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트'만 보면 떠 오르는 아린 기억
우리 농촌서 잊혀진 모습이 있다. 초가지붕이다. 둥그스런 곡선이 뒷동산 봉우리와 어우러져 포근함을 안겨주던, 그래서 언제나 고향의 품을 그립게 하던 정서적 랜드마크가 초가지붕이다.
초가지붕엔 많은 추억이 얹혀 있다. 해질 무렵이면 초가지붕 위로 피어오르던 굴뚝연기 속엔 이 세상 어느 냄새보다 더 향기로운 어머니품 냄새가 배 있고, 해진 창호지 사이로 어슴푸레 흘러나오던 등잔불빛엔 할아버지의 구성진 이야기가 감동으로 각인돼 있다.
초가지붕은 공동체 삶의 산물이었다. 비록 작은 공간이었지만 그 안에 깃든 삶들의 애환이 공동으로 꿈틀대던 정겨운 공간이었다. 모든 게 우리의 개념으로만 통했다. 밖으로도 울은 있었지만 남과 구분짓는 경계가 아니었다. 해서 지붕을 일 때도 늘상 이웃이 함께 했다. 일손이 부족하면 품앗이를 통해 이집 저집 돌아가며 지붕을 단장했다. 초가지붕을 이던 모습은 초가가 보편적이던 시절의 보편적인 행사였지만 그 역시 지금은 볼래야 볼 수 없게 된 아련한 고향 모습이다.
동장군이 오기 전 연례행사로 펼쳐지던 초가지붕 이기는 이러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선 편을 갈라 한쪽에선 묵은 이엉을 걷고 한쪽에선 새 짚으로 이엉과 용마름을 엮었다. 묵은 지붕이 정리되고 새 이엉과 용마름이 엮어지면 이어 본격적인 지붕 이기에 들어가는 데 이때부터 경험과 기술이 필요했다. 물론 이엉과 용마름도 경험과 기술이 있어야 엮을 수 있는 일이지만 엮어진 이엉과 용마름을 이는 데엔 그보다 더한 요령이 필요했다. 이엉과 용마름을 잘 이어야 비도 덜 새고 보온도 잘 되기 때문이다.
경험 많은 사람의 지휘 아래 이엉과 용마름이 이어지고 나면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일이 남는데 이때도 요령이 필요했다. 가지가 여럿 달린 기다란 나무로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쓸어 내려야 보기 좋은 지붕이 완성됐다.
집집마다 지붕 이기가 마쳐지는 날엔 동네가 달라 보였다. 색바랜 지붕 대신 풋풋하고 산뜻한 지붕들로 온동네가 훤해졌다.
이러한 정경들을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한순간에 사라지게 한 것이 70년대 새마을 운동이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란 노래 가사처럼 너도나도 앞장 서 초가지붕을 없앤 게 당시 불어닥친 지붕개량 사업이었다. 더구나 못과 망치만 가지면 손쉽게 지붕을 일 수 있는 일명 쓰레트(슬레이트, 이하 쓰레트)가 나오면서 지붕개량 사업은 더욱 가속도를 얻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한두 채씩은 모두 쓰레트로 교체했다. 쓰레트가 얼마나 유행했었는가 하면 자투리판에 고기까지 구워먹을 정도였다.
그후 30여년. 우리 모두를 어리석은 국민으로 내몬 장본인이 쓰레트다. WHO 산하 국제암연구소가 지난 87년 석면을 1급 발암물질로 지정한 후에도 석면이 최고 20% 가량 함유된 쓰레트를 계속 머리에 이고 사는, 그러면서도 당장 걷어내지도 못하고 있는 게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석면에 노출되면 일정기간 잠복기를 거쳐 석면폐,폐암,악성중피종 등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재 정부양곡 창고의 상당수가 쓰레트 지붕이다. 어디 그 뿐이랴. 농가 본채는 물론 헛간과 화장실,축사 등 곳곳이 쓰레트다.
석면성분은 가벼워서 공기중에 날아다니거나 옷,머리카락 등에 붙어 다른 장소로 쉽게 옮겨지기 때문에 함부로 만지지도 못한다. 고온용융 등 특별처리를 하지 않는 한 잘 소멸되지도 않는 '소리없는 살인자'다. 정부 혹은 지자체가 나서 대책마련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쓰레트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 위에 구워먹은 삼겹살이 몽땅 넘어올 것 같은 이 기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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