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래강 물줄기는 지역민들의 삶과 생을 이어준 요람이자 터전이다. 또한 달래강은 예나 지금이나 지역민들의 영원한 고향으로서, 애환과 기쁨을 함께 해온 자연의 동반자로서 도도한 물흐름을 계속하고 있다.
달래강 물줄기 달래강은 지역민들의 애환과 기쁨을 함께 해 온 자연의 동반자로서 도도한 물흐름을 계속하고 있다./자연닷컴
그 도도한 물흐름 속엔 커다란 버팀목 같은 지역 특유의 정서와 정신이 배어있다. 달래강이 잉태한 정서와 정신, 그것은 지역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씨앗’으로 각인된 채 살아 숨쉬고 꿈틀대며 독특한 ‘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다.
여기 달래강을 젖줄 삼아 삶의 뿌리를 이어가는 ‘달래강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겐 달래강이 어떤 존재이며 지역에는 또 어떠한 존재인지, 나아가 지역은 달래강의 미래를 위해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들어봤다.
■박경수씨(75·속리산 주민)
“수계 내 공동협의체 구성 필요”
달래강 발원지역에 사는 박경수씨(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지역주민이자 한국자연공원협회 이사인 그는 한 마디로 속리산에 푹 빠져사는 ‘속리산 박사’다. 50년 넘게 속리산지역에 살면서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야사나 문화재는 물론 곳곳에 깃들어 사는 온갖 동식물을 꿰뚫고 있는 ‘속리산 통’이다. 이번 ‘달래강의 숨결’ 기획취재 초기 본보 취재팀이 달래강의 새 발원지를 찾을 때에도 적극 도와준 장본인이다.
그는 또 속리산의 자랑이자 달래강의 대표식물인 망개나무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해서 지난 6월에는 취재팀과 동행, 속리산 골짜기서 수령 약 500년된 국내 최대·최고령의 망개나무를 발견하고 17곳의 자생지도 새롭게 찾아내는데 기여했다.
“속리산은 달래강의 근원인 물의 뿌리이자 발원지로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달래강 발원샘이 잘못 알려져 오는 등 너무 소홀하게 인식돼 왔다. 그런 점에서 충청타임즈의 취재로 달래강 발원샘이 새롭게 정립된 것은 무척 큰 의미가 있다.”
국내 유일의 삼파수(三波水: 한강,낙동강,금강의 발원지)인 속리산이 전국민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듯이 달래강 유역 또한 전국 제일의 청정지역, 살아있는 생태관광지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역민 스스로 가치를 인정하고 앞장 서 가꾸며 사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박씨는 “상류·하류 구분없이 지역민 모두가 달래강의 주인이자 관리주체라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속리산은 산으로서, 달래강은 물길로서 지역을 대표하는 중요 자연자원이기 때문에 관리 및 보전 방안을 마련하거나 개발 방안을 고려할 때에는 서로 연계해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상류 따로 하류 따로 소지역 주의에 묶여 지나치게 자기측 입장만 고집한다면 달래강의 미래는 그만큼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박씨는 “같은 수계 사람들은 고향 사람이나 다름없다”며 “그런 만큼 달래강 수계를 중심으로 발전협의회 같은 공동협의체를 구성했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다.
■김사진씨(61·향토사학자)
“개발 안된 것이 오히려 큰 강점”
“달래강은 한 마디로 지역민들의 ‘생의 전부’다. 달래강변에 태어나 그 물로 생활하며 멱 감고 철렵하고 농사짓고, 또 죽어서는 그 곁에 묻히는 게 이 지역사람들이다. 그러니 삶 자체가 달래강이요, 달래강 역시 자연스럽게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이 돼 지금도 지역인구의 80% 이상이 달래강변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괴산 청천에서 평생을 살아온 토박이로서 어릴 적 모든 추억이 고스란히 달래강에 묻혀 있다는 김사진씨의 ‘달래강에 대한 변(辯)’이다.
“지금은 달래강 혹은 달천, 박대천 등으로 불리지만 삼국시대에는 설천(雪川)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설내 혹은 설내거리라는 지명이 청천지역에 남아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먼 옛날의 이름에 눈 설(雪) 자가 붙었던 것은 그만큼 물이 맑고 깨끗했다는 의미다.”
김씨는 “물이 맑고 정기가 좋아 그동안 국회의원만 5명이 배출되는 등 많은 인물이 달래강 지역서 나왔다”며 “특히 자유당 시절의 정치인 이기붕씨가 청천 뒤뜰 출신인 것을 비롯해 벽초 홍명희, 서봉 김사달박사 등 꽤나 유명했던 사람들이 달래강과 생(生)의 인연이 있다”고 덧붙였다.
