너무 깔본 탓이다. 해서 장기전으로 갔다. 면도날 같은 강바람이 연일 몰아쳤지만 한 번 시작한 일 수달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 보자는 식으로 무작정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매복했다. 그러길 일주일여. 수달들도 지쳤는지 아니면 '저 이상한 존재'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님을 알았는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달가족은 셋이었다. 큰 개 만한 어미 둘에 1년생으로 보이는 새끼 한 마리가 가족을 이뤄 살고 있었다. 촬영 시작 보름쯤 돼서는 카메라 앞까지 다가와 두리번거리는 대범함도 보였다. 그만큼 친해졌다.
 

 그로부터 4개월뒤, 수달가족의 여름나기는 어떠한지가 궁금해 다시 그 자리를 찾았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수달가족이 보이질 않았다. 물가 바위 위에 그많던 배설물도 오래된 것 외에는 보이질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예감이 좋질 않아 보금자리를 가봤다. 아뿔싸, 바위굴 앞에 서있던 나무들은 온데간데 없고 웬 뜬금없는 토종벌통 3개가 문지기처럼 서있었다. 굴 안을 들여다 보니 썰렁한 채 풀까지 자라나 있었다.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또 그로부터 일년여가 지난 엊그제(2010년 12월 24일), 수달가족도 보고 싶고 또 미련도 남아 있어 혹시나 하고 다시 그 자리를 찾았다. 역시나였다. 흥분에 들뜨게 했던 발자국도, 먹다만 물고기뼈와 비늘도, 배설물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일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되돌아오지 않을까. 얼마나 두려웠으면 인근에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멀찌감치 달아났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3마리가 동시에 굴밖으로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뚱뒤뚱하면서 물속으로 뛰어들던 귀여운 수달가족. 팔뚝만한 잉어를 잡아서는 자랑스러운 전리품인 양 한참을 가지고 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우둑우둑 씹어먹던 '먹보' 수달가족. 얼음판 위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썰매를 타듯 미끄러지며 정답게 장난치던 개구쟁이 수달가족….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서려는데 문득 소름끼치는 불길함이 스쳤다. "혹시 벌통이 놓이던 그 때 수달가족이 아예 싹쓸이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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