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씨앗 하나가 흙으로 돌아가다

 
 질경이란 풀이 있다. 길섶과 마당가, 들판 어디서나 흔하게 자라는 풀로서 사람들이 아무리 밟아도 또 뙤약볕이 아무리 내리쬐고 가뭄이 든다해도 여간해 죽지않는 속성이 있다. 오죽하면 질경이라 했겠는가. 옛 이름은 차전초(車前草)다. 수레바퀴에 짓밟혀도 언제 그랬냐며 다시 살아난다 해서 붙여졌다.
옛 사람들은 질경이의 모진 특성을 통해 그해 일기를 점쳤다. 즉 질경이가 생기를 잃고 시들시들 자라거나 말라 비틀어지면 그해엔 큰가뭄이 찾아든다고 믿은 것이다. 질경이를 농사 지표식물로 부르는 이유다.


 질경이를 예로 들었지만 기실 풀만큼 생명력이 대단한 것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질기고 모진 것이 풀이다. 사람 목숨이 고래힘줄보다도 질기고 모질다고는 하나 풀의 생명력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들이 대지를 덮는 과정을 보자. 우선 봄이 되면 가장 먼저 돋는 게 그들이다. 어떤 건 얼음과 눈이 채 녹기도 전에 고개를 내민다. 사람 손으로도 뚫기 힘든 언땅을 연약한 새순으로 밀쳐낸다. 날씨가 풀려 봄비가 내리면 약속이라도 한 양 너도나도 모습을 드러낸다. 절기따라 돋아나는 풀의 종류도 갖가지다. 여름철 특히 장마철 이후엔 온통 그들 세상이다. 대지는 그야말로 온갖 풀들로 뒤덮이고 만다.


 농경지의 풀은 가히 위력적이다. 흙을 갈아 엎어놔도 순식간에 풀밭으로 변한다. 뽑고 또 뽑고 안간힘을 다해 매일같이 뽑아대도 뒤돌아서면 돋아오르는 게 풀이다. 해서 약 오른 사람들은 마치 끝장이라도 낼 것처럼 독한 제초제 사다 들이붓지만 그마저 소용없다. 비 한 번 오면 원상태다. 인류가 농삿일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벌이고 있는 전쟁이 바로 풀과의 전쟁이다.


 이렇게 질기고 질긴 풀의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한마디로 풀씨의 수명에 있다. 거의 무한한 수명을 가졌기에 뽑고 또 뽑아도 무한정 돋아나는 게 그들이다. 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명아주와 들개미자리 씨의 수명은 무려 1,700년이란다. 1,700년전에 떨어진 씨가 1,700년후에 햇빛을 보고 온도와 수분이 적당해지니까 곧바로 발아되더란 얘기다. 흔히 생땅이라고 하는 절개지(특히 퇴적층)서 돌연 풀이 돋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고학에서도 풀씨는 무시 못 할 존재다. 유적 발굴 현장엘 가보면 한구석에서 열심히 흙을 체로 치거나 물로 걸러내는 것을 볼 수 있다. 풀씨(꽃가루 포함)를 찾기 위해서다. 유적층에서 찾아진 풀씨는, 아무리 작지만 당시대의 식물상과 기후 등을 알게 해주는 귀중한 단서다.


 풀이라고 해서 일년연중 무한대로 크는 건 아니다. 어느 시기가 되면 성장을 멈추고 씨앗을 잉태한다. 비록 씨앗을 맺지 않는다해도 더이상 크지 않는 시기가 있는데 그 때가 바로 요즘이다. 절기로 치면 처서다. 이 때가 되면 따갑던 햇볕이 누그러져 띠와 수크령 등 각종 풀들이 더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에 예부터 농부들은 논두렁 밭두렁을 깎고 산소에도 벌초를 하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생명력을 자랑하던 풀들도 성장을 멈추기 시작한다는 처서일(23일)에 공교롭게도 이 시대의 ‘큰씨앗’ 하나가 영원한 삶의 고향 흙으로 되돌아갔다. 속담에 처서에 비가 오면 흉년이 든다고 했는데, 다행히도 그날 비는 오지 않았지만 우리 정치사의 큰별이 진 것에 많은 국민이 하염없이 가슴으로 빗줄기를 맞았다. 그의 별명이 인동초였듯 긴 겨울 모진 고통 다 잊어버리고 부디 평안한 마음으로 고이 잠들길 빈다.
 인동초의 다른 이름인 노옹수(老翁鬚)처럼 인자한 할아버지로 영원히 기억되리라. 또한 그가 뿌린 씨앗이 나라발전의 밀알이 되어 이 땅에 더없는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리라.

