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과 마른 장마

 

 

감나무는 참으로 묘하다.

감을 열매 맺지만 그 씨는 이상하게도 감나무가 아닌 돌감나무나 고욤나무를 잉태한다. 다시 말해 감씨에서는 감나무가 나지 않는다. 돌감나무나 고욤나무가 난다.
제 아무리 크고 튼실한 씨를 골라 심어도 결과는 같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세상사 이치가 감나무에서만큼은 예외다.

열리는 결과물 즉 감과 돌감, 고욤만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 마디로 감나무의 본바탕이 돌감나무 혹은 고욤나무이니 그 씨에서 돌감나무나 고욤나무가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씨는 그 자체로 묘목을 만들면 열매가 퇴화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해서 예부터 좋은 감나무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접붙이기를 해왔다. 근연종인 돌감나무 또는 고욤나무를 대목으로 하여 원하는 감나무의 새순이나 눈을 접붙여 크고 맛있는 감이 열리도록 한 것이다.
맛있는 수박을 얻기 위해 박이나 호박묘에 수박순을 접붙이는 이치와 같다. 다만 수박씨에선 박이나 호박묘가 나지 않고 수박묘가 나는 것만 다르다. 감나무는 그만큼 독특하다.


감나무는 또 꽃을 2년에 걸쳐 피우는 특성이 있다. 매년 6월말경 꽃을 피우지만 그 꽃눈은 이미 전년도 7~8월경에 분화돼 4개의 꽃받침이 될 부분을 만들어놨다가 그대로 월동한 후 꽃잎과 암수술 등을 갖춰 꽃을 피운다.
감꽃은 그 해 여름철 일기를 점쳐주는 꽃으로도 알려져 있다. 즉 감꽃이 피었다가 시든 뒤 곧바로 떨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붙어있는 해는 장마철이라도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른 장마의 징후란 뜻이다.
자연현상을 보고 일기를 점치는 것을 관천망기(觀天望氣)라 하는데 감꽃을 통해 본 올해의 관천망기가 어쩜 그렇게도 꼭 들어맞는지 감탄할 지경이다.

며칠전 일이다.

꽃이 지고 난 뒤에 앙증맞게 커가는 감을 촬영하기 위해 어느 감나무 밭을 찾았는데 많은 감들이 말라붙은 꽃을 그대로 둘러쓰고 있었다.
순간 스쳐 지나간 생각이 옛 어른들의 관천망기요 요즘 날씨, 특히 충북지역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마른장마 현상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장마철이 아직은 많이 남았으니 두고 볼 일이지만 지금까지의 일기로 봐서는 감꽃이 점쳐준 그대로다. 장마철에 감질나는 비만 오니 기상청 일기예보보다 되레 정확하단 생각마저 든다.

큰 비가 올 것이라던 지난 주말도 그랬고 월드컵 16강전이 펼쳐지던 2주전 주말도 겁만 잔뜩 줬을 뿐 말 그대로 마른비의 연속이다. 게다가 6월 둘째주 이후 계속 주말에만 비소식이 있고 정작 비는 찔끔거리기만 한다.

충북지역의 대표적인 하천인 달래강은 5월 이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예년 같으면 이미 한 두 번쯤은 큰물이 내려갔을 테지만 올핸 단 한 번도 물다운 물이 내려가지 않았다. 물은 물대로 탁한 빛을 띠고 있고 곳곳에 이끼와 수초가 무성히 자라 다른 강을 보는 듯하다.
본격적인 피서철이 왔어도 뚝 끊어진 피서객들의 발길에 주변 상인들은 한숨만 짓고 있다. 한 철 벌어 일년 먹고 사는 그들로서는 손해가 막심하다.
생태계도 말이 아니다. 비같은 비가 내려야 물고기들이 산란할 텐데 뱃속에 알만 잔뜩 실은 채 갈팡질팡하는 물고기들이 태반이다. 물고기들의 이동도 뜸하니 어부들은 그물치기를 포기했다. 2007년부터 내리 3년째 가을가뭄으로 버섯철을 망친 달래강변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걱정은 벌써 가을을 향하고 있다.

비는 너무 많이 와도 탈이요 너무 적게 와도 탈이다.