달래강의 자연환경적·생태적 가치에 관해서는 “전국적으로 보아도 달래강처럼 개발이 안된 곳도 드물다”며 “이처럼 개발이 안 된 곳이기 때문에 오히려 미래의 신개발지역으로 더욱 각광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비극의 땅 비무장지대(DMZ)가 전 세계인으로부터 관심을 끌고 있듯이 달래강 역시 지역민들이 나서 잘 가꾸고 보전한다면 반드시 지역 발전에 커다란 보탬이 될 귀중한 자연자원”이라고 강조했다.
■정대수씨(45·괴산호 주민)
“괴산호 생태계는 반드시 지켜져야”
달래강 중류 괴산호 주변에 사는 정대수씨는 달래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대표적인 ‘달래강 사람’이다.
주위의 무관심과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괴산호 주변 생태와 자연에만 관심을 가져오고 있는 그이기에 오히려 ‘기인’이란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그는 누가 뭐래도 괴산호 주변에 관한 한 ‘눈 감고도 다 아는 전문가’다. 그만큼 많은 식견과 혜안을 갖고 있다.
“공부요? 더 하고 싶었어도 못했지요. 그래서 집안 살림 거들 겸 잠시 객짓밥 먹으러 나갔다가 곧바로 돌아온 후 줄곧 고향에서 살았으니 벌써 40년이 넘게 괴산호를 지켰나 봅니다.”
생태에 관한 전문적인 교육은 단 한번도 받은 적 없다는 그는 워낙 자연을 좋아하다 보니 궁금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전문서적을 사다 밤새 찾아보고 외우며 기록한 것이 큰 도움이 돼 지금은 왠만한 것쯤은 다 아는 정도가 됐다고 자부한다. 정씨는 “괴산호 주변을 관찰해 온 것이 경제적으로 보탬을 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며 “다른 곳에 살았어도 똑같은 마음으로 자연을 사랑하며 살았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정씨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것은 충청타임즈 보도로 괴산호 일대의 생태가 잇따라 세상에 알려지면서 가치를 인정 받게 된 것”이라며 “특히 처음엔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괴산군이 생각을 바꿔 실태조사를 벌인 후 그 결과에 따라 보호·활용키로 한 것이 큰 위안이 됐다”고 소회를 밝혔다.
“내 주변의 생명체가 온전하게 살 수 있어야 우리 인간도 잘 살 수 있다는 마음에서 반생태적인 개발사업을 반대한 것일 뿐 무조건적인 반대를 하기 위해 괴산호내 옛길 정비사업을 반대해 온 것은 아니다”고 그간의 입장을 털어놓은 그는 “이번 일로 저를 오해한 동네 주민들과 공무원들이 있다면 저의 순수한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 주문했다.
정씨는 “생태보고로 되살아난 괴산호 주변이 아무쪼록 잘 보호되고 활용됨으로써 인근 주민들의 소득증대와 지역발전에 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충청타임즈 첫 발견·보도로 보호 여론 ‘개가’ 법정보호종만 23종 확인 ‘야외전시장’ 방불 괴산군 머잖아 조사착수 보호방안 모색키로 -------------------------------------
이번 기획취재의 가장 큰 수확은 ‘생태보고 괴산호’를 찾아낸 것이다.
괴산호는 51년 전 우리 기술력으로 건설한 국내 최초의 발전 전용댐이란 점에서 기획단계부터 커다란 관심사였다.
하지만 취재결과는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섰다. 현지취재가 시작되자 초빙 전문가조차 쉽게 믿지 않을 만큼 획기적인 결과물들이 잇따라 쏟아졌다.
그러나 흥분도 잠시뿐 취재팀은 이내 실망감에 휩싸였다. 50여년 전 주변 생태계를 희생삼아 들어선 괴산호가 준공 반세기만에 국내 보기 드문 생태보고로 되살아났음에도 불구, 정작 반색해야 할 관할 당국은 연일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설상가상으로 괴산군의 ‘옛길 정비사업과 산악자전거도로 개설계획’이 불거져 나오는 등 발견초기부터 훼손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하지만 취재팀의 계속된 추적과 보도가 잇따르자 사업 주체인 괴산군과 주민들의 인식에 변화가 왔고 결국 괴산군수가 나서 실태조사 후 적극적인 보호·활용방안을 마련키로 함에 따라 ‘지역발전을 위한 중요 생물자원’으로 빛을 발하게 됐다.
