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들이여, 부디 용기 내시길…

 

"남들은 날씨가 풀렸다고 좋아하는데 우린 되레 죽을 지경입니다."
한겨울 날씨에서 봄날씨로, 불과 며칠 사이에 두 계절을 오가는 변덕스런 날씨 탓에 과수농가들의 속이 말이 아니다. 피해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하소연할 입장도 못 된다.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AI) 때문에 속으로만 가슴을 태우고 있다.

 사정은 이렇다. 수십 년 만의 강추위로 가뜩이나 과수목의 동해가 있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갑자기 설 연휴를 맞아 예년보다 푹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나무 곳곳이 갈라터지는 상렬(霜裂)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먼저 농가 얘기부터 들어보자. "진작에 가지치기 작업을 했어야 하는데 그동안 추위 때문에 엄두도 못 내다 설 연휴가 지나자마자 밭에 나가 일을 하려는데 나무마다 가지가 갈라터지니 속이 뒤집힐 일 아닙니까."
 괴산군에서 2만여㎡의 과수(사과, 복숭아)농사를 짓고 있는 김모씨(55)의 말이다. 그는 30년 가까이 과수농사를 짓고 있지만 올 같은 해는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연일 영하 10~20도를 밑도는 날씨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영상의 날씨로 바뀌니 과수나무인들 견뎌낼 재간이 있겠습니까."

 

 상렬 피해의 원인은 순전히 변덕스런 날씨 때문이라는 김씨. 그의 설명을 정리하면 이렇다. 상렬이란 겨울철 기온변화로 나무줄기의 바깥층 목질부가 세로 방향으로 갈라터지는 현상을 일컫는단다.
 상렬은 낮과 밤의 기온변화가 큰 2~3월경에 주로 굵은 가지의 남쪽 부위에서 일어나는데, 낮에는 태양광선에 가열됐다가 밤중 대기온도가 영하로 급격히 떨어지면 목질부의 세포내 수분이 부피가 늘어나면서 나무줄기를 갈라터지게 한다는 것이다. 현재 상렬 피해가 가장 심한 나무는 복숭아 나무란다.

 

 과수 농가들의 시름은 상렬 그 자체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에 따른 2차 피해를 더 우려하고 있다. 갈라진 틈새로 부후균 등 각종 병원균이 침투해 결국 나무를 죽게 만든다니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더군다나 과수농가 대부분이 연 2년째 날씨로 인한 피해를 입고 있다. 지난해 겨울에도 폭설과 강추위로 동해를 입었던 과수목에 설상가상으로 병충해 등 2차 피해가 발생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그들이다.
 지난해 역시 피해가 가장 심했던 수종은 복숭아 나무였다. 나무 자체가 얼어 죽거나 얼었던 부위에 나무좀이 침투해 결국 말라죽는 피해가 속출했다. 당시 취재차 찾아간 한 과수농가는 "죽을 둥 살 둥 일해봤자 남는 것은 빚 뿐이다"며 "날씨 변덕에 농사짓기가 겁난다"고 울먹였던 적이 있다.

 

 땅은 정직하다고 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젠 옛말이 됐다. 제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봤자 '날씨 한 방'에 허사가 되기 십상이니 농심인들 변하지 않을 리 만무다.
 수확을 눈 앞에 둔 딸기밭 비닐하우스가 하룻밤 새 내린 눈 폭탄으로 폐허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여름이면 폭우와 강풍으로 애써 지은 농작물이 졸지에 애물단지로 변하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농심은 천심이라고 했는데 그 천심을 낳는 하늘은 갈수록 무심해지고 있다. 농촌을 떠나지 못하는 농심은 있으되 농촌에 애착을 갖는 농심은 점점 사그라지고 있다.

 

 한 쪽에선 구제역과 AI 폭탄으로 농심이 무너지고 또 한 쪽에선 날씨 폭탄으로 가슴에 피멍 든 농심이 울고 있다. 제발 올해 만큼은 좋은 일만 있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써붙였을 어느 한 농가 대문의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란 글귀가 되레 '한의 천둥소리'로 다가와 가슴을 때린다.
 이 땅의 농부들이여, 그래도 마지막 용기를 잃지 마시길. 파이팅!.

