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간에 별천지요 세상밖 그림이로다”

19세기 노성도선생이 설정 九曲歌 남겨
대부분 물에 잠기고 1·9곡만 남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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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 주변, 특히 산수풍광이 빼어난 중류 주변에는 유난히 ‘구곡(九曲)’이란 명칭이 많이 전한다.

 

위로부터 청원 미원의 옥화구곡과 괴산 청천의 화양구곡·선유구곡, 칠성의 쌍곡구곡·갈은구곡, 그리고 최근에 존재가 알려진 괴산댐 내(칠성) 연하구곡과 연풍의 풍계구곡 등이 그것이다.


이들 구곡에는 구곡시(九曲詩) 혹은 구곡가(九曲歌)(옥화구곡은 六歌가 전함)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자학을 공부하던 옛 선비들이 경치가 뛰어난 이들 지역을 찾아 나름대로 구곡을 설정하고 그에 걸맞은 시와 노래를 읊으며 그들만의 이상향을 동경한 데서 유래됐다.

 

지난 1957년 2월 괴산댐이 준공되면서 물에 잠긴 연하구곡(煙霞九曲)은 그로부터 44년 뒤인 2001년 괴산지역 향토사학자인 이상주씨(괴산향토사연구회·청주대 강사)가 한문학보 제4집에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씨에 의하면 연하구곡은 조선 후기 경은(敬隱) 노성도(盧性度, 1819~1893)란 선비가 설정하고 각 곡(曲)마다 정경을 읊은 연하구곡가를 남겨놓은 곳으로, 괴산군 청천면 운교리 경계로부터 칠성면 사은리 산맥이 마을에 이르는 달래강변에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물에 잠겨 있고 극히 일부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채 ‘전설속 절경’이 돼가고 있다.


연하구곡을 최초로 설정한 노성도 선생은 원래는 경북 상주에 살았으나 그의 10대 선조인 소제(蘇齊) 노수신 선생의 적소(謫所·유배생활을 하던 곳)를 관리하기 위해 이곳 연하동(현재 산맥이 마을에는 노수신 선생의 적소가 남아 있음·사진 참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산수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연하구곡(연하동)을 설정하고 많은 글과 시를 남겼는데 당시의 느낌을 적은 글에 연하구곡의 설정 배경을 읽을 수 있다.


‘불그레한 구름이 창가에 비치고 구곡에 아침햇살 비치니 이곳은 세상에서 뛰어난 산수다. (중략) 노니는 사람은 바람과 안개를 좋아하면서 시를 읊조리고 신선은 구름과 노을에 살면서 즐기는 것을 좋아하니 이곳 연하동은 가히 신선이 별장으로 삼을 곳이다.“(이상주 역)

 

 

저 안에 연하구곡이…
연하구곡은 조선 후기 노성도란 선비가 설정하고 각 곡(曲)마다 정경을 읊은 연하구곡가를 남겨놓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물에 잠겨 있고 일부만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낸 채 ’전설속 절경‘이 돼가고 있다.
 
현재 연하구곡 가운데 상단부가 물위로 드러나 옛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은 제1곡인 탑바위(일명 족두리바위)와 9곡인 병풍바위(屛巖) 뿐이다.

 

제1곡 탑바위(塔巖)는 댐 상류쪽 운교리 경계지점(운교리 아래 아가봉쪽 산자락)에 있고 제9곡 병풍바위는 댐 하류 왼쪽 절벽(산맥이 아래 천장봉쪽 절벽, 현 과수원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물속에 잠긴 나머지 절경 즉, 2곡 뇌정암(雷霆巖, 벼락바위) 3곡 형제바위(삼형제바위, 쌀개바위) 4곡 전탄(箭灘) 5곡 사기암(詞起巖) 6곡 무담(武潭, 무당소) 7곡 구암(龜巖, 거북바위) 8곡 사담(沙潭)은 1곡과 9곡 사이에 연이어 있었다고 한다.

 

연하구곡의 특징은 이렇듯 상류로부터 하류로 내려가면서 구곡이 설정돼 있다는 점이다. 다른 대부분의 구곡들은 하류에 ’동문(洞門·입구)‘과 함께 제1곡을 설정하고 이어 상류쪽으로 가면서 차례로 이름을 붙인 반면 연하구곡은 그 반대다.
 

