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과 낙엽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 어딜 가나 단풍이요 낙엽이다. 기온이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늦가을의 대표적 현상이다. 매년 이맘때면 으레 치러지는 대자연의 통과의례이기에, 사람들은 그저 아름답다거나 쓸쓸하다거나 하는 표현쯤으로 넘겨버리기 일쑤이나 실은 오묘한 것이 이들 현상이다.
가을은 모든 생명체에 있어 참으로 바쁜 계절이다. 한평생 한 자리에 머물며 사는 나무들마저 저렇게 온갖 수식어(빛깔)를 동원해 울긋불긋 속내를 내비쳐가면서 계절의 문턱을 숨가쁘게 넘어가고 있잖은가. 비가 내린 뒤의 가을 행보는 더욱 빨라졌다. 마치 중국의 변검(變瞼)을 보는 듯하다. 이 모습인가 싶으면 어느덧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요란하지만 그렇다고 시끄럽진 않다. 정중동이다. 고요 속의 움직임, 그러나 어떤 움직임보다 더 위대하다. 생명유지를 위해 몸 일부를 기꺼이 떨쳐내는 숭고함마저 깃들어 있다. 한편으론 장엄하다.
자연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모습, 그 과정에 단풍과 낙엽이 있다. 단풍이 그 시작을 알리는 빛깔이라면 낙엽은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결과다. 비록 불리는 이름은 하나같이 단풍과 낙엽이지만, 그들은 숱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자연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이 나무마다 제각각 다르다는 얘기다.
그것은 나무들의 정체성과도 관련 있다. 아니 단풍과 낙엽처럼 나무들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주는 것도 없다. 한여름엔 한결같이 초록빛을 띠고 있다가도 늦가을만 되면 서로 다른 빛깔로 "나 여기 있소"라고 소리치듯 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단풍과 낙엽이다. 비록 단풍이 들지 않고 낙엽도 별로 떨어뜨리지 않는 상록의 나무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모습 자체가 그 나무의 본질이듯이, 낙엽을 떨구는 나무들도 각기 다르게 단풍빛을 띠고 낙엽을 떨치는 자체가 그들의 본질인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노란 빛깔인 나무가 있다. 고로쇠나무, 계수나무, 느릅나무, 물푸레나무, 배롱나무, 생강나무, 은행나무, 자작나무, 튤립나무, 피나무, 호두나무 등이다. 마가목, 복자기, 붉나무, 산딸나무, 신나무, 옻나무, 화살나무 등은 붉은 빛으로 한해 가을을 마무리 한다. 우리나라의 터줏대감격인 참나무류는 종에 따라 단풍이 노란 색과 붉은 색 혹은 갈색이 뒤섞인 빛깔을 띠며 느티나무도 노란 빛과 붉은 빛을 띠는 것이 따로 있다.
단풍 중에는 또 어느 색이라고 딱히 표현 못 할 정도로 매우 오묘한 빛을 띠기도 한다. 감나무 중에 어떤 것은 붉은 듯 노랗고 어떤 것은 노란 듯 붉은가 하면 또 어떤 것은 초록빛이 덜 바랜 황갈색 단풍이 드는 경우가 그 예다.
낙엽도 그렇다. 땅을 향해 떨어지는 모습이 비슷해 보이지만 종마다 특징이 있다. 흔히 낙엽송이라 불리는 일본잎갈나무는 자잘한 노란 잎이 가랑비 내리듯 차분히 떨어지고 은행나무 이파리는 이리 빙글 저리 빙글 팔자걸음으로 떨어진다. 낙하하는 속도 또한 다르다. 어떤 것은 쫓기듯 단숨에 곤두박질 치는 게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미련이 남아 있는 양 더디게 떨어진다. 소리도 다르다. 가만히 귀 귀울여 보면 어린 애가 까치발 딛듯 사뿐사뿐 내려앉는 것도 있고 후두둑 후두둑 싸락눈 소릴 내는 낙엽도 있다. 어디론가 나뒹굴다가도 결국은 지난 일년의 무게와 두께 만큼 쌓인 채 속절없이 썩어갈 신세이지만 '나는 나'라는 정체성만은 끝까지 잃지 않고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낙엽이다.
'10월의 마지막 밤'이 지나면서 이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늦은 단풍이건 빛바랜 낙엽이건 그저 보고 밟으며 가을정취를 느껴보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끼리라면 더욱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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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철에 드러나는 실수의 흔적들

 
  요즘처럼 애매한 계절도 없을 성 싶다.

