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이 땅의 코흘리개 아이들은 많은 시간을 자연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자연이 좋아서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이 그랬습니다.

집안일을 도울 때를 제외하고는 늘 동무들과 함께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시간 보내는 게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마주하게 되는 게 자연에서 나고 자란 먹거리였습니다.

당시엔 주전부리란 게 별도로 없었고 자연에서 눈에 띄는 먹을거리가 모두 주전부릿감이요 허기를 달래던 요깃거리였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동물과 관련한 추억의 먹거리를 살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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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jRUSNG8xy8

산골에 미꾸라지와 개구리가 없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겨울이면 흔히 볼 수 있었던 시골 정경이 있다. 미꾸라지(혹은 미꾸리) 잡이다. 요즘 같은 농한기가 되면 으레 시골에선 삽과 양동이 들고 들로 나서는 게 일이었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해온 일이기에 별다른 약속이 없어도 한 사람이 나서면 다른 사람이 자동으로 따라 나서는 식이었다.
 

 목적지도 거의 정해져 있었다. 대부분이 그 동네 토박이들이었기에 언제 어딜 가면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은 훤히 알고 있었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우선 얼음을 깨고 물을 퍼냈다. 논도랑이나 수렁 같은 곳에 미꾸라지가 많았기에 물이라고 해봤자 삽으로 몇 번 퍼내면 그만이었다. 물이 잦아지면 삽이나 손으로 열심히 진흙을 들춰냈다. 그러면 동면하던 미꾸라지들이 놀라서 꼬물꼬물 삐져나오기 마련이었는데, 날씨가 추운 날엔 미꾸라지의 몸이 굳어져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움직임이 굼뜨거나 아예 죽은 양 꼼짝 않는 것들도 있었다.

 잡은 건 비단 미꾸라지만이 아니었다. 알을 실은 개구리들도 더러 잡곤 했다. 별미 혹은 약용 목적이었다. 지금이야 일부러 개구리만 골라 잡는 전문꾼이 생겨났지만 그 때만 해도 개구리는 잡아도 그만 안 잡아도 그만인 계륵 취급을 받았다. 아니, 오히려 안 잡는 사람이 더 많았다.

 미꾸라지 잡이가 끝나면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한 쪽에선 미꾸라지 손질하느라 시끌벅적, 또 한 쪽에선 가마솥에 양념 넣고 물 끓이느라 시끌벅적, 또 다른 쪽에선 수제비 준비하느라 시끌벅적, 말 그대로 잔치분위기였다. 비록 잡아온 미꾸라지 양은 얼마 되지 않을 지언정 큼직한 무와 대파 썰어넣고 거기에 수제비까지 빚어 넣으면 그야말로 명품 추어탕이 따로 없었고 그 것 한 그릇이면 동장군도 저멀리 달아났다.
 

 지금이야 거의 볼 수 없는 화석화된 시골 모습이지만 그 당시엔 웬만한 시골 마을에선 비일비재하게 이뤄졌던 정겨운 겨울나기요 훈훈한 광경이었다.
 지금도 커다란 가마솥을 보거나 시골집 굴뚝 연기를 보면 그 시절 그 사람들이 마냥 그리워지곤 하는데, 요 며칠 전 보은의 어느 산골 마을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뒤로는 마치 추억의 한 장면을 영영 도둑맞은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얘기인즉슨 이렇다. 달천 상류가 자신들의 고향이어서 매년 이맘때 쯤이면 형제자매들이 모여 미꾸라지 천렵을 하곤 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시골이 엄청나게 변했다는 것이다. 골짜기마다 새로운 집과 공장이 들어서고 논배미마저 택지로 바뀌거나 기계화 영농으로 대부분 마른논으로 변해 미꾸라지와 개구리가 살 만한 곳 자체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개체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더구나 개구리의 경우 논배미든 산골짜기든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씨가 말랐단다.
 그들은 서식환경 악화도 문제지만 배터리를 이용한 싹쓸이 남획이 더 큰 문제라고 열 올렸다. 미꾸라지와 개구리가 있을 만한 곳이면 으레 배터리를 들이대고 마구 지져대니 그들이 살아남을 리 만무란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첩첩산골도 이런 지경인데 찻길이 훤히 뚫린 다른 곳들은 어떻겠냐는 그들의 푸념속에서 생태계는 물론 우리의 추억마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이미 건널 대로 건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찾으면야 어디 미꾸라지 개구리 몇 마리쯤 찾아내지 못할 시골 마을이 있겠냐마는,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이뤄지는 싹쓸이 남획이 근절되지 않는 한 정말이지 미꾸라지 개구리 한 마리 살지 않는 그런 세상이 올 것은 뻔한 이치다.
배터리에 감전돼 쭉쭉 뻗는 미꾸라지와 개구리의 잔영이 아른 거린다. 이 추위에.