이에 대해 이상주씨는 ”당시 노씨 문중인 광산 노씨 세거지가 경북 상주 쪽에 있었기 때문에 상류지역을 거쳐 자주 왕래하다 보니 그쪽 방향에 익숙해져 1곡을 상류쪽에 설정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고 풀이하고 있다.

 

연하구곡의 ’남아있는 정취‘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배를 타고 찾아간 제1곡 탑바위는 아직도 거대한 바위들이 층층이 탑을 쌓은 듯 푸른 물빛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서있다. 맨 윗단의 바위는 마치 신부의 족두리 모양을 하고 있어 바로 윗 동네인 운교리 주민들은 현재 ’족두리바위‘로 부르고 있다.
 

이 탑바위 바로 옆 강변에는 예전에 마당바위라는 넓은 바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물에 잠겨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또한 탑바위 주변에는 선유대(仙遊臺), 강선암(降仙岩)과 같은 글귀 외에도 많은 한시가 암각돼 있다고 하나 장마철 불어난 수위로 직접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움을 더했다.

 

그 중 탑바위 아래쪽 경사진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한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뚝하게 하나의 바위 강가에 솟아있는데/ 꼭꼭 감싸 매우 조화로우니 조화옹(造化翁·조물주)의 솜씨일세/ 이름은 탑바위라 했는데 비둘기가 또한 즐기네‘(이상주 역)

 

 

연하1곡 ’탑바위‘

거대한 바위들이 층층이 탑을 쌓은 듯 푸른 물빛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바위. 맨 윗단의 바위가 신부의 족두리 모양을 하고 있어 인근 주민들은 ’족두리바위‘로 부르고 있다.


9곡 역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어 배를 타고 찾아가야만 했다. 괴산호를 가로질러 건너편 산인 천장봉 끝자락에 다다르니 밑둥을 수십길 물속에 담그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9곡인 병풍바위다.

 

이곳에도 많은 글귀와 한시가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고 하나 2줄의 종서로 써진 ’연하수석(烟霞水石) 정일건곤(精一乾坤)‘ 중 맨 윗자인 연(烟)과 정(精)자의 상단부만이 물위에 빼곰히 내밀고 있다. 풀이를 하자면 ’연하동의 제일가는 수석이요, 천지간에 유정유일(惟情惟一)이로다‘란 뜻이니 별천지가 따로 없단다.
 

이 글귀 옆에는 ’숭정사을축(崇禎四乙丑) 동치 사년 을축 이월 일(同治 四年 乙丑 二月 日)‘이라 새겨져 있다 하나 확인하지 못했다. 동치 사년 을축은 서기 1865년으로 노성도 선생은 바로 그해 이곳에 와 시를 짓고 글씨를 새겼던 것이다. 역시 물에 잠겨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곳에는 ’연하동문(烟霞洞門)‘이란 글귀와 함께 9곡에 대해 읊은 연하구곡운(烟霞九曲韻)을 암벽에 새겨놓았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깎아세운 병풍바위는 별천지니 천장봉 아래서 기꺼이 즐기노라/ 산은 높고 물은 푸르러서 진경을 이루니/ 이곳 연하동이말로 세상밖 그림일세‘

 

 

 연하9곡 ’병풍바위‘
연하9곡인 병풍바위에도 많은 글귀와 한시가 새겨져 있다고 하나 2줄의 종서로 써진 ’연하수석(烟霞水石) 정일건곤(精一乾坤)‘ 중 맨 윗자인 연(烟)과 정(精)자의 상단부만이 물위에 빼곰히 내밀고 있다. 원안이 물밖으로 보이는 연(烟)자와 정(精)자.
 

