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년 새해, 호랑이에게 길을 묻다

 

1년전 우리는 소띠 해를 맞으면서 소의 몸집처럼 풍요롭고 황소걸음처럼 여유로운 한해가 되길 기원했다.

비록 글로벌 금융위기로 모든 분야가 암울했지만 지혜와 슬기를 모으면 빈집에 소 들어가듯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기대감을 가졌다. 행여 힘들고 지치더라도 소의 충직함과 우직함을 본받아 묵묵히 참고 견뎌내면 잘 되는 집 큰소만 낳듯 행운이 찾아올 것이란 희망도 가졌다.

어디 그 뿐인가. 비록 상대방 뜻이 귀에 거슬리더라도 소가 닭 쳐다보듯 닭이 소 쳐다보듯 서로가 넓은 가슴으로 관용을 베풀고 배려하면 만사가 형통하리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나 기축년의 끝자락. 소배꼽 만큼 남은 2009년 한해를 되돌아 보니 무척이나 착잡하다. 아니 쇠똥에 미끄러져 개똥에 코방아 찧은 것처럼 찜찜하기까지 하다.
쇠고삐가 먼저 떠오른다. 이리 끌면 이리 가고 저리 끌면 저리 가도록 굴레와 코뚜레에 매여진 쇠고삐, 그 쇠고삐 끝에 국민이 매여 있었고 부단히도 끌려다닌 한해였다는 생각이 앞선다. 국민이 우매한 소인가. 묘하게도 워낭소리가 오버랩된다.
앞걸음질 보다는 뒷걸음질이 생각난다. 새해 첫날의 구름 탓이었을까. 일년내내 기대했던 찬란한 서광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늘을 탓할 수 있으랴.

다시 되돌아 보지만 참으로 힘들었던 한해였다. 가식적이라도 어디 한번 큰소리로 웃어본 적 있었는가. 지금 당장의 기쁨은 고사하고 어느 한가닥 희망이 있어 가슴속으로나마 쾌재를 불러본 적 있었는가. 나라는 나라대로,사회는 사회대로,경제는 경제대로,가정은 가정대로 한없이 움츠러든 느낌이었으니 한숨과 탄식이 절로 나왔다.

참으로 우울했던 한 해였다. 두 전직 대통령이 서거해 한 사람은 부엉이바위의 한을, 또 한 사람은 인동초의 한을 남겨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전국에 울려퍼진 조종(弔鐘)과 추모 물결은 2009년의 대표적인 잔영이다.             

또 안팎으로 얼마나 시끄렀웠는가. 북한 미사일발사,미네르바 사건,용산 참사,해커 공격,신종플루 창궐,임진강 방류사태,미디어법 충돌,대운하와 4대강 논란,세종시 논란,나영이 사건,연예계 인사 자살 등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다.

이젠 앞을 보고 싶다.

2010년 범띠 해(庚寅年)를 맞아 진짜 희망을 갖고 싶다. 백수의 왕 호랑이처럼 당당하게 어깨 펴고 힘들었던 일,우울했던 일 모두 떨쳐내고 한바탕 웃으며 포효하고 싶다.
호랑이의 나라에서 호랑이 해를 맞은 만큼 나라의 위상이 다시 우뚝 서는 한해가 되길 염원한다. 세 사람만 우겨 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는 말이 있듯이 내년에는 제발 그런 추잡한 꼴들을 보지 않았으면 한다. 호랑이가 개 어르듯 꼼수 부려봤자 서로가 새벽 호랑이 된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호랑이도 제 새끼는 안 잡아먹는다고 했지 않는가. 같은 국민끼리 으르렁거려 봐야 나라망신이요 꼴불견이다.
밝아오는 새해에는 모두가 진정으로 화합했으면 한다. 자는 호랑이에게 공연히 코침 주는 일도,또 거기에 맞서 선불 맞은 호랑이 날뛰듯 기고만장하는 일도 제발 없었으면 한다.

용 가는 데 구름 가고 범 가는 데 바람 간다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상생할 길을 찾음으로써 모든 국가 구성원들이 산 만난 호랑이처럼, 아니 날개 얻은 호랑이처럼 한발짝에 두걸음을 뛰는 비약의 한해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역술상 경인년의 화두는 "자기 이상만 고집 말고 현실을 망각하거나 독선을 드러내지 말라"다. 호랑이의 기세만 믿지 말란 경고다.
1년뒤 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도 못 그렸네 라며 한탄하는 일 없었으면 한다.