처서로 가는 문턱이 이렇게도 높은가

 
 사람마다 날씨가 미쳤다고들 한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단다. 말복이 지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일 30도가 넘는 폭염으로 전국을 달궈대니 그럴만도 하다.

   어떤 지역은 수은주를 40도 가까이 끌어 올려 사람들을 맥 못추게 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까라질 판이다. 어디 사람뿐이랴. 축산농가의 소,돼지도 기진맥진이다. 대형선풍기를 틀고 물까지 뿌려 주며 차광막으로 햇볕을 가려줘도 소용없다. 알 낳는 산란계들은 알 낳길 포기했다. 오리들은 아예 수도꼭지 곁을 떠나지 않는다.


   입추가 지난 지는 열흘 됐고 닷새 후면 처서다. 처서가 무엇인가. 더위가 물러가 선선한 가을로 접어든다는 절기다. 이 때가 되면 모기들도 입이 비뚤어질 만큼 기온변화가 확연하다.

한데 올핸 아니다. 늦더위가 되레 극성이다. 게다가 이번 늦더위는 반짝성이 아니라 여러날 이어지고 있다.


 하기야 올해 날씨가 어디 한 두번 미쳤는가. 좀 과한 표현이지만 미친 개 널뛰듯 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긴 가뭄끝에 봄이 왔으나 돌연 초여름 날씨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정작 농삿철이 돼서는 기온이 뚝 떨어져 농작물에 냉해를 입혔으며 여름 들어서는 하늘둑이 무너진 양 하루가 멀다하고 물폭탄을 퍼붰다. 어디 그 뿐인가. 장마가 끝난 후엔 곧바로 태풍 2개가 올라오면서 또다시 물폭탄을 들이부어 애먼 사람들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런 뒤에 찾아온 게 다름 아닌 요즘의 ‘불꽃 폭탄’ 폭염이다.


 목하 이상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피서행렬까지 되돌려 놓고 있다. 말복 뒤에 이어진 폭염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또다시 피서지로 향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말복과 함께 휴가철이 끝나가면서 한산해지던 피서지가 돌연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해수욕장은 물론 산간계곡의 물가마다 늦더위를 피해 몰려든 사람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다. 지난 주말의 경우 속리산 뒤편 화양·사담계곡과 달래강 물가에는 한여름 피서객보다도 더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뤘다. 이 때문에 주변 도로는 연 이틀째 차량정체가 극심해 운전자들이 생고생했다.


 이렇다 보니 때아닌 호황을 맞은 곳들도 있다. 피서지 숙박시설과 음식점들이다. 지역명품 대학찰옥수수 장사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사실 이들은 말복을 정점으로 여름장사를 마무리하던 참이었다. 그러니 졸지에 밀려든 피서객들이 일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그들을 맞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돌려보냈던 알바생까지 다시 부를 정도다. 대학찰옥수수는 산지에서조차 동이 났다.        

 
 폭염을 반기는 사람들이 또 있다. 농부들이다. 벼와 과일이 잘 여물려면 햇빛이 잘 내리쬐야 하는데 지난 여름내내 잦은 비로 일조량이 부족해 속 깨나 썩었던 그들로서는 요즘 폭염이 보약보다 낫다고 반색이다. 이들에겐 이번의 ‘미친 날씨’가 되레 다행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이번 폭염을 ‘쥐약’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버섯꾼들이다. 장마 이후 선선한 날씨가 이어져야만 송이 등 각종 버섯이 많이 나는데 요즘처럼 날씨가 따갑고 햇볕이 강하면 포자번식이 잘 안되기 때문에 걱정이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금년 버섯 산출량이 많을 것이라며 좋아하던 그들이었는데 지금은 정반대다. 그들은 지금 지난해 같은 가을가뭄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그럴 경우 연3년째 버섯농사가 꽝이니 어찌 걱정되지 않겠는가.

 


 날씨는 이제 우리 삶과 직결돼 있다. 그런 만큼 절기에 맞게 적당한 날씨가 뒤따라 준다면야 더없이 좋으련만 이 땅의 날씨는 갈수록 삐딱해지는 양상이다. 입추에서 처서로 넘어가는 계절 문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삼복에 집중됐던 피서철도 옮겨야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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