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과 마지막눈
강원 산간지역에 때 아닌 눈폭탄이 쏟아졌다. 11월 마지막 날부터 3일까지 무려 나흘간 폭설이 이어졌다. 적설량이 많은 곳은 1미터 가까이 기록했고 적은 곳도 30센티미터를 넘었다. 웬만한 고개와 산봉우리들은 말 그대로 눈천지가 돼 버렸다.
절기상으로 소설이 지나 내일이 대설이라고는 하나 이제 막 초겨울 문턱을 넘어섰는데, 눈폭탄이 쏟아지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몇몇 나무들은 여전히 빛이 덜 바랜 나뭇잎을 붙들고 있고 굼뜬 벌과 나비 또한 한낮이면 더러 모습을 드러내는, 아직은 폭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계절 아닌가. 가뜩이나 올핸 기온마저 푹해 다람쥐, 오소리 등 많은 동물들이 겨울잠에 들지 않고 여기저기 방황하는 어정쩡한 시기다. 해서 언론들마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떤 매체는 늦가을이라고 표현하고 어떤 매체는 초겨울이라고 부르는 등 헷갈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느닷없이 눈폭탄이 떨어졌으니 놀랄 수밖에. 나무들은 나무들대로 물기 머금은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가지마다 축축 늘어뜨리고 있고 산속에서 활동하던 동물들은 졸지에 눈더미를 뒤집어쓴 채 오도가도 못하게 됐으니 그 시련이 오죽 하겠는가. 지역주민들 역시 뜬금없이 내린 눈에 얼마나 놀라고 피해가 컸겠는가.
이번 폭설이 더욱더 혀를 내두르게 하는 것은 그 지역에 내린 '첫눈'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서 인근 지역에 눈발이 날리긴 했어도 '눈다운 눈'은 이번이 처음이었단다. 그러니 제 아무리 폭설이 잦은 다설지역이라 하더라도 첫 번째 내린 눈이 수십센티미터를 넘어서 1미터 가까이 쌓였다는 것은 재앙과 다름없는 이변이다.
첫눈은 의미가 있다. 옛 사람들은 첫눈이 내린 시기와 양, 당시 기온을 가지고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매년 소설 절기를 즈음해 기온이 내려가고 첫눈도 내리기에 소설 절기가 되면 으레 날씨가 추워지고 눈도 적당히 내려주길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야만 보리 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날씨는 푹하고 눈은 산더미처럼 쌓였다.
첫눈은 낭만과 추억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첫눈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떠지고 옛일이 떠오른다. 어느 시인이 "첫눈이 오는 이유는 모두가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했듯이 첫눈이 오는 날짜에 맞춰 약속하고는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연인들도 많다. 요즘엔 첫눈 오는 날을 맞추는 이벤트도 성행하고 있다.
강원 산간지역에 폭설이 쏟아질 때 다른 지역엔 비가 내렸다. 겨울비 치고는 역시 깨나 많은 양이었다. 충청지역의 경우 괴산 등 일부에서는 겨울장마란 얘기가 나올 정도로 때 아닌 폭우가 쏟아졌다. 비 대신 눈으로 쏟아졌다면 수십센티미터는 족히 쌓였을 양이다. 불행중 다행이다. 하지만 땅덩어리는 좁은 나라에서 한 쪽은 폭설이, 또 한 쪽은 폭우가, 그것도 초겨울 초입에서 마구 쏟아지는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린 지난 2004년 3월 4~7일 내린 대폭설을 기억하고 있다. 모두가 봄기운에 들떠있을 때 뜬금없이 쏟아져 역대 기상 관측기록을 경신하면서 곳곳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 그 끔찍했던 눈폭탄. 그 폭설은 다름 아닌 그 해 '마지막눈'이었다.
첫눈도 마음 놓을 수 없고 마지막눈도 결코 안심할 수 없는 불안한 세상이 됐다는 얘기다. 날씨가 걸핏하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극에서 극을 왔다갔다 해대니 눈과 비인들 그 어찌 예측 가능하게끔 내리겠는가.
날씨 현상의 예측불허 시대. 이번 강원 산간지역의 '첫눈 폭설'로 인해 더욱더 분명해진 이 시대의 현실이자 우리 앞에 이미 다가와 있는 소름끼치는 자연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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