개구리 잡던 시절의 작은 소망을 생각하며

 

 

나 어릴때 작은 소망은/ 계곡에 숨어있는 개구리 잡아 노랗게 구워서/ 다리는 뚝 떼어 소금찍어 내가 먹고/ 검은 알은 엄마 드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노는 것이었다네/ 나 어릴때 작은 소망은/ 진달래 먹고 찔레 꺾어먹으며/ 냇가에 나가 버들피리 꺾어불며/ 가재와 미꾸라지 잡아 고무신에 담고/ 다슬기 잡으며 노는 것이었다네….
강순병시인의 '작은 소망'이란 시의 일부다.

 

그렇다.

1960~70년대만 해도 이 땅의 코흘리개 아이들은 무시로 들과 산 찾아 개구리 잡고 꽃과 열매 따 먹으며 놀았다. 그게 생활이요 삶이었다. 지금이야 먹을거리가 지천하고 놀거리도 많지만 그 때만 해도 자연이 곧 주전부리 창고요 놀이터였다.

우선 봄이 되면 너도나도 산을 찾았다. 칡뿌리 때문이었다. 굵직한 알칡을 토막내 주머니에 잔뜩 넣고는 턱이 얼얼하도록 씹고 다녔다.

개구리잡기도 성행했다. 장순병시인은 계곡에 사는 산개구리 잡아 구워먹는 게 작은 소망이었다고 했지만 그 시절 흔히 잡아먹던 개구리는 논과 개울가에 살던 참개구리였다. 지금은 참개구리든 산개구리든 함부로 잡아먹을 수 없지만 그 땐 물고기잡이처럼 예사로 여겼다.
진달래와 찔레순,삘기(띠의 어린순),아까시꽃,감꽃도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의 주전부리였다. 또한 꿀맛이 일품인 원추리와 꿀풀, 한번 손 댔다 하면 입주위가 새까맣도록 따먹던 버찌와 오디, 손가락에 가시 찔리는 것도 잊은 채 정신없이 따먹던 산딸기와 멍석딸기, 도토리 익을 무렵이면 누렇게 익어 알이 빠지던 개암, 늦서리 내려야 쭈글쭈글 익던 고욤도 잊지못할 계절의 별미였다.

모내기철이면 으레 써레질하는 논으로 달려가 올미 주워먹고 여름이면 저수지에 들어가 마름 따다 삶아먹는게 일이었다. 또한 동네앞 논둑에선 동무들과 쭈그리고 앉아 껌풀(떡쑥) 뜯어 한입 물고는 "껌이 되라" 주문하며 오물오물 씹던 빛바랜 추억도 있다.
뿐만 아니다. 소나무 속껍질인 송기를 먹는다고 어린 가지 꺾어 겉껍질 벗긴 다음 앞니에 대고 하모니카 불듯 좌우로 빨고 다녔으며 무의 꽃대인 장아리를 먹기 위해 무밭을 기웃거리고 아까시나무 새순을 잘라 입에 물고다니기도 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보리와 밀에 생긴 깜부기병을 무슨 귀한 먹을거리인 양 보는 대로 입에 털어넣고는 볼에 묻은 깜부기가루가 우스워 깔깔대기까지 했다. 또 가을이면 벼메뚜기 말고도 풀무치,방아깨비 잡아 구워먹고 벌집 따다가 애벌레를 볶아먹어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던 게 그 시절이다.

 

40~50년 전의 일을 알지 못하는 세대들은 웬 뜬금없는 얘기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농작물 외에는 웬만한 건 대부분 자연에서 구했던 그 시절엔 늘 먹고 겪었던 실제 상황이다. 세월이 바뀌고 먹을거리,놀거리가 풍부해진 오늘날 굳이 그 옛날의 먹을거리,놀거리로 되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 때 그 시절 어린이들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며 그곳에서 먹을거리,놀거리를 스스로 찾아냄으로써 자연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즐겼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돈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맛있는 음식과 놀이기구를 즐길 수 있는 요즘 어린이들. 하지만 개구리를 보면 외계동물 만난 것처럼 자지러지고 산에 가면 산딸기를 보고도, 들에 가면 오디를 보고도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런 어린이들이 허다하기에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부모들이여, 요즘의 모광고처럼 학부모만 되려 하지 말고 하루만이라도 진정한 부모가 되어 자녀들과 함께 자연을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자연처럼 있는 그대로를 깨우쳐주는 것도 없쟎은가. 지금 산야엔 오디,산딸기같은 자연의 메뉴가 그득하다.(2010년 6월 15일)

’개구리 망신살’ 또 언론을 탔다

 
 겨울철이면 으레 언론을 타는 동물이 있다. 개구리다.