올해 날씨, 심각한 이상징후다

 

올해 날씨가 예사가 아니다. 심하게 말하면 기고만장이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듯 실로 위세가 대단하다.
언젠가도 얘기했듯 올핸 음력상 입춘이 없다. 지난해 음력에 입춘을 빌려줬기 때문이다. 해서 지난해엔 입춘이 두 개인 쌍춘년(혹은 양두춘)이었던 반면 올핸 무춘년이다.
속설에 쌍춘년은 길하고 무춘년엔 불길하다는 얘기가 전한다. 일부에선 올해 날씨를 그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상황이 아니다.
새해벽두부터 유례없는 추위와 폭설이 몰아치더니만 봄이 돼서는 잦은 비와 한파, 이상난동이 뒤죽박죽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4월 하순엔 눈까지 내리면서 103년만의 4월 한파를 기록했다.

 

뿐만 아니다. 정작 비가 많은 장마철엔 되레 마른 장마가 이어졌고 그런 가운데 중부지방은 '속 타는 주말 비'가 6주 연속(7월 마지막주 건너뛰고는 7주 연속) 계속됐다. 장마철에 비가 너무 많이 와도 탈이지만 너무 안 와도 탈이다. 충북의 대표적인 하천인 달천엔 올 들어 단 한 번도 '큰물'이 흐르지 않았다.
더위는 또 어떤가. 목하 불볕 더위가 한반도를 달달 볶아대고 있다. 7월 한 달만 해도 26일이나 평년기온을 웃돈 데 이어 8월 들어서도 줄창 폭염이다. 말 그대로 전례없는 된더위다. 한번 올라간 수은주는 낮이나 밤이나 내려올 줄 모르고 있다. 가마솥 더위니 찜통 더위니 하는 표현만으로는 실제 체감온도의 반도 못 표현할 정도다.
더워 죽겠다는 말처럼 정말로 더위로 인해 죽는 사람까지 생겨나고 있다. '날씨가 사람 잡는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이 죽을 지경인데 소,돼지,닭 등 가축들은 말하면 뭣하겠는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과 사의 문턱을 넘나든다. 바깥 기온이 연일 30도를 훨씬 넘으니 축사 안은 불가마다. 몸이 단 축산업자들은 밤낮없이 초비상이다. 대형 송풍기를 있는 대로 틀고 지하수를 수시로 뿌려대지만 역부족이다.
얼마나 초비상 상황인지 말도 못 붙일 정도다. 엊그제엔 모 지역의 축사 두 곳을 찾아가 말을 걸었다가 호된 면박만 당했다. 불난 집에 기름 끼얹느냐고 왕짜증을 냈다. 인터뷰 도중에 가축이 죽으면 책임 질거냐는 말까지 들었다. 오죽하면 그럴까 하고 발길을 돌렸다.

 

날씨 탓에 복장 터지는 사람들이 또 있다. 농민들이다. 지난 겨울과 봄에 입은 냉해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속 좋을 리 만무다. 폭서에 웬 냉해 얘기냐고 할지 모르나 현지 상황은 심각하다.
옥수수 농가의 경우 이식기에 찾아든 한파로 묘가 얼어죽어 2~3차례 더 파종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정작 수확기를 맞아 옥수수를 따 보니 수확량마저 예년에 비해 훨씬 적게 나타나는 등 2차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옥수수자루가 껍질을 벗겨보면 알맹이가 형편없이 차 있거나 아예 옥수수자루 끝이 3~5 갈래로 갈라진 기형을 하고 있으니 수확량이 줄어들 수밖에.
과수원도 예외가 아니다. 비싼 인건비 들여 열매솎기 작업에 봉지씌우기 작업까지 마친 과수들이 수확철을 눈앞에 두고 돌연 나무 전체가 고사하거나 낙과, 기형과가 생겨나면서 과수농가들의 속을 시커멓게 타들어가게 하고 있다.

 

연초부터 꼬이기 시작한 날씨, 단지 그것을 탓하는 게 아니다. 심각해진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피해를 말 그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자는 얘기다. 작금의 기후는 마치 산(山) 날씨 같아졌다. 극과 극을 내달린다. 한 해에 수십 년 만의 추위와 수십 년 만의 더위가 함께 찾아오기도 한다.
중요한 건 그런 기후 불확실성의 시대를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이다. 그게 이 시대의 최대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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