생태보고로 밝혀진 괴산호 주변. 괴산호 안동네인 산막이 뒤편으로 하늘다람쥐,까막딱따구리 등 수많은 희귀종이 발견된 천장봉이 둘러싸고 있다./자연닷컴
■최초로 밝혀진 괴산호 생태
취재결과 괴산호 주변은 가히 희귀·보호 야생동식물의 전시장이라 할 만큼 살아있는 생태를 보였다.
지난 7월초 괴산호 주변 천장봉서 멸종위기종이자 천연기념물(328호)인 하늘다람쥐의 둥지를 찾아낸 후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가 지금까지 5개월 동안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등 법정보호종을 무려 23종 발견하고 7종은 서식 정황을 포착해 냈다.<충청타임즈 2008년 8월 18·19일자, 9월 1·3·4·16·17·26·30일자, 10월 6·7·8·14·15·22·23·27일자,11월 3·4·5·6·12·19·20·26일자 보도>-특히 이번 충청타임즈 기획취재와 관련한 각 언론의 반응은 이 카테고리 바로 아래 이어진 '달래강 괴산호 관련 보도기사'란 제목의 카테고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취재팀이 지금까지 실물을 확인한 ‘괴산호의 천연기념물(발견 순서별)’은 하늘다람쥐를 비롯, 황쏘가리(190호),어름치(259호),수달(330호),황조롱이(323-8호),붉은배새매(323-2호),새매(323-4호),수리부엉이(324-2호),솔부엉이(324-3호),쇠부엉이(324-4호),소쩍새(324-6호),올빼미(324-1호),원앙(327호),남생이(453호),망개나무(266호 등),까막딱따구리(242호),고니(201-1) 등 17종이다. (이중 하늘다람쥐,수달,수리부엉이,올빼미,남생이,까막딱따구리,망개나무는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야생동식물로 중복 지정된 종임)
가장 늦게 발견된 겨울철새 고니는 지난 10월 9일 9마리가 첫 관찰된 후 일주일 뒤인 16일 또 다시 12마리가 날아와 잠시나마 호반에 머무는 것이 포착됨으로써 괴산호가 고니의 중간 기착지로서 한 몫을 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괴산호의 첫 겨울손님 ‘고니’./자연닷컴
취재팀은 또 삵,먹구렁이,황구렁이,노랑붓꽃,깽깽이풀,맹꽁이 등 6종의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야생동식물도 괴산호 주변 천장봉 자락서 발견해냈다. 이로써 실물이 직접 확인된 법정보호동식물은 총 23종에 이른다.
이밖에도 취재팀은 탐문조사와 현지 취재를 통해 산양(천연기념물 217호),검독수리(〃243호),뜸부기(〃446호),참매(〃323호),말똥가리(멸종위기야생동식물),담비(〃)는 물론 국내에선 얼마전까지 멸종된 것으로 추정돼 온 세계적 희귀종 사향노루(천연기념물 216호)까지 호수 주변에 살고 있는 정황(목격자 증언,배설물 및 기타 서식 흔적 등)을 포착, 계속 추적하고 있다. 따라서 추후 취재를 통해 이들의 서식 사실이 모두 밝혀질 경우 총 30종의 천연기념물 및 멸종위기종이 분포하는 국내 최고의 유전자원 보고(寶庫)로 기록될 전망이다.
솔부엉이
취재결과의 의의 및 서식환경 분석 이번 취재결과의 가장 큰 의의는 우선 괴산호 주변에 무려 23종의 천연기념물 및 멸종위기 야생동식물이 집중 서식하고 있음을 처음 밝혀낸 점이다. 물론 국립공원지역인 속리산을 제외한 달래강 수역서 하늘다람쥐와 까막딱따구리,삵 등을 발견해 낸 것도 처음이며 그동안 실체가 확인되지 않던 황쏘가리와 고니를 처음 발견한 점, 멸종 우려종인 어름치를 약 20년만에 찾아내고 남생이의 존재를 확인해낸 점 등도 의미가 크다. 괴산호는 만수면적이 불과 1.75㎢밖에 안 되는, 진천 초평저수지(만수면적 2.58㎢) 보다도 작은 인공호수다. 하지만 이번 취재에서 드러났듯이 천연기념물 17종,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6종이 직접 발견된 데 이어 5종의 천연기념물과 2종의 멸종위기 야생동식물이 서식할 가능성이 매우 높게 나타난 것은 국내외적으로 극히 드문 일이다. 더욱이 지금까지 밝힌 종들은 모두 법적 보호종으로, 국내서 첫 발견된 ‘야생 거위’를 비롯해 물닭,쇠물닭 같이 비교적 희소성이 높으나 보호종으로는 지정이 안된 야생동식물들까지 합하면 괴산호 주변의 생태적·유전자원적 가치는 더욱더 높아진다.
