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드니 어릴 적 버릇이 되살아나는가

 

장난감총이 귀하던 시절 얘기다. 그 시절엔 대부분의 아이들이 수제총을 갖고 놀았다.

수제총이래 봤자 새총 아니면 딱총이었지만 그 시절 어린 아이들에겐 그보다 더한 장난감이 없었고 놀이 또한 전쟁놀이나 새총놀이 이상 가는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아이가 있는 집은 늘 고무줄이 남아나질 않았다. 새총과 딱총의 중요한 소재가 고무줄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흔하고 흔한 게 고무줄이지만 그 시절엔 꺼먹 고무줄이든 노란 고무줄이든 무조건 삭아 끊어질 때까지 썼을 만큼 흔칠 않았다. 오죽하면 팬티 고무줄을 잇고 또 이어서 나중엔 굵기도 다르고 색깔마저 형형색색이 됐겠는가.

당시 부모들은 장에 가면 으레 리어카장수한테 들러 고무줄 사는 게 일거리였다. 하지만 사다 놓으면 뭣하랴. '아는 도둑놈'이 그냥 놔둘리 만무였다.
새총과 딱총 때문에 남아나지 않았던 건 고무줄만이 아니었다. Y자로 생긴 나뭇가지와 가죽, 송판, 심지어 쇠로 된 우산대까지 동이 날 지경이었다. Y자형 나뭇가지와 가죽은 새총을, 송판과 우산대는 딱총을 만드는 데 필요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토록 부모 속을 뒤집어 놓으면서까지 애써 만든 총으로 잘만 놀면 되는데 엉뚱하게도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아무 데나 겨루고 쐈다가 애먼 아이 울리는 건 예사고 남의 장독대까지 깨부수기 일쑤였으니 부모들에겐 그야말로 '웬수'가 따로 없었다.
어쩌다가 건전(?)하게 논다는 게 고작 가을걷이 끝난 들판에다 대고 새총알을 누가 더 멀리 쏴대느냐 시합하거나 동네앞 나무 전신주에 표적을 그려놓고 누가 먼저 맞히는가 시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위험천만했다. 총알 때문이었다. 가을철에 도토리를 새총알로 쏠 땐 비교적 작고 가벼워 큰 문제가 없었으나 돌멩이로 쏠 땐 근처를 지나는 사람이나 가축들에게 크나큰 위험요인이었다.
딱총 역시도 화약만 터트리는 단순한 형태에서 벗어나 나중엔 자전거 바퀴의 밸브어댑터를 장착해 그 안에 초와 화약을 함께 다져넣은 다음 못으로 공이를 만들어 쏘는, 당시로선 엄청난 화력(비록 소리만 컸지만)의 총이 만들어지면서 걸핏하면 남의 애 고막이나 손상시키는 말썽의 원흉이 됐다.


세월이 바뀌어 이제 나무로 만든 딱총은 볼 수 없게 됐지만, 그것이 진화한 장난감총의 모양과 성능은 실제 살상용에 버금갈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새총 역시 엉뚱한 방향으로 진화해 지금은 농성장에서 쇠구슬을 날리는 무시무시한 무기로 변한 것을 보면 가슴이 아리다 못해 쓰리다. 


장난감총이라도 역시 총은 총인가 보다. 그러니까 시대 불문하고 더욱 정교하고 더욱 강한 성능을 갖도록 진화하는 것 아니겠는가. 더욱 희한한 것은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손에 총만 들면 뜬금없는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점이다. 먼옛날 수렵·채집 시대에 각인된 유전인자가 오늘날까지 대내림해 온 까닭은 아닌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며칠 전엔 충북의 한 순환수렵장 지역에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현수막을 보았다. '통신케이블에 제발 총을 쏘지 마세요. 신고하여 포상금 받자'
현수막을 나붙게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닌 수렵인들이다. 되나가나 쏴대는 무분별한 총잡이들 때문에 참다못한 KT가 궁여지책으로 내 건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총을 드니 괜히 어릴 적 버릇이 되살아나는 것인지. 케이블 맞춰봤자 박수쳐 줄 사람 아무도 없고 피해만 끼치는 데도 막무가내다. 케이블에 앉은 새 때문이라고 핑계 대지만 그건 엽도를 몰라서 하는 얘기다. 손에 든 총이 새총도 딱총도 아니고 사냥총을 가진 엽사들이라면 적어도 엽도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까치 얼어 죽 듯 짐승도 사람도 얼어붙었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거짓말 아닌 거짓말 하나가 있다. 해가 떠도 일어나지 않고 자꾸만 이불속을 파고드는 어린 나를 향해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다. "얘야, 밤새 뒤꼍에 까치가 하얗게 얼어죽었으니 얼른 일어나 주워와라."
처음 이 말을 들었던 게 대여섯살 때쯤으로 기억된다. 그땐 진짜인 줄 알고 뒤꼍엘 가봤다. 없었다.