큰씨앗 하나가 흙으로 돌아가다

 
 질경이란 풀이 있다. 길섶과 마당가, 들판 어디서나 흔하게 자라는 풀로서 사람들이 아무리 밟아도 또 뙤약볕이 아무리 내리쬐고 가뭄이 든다해도 여간해 죽지않는 속성이 있다. 오죽하면 질경이라 했겠는가. 옛 이름은 차전초(車前草)다. 수레바퀴에 짓밟혀도 언제 그랬냐며 다시 살아난다 해서 붙여졌다.
옛 사람들은 질경이의 모진 특성을 통해 그해 일기를 점쳤다. 즉 질경이가 생기를 잃고 시들시들 자라거나 말라 비틀어지면 그해엔 큰가뭄이 찾아든다고 믿은 것이다. 질경이를 농사 지표식물로 부르는 이유다.


 질경이를 예로 들었지만 기실 풀만큼 생명력이 대단한 것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질기고 모진 것이 풀이다. 사람 목숨이 고래힘줄보다도 질기고 모질다고는 하나 풀의 생명력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들이 대지를 덮는 과정을 보자. 우선 봄이 되면 가장 먼저 돋는 게 그들이다. 어떤 건 얼음과 눈이 채 녹기도 전에 고개를 내민다. 사람 손으로도 뚫기 힘든 언땅을 연약한 새순으로 밀쳐낸다. 날씨가 풀려 봄비가 내리면 약속이라도 한 양 너도나도 모습을 드러낸다. 절기따라 돋아나는 풀의 종류도 갖가지다. 여름철 특히 장마철 이후엔 온통 그들 세상이다. 대지는 그야말로 온갖 풀들로 뒤덮이고 만다.


 농경지의 풀은 가히 위력적이다. 흙을 갈아 엎어놔도 순식간에 풀밭으로 변한다. 뽑고 또 뽑고 안간힘을 다해 매일같이 뽑아대도 뒤돌아서면 돋아오르는 게 풀이다. 해서 약 오른 사람들은 마치 끝장이라도 낼 것처럼 독한 제초제 사다 들이붓지만 그마저 소용없다. 비 한 번 오면 원상태다. 인류가 농삿일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벌이고 있는 전쟁이 바로 풀과의 전쟁이다.


 이렇게 질기고 질긴 풀의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한마디로 풀씨의 수명에 있다. 거의 무한한 수명을 가졌기에 뽑고 또 뽑아도 무한정 돋아나는 게 그들이다. 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명아주와 들개미자리 씨의 수명은 무려 1,700년이란다. 1,700년전에 떨어진 씨가 1,700년후에 햇빛을 보고 온도와 수분이 적당해지니까 곧바로 발아되더란 얘기다. 흔히 생땅이라고 하는 절개지(특히 퇴적층)서 돌연 풀이 돋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고학에서도 풀씨는 무시 못 할 존재다. 유적 발굴 현장엘 가보면 한구석에서 열심히 흙을 체로 치거나 물로 걸러내는 것을 볼 수 있다. 풀씨(꽃가루 포함)를 찾기 위해서다. 유적층에서 찾아진 풀씨는, 아무리 작지만 당시대의 식물상과 기후 등을 알게 해주는 귀중한 단서다.


 풀이라고 해서 일년연중 무한대로 크는 건 아니다. 어느 시기가 되면 성장을 멈추고 씨앗을 잉태한다. 비록 씨앗을 맺지 않는다해도 더이상 크지 않는 시기가 있는데 그 때가 바로 요즘이다. 절기로 치면 처서다. 이 때가 되면 따갑던 햇볕이 누그러져 띠와 수크령 등 각종 풀들이 더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에 예부터 농부들은 논두렁 밭두렁을 깎고 산소에도 벌초를 하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생명력을 자랑하던 풀들도 성장을 멈추기 시작한다는 처서일(23일)에 공교롭게도 이 시대의 ‘큰씨앗’ 하나가 영원한 삶의 고향 흙으로 되돌아갔다. 속담에 처서에 비가 오면 흉년이 든다고 했는데, 다행히도 그날 비는 오지 않았지만 우리 정치사의 큰별이 진 것에 많은 국민이 하염없이 가슴으로 빗줄기를 맞았다. 그의 별명이 인동초였듯 긴 겨울 모진 고통 다 잊어버리고 부디 평안한 마음으로 고이 잠들길 빈다.
 인동초의 다른 이름인 노옹수(老翁鬚)처럼 인자한 할아버지로 영원히 기억되리라. 또한 그가 뿌린 씨앗이 나라발전의 밀알이 되어 이 땅에 더없는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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