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난초과 식물인 천마의 사진을 찍기 위해 산에 오르다 실로 오랜만에 반가운 광경을 봤다.

풀이 무성한 어느 묘를 지나는데 느닷없이 까투리 한 마리가 발밑에서 튀어올랐다. 독사가 많은 지역이라 가뜩이나 조심스레 발길을 옮기는 중이어서 내심 놀랐으나 까투리 하는 꼴을 보니 그 녀석은 더 놀란 모양이었다.
갑자기 튀어 올랐다가는 이내 땅에 떨어져 다친 시늉을 했다. 한 쪽 날개와 다리가 부러진 양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며 몸을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마치 자기를 잡아보라고 유혹이라도 하듯 주위를 맴돌며 혼을 뺐다.

 

얼마 만에 보는 몸짓인가.

제 딴엔 내 시선을 끌어보려고 부던히도 애쓰고 있었지만, 그 속내를 익히 아는지라 눈길은 이미 발밑을 향해 있었다.

그의 새끼인 꺼병이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몇 초 안 지나 바짝 엎드린 채 머리를 처박고 있는 꺼병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미의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무작정 꼼짝 않고 있을 태세였다. 귀엽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두려움에 떠는 작은 움직임들이 애처로워 서둘러 자리를 뜨고나니 그제야 어미의 행동과 소리가 달라졌다. 적이 물러갔으니 안심해도 좋다는 공습해제 경보였다.

 

꿩 가족이 보인 일련의 행동들을 생물학에선 의태(擬態)라고 한다.

사람이 나타나자 어미가 다친 시늉을 하며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려고 한 것이라든가 어미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몸을 숨긴 뒤 죽은 척 했던 꺼병이들의 몸동작이 의태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동물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동물 혹은 식물체나 무생물체와 흡사한 색채, 모양, 자세 등을 가지는 게 의태다. 한 마디로 생존을 위한 흉내작전과 위장술이 곧 의태다.

 

새끼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방패막이로 삼았던 까투리의 모정, 그 모정의 다급한 신호를 받고 즉시 시체놀이하듯 부동자세를 취했던 꺼병이들의 모습, 그 어찌 생명의 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반갑고 흐뭇한 광경이 아니겠는가.

 

의태를 하는 새 중에는 깝작도요란 게 있다. 모래와 자갈이 깔린 하천변에 주로 살면서 꼬리와 몸통을 항시 깝작거리는 이 새도 번식기에 위급상황을 만나면 까투리처럼 즉시 다친 시늉을 해 가족의 안녕을 지킨다. 꿩은 덩치라도 크지만 깝작도요는 덩치도 작은 게 간덩이는 커 천적이 바싹 다가올 때까지 꼼짝 않고 있다가 마주치기 직전 또는 밟혀죽기 직전에서야 별안간 움직여 다친 시늉을 한다.
요즘 보기 드물어진 쏙독새도 의태를 하는데, 쏙독새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아주 어렸을 적이다. 마을 뒷산을 오르는데 한 오리나무 아래서 쏙독새 한 마리가 날더니 갑자기 총 맞은 행동을 보였다. 어린 마음에 잡으려고 다가갔더니 약 올리듯 자꾸만 달아났다. 다가가면 날아가고 다가가면 날아가고. 한참 뒤 제자리로 돌아와 보니 낙엽속 둥지안에 품고 있던 흰알 두 개가 있었다. 그 뒤로 새의 의태란 걸 알았다.

 

지난 주말엔 의태가 아닌, 안타까운 죽음을 목격했다.

한 야산길을 지나는데 장끼 한 마리가 '까투리 의태하듯' 풀숲에서 튀어올랐다. 아니 까투리도 아니고 웬 장끼가 저런 행동을 할까, 의아해 했지만 하는 짓이 영락없이 의태 같았다.

그런데 웬걸, 한 5분 가량을 이리 뛰고 저리 뛰더니만 이내 움직임이 없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다며 다가가 보니 상황이 그게 아니었다. 금세라도 죽을 것처럼 온몸이 굳어가고 있었다. 주변을 보니 최근에 씨앗을 뿌린 콩밭이 있었다. 씨앗 도둑을 막기 위해 밭주인이 놓은 극약을 먹은 것이다.

 

약 기운에 졸다가 졸지에 불청객에 놀라 튀어오른 게 마지막 날갯짓이 된 셈이다.