죽은 까치는 커녕 산 까치도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이웃집 애가 먼저 와서 주워갔단다. 그 뒤로도 뒷산,앞산,동구밖 등 장소만 바꿔가며 걸핏하면 하얗게 얼어죽었다는 까치는 전혀 보질 못했다. 어머니는 늘 내가 늦게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일은 우리집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다. 어린 아이가 있던 집은 겨울이면 으레 까치가 얼어죽었다.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 어머니들의 이같은 농담이 어린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줘 어서 일어나라고 하는 지혜였다는 것과 얼어죽은 까치가 하얗게 내린 서리였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뜬금없이 얼어죽은 까치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정서가 예전과 너무나 달라졌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예전엔 까치소리를 들으면 기쁜 소식이나 반가운 손님이 올 거라 여겼는데 요즘엔 되레 까치가 진짜로 얼어죽는 게 반가운 소식이라는 말까지 나도는 세태다.

길조를 넘어서 시조(市鳥)니 도조(道鳥)니 국조(國鳥)니 떠들 땐 언제고 이제와 망나니 대접을 하는 세태가 안타까운 것이다.

언제 그들이 대접받기를 원했는가. 반가운 새니 시,도,나라를 대표하는 새니 했던 것도 다 사람 입에서 나왔지 언제 그들 입에서 나왔는가.


유해조수도 그렇다.

전봇대에 둥지 틀고 과수에 입질했다 하여 무조건 때려잡아야 할 해조로 몰아세운 것 역시 우리들이다. 그들은 단지 둥지 틀 장소가 모자라 전봇대에 둥지 틀고 먹거리가 마땅치 않아 과수에 입질 했을 뿐이다. 둥지 틀 장소와 먹거리 부족은 누가 가져왔는가. 개체수가 늘었다는 것도 편견이다. 그 원인 역시 사람이 불러왔다.

 

더 큰 문제는 종 전체를 싸잡아 망나니 취급하는 일이다.

까치라고 해서 모두 다 전봇대에 둥지 틀고 과수에 입질하는 건 아니다. 일부만 그런다. 엄밀히 따지면 피해를 주는 현행범은 그 일부다.

어느 한 사람이 강도짓 했다고 해서 사람 모두를 강도로 몰아세우는 것과 다를 게 뭐 있겠는가.


수렵철인 요즘 순환수렵장 지역은 조용하다 못해 썰렁하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다.

사냥꾼은 많은데 짐승이 보이질 않는다. 멧토끼,고라니,멧돼지 보다 사냥개 수가 더 많다.

꿩과 멧비둘기는 물론 각 하천에 그 많던 흰뺨검둥오리며 청둥오리,비오리,논병아리 등도 모두 다 꽁지를 감췄다.

수렵장 운영 한 달이 지나면서 전혀 딴 세상이 됐다. 그런데도 관할 기관에 신고된 포획건수는 극소수다. 신고 건수로만 보면 소위 '엽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껏 '공포탄'만 쐈다는 얘기다. 그럴 리 없다. 잡은 사람이 신고토록 돼 있는 현행규정의 모순 때문이다.

기껏해야 인가 근처서 드물게 만나는 까치나 까마귀의 행동도 달라졌다. 자라에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마구잡이 총질에 얼마나 놀랐으면 낯선 사람, 아니 동네로 접어드는 낯선 차량만 봐도 똥줄이 빠져라 내뺀다.


사람들도 놀라 있다. 순환수렵장내 사람들 얘기다. 오죽하면 그들은 요즘 가까운 산은 커녕 밭에도 못 간다. 행여 짐승으로 오인돼 졸지에 탄환밥이 되지 않을까 겁 나서다. 빨간 옷에 빨간 모자를 써도 날뛰는 사냥개가 무섭단다.
수렵기간은 아직 석달 남았는데 까치도 얼고 들짐승도 얼고 사람들도 얼어 붙었다. 꽁~꽁.

