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낚시와 요즘 낚시

 

옛 사람들은 낚시를 어떻게 했을까. 우선 낚싯줄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궁금하다. 18세기 후반 조선 학계에 영향을 끼친 일본의 화한삼재도회에는 "참외덩굴을 햇볕에 말리면 철선처럼 질겨서 끊기 어려우므로 낚싯줄로 쓰는데 어가(漁家)에서 가장 귀히 여긴다"고 기록돼 있다. 화한삼재도회가 중국의 삼재도회를 본떠 지은 것이기에 당시 일본산이었건 중국산이었건 오늘날의 참외덩굴과 얼마만큼 달랐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낚싯줄로 썼다는 게 쉽게 이해되질 않는다. 아마도 참외덩굴의 섬유질 부분을 실처럼 꼬아 사용한 게 아닌가 싶다.
또 같은 책에는 중국 광동서 생산되는 천잠사(天蠶絲)를 낚싯줄로 썼다는 기록도 보인다. 천잠사는 산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실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쓴 난호어목지에는 삼이나 칡 껍질로 만든 실을 이용해 오늘날에는 사라진 오리낚시(鴨釣)를 했다고 소개돼 있다.
다음엔 찌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화한삼재도회에는 "갈대 혹은 기장 줄기를 1~2촌 정도 잘라 썼다"고 전하며 중국에서는 새깃털을 썼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후기 문신 남구만은 시문집 약천집에서 "낚시할 때 무릇 낚싯줄에 삼대(짚대공이란 설도 있음)를 매다는 이유는 그것이 뜨고 가라앉는 것을 보고 물고기가 먹이를 삼키거나 뱉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남구만은 또 "그것이 움직이기만 하고 잠기지 않은 것은 물고기가 미끼를 완전히 삼키지 않은 것이어서 이 때 당기면 너무 빠른 것이고 삼켰다 다시 토하는 것을 천천히 당기면 이미 늦은 것이다. 그러므로 잠길락 말락할 때 당기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낚싯바늘. 서유구는 전어지에서 "낚시는 쇠갈고리를 달아서 물고기를 잡는 도구로서, 쇠갈고리 즉 낚싯바늘(鉤:구)에는 거꾸로 된 가시(미늘 혹은 구거:鉤距)를 만들어 쓴다"고 설명하고, 난호어목지에서는 "무쇠 혹은 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든다"고 설명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낚싯바늘은 가는 철과 바늘을 갈고리처럼 구부린 다음 닭의 뒷 발톱(距)처럼 생긴 미늘을 만들어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미끼는 무엇을 썼을까. 서유구는 난호어목지에 먹이를 던져 물고기 모으는 방법(投餌聚魚法)을 소개하면서 "깻묵과 술지게미는 모두 냄새를 많이 풍기는 물고기 미끼이다. 깻묵과 술지게미를 두 손으로 두드려 덩어리를 만들고 황토진흙으로 얇게 싸서 햇볕에 말린 다음 배를 타고 물고기가 노는 곳에 던져 넣는다. 그러면 물고기들이 냄새를 맡고 모여든다. 그런 뒤에 그 곳에 낚싯대를 드리우면 만에 하나라도 실수하는 법이 없다."고 썼다.
서유구는 또 같은 책에서 오늘날의 여울낚시격인 유조법(流釣法)을 소개하면서 "지렁이나 물가 돌밑의 청충(靑蟲:수서곤충의 유충)을 미끼로 써서 얕은 여울에 낚시를 던져 넣고는 연 날리듯 줄을 풀거나 당기면 물고기가 잡힌다"고 설명했다.
낚시에 관한 옛기록을 살피다 보면 오늘날의 주낚처럼 예전에도 일타백피식 싹쓸이 낚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난호어목지에 소개된 만등조법(萬燈釣法)이 그것이다. 기다란 낚싯줄에 수백 개의 바늘을 매달고 미끼를 꽂아 바다나 포구같은 곳에 가로질러 놓았다가 이튿날 아침 거두는 방식이다. 걸려든 물고기 모습이 만등을 달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단다.
강태공이 봤다면 혀를 찰 일이지만 기록으로 남겨질 만큼 성행했던 것으로 보아 예전 사람들도 물고기를 많이 잡고 싶은 욕심은 요즘 사람 못지 않았나 보다.
모든 낚시도구가 현대화된 오늘날 국내 낚시계에는 잡는 것보다 풀어주는 게 미덕이라는 바람이 불고 있다. 모처럼만에 부는 멋진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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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의 한과 실학정신