    달력은 분명 입동을 지나 소설절기를 향하고 있는데 산자락엔 아직도 늦가을의 여운이 미련처럼 걸려 있다.
 일기예보도 가을과 겨울의 동거를 알린다. 서리와 얼음, 비와 눈이 공존한다.
  사람마다 체감 계절도 다르다. 시간의 추가 아직은 가을 쪽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미 겨울의 경계를 넘어섰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주변의 자연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오랜 시간 촬영한 동영상 테이프를 단 몇초에 재생시키는 것처럼 자고 나면 하룻 밤새 풍경이 전혀 딴판이다. 기온변화로 단풍잎을 낙엽으로 밀쳐내는 떨켜의 작용이 훨씬 더 활발해졌기 때문이리라.
 

   이 시기의 낙엽은 단순히 나뭇잎을 떨궈내기만 하지 않는다. 그동안 감춰온 한과 생채기를 밖으로 드러내는 듯 싶다. 그래서 이 시기가 오기 전 그렇게도 눈물겹도록 울그락 불그락 몸서리치다가 이내 떨어져 나뒹구는 게 바로 낙엽이 아닌가 생각된다.
  혼자만의 엉뚱함인지는 몰라도, 이 계절이 던지는 함축된 언어는 흔적이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두드러지는 게 우리 인간의 ‘실수의 흔적’이다.
  대표적인 게 실패한 인공 조림(造林)이다. 우리나라의 인공 조림을 경제적 가치나 자연경관적 가치로 평가할 때 나름대로 성공한 것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또한 많다. 귀중한 생명체인 나무와 숲을 경제적 혹은 자연경관적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하는 아쉬운 마음을 들게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한 가지 예를 보자. 산 중턱 이상의 고지대서 마치 부끄러운 마마 자국처럼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는 은수원사시 나무숲을 보라. 주변 경관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어찌보면 생뚱맞은 낙서처럼 보이는 그 나무숲은 유독 이 시기가 되면 더욱더 뚜렷이 드러나는 실수의 흔적이다.
 1960년대 미국산 은백양과 한국산 수원사시나무를 교배시켜 만든 은수원사시, 개량자의 성을 따 현사시로도 불리는 그 나무 자체를 탓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척박한 산기슭서 잘 자란다 하여 무턱대고 심은 게 실수라면 실수다. 주변 경관과 식생, 경제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화전답을 없앤다는 명목 아래 가난한 자들이 피땀으로 일군 밭뙈기에 강제로 심겨진 이후 매년 이 무렵이면 흉터같은 모습을 드러내 당시의 한(恨)을 되돌아보게 하는 장본인이다.
 

   가로수도 마찬가지다. 성공한 것도 많지만 어색한 가로수도 많다. 지역의 정책결정자가 바뀌면 하루아침에 그 지역 가로수가 모습을 바꾸거나 아예 수종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공공 장소인 학교 운동장의 정원수 또한 학교장 인사철만 되면 모든 나무가 떤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쉽게 모습을 바꾼다.
 숲과 가로수, 공공장소의 정원수는 넓게는 한 나라, 좁게는 한 지역 한 공공건물의 환경·정서적 특징을 대변해주는 중요한 랜드마크다. 전혀 한국적이지 않거나, 그 지역 고유의 환경·정서적 특징과 조화되지 않는 경우엔 오히려 한국에 대한 인상, 그 지역에 대한 인상을 왜곡시키는 주범이 된다. 우리가 외국 혹은 외지를 여행하고 왔을 때 머릿속에 가장 오랫동안 남는 것은 그 나라 그 지역의 숲과 나무가 주는 첫 인상이다.
 

   다행인 것은 우리도 이제 산림녹화의 성급함에서 벗어나 경제림·경관림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 점이지만, 아직도 곳곳에 실수의 흔적들이 눈에 거슬리고 외국풍의 가로수·정원수가 마치 그 지역 그 건물의 얼굴인 양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올해의 단풍도 가슴속에서 또 그렇게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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