멧돼지 소동,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5인조 추격대와 식인 멧돼지의 한판 승부를 그린 영화 '차우'. 최근 빈발하고 있는 멧돼지 소동을 모티브로 한 괴수 어드벤처다. 공교롭게도 국내에서는 이 영화 상영 이후 멧돼지 소동이 더욱 빈발함에 따라 목하 신드롬까지 일고 있다. 우연치고는 대단한 우연이다.
하지만 최근의 멧돼지 소동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선 멧돼지만 나타나면 총부터 들이대 사살하고 보는 현 세태가 아쉽다. 멧돼지가 그렇게도 위험한 동물인가.


물론 멧돼지는 위험하다. 화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오죽하면 저돌(猪突)이란 말까지 생겼을까. 이 말뜻엔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는 멧돼지 모습이 내포돼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어디까지나 화난 멧돼지를 전제로 한다. 멧돼지는 보통 새끼를 거느리고 있거나 위협을 느꼈을 때 저돌적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러질 않는다. 사람을 먼저 공격하는 예는 더욱 드물다.


그런데도 나타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살한다. 과잉반응이란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생명경시 풍조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제 아무리 위험성 있는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단지 도심지 또는 주택가, 도로변에 나타났다고 해서 무조건, 그것도 공개된 장소서 총으로 쏴 죽인다는 것은 자칫 '무엇이든 위험하면 죽여도 된다'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얼마 전 조류 인플루엔자와 구제역에 걸린 가축들을 보란 듯이 공개적으로 살처분했다가 뒤늦게 너무한 처사란 반발이 일자 인도적(?) 살처분이란 지침을 마련했던 기억을 벌써 잊었는가.


해서 제의하건대 대처방안을 좀 바꿨으면 한다. 그들도 엄연한 생명체요 우리 생태계의 한 구성원이란 점을 고려해 무조건 죽이고 보는 행위는 자제했으면 한다. 인명 피해와 같은 위험 소지가 높아 굳이 급처방이 필요하다면 일단 마취시켜 생포한 다음 살처분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풀어줄 것인지를 결정하되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함부로 사살하는 행위는 하지 말길 바란다. 이는 교육상으로도 필요한 일이다.


또 하나. 도심지 등에 나타나는 멧돼지는 대부분 먹잇감이 궁해서 혹은 길을 잃어 방황하다가 본의 아니게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따라서 덮어놓고 맹수취급하는 것 역시 피해망상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왜 갈수록 더 자주 출몰하고 있는지부터 생각할 일이다. 야생동물에게 있어 사람은 결코 달갑잖은 존재다. 그러니 사람곁을 찾아오고 싶어 찾아오겠는가. 개체수는 늘어난 반면 서식공간은 한정돼 있기에 사람들과의 활동영역이 겹치면서 맞닥뜨릴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 것 뿐임을 헤아려야 한다.


또한 멧돼지를 만났을 때의 행동요령도 제대로 알릴 필요가 있다. 먼저 위협하든가 공격하지 않는 한 덤벼들지 않는 동물이란 점을 주지시키고 당황하거나 소리쳐 예민해지지 않도록 주의할 것도 상기시켜야 한다. 두렵다고 허겁지겁 달아나는 것도 멧돼지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삼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차제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얼마전 한 고속도로에 멧돼지가 뛰어들어 자칫 대형사고를 빚을 뻔한 것처럼 앞으로 그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로드킬 문제'를 보다 심각한 당면과제로 받아들여 대책마련을 서둘렀으면 한다.


앞으로 닷새 뒤면 전국 각지서 순환수렵장이 운영된다. 명목이야 멧돼지를 포함한 유해조수의 구제와 개체수 조절, 건전한 수렵문화 정착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살생을 공식적으로 허가하는 일에 어느 지자체에서는 신청자 접수시작 3분 만에 무려 1,000명이 몰려들어 곧바로 마감됐다고 한다. 해당 지자체야 신이 났겠지만 그 역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수렵철, 짐승도 떨고 사람도 떨고 있다

 
며칠전 청원ㆍ괴산 경계의 한 마을에선 별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130kg이나 되는 커다란 멧돼지가 마을옆 봇도랑에 빠져 죽은 것이다. 시멘트 구조물이긴 하지만 너비와 높이가 고작 1m 남짓하고 물도 말라있는 봇도랑이기에 모두들 의아해 했다.

