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로 가는 문턱이 이렇게도 높은가

 
 사람마다 날씨가 미쳤다고들 한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단다. 말복이 지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일 30도가 넘는 폭염으로 전국을 달궈대니 그럴만도 하다.

   어떤 지역은 수은주를 40도 가까이 끌어 올려 사람들을 맥 못추게 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까라질 판이다. 어디 사람뿐이랴. 축산농가의 소,돼지도 기진맥진이다. 대형선풍기를 틀고 물까지 뿌려 주며 차광막으로 햇볕을 가려줘도 소용없다. 알 낳는 산란계들은 알 낳길 포기했다. 오리들은 아예 수도꼭지 곁을 떠나지 않는다.


   입추가 지난 지는 열흘 됐고 닷새 후면 처서다. 처서가 무엇인가. 더위가 물러가 선선한 가을로 접어든다는 절기다. 이 때가 되면 모기들도 입이 비뚤어질 만큼 기온변화가 확연하다.

한데 올핸 아니다. 늦더위가 되레 극성이다. 게다가 이번 늦더위는 반짝성이 아니라 여러날 이어지고 있다.


 하기야 올해 날씨가 어디 한 두번 미쳤는가. 좀 과한 표현이지만 미친 개 널뛰듯 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긴 가뭄끝에 봄이 왔으나 돌연 초여름 날씨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정작 농삿철이 돼서는 기온이 뚝 떨어져 농작물에 냉해를 입혔으며 여름 들어서는 하늘둑이 무너진 양 하루가 멀다하고 물폭탄을 퍼붰다. 어디 그 뿐인가. 장마가 끝난 후엔 곧바로 태풍 2개가 올라오면서 또다시 물폭탄을 들이부어 애먼 사람들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런 뒤에 찾아온 게 다름 아닌 요즘의 ‘불꽃 폭탄’ 폭염이다.


 목하 이상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피서행렬까지 되돌려 놓고 있다. 말복 뒤에 이어진 폭염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또다시 피서지로 향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말복과 함께 휴가철이 끝나가면서 한산해지던 피서지가 돌연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해수욕장은 물론 산간계곡의 물가마다 늦더위를 피해 몰려든 사람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다. 지난 주말의 경우 속리산 뒤편 화양·사담계곡과 달래강 물가에는 한여름 피서객보다도 더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뤘다. 이 때문에 주변 도로는 연 이틀째 차량정체가 극심해 운전자들이 생고생했다.


 이렇다 보니 때아닌 호황을 맞은 곳들도 있다. 피서지 숙박시설과 음식점들이다. 지역명품 대학찰옥수수 장사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사실 이들은 말복을 정점으로 여름장사를 마무리하던 참이었다. 그러니 졸지에 밀려든 피서객들이 일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그들을 맞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돌려보냈던 알바생까지 다시 부를 정도다. 대학찰옥수수는 산지에서조차 동이 났다.        

 
 폭염을 반기는 사람들이 또 있다. 농부들이다. 벼와 과일이 잘 여물려면 햇빛이 잘 내리쬐야 하는데 지난 여름내내 잦은 비로 일조량이 부족해 속 깨나 썩었던 그들로서는 요즘 폭염이 보약보다 낫다고 반색이다. 이들에겐 이번의 ‘미친 날씨’가 되레 다행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이번 폭염을 ‘쥐약’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버섯꾼들이다. 장마 이후 선선한 날씨가 이어져야만 송이 등 각종 버섯이 많이 나는데 요즘처럼 날씨가 따갑고 햇볕이 강하면 포자번식이 잘 안되기 때문에 걱정이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금년 버섯 산출량이 많을 것이라며 좋아하던 그들이었는데 지금은 정반대다. 그들은 지금 지난해 같은 가을가뭄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그럴 경우 연3년째 버섯농사가 꽝이니 어찌 걱정되지 않겠는가.

 


 날씨는 이제 우리 삶과 직결돼 있다. 그런 만큼 절기에 맞게 적당한 날씨가 뒤따라 준다면야 더없이 좋으련만 이 땅의 날씨는 갈수록 삐딱해지는 양상이다. 입추에서 처서로 넘어가는 계절 문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삼복에 집중됐던 피서철도 옮겨야할 판이다.