물닭./자연닷컴
한국민물고기보존협회 손영목회장(어류학자, 서원대 명예교수) 등 관련 학자들이 “대단한 생태 보고” 혹은 “DMZ(비무장지대)에 버금가는 생태섬(Eco-Island)”이란 평가를 내놓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일부에서는 ‘기적’이라고까지 일컫는다.
취재팀은 괴산호 주변의 현 생태가 괴산댐으로 인한 생태지리적 환경과 51년이라는 시간적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괴산호 주변은 댐이 들어선 이후 천혜의 요새로 변했다. 달래강을 사이에 두고 천장봉과 군자산, 아가봉이 둘러싸고 있고 댐 양안의 도로도 중간까지만 이어져 반폐쇄적인 공간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지역은 뱃길과 험한 산자락을 통해서만 닿을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조건이 시간이 흐르면서 생태계에 순기능으로 작용, 오늘과 같은 보고(寶庫)를 탄생시킨 것이다.
괴산호에서 야간 수중탐사 중인 취재팀./자연닷컴
■천혜의 자원으로 활용 전망
생태보고로 밝혀진 괴산호의 앞날은 호 주변의 자연 환경을 포함해 그 안에 서식 분포하고 있는 각종 희귀종들을 어떻게 보호 관리해 나가느냐에 달려있다. 특히 법적 보호종인 경우 관할 당국인 문화재청과 환경부는 물론 1차적인 보호 관리 의무가 있는 충북도와 괴산군의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예산 및 절차상의 이유와 관할 당국·지자체간의 눈치보기 관행으로 지금까지 보여온 일회성의 현장 답사 내지 체면치레식의 단편적인 조사만으로는 51년만에 찾아온 생태보고를 제대로 지켜낼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장 직접적인 보호 관리 주체인 괴산군이 각 분야별, 단계별로 실태조사를 벌인 후 그 결과에 따라 보호·관리 및 활용 방안을 모색키로 한 점이다. 괴산군은 이같은 방침에 따라 빠르면 이달 중으로 포유류와 조류 등 2개 분야에 대한 조사를 우선 실시키로 하고 현재 예산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이미 추진중인 호수내 옛길정비사업도 그 위해성을 최소화 하고자 모든 공정을 최단기일내에 친환경적으로 마칠 계획이다. 또 공사 후에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른 후속 보완조치와 함께 옛길 탐방객들에 대해서도 엄격한 통제계획을 세우는 등 친환경적으로 운용할 계획임을 밝히고 있다.
19세기 노성도선생이 설정 九曲歌 남겨 대부분 물에 잠기고 1·9곡만 남아있어 -------------------------------------------------------------
달래강 주변, 특히 산수풍광이 빼어난 중류 주변에는 유난히 ‘구곡(九曲)’이란 명칭이 많이 전한다.
위로부터 청원 미원의 옥화구곡과 괴산 청천의 화양구곡·선유구곡, 칠성의 쌍곡구곡·갈은구곡, 그리고 최근에 존재가 알려진 괴산댐 내(칠성) 연하구곡과 연풍의 풍계구곡 등이 그것이다.
이들 구곡에는 구곡시(九曲詩) 혹은 구곡가(九曲歌)(옥화구곡은 六歌가 전함)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자학을 공부하던 옛 선비들이 경치가 뛰어난 이들 지역을 찾아 나름대로 구곡을 설정하고 그에 걸맞은 시와 노래를 읊으며 그들만의 이상향을 동경한 데서 유래됐다.
지난 1957년 2월 괴산댐이 준공되면서 물에 잠긴 연하구곡(煙霞九曲)은 그로부터 44년 뒤인 2001년 괴산지역 향토사학자인 이상주씨(괴산향토사연구회·청주대 강사)가 한문학보 제4집에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씨에 의하면 연하구곡은 조선 후기 경은(敬隱) 노성도(盧性度, 1819~1893)란 선비가 설정하고 각 곡(曲)마다 정경을 읊은 연하구곡가를 남겨놓은 곳으로, 괴산군 청천면 운교리 경계로부터 칠성면 사은리 산맥이 마을에 이르는 달래강변에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물에 잠겨 있고 극히 일부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채 ‘전설속 절경’이 돼가고 있다.
