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라면을 참새들이 먹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라면은 강추위에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참새들에겐 그림의 떡입니다.

Sparrows are going to eat the discarded ramen.

But the ramen froze in the strong cold.

It's a pie in the sky for sparrows.

동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com/shorts/gesn81KvJyo

 

 

최근 20~30년 동안 한국의 자연생태계에서 두 개의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직박구리의 서식 개체수 급증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민물가마우지의 텃새화입니다. 

2000년대 초를 전후해 전국적으로 나타난 직박구리의 서식 개체수 급증은 급기야 국내 야생 조류의 우점 서열을 바꿔놨습니다.

 

직박구리의 출현 빈도가 가장 높아지면서 출현빈도 1위와 2위였던 까치와 참새는 2, 3위로 순위가 밀려났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돼 아직도 진행 중인 민물가마우지의 텃새화 또한 국내 하천 및 호소 생태계의 양상을 뿌리째 흔들고 있습니다.

이들 두 사건으로 국내 조류 생태계에서 두드러지게 변한 새들 간의 먹이 경쟁 풍속도에 관해 집중 살펴봤습니다.

 

동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N5wnu_EATlY

야생의 세계는 경쟁의 세계입니다.

둥지를 지으려 해도 다른 종은 물론 같은 종 끼리도 경쟁을 하게 됩니다.

먹이를 구할 때에도 경쟁을 하게 됩니다.

다른 개체보다, 또 다른 종보다 먼저, 그리고 유리한 장소를 차지해야 양질의 먹이를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제비와 귀제비, 참새는 비록 인가에 집을 짓지만 그들의 세계는 엄연히 야생입니다.

이번 동영상에서는 남들에게 밀려나 현재의 둥지를 차지했든, 아니면 경쟁에서 이겨 차지했든 일단 둥지를 마련한 제비와 귀제비, 참새들의 사는 모습을 통해 둥지 경쟁의 결과가 과연 어떠한가를 살펴봤습니다.

그냥 기온도 더운데 햇볕을 받아 열을 품어내는 타포린과 쇠파이프를 곁에 두고 생활하는 두 제비 가족의 투혼과 네 개의 둥지 가운데 세 개를 차지한 참새들을 이웃으로 두고 생활하는 귀제비를 통해 둥지 경쟁의 결과가 때로는 엉뚱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습니다.

다음 편에서 새들의 둥지 전쟁 2탄으로 소나무에 지어진 10층의 아파트를 점령한 찌르레기들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많은 성원과 관심 당부 드립니다.


동영상 보러 가기

 

https://youtu.be/RE_05CJve9Y

 

 

참새들이 무언가 정신없이 먹고 있는 장면을 촬영하던 중 그들이 먹고 있는 것이 흰 가루에 섞인 모래란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아 영상을 제작하게 됐습니다.

 

먹이가 부족한 탓일까, 아니면 참새들의 입맛이 변해서일까.

 

도대체 그 흰색 가루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참새들이 그토록 홀딱 빠져 3일간이나 계속해서 먹었을까.

 

제가 직접 흰 가루의 맛을 봤는데 아무런 맛도, 냄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신기합니다.


이 동영상 제작은 모든 장면을 DSLR 카메라로 연사 촬영한 다음 타임 랩스 형식으로 만들었습니다.

 

동영상 보러 가기

 

https://youtu.be/YERzjCy7jwk

 

 

직박구리가 가져온 이땅의 최고장

 
 우리 주변에 참새보다 더 흔해진 새가 있다. 참새에 비해 덩치가 훨씬 크고 소리 또한 더 요란하기 때문에 그들이 있는 곳이면 참새는 찍 소리도 못하고 범접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새를 잘 모르고 있다. 이름 뿐만 아니라 모습 역시 생소해 한다.
눈만 뜨면 자연과 접하는 농촌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 하고 도시공원을 찾은 노인들에게 물어봐도 역시 고개를 가로 젓는다. 하지만 모두들 갑자기 수가 많아진 것 만큼은 분명히 인정한다.