장마철이 끝나기 전에 어서 적당한 비가 오면 좋으련만, 언제쯤 그런 약비가 올지 적이 걱정이다

개구리 잡던 시절의 작은 소망을 생각하며

 

 

나 어릴때 작은 소망은/ 계곡에 숨어있는 개구리 잡아 노랗게 구워서/ 다리는 뚝 떼어 소금찍어 내가 먹고/ 검은 알은 엄마 드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노는 것이었다네/ 나 어릴때 작은 소망은/ 진달래 먹고 찔레 꺾어먹으며/ 냇가에 나가 버들피리 꺾어불며/ 가재와 미꾸라지 잡아 고무신에 담고/ 다슬기 잡으며 노는 것이었다네….
강순병시인의 '작은 소망'이란 시의 일부다.

 

그렇다.

1960~70년대만 해도 이 땅의 코흘리개 아이들은 무시로 들과 산 찾아 개구리 잡고 꽃과 열매 따 먹으며 놀았다. 그게 생활이요 삶이었다. 지금이야 먹을거리가 지천하고 놀거리도 많지만 그 때만 해도 자연이 곧 주전부리 창고요 놀이터였다.

우선 봄이 되면 너도나도 산을 찾았다. 칡뿌리 때문이었다. 굵직한 알칡을 토막내 주머니에 잔뜩 넣고는 턱이 얼얼하도록 씹고 다녔다.

개구리잡기도 성행했다. 장순병시인은 계곡에 사는 산개구리 잡아 구워먹는 게 작은 소망이었다고 했지만 그 시절 흔히 잡아먹던 개구리는 논과 개울가에 살던 참개구리였다. 지금은 참개구리든 산개구리든 함부로 잡아먹을 수 없지만 그 땐 물고기잡이처럼 예사로 여겼다.
진달래와 찔레순,삘기(띠의 어린순),아까시꽃,감꽃도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의 주전부리였다. 또한 꿀맛이 일품인 원추리와 꿀풀, 한번 손 댔다 하면 입주위가 새까맣도록 따먹던 버찌와 오디, 손가락에 가시 찔리는 것도 잊은 채 정신없이 따먹던 산딸기와 멍석딸기, 도토리 익을 무렵이면 누렇게 익어 알이 빠지던 개암, 늦서리 내려야 쭈글쭈글 익던 고욤도 잊지못할 계절의 별미였다.

모내기철이면 으레 써레질하는 논으로 달려가 올미 주워먹고 여름이면 저수지에 들어가 마름 따다 삶아먹는게 일이었다. 또한 동네앞 논둑에선 동무들과 쭈그리고 앉아 껌풀(떡쑥) 뜯어 한입 물고는 "껌이 되라" 주문하며 오물오물 씹던 빛바랜 추억도 있다.
뿐만 아니다. 소나무 속껍질인 송기를 먹는다고 어린 가지 꺾어 겉껍질 벗긴 다음 앞니에 대고 하모니카 불듯 좌우로 빨고 다녔으며 무의 꽃대인 장아리를 먹기 위해 무밭을 기웃거리고 아까시나무 새순을 잘라 입에 물고다니기도 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보리와 밀에 생긴 깜부기병을 무슨 귀한 먹을거리인 양 보는 대로 입에 털어넣고는 볼에 묻은 깜부기가루가 우스워 깔깔대기까지 했다. 또 가을이면 벼메뚜기 말고도 풀무치,방아깨비 잡아 구워먹고 벌집 따다가 애벌레를 볶아먹어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던 게 그 시절이다.

 

40~50년 전의 일을 알지 못하는 세대들은 웬 뜬금없는 얘기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농작물 외에는 웬만한 건 대부분 자연에서 구했던 그 시절엔 늘 먹고 겪었던 실제 상황이다. 세월이 바뀌고 먹을거리,놀거리가 풍부해진 오늘날 굳이 그 옛날의 먹을거리,놀거리로 되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 때 그 시절 어린이들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며 그곳에서 먹을거리,놀거리를 스스로 찾아냄으로써 자연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즐겼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돈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맛있는 음식과 놀이기구를 즐길 수 있는 요즘 어린이들. 하지만 개구리를 보면 외계동물 만난 것처럼 자지러지고 산에 가면 산딸기를 보고도, 들에 가면 오디를 보고도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그런 어린이들이 허다하기에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부모들이여, 요즘의 모광고처럼 학부모만 되려 하지 말고 하루만이라도 진정한 부모가 되어 자녀들과 함께 자연을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자연처럼 있는 그대로를 깨우쳐주는 것도 없쟎은가. 지금 산야엔 오디,산딸기같은 자연의 메뉴가 그득하다.(2010년 6월 15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