연하구곡을 최초로 설정한 노성도 선생은 원래는 경북 상주에 살았으나 그의 10대 선조인 소제(蘇齊) 노수신 선생의 적소(謫所·유배생활을 하던 곳)를 관리하기 위해 이곳 연하동(현재 산맥이 마을에는 노수신 선생의 적소가 남아 있음·사진 참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산수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연하구곡(연하동)을 설정하고 많은 글과 시를 남겼는데 당시의 느낌을 적은 글에 연하구곡의 설정 배경을 읽을 수 있다.
‘불그레한 구름이 창가에 비치고 구곡에 아침햇살 비치니 이곳은 세상에서 뛰어난 산수다. (중략) 노니는 사람은 바람과 안개를 좋아하면서 시를 읊조리고 신선은 구름과 노을에 살면서 즐기는 것을 좋아하니 이곳 연하동은 가히 신선이 별장으로 삼을 곳이다.“(이상주 역)
저 안에 연하구곡이… 연하구곡은 조선 후기 노성도란 선비가 설정하고 각 곡(曲)마다 정경을 읊은 연하구곡가를 남겨놓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물에 잠겨 있고 일부만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낸 채 ’전설속 절경‘이 돼가고 있다.
현재 연하구곡 가운데 상단부가 물위로 드러나 옛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은 제1곡인 탑바위(일명 족두리바위)와 9곡인 병풍바위(屛巖) 뿐이다.
제1곡 탑바위(塔巖)는 댐 상류쪽 운교리 경계지점(운교리 아래 아가봉쪽 산자락)에 있고 제9곡 병풍바위는 댐 하류 왼쪽 절벽(산맥이 아래 천장봉쪽 절벽, 현 과수원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물속에 잠긴 나머지 절경 즉, 2곡 뇌정암(雷霆巖, 벼락바위) 3곡 형제바위(삼형제바위, 쌀개바위) 4곡 전탄(箭灘) 5곡 사기암(詞起巖) 6곡 무담(武潭, 무당소) 7곡 구암(龜巖, 거북바위) 8곡 사담(沙潭)은 1곡과 9곡 사이에 연이어 있었다고 한다.
연하구곡의 특징은 이렇듯 상류로부터 하류로 내려가면서 구곡이 설정돼 있다는 점이다. 다른 대부분의 구곡들은 하류에 ’동문(洞門·입구)‘과 함께 제1곡을 설정하고 이어 상류쪽으로 가면서 차례로 이름을 붙인 반면 연하구곡은 그 반대다.
이에 대해 이상주씨는 ”당시 노씨 문중인 광산 노씨 세거지가 경북 상주 쪽에 있었기 때문에 상류지역을 거쳐 자주 왕래하다 보니 그쪽 방향에 익숙해져 1곡을 상류쪽에 설정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고 풀이하고 있다.
연하구곡의 ’남아있는 정취‘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배를 타고 찾아간 제1곡 탑바위는 아직도 거대한 바위들이 층층이 탑을 쌓은 듯 푸른 물빛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서있다. 맨 윗단의 바위는 마치 신부의 족두리 모양을 하고 있어 바로 윗 동네인 운교리 주민들은 현재 ’족두리바위‘로 부르고 있다.
이 탑바위 바로 옆 강변에는 예전에 마당바위라는 넓은 바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물에 잠겨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또한 탑바위 주변에는 선유대(仙遊臺), 강선암(降仙岩)과 같은 글귀 외에도 많은 한시가 암각돼 있다고 하나 장마철 불어난 수위로 직접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움을 더했다.
그 중 탑바위 아래쪽 경사진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한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뚝하게 하나의 바위 강가에 솟아있는데/ 꼭꼭 감싸 매우 조화로우니 조화옹(造化翁·조물주)의 솜씨일세/ 이름은 탑바위라 했는데 비둘기가 또한 즐기네‘(이상주 역)
연하1곡 ’탑바위‘
거대한 바위들이 층층이 탑을 쌓은 듯 푸른 물빛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바위. 맨 윗단의 바위가 신부의 족두리 모양을 하고 있어 인근 주민들은 ’족두리바위‘로 부르고 있다.
9곡 역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어 배를 타고 찾아가야만 했다. 괴산호를 가로질러 건너편 산인 천장봉 끝자락에 다다르니 밑둥을 수십길 물속에 담그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9곡인 병풍바위다.
이곳에도 많은 글귀와 한시가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고 하나 2줄의 종서로 써진 ’연하수석(烟霞水石) 정일건곤(精一乾坤)‘ 중 맨 윗자인 연(烟)과 정(精)자의 상단부만이 물위에 빼곰히 내밀고 있다. 풀이를 하자면 ’연하동의 제일가는 수석이요, 천지간에 유정유일(惟情惟一)이로다‘란 뜻이니 별천지가 따로 없단다.