   관련 법규가 강화된 이후 아무개가 개구리를 잡다 적발됐다느니 모씨는 먹기만 했는데도 벌금을 물게 됐다느니 하는 기사가 곧잘 보도된다.
   겨울철 단골메뉴인 개구리 관련기사 중에는 간혹 쓴웃음을 짓게 하는 경우가 있다. 4년전 충북 모지역서 있었던 사건(?)도 그런 경우다. 당시 한 펜션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화재원인이 가관이다. 까닭인 즉슨 당시 모지역 사람들이 그 펜션으로 놀러왔다가 개구리를 잡아먹고는 2차로 노래방엘 간다는 것이 그만 가스불 위에 개구리 잔여분을 올려놓고 가는 바람에 불이 난 것이다.
 조사 결과 시커멓게 그을린 용기속에 역시 시커멓게 탄 채 ‘만세’를 부르는 개구리가 꽤 여러 마리 발견됐으니 당사자들은 꼼짝없이 실화자에다 야생동물 불법 포획자로 몰려 졸지에 개망신 당했다. 개구리 잡아먹다 남의 재산 태워먹고 범법자까지 된 셈이니 개망신 아닌가.
 

   지금은 많이 계도돼 개구리를 몰래 잡아먹는 행위는 크게 줄었지만 아직도 깊은 산골에선 배터리까지 동원한 간 큰 포획꾼들이 더러 있다. 현행 야생동식물보호법에는 개구리와 뱀 등을 불법 포획할 경우 2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도록 돼 있다. 불법포획한 걸 먹거나 운반, 보관만 해도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백만원 이하의 벌금을 문다. 그만큼 중범죄 취급한다. 들키면 오랏줄 망신 아니면 재산을 축내야 한다. 혹자는 너무 과한 게 아니냐고 할 지 모르나 그게 다들 자초한 일이다.
 

   개구리가 또 이번에 언론을 탔다. 그냥 언론을 탄 게 아니라 한 지자체를 개망신 주고 있다. 다름 아닌 청원군이 관내 업자에게 중국산 개구리를 산 채로 수입토록 허가했다가 망신살이 뻗친 것이다.
 보도 대로라면 관계부서 공무원들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다. 해당업무에 관한 기초 소양조차 없는 것 같다. 그러기에 그깟 개구리 좀 수입허가를 내줬다고 웬 호들갑이냐는 반응이다. 게다가 문제의 북방산개구리(흔히 경칩개구리로 불리는 종의 하나)는 국내산과 종도 같고 생김새도 같을 뿐만 아니라 생태계 교란 동물로도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는 설명까지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생태학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제 아무리 종이 같고 생김새가 국내산과 별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일단 외국산 동물이 산 채로 유입돼 야생화 됐을 경우엔 유전 생태학적으로 큰 문제가 생긴다. 더욱이 이번처럼 수입목적에 인공증식이 포함된 경우엔 그들 개구리가 야생으로 뛰쳐나올 가능성이 훨씬 높다. 만일 우려대로 야생에 노출되면, 담당 공무원의 말처럼 ‘국내산과 꼭같은 종’이기 때문에 국내산과의 교잡은 불보듯 뻔하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우리 고유의 유전자가 훼손되고 흐트러지게 되는 것이다.
 

   이해가 안 간다면 중국산 붕어를 생각해 보라. 일명 짜장붕어가 유입된 이후 국내 상황이 어떻게 됐는가. 당초 우려대로 교잡종인 ‘짬뽕붕어’가 생겨나 판을 치게 됐지 않은가. 중국산 붕어 역시 분류학상으로는 국내산 붕어와 그리 멀지 않다. 혈통이 가까워서 문제가 덜 되는 게 아니라 혈통이 가깝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더 큰 것이다. 교잡이 쉬운 만큼 우리 고유의 유전자가 쉽사리 훼손된다고 보면 된다.
 

   시쳇말에 ‘개구리 뛰는 방향’이란 게 있다.

   하찮은 개구리라고 얕잡아보다간 불똥이 어디로 튈 지 모른다. 물가니 주식이니 모든 것이 다 개구리 뛰는 방향처럼 어지러운 세상, 그나마 개망신 당하지 않으려면 겨울철 개구리마냥 곱게 움츠리고 살 일이다.

   그러다 보면 봄이 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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