위급상황이 벌어지면 사냥개도 쉽게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민첩하고 괴력을 발휘하는 야생 멧돼지가, 그것도 자기 키의 한 길도 채 안 되는 도랑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객사하다니. 총에 맞아 창자가 밖으로 나와도 그것을 씹어가면서 덤벼들고 또 덫에 걸리면 발목을 끊고라도 도망치는 악착스러움과 강한 생명력을 가진 멧돼지이기에 의아심은 더욱 컸다.
주민들에 의하면 당시 그 멧돼지는 특별한 외상도 없었고 병들어 쇠약한 상태도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얼마나 발버둥 쳤으면 발굽이 다 까지고 두눈은 부릅뜬 채 앞발을 난간에 걸치고 죽었단다.

 
또 엊그제엔 이런 일도 겪었다.

멧돼지가 죽은 곳서 아주 가까운 농로를 지나치다 고라니와 마주쳤다. 대낮에 고라니와 마주친 게 이상한 게 아니라 그 고라니의 행동이 이상했다. 맞은 편서 황급히 달려오던 고라니는 차를 보자마자 맹수를 만난 양 뒤도 돌아보지 않고 똥줄이 빠져라 달아났다. 헌데 뛰는 모습이 영 이상했다. 한쪽 다리를 저는 것이었다. 깨금발을 뛰듯 엉덩이를 실룩거리던 그 고라니는 한참 뒤 다른 장소서 다시 마주쳤을 때도 역시 기겁을 했다.
당시 필자는 겨울철 야생동물을 촬영하느라 좁다란 농로를 매우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던 중이어서 평소 같으면 고라니가 그렇게 까지 놀라 허둥대진 않았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데 별안간 하천 건너편서 총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게 답이었다. 총소리를 듣는 순간 두 가지 의문점이 풀린 것이다.

멧돼지가 비명횡사하고 고라니가 깨금발로 달아나던 장소는 다름 아닌 청원군 경계와 바로 이웃한 지역이다. 청원군 지역은 올겨울 순환수렵장이 운영되는 곳이다.

해서 이곳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연일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고 졸지에 사냥밥 신세가 된 야생동물들은 살길 찾아 인근 타지역으로 몸을 피하고 있다. 봇도랑에 빠져 죽은 멧돼지 역시 청원지역서 사냥꾼에 쫓겨 ‘피난’하다 기진맥진해 참변을 당했다.  

비록 청원 뿐만 아니라 진천,음성,제천 등 순환수렵장이 운영되고 있는 지역의 야생동물들은 요즘 편안할 날이 없다.

그들이 얼마나 불안해 하는가는 그들의 행동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어찌나 사람을 무서워하는지 달리던 차가 멈춰서는 시늉만 해도 즉각 달아나거나 긴장한다. 총을 쏠까 두려워서다.

지자체마다 돌아가면서 순환수렵장을 운영하는 이유는 유해조수를 구제하고 건전한 수렵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그러기에 제도 자체를 탓하는 건 아니다.

늘어난 들짐승 때문에 농사철 내내 밤잠 설치는 산간주민들의 애타는 농심도 잘 알고 있고 1년을 학수고대하며 수렵철을 기다려온 엽사들의 기분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일부 몰지각한 엽사들의 그릇된 총질로 인해 야생동물들이 수난 당하고 농촌주민들이 불안에 떠는 등 부작용이 심각한 데 있다.

예전의 엽도(獵道)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날짐승이 땅이나 물위에 있을 땐 절대 쏘지 않고 한번 놓친 들짐승은 뒤쫓지 말아야 함에도 기필코 잡겠다는 듯 막무가내다.

인가에선 총소리를 내지 않는 게 도리인데 걸핏하면 지붕과 마당위로 총알이 날아든다.

주민들은 하소연하고 싶어도 총 든 이들이기에 함부로 말도 못한다.
짐승도 떨고 사람도 떠는, 그래서 더 으스스해진 곳이 요즘의 순환수렵장 부근 산간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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