이 글귀 옆에는 ’숭정사을축(崇禎四乙丑) 동치 사년 을축 이월 일(同治 四年 乙丑 二月 日)‘이라 새겨져 있다 하나 확인하지 못했다. 동치 사년 을축은 서기 1865년으로 노성도 선생은 바로 그해 이곳에 와 시를 짓고 글씨를 새겼던 것이다. 역시 물에 잠겨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곳에는 ’연하동문(烟霞洞門)‘이란 글귀와 함께 9곡에 대해 읊은 연하구곡운(烟霞九曲韻)을 암벽에 새겨놓았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깎아세운 병풍바위는 별천지니 천장봉 아래서 기꺼이 즐기노라/ 산은 높고 물은 푸르러서 진경을 이루니/ 이곳 연하동이말로 세상밖 그림일세‘
연하9곡 ’병풍바위‘ 연하9곡인 병풍바위에도 많은 글귀와 한시가 새겨져 있다고 하나 2줄의 종서로 써진 ’연하수석(烟霞水石) 정일건곤(精一乾坤)‘ 중 맨 윗자인 연(烟)과 정(精)자의 상단부만이 물위에 빼곰히 내밀고 있다. 원안이 물밖으로 보이는 연(烟)자와 정(精)자.
노수신 선생의 적소 연하구곡을 최초 설정한 노성도선생은 원래는 경북 상주에 살았으나 그의 10대 선조인 소제(蘇齊) 노수신선생의 적소(謫所·유배생활을 하던 곳)를 관리하기 위해 괴산 칠성의 산맥이(연하동)로 들어왔다고 한다. 노수신 적소는 현재 충북도 기념물 74호로 지정돼 있으며 수월정(水月亭)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괴산댐에 묻힌 옛절경 반세기 만에 모습 드러내 ‘雲霞洞門(운하동문)’ 암각 문귀 최초 확인 개가 거치비 마을 유래된 우암 송시열 글씨 물밑에 -------------------------------------------------------
달래강 물길 3백리 가운데 물흐름이 ‘노루 모가지’ 형국을 한 곳은 무척 많다.
하지만 마을 이름이나 지명으로서의 노루목으로 불리는 곳은 괴산군 청천면의 노루목과 충주시 살미면의 노루목 뿐이다. 이들 두 곳의 지형은 모두 물줄기가 노루목처럼 휘돌아 흐른다는 공통점 외에도 물살이 비교적 센 여울을 이루며 굽이친다는 점이다.
달래강의 윗 노루목, 즉 청천면 관내의 노루목을 빠른 물살로 줄행랑 치듯 휘돌아 나온 물길은 예전 ‘덕평 유원지’라 불리던 거봉리 앞 강변에서 잊혀졌던 옛추억을 되새기며 굽었던 허리를 곧게 편다. 이곳 덕평 유원지는 지난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철이면 청주 등 인근에서 물놀이를 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항시 북적였으나 지금은 화양구곡과 선유구곡, 청천 뒤뜰숲 등 숲과 그늘이 있는 곳으로 손님(?)을 빼앗겨 점차 퇴색해 가는 옛명소로 변해 버렸다.
거봉리에서 추억을 털고 일어선 물길은 다시 거봉교를 지나 덕평에서 지촌을 잇는 덕평1교를 향해 푸른 비단을 곱게 펼친다. 조금 전의 지루하던 곧은 물길과는 딴판이다. 거봉교서 덕평1교 방면으로 절벽을 끼고 굽이치는 달래강의 모습이 가히 절경이다.
거봉교 아래 절벽밑으로는 자라들이 햇볕을 쐬느라 자주 출몰하던 자라바위들이 빼곰히 머리를 들고 올라와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자연산 자라를 잡기 위한 싹쓸이식 남획이 성행하면서 지금은 예전처럼 많이 올라오질 않는다고 한다.
달래강의 여름 괴산군 청천면 거봉교 부근의 여름 풍경. 왼쪽 절벽아래로 ‘자라바위’들이 즐비하게 있으나 최근 남획으로 바위 위로 올라오는 자라 숫자가 크게 들어들었다.
거봉교와 덕평1교는 이 근처에서 가장 높게 세워진 신설교로서 높은 다릿발과 관련해 지금도 많은 얘기가 오가고 있다.