 우리나라 터줏대감격인 참새의 생태적 지위를 하루아침에 위협하게 된 이 새,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나라 조류(鳥類) 생태계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이 새는 다름 아닌 직박구리다.
 참새와 같은 참새목에 속하나 몸 길이가 28cm로 참새의 두 배나 되고 몸색깔은 전체적으로 회갈색을 띤 새다. 옛 사람들이 흔히 이 새를 ‘후루룩 빗죽새’라고 불렀을 정도로 우는 소리가 특이해 ‘삣 삣 삐이’ 혹은 ‘삐유르르르르 삐이요’ 하고 시끄럽게 우는 특징이 있다.
 이 새가 어느 새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은 제주도나 남해안에 갔을 때 바닷가 동백나무 숲에서 ‘삣 삣’ 거리며 요란을 떨던 새를 생각하면 된다. 이 새가 과거엔 제주도나 남해안 등지에서만 쉽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본래 한반도의 중부이남에서 번식하는 텃새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국내에서 발간된 조류도감을 보면 한국의 중부이남을 비롯해 일본,타이완,필리핀 등지서 번식하는 남방계의 산림성 조류로 설명돼 있다.


 이러한 ‘남쪽새’가 충청지역은 물론 경기도와 서울지역까지 우점(優占)하는 등 왜 돌연 한반도를 점령해 가고 있을까. 더욱이 점령 속도도 엄청 빠르게 말이다. 지난 1990년대까지만 해도 중부지역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새가 불과 10년 안팎에 남한지역을 완전히 그들의 텃새권으로 만들어버렸다. 서울에서는 이미 비둘기와 까치 다음으로 많은 새가 됐다. 참새를 세번째 순위에서 몰아낸 것이다.
 우리나라의 조류도감을 전면 수정하게끔 하고 있는 이같은 현상, 국내 조류학계가 공식 논문발표도 하기 전에 전국을 뒤덮어 버린 직박구리의 대란. 이러한 일이 도대체 왜 일어나고 있을까. 이는 한 마디로 이상징후다. 아니 이보다 더 뚜렷한 자연계의 최고장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반도의 기후와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생태계까지 그 못지 않게 급속도로 변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마지막 경고장인 셈이다.
 텃새는 말 그대로 계절이 바뀌어도 이동하지 않고 한 지역에 머무는 새이다. 이는 그 지역에서 나고 자라 생태와 습성이 완전히 그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맞도록 적응한 까닭이다. 그러기에 텃새가 자신의 텃새권을 넓혀나간다는 것은 그들이 살기에 적합한 기후와 환경이 그만큼 넓어졌음을 뜻하는 확실한 증거다.
 다시 말하지만 직박구리는 최소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분명 남쪽에나 가야 볼 수 있었던 남방계 조류였다. 그런데 지금은 참새보다 더 가까운(?) 이웃새가 됐다. ‘가까운’에 물음표를 표기한 것은 그들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데 정녕 우리들은 그들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그로 인해 수백 수천 년을 이어져온 우리 주변의 생태계가 완전히 딴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남의 일인 양 불감증에 빠져있다.
 모성애가 무척 강해 번식기엔 까치도 꼼짝 못하게 하는 억척스러움과 무엇이든 잘 먹는 탐식성의 새 직박구리, 그들이 갑작스럽게 개체수를 불려나가고 있는 이 땅의 생태계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이상한 봄이 또다시 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농촌하면 떠오르는 것이 고목이다. 일종의 랜드마크라 할까.

