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새들은 집짓기의 명수다.

파랑새처럼 남의 둥지를 빼앗아 새끼를 치는 종도 있고 뻐꾸기처럼 아예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그 둥지 주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새끼를 기르도록 하는 종도 있지만, 많은 새들은 집짓기의 타고난 선수들이다.
송곳 같이 뾰족한 부리로 나무와 흙을 쪼아 기다란 구멍을 뜷고 그 속에 둥지를 마련하는 딱따구리와 물총새류를 보면 목수들도 가히 놀랄 만큼 기막힌 기술력을 보인다. 그들의 둥지 안을 들여다 보면 드릴로 파낸 듯 대패로 밀어낸 듯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뾰족한 부리로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흔히 볼 수 있는 까치집도 그냥 지어진 게 아니다. 한 마디로 철옹성 같다. 무려 1천600여 개나 되는 나뭇가지를 이리 얽고 저리 얽어 매우 견고하게 짓는다. 바닥에는 진흙을 깐다. 공학의 개념을 배운 것도 아닌데 바람 부는 방향과 세기 등 주변 여건까지 고려해 둥지를 튼다. 그러니 비가 와도 잘 새지 않고 태풍이 불어도 까딱없다. 설령 나무가 뿌리째 넘어가 땅바닥에 내동갱이 쳐져도 겉만 약간 부서질 뿐 벽체와 바닥은 멀쩡하다.

 


꾀꼬리와 때까치, 밀화부리는 물론 붉은머리오목눈이(일명 뱁새)와 개개비처럼 덩치 작은 새들도 정교하게 집을 짓는다. 자기들만의 명당자리를 찾아 풀잎과 뿌리, 나뭇가지, 심지어 폐비닐 같은 각종 재료들을 물어다 적재적소에 꼼꼼히 이용한다. 사람의 손기술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다.

 

집짓는 기술만 뛰어난 게 아니다. 둥지의 위치에 따른 안전성도 고려한다. 천적으로부터 자신과 새끼를 보호하고 아울러 안정적인 먹이 공급을 위한 본능이자 진화의 결과이다. 앞에서 말한 '명당자리'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요즘 들어 딱새와 할미새, 박새류처럼 인가 근처 혹은 인가내 구조물에 둥지를 트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는 것도 속내는 안전성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천적에 비해 안전하고 인가 주변이 다른 곳에 비해 먹이 구하기가 쉽다고 믿는 것이다.

 


앞날의 일기를 내다보고 둥지 위치를 정하는 새들도 있다. 천연기념물 어류인 어름치가 그해 강수량을 예견해 산란탑 위치를 수심이 깊거나 얕은 곳으로 정하듯, 쇠물닭이나 깝작도요 같은 일부 물가새들도 나름대로의 일기전망에 따라 둥지 위치를 정한다. 예를 들어 번식기간 중 비가 많이 올 것 같으면 둥지를 평소보다 높은 곳에 짓고 그와 반대면 낮은 곳에 짓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새들의 이같은 지혜로움도 때론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올해 같은 경우다. 얼마나 날씨가 극성스러우면 새들의 본능으로도 예측하지 못하는 이변 아닌 이변이 일어나겠는가.
사정은 이렇다. 달래강(달천)에서의 번식 생태를 기록하기 위해 약 20일 전부터 관찰해 오던 쇠물닭 둥지와 깝작도요 둥지가 있었는데, 이번에 내린 장맛비로 하나는 둥지 전체가 떠내려가고 또 하나는 알이 몽땅 물에 잠겨 곯는 사태가 벌어진 것. 쇠물닭은 쇠물닭대로, 깝작도요는 깝작도요대로 이른바  안전 수위를 정해 둥지를 틀었건만 예기치 못한 악천후로 인해 한 해 새끼 농사를 모두 망치는 뼈아픈 시련을 겪어야 했다.

 

졸지에 피붙이를 잃고 허공을 헤매는 생명체가 어디 이들 새 뿐이겠냐마는, 그동안 온갖 정성 들여 알을 품던 쇠물닭과 깝작도요 어미들, 또 불빛을 비추면 알 속에서 꼼지락 거리며 어엿한 생명력을 느끼게 했던 어린 새끼들, 그 가엾은 존재들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 마음이 편하질 않다.

 

자연이 자연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이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예측불허의 시대'. 그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더 빨리 다가오고 있다.