이들 다리가 건설될 당시인 2000년을 전후해 가칭 ‘달천댐’이 새로 들어선다느니, 기존 괴산댐을 확대 증설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나돈 이후 걸핏하면 댐 건설 얘기가 들리곤 했는데 그 때마다 호사가들은 높게 세워진 이들 다릿발을 증거물인 양 들먹이며 마치 사실처럼 말해오고 있는 것이다.
덕평1교가 세워진 양쪽 강변으로는 새마을운동이 물결치던 지난 1970년대 중반까지도 나룻배가 있어 덕평리와 지촌, 사기막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먼 이야기’가 됐다.
거봉교에서 덕평1교 사이의 구간은 매년 여름 장마철만 되면 하류쪽 괴산댐의 영향으로 수위가 올라가는 사실상의 댐 상류에 속한다. 따라서 이 구간부터 최소한 댐 직하부(괴산군 칠성면 외사·송동리)까지는 괴산댐 건설로 인해 나타난 각종 영향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괴산댐 최상류 전경 괴산댐 최상류쪽인 덕평1교 부근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지역에 머물면서 직접 썼다는 ‘거차비 동문(去此非 洞門)’이란 글귀가 암각돼 있다고 하나 지금은 물에 잠겨 확인할 길이 없다.
괴산댐은 조선전업주식회사(한국전력공사의 전신)가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에 지난 1952년 착공, 5년만인 1957년 준공한 댐으로 비록 규모는 작지만 순수한 국내 기술진에 의해 조사,계획,설계,시공된 최초의 발전 전용댐이다.
지금은 괴산댐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지만 예전엔 수전댐, 칠성댐, 외사댐 등으로도 불렸으며 댐내 호수, 즉 괴산호는 괴산군 칠성면과 문광면, 청천면 등 3개 면에 걸쳐 있다.
댐의 유역면적은 671㎢, 총저수용량은 1500만톤으로 댐 치고는 많지 않은 양이다. 하지만 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 안에는 최근 그 존재가 밝혀진 ‘연하구곡’ 등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던 옛 계곡들이 수많은 문화유적과 함께 물에 잠겨있으며 댐 조성에 따른 생태변화 등 자연환경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댐 건설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댐내 잊혔던 구곡들을 재조명하고 나아가 생태계에 나타난 각종 변화들을 되짚어보기 위해 수 차례에 걸쳐 댐유역을 현지 답사했다.
필자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댐 최상류쪽인 덕평1교 부근의 동쪽 절벽으로, 이곳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지역에 머물면서 직접 썼다는 ‘거차비 동문(去此非 洞門)’이란 글귀가 암각돼 있다고 하는 곳이다.
필자가 다른 곳을 재켜두고 이곳을 먼저 찾은 이유는 인근에 있는 지촌리의 ‘거치비’ 마을 이름이 이 글귀의 ‘거차비’에서 유래됐을 만큼 상징성과 역사성이 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암 선생이 ‘가히 한번 가볼 만한 곳’이라고 바위에 글자까지 새겨가며 감탄했던 이 지역의 대표적인 옛명소였기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현지 어부의 도움으로 배까지 빌려타고 찾아간 취재팀은 이 일대를 이 잡듯 뒤지며 암각된 글자를 찾아 헤맸으나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현지 주민인 박래성씨(81)로부터 “물속에 잠겨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만 듣고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더욱이 아쉬움을 더한 것은 ‘동문(洞門-물가의 절경 혹은 경승지의 입구란 의미로서 특히 구곡과 같은 연이은 절경의 첫 번째 절경에 흔히 붙임)’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증언으로 보아 예전엔 이 일대를 중심으로 빼어난 절경이 강을 따라 줄줄이 이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이렇다할 절경이 남아있지 않아 상전벽해의 무상함을 다시금 느껴야만 했다는 점이다.
달래강의 겨울풍경과 운하동문 글귀
괴산댐 최상류 운교리 부근의 겨울풍경이 색다른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원내는 취재팀이 최초로 찾아낸 ‘운하동문’ 암각글자로 사진의 물굽이 친 절벽 부근 바위에 새겨져 있다.
운하구곡의 사모바위 바위절벽 위에 생뚱맞게 올려진 바위 모습이 전통혼례때 신랑이 쓰는 사모와 비슷하다해서 사모바위라 이름 붙여졌다고 하나 얼마 전 외지인들이 올라가 사모를 훼손하는 바람에 ‘어색한 사모바위’가 돼 버렸다. 원내가 훼손된 사모 부위.