길을 가다가도 고목이 나타나면 으레 가까운 곳에 마을이 나오고 행여 마을이 없으면 적어도 옛 마을터나 집터가 자리하고 있는 게 우리네 농촌이다.
   그만큼 고목은 우리 농촌을 대표하는 상징물로서 그 자체가 고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예부터 고목은 마을을 지켜온 수호신이자 휴식을 주던 쉼터요 할아버지의 따스한 정을 기억케 하는 매개체였다.
 고목은 또 자연 생태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니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태박물관이었다.
봄이 되면 참새와 찌르레기,원앙이 날아들어 줄기와 가지에 난 구멍마다 둥지 트느라 요란했고 여름이면 서쪽새 깃들어 밤새 불침번 서던 곳이 고목이다. 또 늦가을 돼 서리라도 내릴라 치면 구렁이,무자치 얼어죽을 새라 밑둥치 구멍으로 속속 기어들고 중턱 나뭇가지 구멍으론 귀염둥이 다람쥐 겨울잠 자러 서둘러 들어가던 곳이 바로 고목이다. 또 겨울이 오면 올빼미 눈 부라리며 썩은 나무구멍 찾아 몸 숨기고 터줏대감 부엉이는 밤새 울며 괜한 아이 겁 주던 곳이 마을어귀 고목이었다. 일년내내 딸린 식구 많아 늘 시끄럽고 사시사철 생명이 머물던 생태계의 텃밭이었다.
 

  그러던 고목이 요즘엔 어떻게 됐나.

봄이 와도 찌르레기,원앙은 커녕 참새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고 여름철 서쪽새 울음소리 끊긴 지 오래다. 유구한 마을마다 전설처럼 내려오던 고목나무 속 구렁이 얘기도, 겨울밤이면 머리끝을 쭈뼛쭈뼛하게 만들던 부엉이 소리도 추억속 옛일이 됐다.
 나무는 서있건 만 생명의 발길이 무 잘리듯 단절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온갖 생명이 들끓던 고목들이 왜 이처럼 황량해졌을까. 답은 하나, 우리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고목의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막아버림으로써 생명의 발길을 끊어버린 것이다. 고목의 줄기나 가지에 난 구멍은 새를 비롯한 많은 생명들의 둥지 내지 거소 역할을 해온 중요한 서식환경이다. 참새가 붙박아 살고 찌르레기와 원앙이 날아들며 서쪽새와 올빼미가 찾아든 것도 기실 나무구멍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중요한 곳에 엉뚱한 손을 댐으로써 그곳을 찾던 생명들을 졸지에 갈 곳 없는 미아(迷兒)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나무를 살리기 위한 외과수술이란 미명 아래 전국에 있던 거의 모든 고목의 구멍들을 몰타르와 스치로폼 류로 온통 ‘땜질’한 웃지 못할 처방(?)으로 인해 그곳에 깃들던 생명들로 하여금 집 잃은 설움을 겪게 한 일대 사건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편협한 잣대가 부른 자연파괴 행위다.
 

  수백년을 살아온 고목들은 비바람을 비롯한 모든 자연조건에 적응한 결과로서 가지에 구멍도 생기고 때론 줄기 자체가 텅 빈 채 서 있는 것이 본디 모습이다. 또한 오래된 줄기 가운데엔 죽은 세포가 모여 살아있는 세포를 감싸 보호하는 것이 나무의 섭리다. 그러니 구멍 몇 개 난 들 큰 문제가 안되며 자신의 썩은 구멍으로 인해 죽었다는 나무도 보질 못했다.
 그런데 이같은 자연섭리를 생각지 않고- 순전히 인간의 시각에서- 그것을 도려내고 땜질해 주면 오래 살겠지 하는 단순한 판단이 결국 나무에게도 씻지 못할 생채기를 남기고 생태계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꼴이 됐다.

 한쪽에선 인공둥지를 달고 먹이까지 줘 가며 억지로라도 야생동물을 불러들이려 하고 또 한쪽에선 엉뚱한 발상으로 찾아오던 동물마저도 내쫓는 게  우리네다. 전문적인 의견은 무시되기 일쑤이고 들으려하지도 않는다.
 산란철 앞둔 참새가 가까운 고목 놔두고 애써 콘크리트 구멍 찾아 기웃거리는 그 이상한 봄이 또다시 오고 있다.

18세기 독일 북부에 프로이센 왕국이 있었다.