조선 최대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 중 전어지에 '돗고기'가 소개돼 있다. "머리는 작고 배가 부르며 꼬리는 뾰족하고 끝이 둘로 갈라진다. 주둥이는 가늘고 뾰족하며 등은 검고 눈은 작다. 몸의 생김새가 돼지 새끼와 비슷해 돗고기로 불린다. 지렁이를 미끼로 써서 낚는다."
200년 전의 기록치고는 매우 상세하다. 놀랍다.
임원경제지를 지은 이는 실학자 서유구다. 19세기 초에 이미 농업개혁론을 부르짖은 선지자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1801~1818년)하던 비슷한 시기(1806~1824년), 비슷한 기간(약 18년) 동안 은둔생활하면서 쓴 책이 임원경제지다. 총 113권 52책에 글잣수만 250만자에 이른다.
그로부터 반세기 뒤인 1872년 국제학술지에 'Pungtungia herzi'란 신종 물고기가 발표됐다. 발표자(명명자)는 헤르첸슈타인이란 외국 학자로, 그는 조선의 풍중이란 곳에서 채집한 물고기 1종을 지역명과 자신 이름을 따 신종으로 기재했다. 헤르첸슈타인은 당시 이 물고기에 대해 형태적으로만 간략히 소개했다.
주목할 것은 헤르첸슈타인이 발표한 이 물고기가 한반도 물고기로는 처음으로 학술지에 공식 기재됐다는 점이다. 학술지에 처음으로 기재됐다함은 국내 물고기가 비로소 학계에 알려졌다는 얘기다.
두 사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돌고기다. 서유구가 돗고기로 소개한 돈어(豚魚)와 헤르첸슈타인이 신종 발표한 물고기는 종이 같은 돌고기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 서유구의 한이라 할까, 당시 미개국이었던 조선 사회의 학문적 한계라고 할까. 시기적으로 헤르첸슈타인보다 최소 40여년 앞선 시기에 돌고기에 관한 내용을 책으로 처음 기록했으면서 학계로부터 첫 기재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되새겨 보자는 말이다.
어떤 생물종을 발견해 신종 발표하기 위해선 국제명명규약에 따라 학명을 짓고 정확한 분류와 기재를 한 다음 출판하고 학계에 보고해야 한다. 린네(1707~1778년)가 이명법을 창안한 이래 생긴 국제관례다.
이러한 사실만 서유구가 알았더라도 당시 전어지에 소개한 물고기를 어엿한 신종 물고기로 발표했거나 최소한 조선의 어류목록으로 기록하는 또 다른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정은 그렇질 못했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를 쓰면서 인용한 서적이 약 900종에 이르고 참고한 서적만도 수천 종에 이르지만 서양의 선진학문인 생물분류학적 지식은 접하질 못했다.
돌고기의 한은 또 한 차례 이어졌다. 1935년 일본인 모리가 또 다시 감돌고기(Pseudopungtungia nigra Mori)를 신종 발표한 것이다. 채집지는 영동(황간)과 진안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의 암흑기가 지나면서 국내 어류학계에도 서광이 찾아들어 1975년 드디어 김익수박사가 국내 학자로선 처음으로 참종개를 신종 발표한 것을 비롯해 지난 30여년간 총 20종의 물고기가 국내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기재됐다. 그 중에는 돌고기의 1종인 가는돌고기(1980년 전상린박사 발표)도 포함돼 있다. 3종의 한국산 돌고기 중 1종이나마 국내 학자가 찾아낸 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헤르첸슈타인 이후 100여년간 맺혀온 한이 다소나마 풀린 셈이다.
돌고기의 한을 되짚어보면서 당대 석학 서유구가 가졌던 신념을 떠올려봤다.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 즉 일상의 경제생활에 필요한 실용의 학문을 집대성하겠다"는 확고한 신념 말이다. 그는 그런 의지로 임원경제지를 썼다. 전어지에 물고기 잡는 법과 어구를 자세히 설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게 헤르첸슈타인과 달랐던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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