얼마 전 난초과 식물인 천마의 사진을 찍기 위해 산에 오르다 실로 오랜만에 반가운 광경을 봤다.

풀이 무성한 어느 묘를 지나는데 느닷없이 까투리 한 마리가 발밑에서 튀어올랐다. 독사가 많은 지역이라 가뜩이나 조심스레 발길을 옮기는 중이어서 내심 놀랐으나 까투리 하는 꼴을 보니 그 녀석은 더 놀란 모양이었다.
갑자기 튀어 올랐다가는 이내 땅에 떨어져 다친 시늉을 했다. 한 쪽 날개와 다리가 부러진 양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며 몸을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마치 자기를 잡아보라고 유혹이라도 하듯 주위를 맴돌며 혼을 뺐다.

 

얼마 만에 보는 몸짓인가.

제 딴엔 내 시선을 끌어보려고 부던히도 애쓰고 있었지만, 그 속내를 익히 아는지라 눈길은 이미 발밑을 향해 있었다.

그의 새끼인 꺼병이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몇 초 안 지나 바짝 엎드린 채 머리를 처박고 있는 꺼병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미의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무작정 꼼짝 않고 있을 태세였다. 귀엽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두려움에 떠는 작은 움직임들이 애처로워 서둘러 자리를 뜨고나니 그제야 어미의 행동과 소리가 달라졌다. 적이 물러갔으니 안심해도 좋다는 공습해제 경보였다.

 

꿩 가족이 보인 일련의 행동들을 생물학에선 의태(擬態)라고 한다.

사람이 나타나자 어미가 다친 시늉을 하며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려고 한 것이라든가 어미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몸을 숨긴 뒤 죽은 척 했던 꺼병이들의 몸동작이 의태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동물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동물 혹은 식물체나 무생물체와 흡사한 색채, 모양, 자세 등을 가지는 게 의태다. 한 마디로 생존을 위한 흉내작전과 위장술이 곧 의태다.

 

새끼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방패막이로 삼았던 까투리의 모정, 그 모정의 다급한 신호를 받고 즉시 시체놀이하듯 부동자세를 취했던 꺼병이들의 모습, 그 어찌 생명의 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반갑고 흐뭇한 광경이 아니겠는가.

 

의태를 하는 새 중에는 깝작도요란 게 있다. 모래와 자갈이 깔린 하천변에 주로 살면서 꼬리와 몸통을 항시 깝작거리는 이 새도 번식기에 위급상황을 만나면 까투리처럼 즉시 다친 시늉을 해 가족의 안녕을 지킨다. 꿩은 덩치라도 크지만 깝작도요는 덩치도 작은 게 간덩이는 커 천적이 바싹 다가올 때까지 꼼짝 않고 있다가 마주치기 직전 또는 밟혀죽기 직전에서야 별안간 움직여 다친 시늉을 한다.
요즘 보기 드물어진 쏙독새도 의태를 하는데, 쏙독새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아주 어렸을 적이다. 마을 뒷산을 오르는데 한 오리나무 아래서 쏙독새 한 마리가 날더니 갑자기 총 맞은 행동을 보였다. 어린 마음에 잡으려고 다가갔더니 약 올리듯 자꾸만 달아났다. 다가가면 날아가고 다가가면 날아가고. 한참 뒤 제자리로 돌아와 보니 낙엽속 둥지안에 품고 있던 흰알 두 개가 있었다. 그 뒤로 새의 의태란 걸 알았다.

 

지난 주말엔 의태가 아닌, 안타까운 죽음을 목격했다.

한 야산길을 지나는데 장끼 한 마리가 '까투리 의태하듯' 풀숲에서 튀어올랐다. 아니 까투리도 아니고 웬 장끼가 저런 행동을 할까, 의아해 했지만 하는 짓이 영락없이 의태 같았다.

그런데 웬걸, 한 5분 가량을 이리 뛰고 저리 뛰더니만 이내 움직임이 없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다며 다가가 보니 상황이 그게 아니었다. 금세라도 죽을 것처럼 온몸이 굳어가고 있었다. 주변을 보니 최근에 씨앗을 뿌린 콩밭이 있었다. 씨앗 도둑을 막기 위해 밭주인이 놓은 극약을 먹은 것이다.

 

약 기운에 졸다가 졸지에 불청객에 놀라 튀어오른 게 마지막 날갯짓이 된 셈이다.

장끼는 그렇게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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