피서행렬과 동물들의 이동이 다른 이유

 
 여름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자연은 자연대로 인간세계는 인간세계대로 나름의 이동을 통해 여름나기를 하고 있다. 여름행렬 가운데엔 더위를 씻기 위해 떠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 동물처럼 아예 삶의 터전을 버리고 다른 곳을 찾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간에 여름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삶의 방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자연계의 이동부터 들여다보자. 자연계의 이동행렬이라면 가장 먼저 철새들의 이동모습이 떠오르겠지만, 그것은 계절변화와 기후 환경에 따라 번식지와 월동지를 오고 가는 1년 단위의 서식지 옮기기 즉 넓은 의미의 철새이동으로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여름행렬과는 성격이 다르다. 다시 말해 한여름철인 요즘 현재진행형으로 이뤄지고 있는 각종 야생동물의 자리이동을 들여다 보자는 것이다.

 하기야 오래 전엔 철새마저도 의미가 모호했던 때가 있었다. 철새가 계절이 바뀌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자취를 감추는 것을 마치 같은 지역내에서 자리이동해 종(種)이 바뀌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제비는 음력 9월 9일께가 되면 깊은 산 고목으로 들어가는 대신 고목 속에 있던 콩새가 교대해 나온다고 믿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 아닌 조선후기의 우리 사고방식이다.   


 자연계의 여름행렬은 여러 행태로 나타난다. 한낮 땡볕더위가 시작되면 멧비둘기와 참새같은 조류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물가를 찾아 날개 적시거나 나무그늘 아래서 구덩이 파고 모래욕을 즐기는 등 각기 선호하는 장소로 이동해 더위를 피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새들 뿐만이 아니다. 멧돼지 같은 들짐승들도 산속의 진흙탕 혹은 계곡물 찾아 더운몸 식히거나 동굴속 시원한 바닥 찾아 배 깔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반대로 내리쬐는 햇볕이 아까워 볕 잘 드는 곳만 찾는 동물도 있다. 자라와 뱀 같은 변온동물들이다. 물속에 사는 자라는 서식지 주변 바위 위에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면 너나 할 것 없이 일광욕하러 기어오르고 각종 뱀 역시 체온을 덥히기 위해 양지쪽을 자주 찾는다.
 한여름철 먹이활동을 위해 가족단위로 이동하는 동물도 있다. 새끼를 데리고 있는 새와 들짐승들로서 삼복더위에 되레 새끼 기르기에 전념함으로써 이열치열한다. 새의 경우는 물닭,쇠물닭,논병아리 같은 대부분의 물새류와 꾀꼬리,때까치,파랑새 같은 종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이들이라고 해서 더위에 먹이사냥하기가 좋을 리 없겠지만 무더위에 새끼 깠으니 어쩔 도리 있겠는가. 새끼들을 하루라도 빨리 키워야 천적으로부터 살아남고 또 철새인 경우 제때 월동지로 갈 게 아닌가.
 목숨 건 필사의 이동행렬도 있다. 올해처럼 집중호우가 잦은 해에 자주 목격되는 여름행렬로서, 생(生)을 잇기 위한 이동본능이 얼마나 경이로운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개미의 경우 큰비 올 기미가 보이면 마치 철수명령에 따라 퇴각하는 군부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동한다. 들쥐 역시 비가 많이 와 둥지가 잠길라치면 어미는 털도 안 난 빨간 새끼들을 데리고 피신하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동하는 모습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인간세계에도 목하 여름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다름 아닌 피서행렬이다. 외국여행을 겸한 것이든 국내에서의 피서여행이든 이 또한 여름의 시련을 피하려는 인간만의 삶의 한 방식이다. 자연계의 그것과 다른 게 있다면 으레 흔적을 남긴다는 점이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스스로도 부끄러운 일들이 상처처럼 남겨지기 일쑤다. 자연계의 동물들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비양심적인 행적 말이다. 모두가 머물던 자리, 그대로 아름다운 자리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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