 

노수신 선생의 적소
연하구곡을 최초 설정한 노성도선생은 원래는 경북 상주에 살았으나 그의 10대 선조인 소제(蘇齊) 노수신선생의 적소(謫所·유배생활을 하던 곳)를 관리하기 위해 괴산 칠성의 산맥이(연하동)로 들어왔다고 한다. 노수신 적소는 현재 충북도 기념물 74호로 지정돼 있으며 수월정(水月亭)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달래강과 선비정신, 그리고 오늘의 세태


 충북엔 유난히 정자와 구곡(九曲)이 많다. 선비의 고장임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다.
정자의 경우 모두 50여 개소인데 이중 19개소가 괴산군에 있다. 도내서 가장 많은 숫자다. 더욱이 특별한 건 이들 정자 대부분이 달래강 유역에 있다는 점이다.
 구곡 역시 괴산지역, 특히 달천강 유역에 집중돼 있다. 화양·선유·쌍곡구곡을 비롯해 최근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존재가 밝혀진 연하(칠성)·갈은(〃)·풍계구곡(연풍)에 이르기까지 모두 6곳이다.
 게다가 유사 개념의 구경(九景)이란 이름이 붙여진 고산구경(괴산읍)까지 합하면 7곳이요, 명칭만 남아있는 거차비(청천)·운하구곡(〃)까지 더하면 무려 9곳이다. 관내는 다르지만 청원 미원의 옥화구경 역시 달래강변에 있다.
 강줄기 하나에 이처럼 많은 정자와 구곡이 존재하는 곳은 아마 달래강뿐이리라. 그만큼 풍취가 남다른 천혜의 강이다. 풍취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시가 전하고 그 속에 선비정신까지 배어있으니 멋과 풍류 또한 으뜸이다.
 우리나라 정자는 백제 의자왕 15년(655년)에 지어진 망해정이 최초다. 달래강 유역의 정자 중 가장 오래된 건 괴산 제월리 강변의 고산정으로 조선 선조 29년(1596년)에 지어졌다. 
 구곡의 기원은 본래 중국 무이산의 무이구곡서 비롯됐다. 무이산은 중국 푸젠성(福建省)의 명산으로 이곳에 있는 9개의 절경에 남송때 성리학의 대가인 주자(朱子)가 들어가 각 곡의 이름을 붙이고 무이구곡가를 지은 게 효시다.
 고려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주자학(성리학)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보편화됐는데 이를 계기로 성리학자들, 이른바 선비들 사이에서 구곡을 설정하고 구곡시를 짓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각 절경마다 설정된 구곡과 구곡시다.
 지금은 괴산댐으로 인해 물속에 잠겼지만 조선시대 노성도란 선비가 설정한 연하구곡에도 각 곡마다 남겨진 한시가 있으니 제9곡(병풍바위)에 관한 시를 통해 당시 선비들이 가졌던 사상의 일면을 살펴보자.
 ‘병풍바위 산마루엔 초속적 흥취가 넉넉한데/ 혼연하게 진실한 본성을 연마하게 해주네/ 마을어귀엔 이끼 낀 돌 깊이 박혀 있는데/ 나 자신은 산수자연에 묻혀 도가(棹歌)를 부르네’
 구곡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정자에도 많은 시가 전하는데 그 중 괴산의 애한정과 관련된 백곡 김득신선생의 시를 보자.
 ‘높고 푸른 산벽에 저녁노을 밝더니/ 깊은 숲속엔 어둔 빛이 점점 생기는구나/ 산그림자와 저녁연기가 서로 얽히니/ 그림으로도 글로도 그려내기 어렵구나(애한정 팔경의 ’창벽낙조(蒼壁落照)‘
 자고로 자연은 사람 마음을 움직인다고 했던가. 조선시대 선비들은 산수가 빼어난 이들 구곡과 정자를 찾아 자연을 노래하면서 실물을 통한 정신수양에 해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지금도 이들 구곡과 정자를 찾아가 보면 아무리 문외한이라도 절로 시흥이 돋고 마음까지 맑아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람 마음이 다 같은 건 아닌가 보다. 선조들이 남긴 이러한 문화유산들이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망가져가고 있으니 선비의 고장 체면이 말이 아니다. 구곡은 구곡대로 각종 낙서와 각자(刻字)로 훼손돼 있고 정자는 정자대로 편액과 현판이 사라지는 수난을 겪고 있다.
 어지러운 세상을 뒤로하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면서도 자신들의 꿋꿋한 정신세계를 일궈나감으로써 세계사에 유례없는 선비정신을 낳았던 우리 선조들. 그 선조들의 멋과 슬기가 한낱 흑심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 왔다 가노라‘ 어느 구곡 바위에 새겨진 글자 같지 않은 글자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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