‘거차비 동문’의 존재를 증언해 준 박래성씨
이러한 아쉬움은 두 번째로 찾아간 운교리앞 절벽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다만 이곳 절벽에서는 배를 빌려준 여영희씨(현지어부·운강식당 운영)의 도움으로 ‘운하동문(雲霞洞門)’이라고 암각된 네 글자를 최초 확인하는 보람을 얻었지만, 이 일대 역시 댐 조성후 변해진 물길로 옛정취는 찾아볼 수 없고 현대적인 댐 풍경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운하동문 글귀가 암각된 산자락을 끼고 운교리앞을 벗어날 즈음 수십길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나타나는데 이곳이 그 옛날 운하구곡의 마지막 절경으로 추정되는 사모바위다. 바위절벽 위에 마치 눈사람의 머리처럼 생뚱맞게 올려진 바위 모습이 전통혼례때 신랑이 쓰는 사모와 비슷하다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하나 얼마 전 외지인들이 올라가 사모를 훼손하는 바람에 ‘어색한 사모바위’가 돼 버렸다.
박덕흠 의원, 정부의 홍수재난 위기관리 총체적 부실 '인재(人災)' 지적 하천법·자연재해법·재난안전법 등 총체적 위반 '감사 필요' 주장
[충북=아시아뉴스통신] 김성식기자기사입력 : 2017년 10월 16일 09시 16분
<박덕흠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충북 보은.옥천.영동.괴산)./아시아뉴스통신DB>
지난 7월 발생한 충북 괴산댐 수해가 정부의 ‘홍수위기 정부대응 총체적 붕괴’로 인한 인재(人災)였음이 당시 부처기관 간 대응일지를 통해 국정감사에서 재차 명백히 드러났다.
박덕흠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충북 보은·옥천·영동·괴산.국토교통위원회)은 16일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7월16일 괴산댐 조치일지’를 공개하고 이는 ‘홍수비상상황 위기대응 부적절’로서 자연재해법·재난안전법·하천법 등 총체적 법령위반 정황이 있다고 주장했다.
◆당일 오전 10시37분 한수원→괴산군청 통보 박 의원이 공개한 국토부 공식제출 일지자료에 의하면 당일 한수원은 오전 10시37분 괴산군청에 최초 위기통보를 하면서 정작 홍수통제기관인 국토부(홍수통제소)에는 보고를 누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국토부는 오전 내내 정확한 상황을 모르고 ‘통상적 방류승인’만을 시행하다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오후 12시20분 거꾸로 국토부가 먼저 한수원에 문의를 하고서야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오후 12시25분 국토부(홍수통제소→하천운영과) 최초 초동보고 그 결과 비가 그친 오후 12시25분이 돼서야 국토부에서 내부적인 자체 초동보고가 최초로 이뤄진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예상된다.
이는 기록적 폭우가 쏟아진 오전 내내 홍수통제를 책임지는 국토부는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오후 12시26분 한수원→국토부 최초보고 박 의원은 또 “놀랍게도 한수원이 국토부 한강홍수통제소에 최초로 공식적 상황통보가 이어진 시점은 당일 오후 12시26분이었다”고 주장했다.
즉 한수원은 정작 오전 10시37분 괴산군청에는 통보를 하면서 홍수통제기관인 국토부에는 쉬쉬하다가 국토부의 문의를 받고 나서야 최초 보고를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후 12시50분 국토부→산자부 최초통화 또한 국토부가 괴산댐 관리부처인 산자부와 최초로 통화한 시점은 당일 오후 12시50분인 것으로 드러났다.
박 의원은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당시 국토부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산자부 일요일 당직 공무원 혼자였다는 점이다”며 “부처 간 유기적 대응에 완전한 ‘구멍’이 뚫렸다는 것이 확인되는 부분이다”고 지적했다.
이후 진행은 알려진 바와 같이 비가 완전히 그친 오후 1시50분이 돼서야 산자부는 재난관리수준을 ‘주의’에서 ‘경계’로 격상했다.
또한 국토부는 댐이 넘치기 직전인 오후 2시30분이 돼서야 ‘홍수경보’를 발령했고 오후 4시가 다 돼서야 국토부장관이 부랴부랴 한강홍수통제소를 찾은 게 전부였다.
박 의원은 “괴산댐 수해는 ‘불법무허가’ 시설에 대해 홍수제한수위 위반에 범정부적 홍수위기대응 붕괴가 초래한 인재(人災)라는 점이 재차 확인됐다”면서 “총체적 법령위반 사항에 대해, 국정감사를 통해 국토부·산자부·한수원 등을 대상으로 ‘감사원 감사청구’를 의결하고 철저규명으로 재발방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