이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절대주의 국가를 확립한 군주로 유명한 데 엉뚱하게도 버찌를 좋아했다. 

어느날 그가 정원을 거닐다가 벚나무에 참새가 날아와 버찌를 먹어치우는 걸 목격했다.

화가 난 그는 즉시 포고령을 내려 참새란 참새는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추상같은 명령에 온 나라가 뒤집혀 참새 사냥을 한 결과 2년만에 해충이 들끓어 나무와 곡식이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버찌마저 열리지 않게 됐다.

뒤늦게 참새의 역할을 깨달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성급했던 판단을 후회하며 곧바로 참새 보호에 나섰다.

2백년 뒤 중국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공산혁명을 마친 중국정부는 쥐,파리,벼룩,참새를 소위 사해(四害)라 하여 대대적인 추방운동을 펼쳤는데 그 결과 베이징에서만 30만 마리의 참새가 잡혀죽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참새가 줄수록 되레 농산물 생산량이 줄어든 것이다.

조사결과 대흉작의 원인이 참새와 해충간의 역학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중국 정부는 서둘러 참새박멸을 중단했다.

단편적이나마 이들 사례는 큰 교훈을 던져준다.

하나는 그릇된 자연 환경정책이 얼마나 큰 부작용을 낳는지를 역사적 사실로써 입증해준다.

자연은 그리 만만한 대상이 아니다.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게 자연 환경인 만큼 인간의 짧은 소견으로 섣불리 판단하는 건 금물임을 일깨워준다.

또 하나는 비록 추진중인 정책일지라도 잘못된 것일 경우엔 과감히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미뤄봤자 손해다.

우리도 이미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수초와 조류(藻類)를 없앤답시고 외국서 초어와 백련어를 들여다 강과 저수지에 풀고 자원증식 시킨다고 육식어종인 블루길과 큰입배스를 들여와 함부로 호소에 푼 것이 민물생태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지 않았는가.

또 산림을 녹화하고 화전을 없앤다며 아까시나무와 리기다소나무,낙엽송,은사시나무를 마구 심었다가 훗날 이상한 식생이 나타나자 돌연 조림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난리법석을 떨지 않았는가.

또 시화호와 새만금 사업의 악몽은 어떻고….

자연은 미래로부터 빌려온 후손들의 재산이다.

그런 만큼 현재 보이는 알량한 이익과 욕심 때문에 함부로 대해선 안된다.

더욱이 도를 넘어선 과도한 개발은 미래 후손들의 재산을 선조 임의로 훼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건 엄청난 재물손괴다.
그럼에도 우린 목하 한반도 대운하란 소용돌이에서 2년 가까이 허우적대고 있다.

대통령이 나서 추진 않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개운치 않다. 완전 백지화 선언이 아닌 '국민이 반대한다면'이란 묘한 단서 때문이다.

현재의 반대여론을 두고 한 말인지, 앞으로 국민의사를 묻는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외신들도 '포기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고 해석할 뿐이다. 때문에 찬반여론이 다시 들썩이고 관련 건설업계,부동산 시장,주식시장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물길 마다엔 그곳에 적응된 여러 생명체가 독특한 유전형질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같은 종이라도 한강 것과 금강 것이 다르다. 그들의 유전자엔 그들 종이 지닌 생명의 비밀과 한반도의 비밀이 내재돼 있다. 그래서 토종 물고기라도 함부로 이동시켜선 안되는데 하물며 물길을 송두리째 터 연결하는 건 이만저만 큰 사건이 아니다. 유전 다양성에 대한 반란이다.
참새 한 종 잘못 건드려도 곧바로 화가 되돌아오는 게 자연이다.

그런 자연을 얕잡아 보고, 참새를 단지 버찌나 따 먹고 곡식 낟알이나 훔쳐먹는 생도둑으로 몰았다가 된통 당한 그 옛날 독선자들의 망령을 다신 보지 않았으면 한다.

비단 대운하 뿐만이 아니고 모든 자연 환경정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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