장끼는 그렇게 죽어갔다.

누가 미물이고 누가 영물인가


자연 생태계에는 새끼에 대한 사랑이 유난히 강한 동물이 있다.
예를 들어 꼬마물떼새를 비롯한 물떼새류와 원앙이, 꿩, 쏙독새 등은 알을 낳아 둔 둥지 근처나 어린 새끼가 있는 곳에 낯선 침입자가 나타나면 어미새는 마치 부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몸이나 날개를 갑자기 늘어뜨려 금방 잡힐 것처럼 보이거나 한쪽 날개가 부러진 것처럼 옆으로 누워 날개를 푸드덕거리기도 하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넘어지기까지 한다. 그러면 침입자는 그 행동에 현혹돼 잡으려고 달려들게 마련인데 어미새는 그때마다 잡힐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도망치며 침입자를 먼곳으로 유인한다. 어미새의 목숨을 담보로 알과 새끼를 보호하는 강한 모성애를 엿볼 수 있다.

또 꾀꼬리와 때까치, 파랑새는 둥지 가까이에 천적이 다가가면 큰 경계음을 내며 잽싸게 공격한다. 행여 둥지를 건들라치면 마치 사생결단을 한 것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얼굴과 머리를 마구 공격하는데 특히 어린이와 여자는 어떻게 용케 알고 더욱더 악()을 써 혼비백산하게 만든다. 이 역시 목숨을 건 강한 새끼사랑이다.

새 가운데에는 또 새끼가 어미를 도와 동생들을 기르거나 둥지를 트는 등 '가족애'가 유난히 두터운 새도 있다.
앞서 말한 꾀꼬리가 그 주인공인데 지난해 태어난 1년생 새끼 꾀꼬리는 이듬해 어미가 둥지 틀 때 함께 재료를 물어다 틀고 또 동생들이 태어나면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줌으로써 어미에게 은혜를 갚는다. 또한 둥지에 침입자가 나타나면 어미보다 더 맹렬히 공격해 동생들을 지켜낸다.
이경우 1년생 새끼를 조류학에서는 '헬퍼(Helper)'라 부르는데 이 헬퍼의 행동은 실제로는 어미가 되기 위한 학습과정이나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한 효조(孝鳥)가 없고 더한 가족애도 없을성 싶다.

곤충도 강한 자식사랑을 보이는 게 있다. 수서곤충인 물자라는 암컷이 수컷 등에 알을 낳으면 수컷은 부화할 때까지 업고 다니며 애지중지 보호한다. 또 에사키뿔노린재는 자신의 알을 몸으로 감싼채 꼼짝 않고 부화할 때까지 보호한다.

물고기도 자식사랑이 유난히 강한 게 있다.

우리나라에 사는 열동가리돔과 줄도화돔은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이 입으로 받아 부화할 때까지 넣고 다니며 보호한다. 수컷의 입이 부화장인 셈이다. 자신은 먹을 것도 못 먹어가면서 오로지 새끼만 보호하는 참으로 기특하고 영특한 부성애다.

또 해마라는 물고기는 수컷 배에 육낭(育囊)이 있어 암컷이 낳은 알을 받아 부화할 때까지 살신보란(殺身保卵)한다. 열거하자면 끝없는 이러한 동물들의 자식사랑은 그 내면을 알면 알수록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경외감마저 든다. 자연은 인간의 어머니라 했던가. 사유(思惟)가 없는 이들 동물도 자식과 부모, 가족을 사랑하는 지고지순의 본능을 갖고 종족 유지에 최선을 다하는 게 대자연의 이치다.

하물며 인간사는 어떤가. 걸핏하면 어린 핏덩이를 남의 집앞이나 화장실에 내다버리고 자식들은 어버이를 돈 없고 늙었다는 이유로 마구 학대하거나 홀로 살게하는 현대판 고려장이 난무한다.

이유도 모른채 가족들과 헤어져 험한 세상을 방황하는 미아들이 부지기수고 알량한 돈 몇푼과 성적 욕구 때문에 남의집 귀한 자식 유괴해 목숨 끊는 비정한 사건이 연일 터진다. 우리가 미물이라 깔보는 동물들은 자식사랑 부모사랑 가족사랑이 변치않는데 사람들은 그 반의 반도 못 따라 가는 이들이 허다하다. 허니 누가 미물이고 누가 영물인가. 자식과 부모,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5월 가정의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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